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박상훈목사

[스크랩] 로마서강해/제25강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5:12-14)

제25강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5:12-14)  


예전에 유명한 지휘자 스토코우스키(Leopold Stokowski)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때였습니다. 하루는 '베토벤의 서곡'(Overture)을 연주하게 되었습니다. 그 연주에는 트럼펫 하나가 무대가 아닌 이층 관중석 맨 뒤에 있다가 솔로를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드디어 지휘자가 등단하여 음악이 연주되었습니다. 관현악의 우렁찬 음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연주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지휘자는 관중석 쪽으로 돌아서서 이층 맨 뒤에 있을 트럼펫 연주자가 있는 쪽을 향해 지휘봉을 휘둘렀습니다. 그런데 아무 소리도 없고 연주자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지휘자는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관중들도 모두 뒤를 돌아보며 웅성거렸습니다. 결국 그 연주회는 실패작이 되고 말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 원인은 이러했습니다. 수위가 뒷문을 지키고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갑자기 트럼펫을 들고 관중석에서 일어서더니 나팔을 불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수위는 엉겁결에 달려가 트럼펫을 빼앗고 그 사람의 팔을 비틀고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은 펄펄 뛰면서 자기는 지휘자에 맞추어 나팔을 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한 사람 수위의 무지로 말미암아 그 연주회는 실패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한 사람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일깨워준 사건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사실도 한 사람의 중요성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이해하기 어려운 성경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를 감동해 주시면 어려운 말씀을 통해서도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될 줄 압니다. 모쪼록 성령께서 우리 모두의 마음을 활짝 열어주셔서 말씀을 잘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본문 바로 앞에 있는 롬5:9∼11절을 잠시 보십시다. 그 가운데서 "인하여"라든지 "말미암아"라는 단어가 모두 몇 번 사용되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모두 다섯 번 사용되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을 물어봅니다. 그러면 이런 "인하여"라든지 "말미암아"라는 단어가 누구와 연결해서 사용되었습니까? "그 피로 인하여"라고 할 때 그가 누구입니까? "그 아들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라고 할 때 그 아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모든 죄를 용서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또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삶을 누릴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복들은 누구로 말미암은 것입니까?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안계셨다면, 이 모든 복 가운데 그 어느 하나라도 우리는 누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한시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들을 때 아무런 거부감이 없습니다. 그저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이런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의 유대인들 가운데는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고 해서, 한꺼번에 모든 사람들의 죄가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의 율법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범할 경우에 그 죄를 사함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제사를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1년에도 몇 차례씩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거기다가 내가 죄를 지었을 경우에 그 죄를 사함 받기 위해서 나 자신이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고 해서 어떻게 한꺼번에 모든 사람의 죄가 용서함을 받을 수가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또 시간적으로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이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그대로 직접적인 효험이 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는데, 어떻게 예수님의 피로 인해서 지금의 우리가 죄사함을 받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속에서 이러한 질문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에 대한 답변을 주기 위해서 인류의 시조라고 불리어지는 아담을 예로 들어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인해서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도 역시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아담이 모든 인류의 대표가 되었다면, 왜 예수님이 거듭난 모든 사람들의 대표가 될 수가 없겠습니까? 아담 안에서 우리가 죽었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새 생명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앞의 것이 분명하다면 뒤의 것도 역시 확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 속에서 우리들에게 일깨워주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편의상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죄의 역사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습니까? 또 죄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먼저 여기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1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여기에도 "말미암아"라는 단어가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12절의 "말미암아"와 연결된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담입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아, 에덴 동산에 있는 모든 실과는 임의로 따먹어도 괜찮다. 그러나 선악과는 따먹지 말아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죽으리라고 엄하게 경고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사도 바울이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하지 않고,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했습니까? 여기에 바울의 의도가 있습니다. 한 사람, 곧 아담이 모든 사람을 대표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아담의 이름을 쓰지 않고, "한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한 사람 아담이 모든 인류를 대표한다면,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죄가 아담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죄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죄의 삯은 무엇입니까? 사망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사망 선고를 내리셨습니다.
"네가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었은즉 필경은 네가 흙으로 돌아가리라."
사망 선고를 내리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담 한 사람의 범죄가 아담 자신에게만 영향을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12절 하반부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한 사람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었는데, 그 결과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다 죄를 지은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담은 모든 인류를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대표의 원리"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설명해 봅니다. 승객을 가득히 태운 버스가 내리막길을 쏜살같이 내려가고 있습니다. 버스를 운전하는 기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운전 기사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버스는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경우 졸음을 이기지 못한 운전 기사 한 사람만 다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버스에 타고 있는 모든 승객들이 한꺼번에 다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버스 안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은 운전기사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담 한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었지만, 그 결과는 모든 인류가 죄를 지은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담은 인류를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 아담이 죄를 지은 결과로 무엇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습니까?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창세기에 나오는 족보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옛날 사람들은 참 오래도 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900년도 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족보를 살펴보면 예외 없이 똑같은 말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죽었더라."

