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박상훈목사

[스크랩] 로마서강해/제13강 우리는 나으뇨(3:9-18)

제13강 우리는 나으뇨(3:9-18)  

사도 바울은 롬 1:18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인간의 죄의 문제에 대해서 길고도 자세하게 언급했습니다. 그는 먼저 이방인들의 죄에 대해서 지적했습니다. 그것이 롬 1:18부터 마지막 32절까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물론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율법이 주어지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방인들의 마음속에도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심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도 아니했습니다.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졌습니다. 그래서 썩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을 그대로 내버려두셨습니다. 그 결과 이방인들은 종교적으로 타락하고, 성적으로 타락하고, 도덕적으로도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방인들에 대한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1:32에 있는 말씀처럼 사형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뒤에 사도 바울은 롬 2:1부터 시작해서 3:8까지 유대인들의 죄에 대해서 주로 지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습니다. 저들은 율법을 자랑했습니다. 남을 가르치고, 남을 판단하는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은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율법대로 살지 못하고 율법을 범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죄인이면서도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심지어는 괴변까지 늘어놓으면서 자기의 죄를 정당화하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유대인에 대한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3:8의 끝부분에 보니까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도 역시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서 죽어 마땅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이 다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한 뒤에 오늘 본문에서 관심의 초점을 그들에게서 우리에게로 돌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예수 믿는 우리들은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과 본질적으로 더 나은 것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결코 아니라!” 아주 강한 부정입니다.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똑같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무슨 뜻이겠어요?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는 것은 자기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처음으로 발견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변의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 속에 이미 다 그것이 선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열세 가지로 인간의 추악한 모습을 우리들에게 지적을 해주었습니다. 간단하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10~12절까지입니다. 여기에서는 죄 아래 있는 인간들의 추악한 성품에 대해서 우리들에게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두번째로, 13~14절에 나타나는 말씀입니다. 죄 아래 있는 인간들의 언어가 얼마나 지저분하고 더러운지를 우리들에게 깨우쳐주었습니다.  마지막 세번째로, 15~17절까지 나타나는 내용입니다. 죄 아래 있는 인간들의 타락한 행동이 또 얼마나 더러운지를 우리들에게 깨우쳐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열세 가지의 죄악상을 지적한 다음에, 결론으로 18절에서 그 근본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들에게 말씀해주었습니다. 18절을 보시겠습니다.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하나님을 무서워할 줄 모르니까 마구잡이로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진정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보세요. 우리의 삶이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조용히 묵상해보면서 우리가 본시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추악한 죄인인지를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울서 우리가 본시는 죄 아래 있었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 아래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에게 복음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다시 한번 마음 깊이 감사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죄 아래 있는 인간들의 타락한 성품이 어떠한지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10~12절에 나오는 내용 속에서 죄 아래 있는 인간들의 타락한 성품에 대해서 우리들에게 모두 여섯 가지로 일깨워주었습니다. 제가 간단간단하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로마서의 대주제가 무엇입니까? 죄인 된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가? 이것을 설명해주는 책이 바로  로마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인간의 죄악 된 모습을 지적하면서 제일 먼저 의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예외라고 혹시라도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봐 사도 바울은 거기에다가 한 마디 덧붙였습니다. 무슨 말을 덧붙였습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누구나 다 똑같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두번째로, 11절에 보십시오. “깨닫는 자도 없고”라고 했습니다. 죄악 된 인간들은 자기가 죄인이면서 죄인인 줄 깨닫지 못합니다. 내가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를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해주셨는데 그것을 제대로 깨닫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어리석은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욕심을 부리면서 살아가는 어리석은 인간들입니다.
세번째로,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주시지 아니하신다면 내 힘으로는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심어주셨습니다. 우주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전심전력으로 찾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찾는 것 같지만 속에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세상 염려 속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전심전력으로 찾는 사람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네번째로, 12절에 보니까 “다 치우쳤다”고 했습니다. 비뚤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일심으로 똑바로 나아가야 할 텐데 세상이 이끄는 대로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선한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불쌍한 우리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나아가야 하는데 세상의 길로 다 어그러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다섯번째로,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라고 했습니다. 음식물이 상했습니다. 썩었습니다. 먹을 수가 없습니다. 내다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나뭇가지가 말라 비틀어졌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찍어서 불에 던지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모든 인간이 쓸모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여섯번째로,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노아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인간들을 굽어보셨습니다. 죄악이 관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인간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셨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들 마음에 생각하는 것이 항상 악한 생각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계획하는 것이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홍수로 심판하시고 만 것입니다.
