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누가복음 10:25~37
죽음을 앞둔 사도 요한에게 평소에 사랑하는 제자들이 마지막으로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사도 요한은 “처음도 사랑이고, 둘째도 사랑이고, 셋째도 사랑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어찌 보면 단순한 대답처럼 들리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진리가 숨겨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렇습니다.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율법학자는 성경에 대해서 꿰뚫는 사람입니다. 이 율법학자는 대단히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고,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는 몇 가지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한번밖에 없는 이 인생,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인생을 사는 것입니까? 라는 인생의 의미를 묻는 질문입니다. 또한 한번밖에 없는 이 인생의 목표가 뭡니까?”라는 인생의 목적을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영원히 산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하면 확신할 수 있습니까?”라는 철학적이고도 신학적인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향해 네가 율법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지 않느냐? 율법에 쓰인 내용이 무엇이며, 너는 그 율법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율법학자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대답했습니다.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은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온 율법학자에게 예수님은 아주 명확하면서도 단순한 해답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같이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마치 손 하면 손등과 손바닥이 있듯이, 손등과 손바닥의 관계처럼 서로 없어서는 안 되며, 떨어질 수도 없는 관계를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율법학자에게 영생을 얻는 길은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길이며 그것을 네가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무나 간단한 대답에 율법학자는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렇다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그에게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강도를 만나서 거의 다 죽게 되었다. 제사장이 그 곳을 지나갔는데 그냥 지나쳤고, 레위인도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포도주와 기름으로 상처에 붓고 상처를 싸매주었을 뿐만 아니라, 주막까지 데리고 간 후 치료까지 부탁하며 길을 떠났다.” 예수님은 율법 학자에게 묻습니다. 도대체 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누구냐?” 그러자 율법학자가 대답합니다.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누가 내 이웃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도리어 율법학자에게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누구냐? 고 묻습니다. 율법학자의 질문 ‘누가 내 이웃이냐’는 질문에서 평소 그가 생각하는 이웃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에게 이웃은 자기를 중심으로 그 세상 속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의 옆집에 사는 사람이 이웃이고, 자신의 집 안에 사는 사람이 이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누구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의 중심에는 강도 만난사람이 있습니다. 강도만난 사람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그 사람에게 이웃은 도움을 주는 사람인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 율법학자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이웃을 사랑하는 길이며, 그 이웃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너도 그와 같이 행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우리가 예수님의 이웃이 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중심이 되었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상처를 싸매주시고, 죽어가는 우리를 살려주셨기에 우리는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 내 이웃이냐? 이것은 논쟁도 토론도 학문적인 연구도 아니라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행하라’는 말에 그 대답이 있듯이 바로 실천이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행함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은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심판하실 때, 오른편에 설 사람과 왼 편에 설 사람을 가르십니다. 그 때의 심판의 기준은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 물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했고, 내가 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 나를 찾아와서 나를 치료했고, 내가 옥에 갇혔을 때는 너는 나를 위문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선다씽이 동료와 함께 매섭게 눈보라가 치는 날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걸어가다가 앞에 뭔가 발길에 걸리는 물체를 발견했습니다. 보니 동상으로 죽어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선다씽은 동료에게 죽어가는 사람을 서로 번갈아가며 메고 언덕을 넘어가자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동료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혼자 앞장 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선다씽은 발에 걸린 사람 즉 얼어 죽어가는 사람을 등에 업고 언덕을 올라갑니다. 올라가던 언덕길에 발에 걸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보니 앞서 가던 동료였던 것입니다. 목숨은 이미 끊어져 있었습니다. 선다씽은 그 사람을 업고 무사히 언덕 밑을 내려와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두 사람 모두 살았습니다. 그것은 선다씽의 몸의 땀으로 뒤에 업혔던 사람의 몸이 녹기 시작했고, 업힌 사람의 온기로 선다씽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살려내자 한 생명은 찾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논쟁과 토론이 필요 없습니다. 살려내자 한 생명은 실천하는 것입니다. 가서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그 생명을 찾아가는 것이 그 생명에게 우리는 이웃이 되고, 그 생명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이웃 사랑이 되고, 그 생명을 살리는 것이 바로 내 생명을 살리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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