죽었더라는 말로 끝맺음을 하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12절 말씀을 첫 부분과 끝 부분을 연결해서 한 번 읽어봅니다. 우선 첫 부분입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끝 부분 말씀입니다.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우리가 이런 말씀을 듣게 되었을 때, 속으로 아마도 반문하는 사람이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아니, 아담이 그까짓 과일 하나 따먹었는데 하나님께서 그토록 흥분하실 이유가 무엇인가? 그까짓 보잘 것 없는 과일 하나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죽어야 하는가? 하나님이 너무 심하지 않으신가?"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해 봅니다. 여기에 성이 있습니다. 그 안에 여러 사람이 모여서 살고 있습니다. 성 밖에는 지금 적군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적군은 그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 안에 있는 한 사람이 그만 적의 꾀임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몰래 뒷문을 열어주었습니다. 문을 열어주는 그 자체는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엄청난 결과가 초래될 수밖에 없습니다. 뒷문을 통해서 적군들은 다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성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아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담이 행했던 결정적인 실수는 문을 열어주는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비로소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12절 말씀의 뜻입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 결과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게 되었습니다.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고 만 것입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인간의 원죄를 역사적으로 입증하고 있습니다.

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있기 전에 죄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얼마든지 입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벌하셨습니다. 왜 벌하셨습니까?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죽이는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노아 시대에 인류를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죄악이 관영했기 때문입니다. 또 왜 바벨탑이 무너졌습니까? 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했습니까? 인간들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모든 사건들이 율법 이전이었습니까? 아니면 이후였습니까? 좀 더 쉽게 말해서 모세 이전이었습니까? 아니면 모세 이후였습니까? 이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인간들에게 율법을 주시기 이전이었습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이 세상에는 죄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율법이 있기 전과 율법이 있고 난 뒤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미 롬3:20에서 율법의 역할을 우리들에게 밝혀주었습니다. 율법은 우리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설명해 봅니다. 여기에 방이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방에는 사람이 살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먼지가 자욱하게 끼어 있습니다. 어둑어둑할 때는 먼지가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먼지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커튼을 걷어 제치고 창문을 열어놓으면 햇빛이 들어오면서 그 속에 있는 먼지가 그대로 환하게 눈에 띄게 됩니다. 먼지가 얼마나 많은지를 비로소 알 수가 있습니다.
율법이 하는 역할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는 우리가 죄를 지으면서도 죄를 짓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죄의식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난 뒤에 죄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13절 본문의 말씀의 뜻입니다. 제가 13절 다시 한 번 읽어봅니다.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면 이와 같은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는 죄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죄의 삯이라고 할 수 있는 사망은 그들에게 있었는가, 없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망이 있었습니다. 14절 말씀이 그것을 설명해 줍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그러니까 인간이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받기 이전입니다. 율법 이전 시대입니다. 그 다음의 말씀을 봅시다.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아담의 죄는 특이성이 있습니다. 아담의 죄는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었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했습니다. 그 때부터 인류는 그 어느 누구도 선악과를 따먹는 죄는 지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후손들 위에도 무엇이 왕노릇하였다고 했습니까?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역시 사망이 왕노릇하게 되었습니다. 율법이 없어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했더라도 그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들에게 무엇이 있었기 때문입니까? 원죄입니다. 아담으로부터 말미암은 원죄의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에 다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원죄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갓난아기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잘못해서 그 갓난아기가 죽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사망은 죄의 삯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갓난아기가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거짓말을 했습니까? 남을 미워했습니까? 그 아이는 죄를 짓지 아니했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는데도 그 아이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에게도 죄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사망은 죄의 삯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는 것입니까? 아담으로부터 말미암은 원죄가 있습니다. 