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강 은사와 범죄의 차이점(5:15-17)
L. A.에 있는 어떤 교회의 남자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본시 믿지 않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직업은 의사였습니다. 그는 공부하느라 노총각으로 지내다가 느지막하게 장가를 들었습니다. 그의 부인은 절세미인이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자기 아내를 얼마나 사랑했겠습니까?
그런데 그 도가 지나쳐 그에게 의처증이 생겼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가 아예 문밖 출입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병원에 출근해서도 시간마다 집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자기 아내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 확인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심지어 그는 찬거리까지 퇴근하는 길에 직접 사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니 부인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지긋지긋하겠습니까? 결혼 생활이 아니라, 완전히 생지옥과 같은 삶이었을 것입니다.
부인은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이 너무나도 그리웠습니다. 그래서 부인은 한 가지 꾀를 냈습니다. 그는 자기 남편에게 일주일에 단 하루만이라도 교회에는 다녀야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남편도 그것까지는 말릴 수가 없어서 허락을 했습니다.
처음 몇 주는 부인 혼자서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그러다가 차츰 남편도 아내를 따라서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 믿음이 생겨서가 아니라 자기 아내를 감시하기 위해서 따라오는 것입니다. 간혹 남자 성도들이 자기 아내에게 아는 체를 하고 인사라도 몇 마디 길게 나누면 난리가 났습니다.
"당신 말이야! 교회를 다니면 좀 곱게 다니지, 왜 쓸데없이 남의 아내를 붙들고 수작을 떨어?"
이렇게 호통을 쳤습니다. 그 정도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하다가 우연히 자기 아내 쪽을 쳐다보는 날은 영락없이 목사님실에 노크 소리가 나는 날이었습니다.
"목사가 설교를 하면 했지, 왜 쓸데없이 남의 아내 있는 쪽을 힐끗힐끗 쳐다보는거요?"
정말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와 목사님은 이야기할 기회가 생겨도 대화가 되지를 않았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불쌍하게만 생각했습니다. 목사님은 그의 영혼이 거듭나지 못한 것을 바라보면서 측은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대로 남자가 배울 만큼 배워놓고, 뭐가 할 일이 없어서 남에게 공갈이나 해서 먹고사는 목사가 되었느냐고 빈정거렸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중풍 병자가 벌떡 일어났다고 하지를 않나,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고 하지를 않나, 의사 입장에서 보면 모두 거짓말 같이 느껴졌을 것입니다. 심지어 그는 목사님에게 이런 제안까지 했습니다. 원한다면 자기가 재정적으로 좀 도와줄 수도 있으니까, 더 늦기 전에 보람이 있는 직업을 찾아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가 교회를 출석한지 한 1년쯤 되었을 때입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목사님에게 물어내라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이 깜짝 놀라서 도대체 무엇을 물어달라는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성경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이 지난 1년 동안 주일마다 나를 세뇌공작해서 이제는 이 책만 들여다만 봐도 자꾸 눈물이 나서 견딜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목사님의 책임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 그는 그 자리에서 자기의 지나간 잘못을 뉘우치고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그는 그 교회에서 그 누구 못지 않게 열심히 섬기는 헌신적인 일군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 때로는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고, 또 때로는 이해가 잘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예컨대 구원의 교리가 그러할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범죄했습니다. 잘못은 아담이 했는데, 왜 내가 죄인이 되어버리는지를 이성적으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아담의 잘못으로 인해서 아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내가 죽어야 하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는데, 그것 때문에 아무것도 잘한 것이 없는 내가 의인이 된다는 사실도 우리의 머리로는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뒤집어놓습니다. 그 때는 나도 모르게 내 눈에서 뜨겁고 감격스러운 눈물이 흘러내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로마서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그와 같은 뜨거운 체험을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은사와 범죄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편의상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사는 아담의 범죄보다도 더 큰 위력이 있습니다.