이 여섯 가지는 하나님의 기준에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판단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그렇게 보지를 않습니다. 내가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으면 아주 대단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그렇지가 않은 것입니다. 도토리 키 재기에 불과합니다. 알기 쉽게 예를 들어서 제가 설명을 합니다. 저희 집 막내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입니다. 요즘 구구단을 외우느라고 아주 열심입니다. 그래서 온 집안식구들이 다 거들고 있습니다. 심심하면 “7×8이 얼마니?”하고 물어보고 외우게 합니다. “56.” 대답을 잘합니다. 학교에서 시험을 칩니다. 한 아이는 7×8이 얼마냐는 질문에 55라고 썼습니다. 56에서 55는 하나밖에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아이는 그것을 잘못 외워서 65라고 썼습니다. 56와 65는 9가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55라고 쓴 것과 65라고 쓴 것을 똑같이 영점을 주었습니다. 55라고 쓴 아이가 손을 들고 선생님께 따집니다. “선생님, 저는 정답에서 하나밖에 차이가 안나고, 쟤는 아홉이나 차이가 나는데 왜 똑같이 영점을 주십니까?” 그렇게 따질 수가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인간의 시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기준은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적입니다. 상대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기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바라볼 때에 그 기준에서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고,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똑같이 다 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죄 아래 놓여 있는 인간들의 타락한 언어 생활에 대해서 설명해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들의 타락한 언어 생활에 대해서 네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13절에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라고 했습니다. 무덤 속에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시체가 들어 있지 않습니까? 시체가 썩어가는데 무덤이 닫혀 있지 않고 열려 있으면 그 속의 악취가 밖으로 다 새나오지 않습니까? 입만 벙끗하면 불평하고 원망하고 시기하고 남을 헐뜯는 사람들은 왜 그렇습니까? 목구멍이 열린 무덤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닫아놓으세요. 마음의 무덤을 열어놓지 말고 닫아놓으라는 것입니다. 악취가 퍼져나오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라고 했습니다. 옛날 에덴 동산에서 뱀이 혀를 날름날름하면서 하와를 속였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도 부드러운 혀를 가지고 사람을 속인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아첨합니다. 칭찬합니다. 그러나 뒤돌아서면 그 사람을 욕하고 비방하고 중상하는 것이 추악한 우리 인간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 다음에 세번째로,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라고 했습니다. 목구멍에서 시작해서 혀로, 그 다음에는 입술로 넘어왔습니다. 여러분, 독사의 입 뒤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있습니다. 뱀이 사람을 물면 잘못하면 죽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빨 속에 독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도 입으로 내뱉는 독설로 남을 해치고, 남을 죽게 만드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습니까?
마지막 네번째로, 14절에 보니까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입을 열기만 하면 남을 잡아죽이는 말이 튀어나옵니다. 그 입에 저주와 악독이 꽉 차 있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이런 말까지 다 생겼겠습니까? 별로 친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친해지면 그것은 틀림없이 두 사람이 함께 미워해야 할 공동의 적이 생긴 증거라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가까워진 것이 아니고 공동의 적이 생겼기 때문에 가까워졌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빌라도와 헤롯이 그러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의 총독이었습니다. 헤롯은 갈릴리 분봉왕이었습니다. 정치적인 알력이 있었습니다. 이해관계 때문에 서로 원수같이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이 하루아침에 친구가 되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일 때문에 원수로 지내던 두 사람이 하루아침에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추악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 아래 놓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 놓여 있는 우리들은 무엇보다도 언어 생활이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할 때 이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높고 높은 보좌에 앉으셨고 주변에는 천사들이 날면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고 창화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이사야가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로다.” 자기의 입술이 부정하다는 사실을 제일 먼저 깨닫게 되었습니다. 탄식하고 있을 때 천사 중의 하나가 제단에 피어 있는 숯불 속에서 핀 숯 하나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으로 이사야의 입을 살라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너의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다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체험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나의 입술이 부정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오 주여! 성령의 불로써 나의 입술을 살라주시옵소서”라는 기도가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해서 우리의 목구멍이 더 이상 열린 무덤이 아니라 내 속에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를 전하는 통로로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속임을 베푸는 혀가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성호를 소리 높여 찬미하는 혀로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남을 죽이는 일이 아니고 남을 살리고, 세워주고, 위로해주고, 덕을 세우는 아름다운 입술로 다 바뀌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번째로, 죄 아래 놓여 있는 인간들의 타락한 행동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15~17절까지 각 절마다 한 번씩 세 번을 지적했습니다. 첫째는, 15절에서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고 했습니다. 죄악 된 인간이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 있기만 해도 좀 괜찮을 텐데 부지런히 돌아다닙니다. 무엇을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까? 피 흘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그 해악이 얼마나 심하겠습니까? 