이것 한 가지만 보더라도 우리 인간은 누구나 원죄 아래서 태어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셋째로,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원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위에 왕노릇하고 있는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14절 제일 끝 부분에서 이것을 우리들에게 단적으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4절 끝 부분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표상이라는 어려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표(表)"라는 것은 대표가 된다는 말이고, "상(象)"이라는 것은 상징이 된다는 말입니다. 어떤 실체를 보여주는 하나의 좋은 본보기요, 모형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표상입니다. 그렇다면 실체는 누구입니까? "오실 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오실 자는 누구겠습니까? 저 높고 높은 하늘의 별을 넘어서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죄 범한 우리 영혼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그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하나의 모형입니다. 아담에게서 볼 수 있는 원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원리입니까? 대표의 원리입니다. 아담이 모든 인간을 대표하듯이 예수 그리스도도 그 안에서 거듭난 모든 사람들의 대표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가 죽은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새 생명을 얻게 됩니다. 지금 바울이 장황하게 인류의 원죄에 대해서 설명한 이유는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대표를 볼 수가 있습니다. 한쪽은 아담입니다. 또 한쪽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인정하든지 인정하지 않든지 간에 이 두 대표 가운데 어느 한쪽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연결하는 고리는 "말미암아"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과 연결되어 있습니까?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에 아직도 연결되어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에 연결이 되어 있습니까? 간단한 것 같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도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한쪽은 영원한 사망입니다. 그러나 한쪽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길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에 연결되는 것입니다.
백두산의 천지에는 두 개의 강이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내리는 압록강입니다. 황해로 연결이 됩니다. 또 하나는 오른쪽으로 흘러내립니다. 두만강입니다. 동해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은 조금만 왼쪽으로 기울면 압록강을 따라서 황해로 빠져버립니다. 그러나 조금만 반대로 오른쪽으로 기울면 두만강을 통해 동해로 빠지게 됩니다. 처음은 똑같이 시작했지만 가는 방향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종착역은 엄청나게 차이가 나고 만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느 말미암아에 연결이 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종착역도 엄청나게 차이가 납니다. 한쪽은 사망입니다. 한쪽은 생명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는 길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는 이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미암아에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이 되었습니다. 그의 살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는 영원한 구원이 보장되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 땅에서도 하나님 안에서 매일매일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스운 이야기 한 토막입니다. 하루는 어떤 아주머니 한 분이 나이 어린 딸을 데리고 백화점에 모처럼 구경을 갔습니다. 오래간만에 백화점을 구경하느라고 어머니는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어린 딸은 달랐습니다.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뭔가 못마땅한 듯한 표정을 짓습니다. 급기야는 찡얼대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가 그것을 보고 나무랐습니다.
"얘야, 너는 이 좋은 물건들을 보고서도 즐거워하지 못하고 왜 그렇게 바보같이 찡얼대기만 하느냐?"
그랬더니 그 아이는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엄마, 내 눈에는 그런 것 하나도 안보여요. 내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줌마들 엉덩이밖에 없어요."
왜 그렇습니까? 키가 작아서 백화점에 진열된 물건들이 하나도 안보인 것입니다. 그 아이의 눈에는 그저 앞에 있는 사람들의 엉덩이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찡얼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엄청나게 놀라운 복들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찡얼댑니까? 밑에 있는 것만 쳐다보기 때문입니다. 눈을 들어서 위를 좀 쳐다봅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놀라운 은혜들을 생각해 봅시다. 왜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이 없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에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이 허락하신 놀라운 특권들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매일 매순간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 평강, 즐거움을 우리의 마음 속에 충만하게 가질 수 있는 복된 삶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이렇게 담대하게 나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릴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해 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본시 저희는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 복을 허락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들이 되었사오니 너무 이 세상적인 것, 땅엣 것, 밑엣 것을 추구하지 말고, 눈을 들어서 하늘을 바라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줄꼬? 너는 내게 구하라 하실 때 주 예수보다도 더 귀한 것이 없는 줄 알아서 주님을 구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의 마음을 충만히 채울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세상적인 것으로 만족을 삼지 말고, 하나님으로 만족 삼을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이 시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즐거움을 다시금 회복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