14절 끝 부분 말씀입니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어떤 점에서 그렇다는 것입니까? 대표의 원리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모든 인류의 대표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대표가 되셨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었습니다. 그 결과 모든 인류에게 사망이 임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심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결과로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생명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사와 아담의 범죄 사이에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예수 그리스도의 은사와 아담의 범죄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둘 사이의 차이점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살펴봅니다.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여기서 말하는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담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었습니다. 그 결과 아담 이래의 수많은 사람들, 곧 모든 인류에게 죽음이 임했습니다. 그러니 아담의 범죄가 얼마나 엄청난 위력이 있는 것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겁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더욱 넘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에게는 더욱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우리에게 넘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죄가 아무리 기승을 부리고 있어도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우리에게 더욱 넘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장기를 둘 때를 생각해 봅시다. 상대방이 "장군이오!"라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막아야 합니까? 무조건 졌다고 두 손들면 안됩니다. "멍군이오!"라고 막아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우리 앞에 장군이 들어왔습니다.
"사망이오. 장군 받아라!"
그 때 어떻게 하면 됩니까? 겁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멍군이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들어온 장군을 막으시겠습니까?
"더욱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은혜로 막는 것입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요!"
이렇게 치고 들어가면 게임은 끝납니다.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죄는 은혜 앞에서 꼼짝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은혜는 더욱 우리에게 넘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이래 모든 인류의 죄를 다 합친 것이 지구 땅덩어리 만하더라도,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온 우주보다도 더 크고, 더 넓게, 우리에게 넘치고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가 한강 물처럼 도도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겁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태평양보다도 더 넓게 우리에게 넘쳐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죄가 아무리 주홍빛보다도 더 붉다 할지라도, 더욱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모든 죄를 눈보다 더 희게, 양털보다 더 순결하고 깨끗하게 씻어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지금도 우리에게 넘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죄는 은혜 앞에서 꼼짝할 수가 없습니다. 은혜는 언제나 더욱더 넘쳐 흐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지금도 나이아가라 폭포수보다도 더 강하고 더 세차게 우리 위에 쏟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 믿음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날마다 이겨내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사는 아담의 범죄가 끼친 효과를 완전히 뒤집어놓습니다.
1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예수 그리스도의 은사는 아담의 범죄와 또 다른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아담의 범죄와 은사의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알기 쉽게 비유로 설명해 봅니다. 여기에 큰 다이아몬드가 서 있습니다. 맨 위 꼭대기 점에는 아담이 서 있습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습니다. 죄가 인류에게 좍 퍼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아니했습니다. 그 수많은 범죄가 다시금 한 곳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다이아몬드 맨 아래 꼭지점에는 예수님이 서 계십니다. 그 수많은 범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집중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한 몸에 담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의롭다 고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범죄의 결과는 심판이지만, 은사의 결과는 의롭다 하심입니다.
1963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살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모 군부대 대대장 일가족 여섯 명이 도끼로 무참하게 살해당했습니다. 범인은 한 달만에 붙들렸습니다. 그는 고재봉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포악한지 모릅니다. 그는 감옥 속에서 간수가 자기를 좀 쳐다본다고 기분 나쁘게 생각하고는 자기의 손가락으로 간수의 눈을 찔러서 피 흘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감옥 속에서 괜스레 자기의 머리를 벽에 들이받아서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그는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에게 한 통의 편지가 전달되었습니다. 어느 초등학교 3학년인 소녀가 쓴 편지였습니다.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고재봉 아저씨, 사람들은 아저씨를 살인마라고 부르면서 무서워하지만 저는 아저씨 사진을 봤는데 그렇게 보이지 않아요. 아저씨가 그런 일을 한 것은 진짜 마음으로 그런 게 아니지요? 교회에서 배웠는데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예수님 옆에서 어떤 강도도 사형을 당했대요. 그런데 교회 선생님 말씀이 그 강도도 하늘 나라에 올라가서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되었대요. 죽을 때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니 아저씨도 이제부터는 예수님을 꼭 믿으세요. 실은 어제 저는 친구들과 싸움을 했어요. 친구들은 아저씨가 무서운 사람이라고 했고, 저는 아니라고 했거든요. 아저씨, 저는 요즘 아저씨가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해 달라고 매일 예수님께 기도 드리고 잠들어요. 아저씨도 너무 슬퍼하지 마시고, 저처럼 꼭 기도하고 주무세요. 또 편지 드릴게요."
이 어린 소녀의 편지 한 통이 완악한 고재봉의 마음을 찢어질 듯이 아프게 만들었습니다. 그 후 또 한 통의 편지가 전달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시골 교회 목사님이 쓴 편지였습니다.