독을 품은 독사가 사람을 물기 위해서 쏜살같이 달려오는 것처럼 죄악 된 인간은 지금도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피 흘리기 위해서, 남을 해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문자적으로 정말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의 눈에 피눈물 쏟게 만들고,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어서 피를 흘리게 만든  경우가 있지 않은지 한번 반성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두번째 타락한 행동은 16절에 있습니다.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라고 했습니다. 피 흘리는 데 빠른 발이 가는 길이 무엇입니까? 결국 파멸의 길이요, 고생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나도 죽고, 너도 죽고, 모두가 죽는 파멸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고통이 있습니다. 고생문이 훤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인간만큼 파괴적인 존재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서로가 서로를 물고 뜯고 찢고 죽입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짐승이라 해도 그런 짐승들이 어디 있습니까? 어디 그것뿐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주신 이 대자연을 건설과 문명이라는 미명 아래 마구잡이로 파괴하고 있습니다.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지 않습니까? 결국은 그것 때문에 우리 자신이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야말로 인간들이 가는 발걸음 앞에는 파멸과 고생이 있을 뿐입니다.
마지막 세번째로, 17절에 보니까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두 가지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는 파멸과 고생의 길이고, 또 하나는 평강의 길입니다. 그런데 죄악 된 인간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고 파멸과 고생의 길을 자초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끝이 무엇이겠습니까? 절망밖에 더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열세 가지의 인간의 죄악 된 모습을 지적한 뒤에 제일 마지막 18절에 가서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인간들이 이와 같이 죄악 된 모습을 보여주는 이유는 인간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죄악이 관영한 인간들을 물로써 심판하신 하나님, 죄악의 소돔과 고모라를 불로써 심판하신 하나님, 물질 때문에 하나님을 속였다가 심판을 당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우리가 생각한다면 우리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생각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죄악 된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왜 이와 같이 적나라하게 인간의 추악한 모습을 우리들에게 폭로해주었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죄 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기 전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원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바리새인은 의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필요 없고, 세리나 창기들은 죄인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만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바리새인이나 세리나 창기나 다 똑같이 병든 사람이요, 죄인입니다. 단지 바리새인은 자기가 죄인이면서도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배척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세리나 창기들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을 했던 것입니다. 내가 죄 아래 있다는 사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전에는 우리는 참된 은혜의 자리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제가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번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구약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한 부분인 10~18절을 읽어보겠는데 여러분께서는 성경을 보시고 그 가운데서 “없다”는 말이 몇 번 사용되었는지 세어보시기 바랍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없다는 단어가 몇 번이나 사용되었습니까? 일곱 번입니다. 성경에서 7은 무엇을 상징하는 숫자입니까? 완전수입니다.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저도 예외가 아니고, 여러분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고 계신지 살펴보았습니다. “다 죄 아래 있느니라.”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느 누구 한 사람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다 죄 아래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똑같은 죄인이라는 것을 이 시간에 분명하게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인간이 자기 힘으로 의로워질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야 했겠습니까? 내가 죽어 마땅한 죄인이나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기에 그분께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내가 저주받아야 할 죄인이나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기에 그분께서 대신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이 시간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죄인 된 것을 철저하게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든든히 붙드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분만이 우리를 죄 아래에서 은혜 아래로 옮겨주실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손을 든든히 붙드시고 모든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의로운 삶이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있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도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눈에 비치는 저희들의 모습이 얼마나 추악한지 살펴보았습니다. 저희들은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죄인이면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저희들입니다. 전심전력으로 하나님을 찾지도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행하라고 하신 선은 행하지도 않고 악한 짓을 행하면서 살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입술로 수많은 죄를 지으면서 살아왔습니다. 우리의 행동으로도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독생자를 보내주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게 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깨끗이 씻어주시고 우리를 이제 의롭다 해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더 이상 죄 아래 거하는 일이 없게 해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 거하는 자답게 의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