"고 군에게 눈물로 호소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죄인입니다. 누구나 다 똑같이 지옥에 갈 죄인이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특히 고재봉군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고, 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영원한 처소를 예비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은 성도들의 눈물어린 기도와 사랑의 편지는 고재봉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결국 더욱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얼어붙었던 그의 마음을 완전히 녹여버리고 말았습니다. 고재봉은 옥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세주로 영접했습니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고재봉은 밤새워서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힘써 자기 동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변화된 모습을 보면서 그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습니다.
드디어 사형을 집행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고재봉은 웃으면서 동료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내가 먼저 하늘 나라에 가서 기다릴테니 그대들도 예수님을 잘 믿고 하늘 나라로 오시기 바랍니다. 저 하늘 나라에 가서 우리 모두 만납시다."
사형 집행관이 그에게 마지막 소원을 물었습니다.
"예, 제가 마지막으로 찬송을 한 곡 부르고 싶습니다. 제가 찬송을 부르면서 웃고 있을 때 총으로 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고재봉은 천천히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
고재봉은 가사가 조금도 막히는 부분 없이 1절, 2절을 계속해서 불렀습니다. 그런데 웃으면서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염없이 눈물을 떨어뜨리면서 부르고 있었습니다. 집행관은 인내하면서 끝까지 기다려주었습니다. 고재봉은 드디어 3절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천성 바라보고 가까이 왔으니
아버지의 영광 집에 가 쉴 맘 있도다
나는 부족하여도 영접하실 터이니
영광 나라 계신 임금 우리 구주 예수라."
고재봉은 마지막 부분에서 평화스럽게 웃었습니다. 드디어 총성과 함께 그의 가슴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평화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족합니다. 연약합니다. 그러나 이 시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박대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영접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품에 안으시고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의롭다고 해 주실 것입니다.
셋째로, 범죄의 결과는 무엇이며, 은사의 결과는 무엇인지를 살펴봅시다.
1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였은즉."
여기서 말하는 한 사람은 물론 아담입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습니다. 그 결과 사망이 왕노릇하였다고 했습니다. 사망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왕노릇하였은즉"이란 말의 시제가 과거입니까? 현재입니까? 과거입니다. 이미 지나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더 이상 사망에 매여서 종노릇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망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신분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17절 하반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
누가 왕노릇한다고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왕노릇한다고 했습니까? 물론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세요.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왕노릇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입니까?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게 받아왔습니다. 지금도 넘치게 받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바로 우리가 왕노릇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과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는 사망의 종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의 신분이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세세무궁토록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왕노릇하게 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순교사화를 읽어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성도가 핍박자의 손에 잡혔습니다. 핍박자들은 그를 나무 위에 매달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불태우기 위해서 나무들을 던졌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순교자는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가 가는 걸음을 복되게 하기 위해서 저들로 하여금 장미 꽃송이들을 던져주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순교자의 눈에는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 던지는 장작들이 장미 꽃송이로 보였던 것입니다. 불길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순교자는 하늘을 우러러 또 이와 같은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저로 하여금 빨리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수 있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사망에 매여서 종노릇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망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사망을 향하여 호통을 칠 수가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더 이상 사망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사망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사망을 향하여 담대하게 호통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하나님은 저 영화로운 하늘 나라, 새 예루살렘을 준비하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장차 우리는 그곳에서 예수님의 손을 붙들고 세세무궁토록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매순간마다 이 소망을 붙들고 저 높은 곳을 바라보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갑시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은사와 아담의 범죄와의 차이점을 깨닫게 되셨습니까?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지금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넘치고 있다는 사실이 이해가 되십니까? 죄가 아무리 기승을 부린다 할지라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더욱더 넘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셨습니까?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사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 받고 의롭다 하심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
이제는 더 이상 사망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도리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세세무궁토록 왕노릇하리라는 놀라운 사실을 확신하십니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한 우리의 답변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멘!"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더욱 넘쳐 흐르는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호를 소리 높여 찬양합니다. 우리에게 지금도 더욱 넘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와 사망의 모든 권세를 이겨내게 해 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세세무궁토록 왕노릇한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생각하면서, 이 믿음 붙들고 세상을 이기되 넉넉히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의 발걸음을 지켜주시기를 원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이기면서 살아가는 복된 삶이 우리에게 있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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