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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강용규목사

만족함을 얻는 길

만족함을 얻는 길
  

▒▒▒▒ 시편 131:1~3



예레미야 보로스는 “감사함 또는 만족함은 진귀한 보석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만족함과 감사함으로 사는 것은 진귀한 보석을 가진 것처럼 귀한 것을 품고 사는 삶을 말합니다. 또 다른 의미는 진귀한 보석처럼 쉽게 가질 수 없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만물과 사람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다하실 정도로 에덴동산은 모든 것이 만족한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과 이브는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를 따 먹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정치적으로는 나라가 없고, 사회적으로는 최하위 계층이며, 경제적으로는 빈곤한 히브리 족속이었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역사로 가나안 땅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을 무너뜨림으로 가나안 땅은 바로 눈앞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간은 거기에서 금덩이와 은덩이를 숨겼을 뿐만 아니라, 시날산 외투까지도 숨겼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많은 것을 가진다 해도 만족하며 살기는 무척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시편 시인은 “나는 어미에게서 젖 뗀 아이처럼 어미 품 안에서 평안하고, 고요하고, 만족하고, 감사합니다.”고 찬양합니다. 시편은 모두 150편으로 되어 있으며, 120편부터 134편까지는 성전에 올라가며 부른 노래입니다. 일 년에 적어도 세 번의 절기에는 북쪽의 단으로부터 남쪽의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흩어져 살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교통이 불편하던 시대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31편은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면서 “하나님이여, 우리를 지켜주셔서 우리의 발이 실족지 않도록 우리의 발을 지켜주시옵소서. 뜨거운 태양이 나를 해하거나 밤에 추운 날씨가 우리를 상하지 않도록 지켜주시옵소서.”고 노래했습니다. 시편 130편은 “하나님, 하나님이 죄악을 살피실진데 하나님 앞에 설 자가 어디 있습니까? 라고 고백합니다. 은혜 받을 때, 우리의 죄가 생각납니다. 죄가 생각나는 것은 바로 은혜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배드리기 위해 어렵게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온 순례자들은 성전 안에서 기쁨과 평강으로 예배드립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게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사죄함의 은총을 받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시편 131편의 찬양처럼 “하나님이여 내가 젖 뗀 아이처럼 어미 품안에서 평안함, 고요함, 만족함, 감사를 느끼나이다.”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감사와 찬양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진정한 감사와 만족은 주님이 주시는 것임을 그들은 분명히 깨닫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아기가 젖 떼는 나이가 평균 네 살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기가 엄마의 젖을 떼든지, 떼지 않든지 그들은 어머니 품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아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가 감사하며 만족할 수 있는 것은 아기가 어머니의 품 안에 있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품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박국 예언자의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는 고백과 찬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만족함과 감사함을 받는 길을 1절에서 말씀하시는데, “하나님, 내 눈이 교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마음이 허탄한 것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하나님 내가 미치지 못할 것들, 내가 하지 않아야 일들을 내가 기대하지 않습니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꿈을 꾸고 교만할 때는 형들의 미움을 사서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 겸손해지고 다시 하나님만을 의지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총리대신으로 세워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눈을 가진 자에게는 불평과 불만과 어려움을 주시고, 감사한 마음을 품은 자에게는 풍성함으로 채워주십니다. 아담과 이브 즉 피조물들이 창조주처럼 되겠다고 선악과를 따먹고 난 후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반면에 사무엘상 24장에서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윗의 뒤를 밟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역전되어 다윗이 엔게디 동굴 안에 무방비 상태로 누워있는 사울 왕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비새 장군은 “왕이여, 하나님이 주신 기회입니다. 죽이십시오.” 말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이지 않습니다. 그 후에 아비새 장군과 다윗이 밤중에 몰래 사울의 진영으로 들어갑니다. 그때에도 사울은 무방비 상태로 있었습니다. 다시 아비새 장군이 말합니다. “왕이여, 하나님이 왕에게 주신 기회입니다. 명령만 내리십시오. 사울을 두 번 창으로 찌를 필요가 없습니다. 한번 찌르면 끝납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자를 치는 죄를 범하지 말라”며 사울 왕을 그냥 살려줍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만족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우리 안에 기쁨이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우리가 미치지 못할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우리가 꼭 해야 되는 일을 3절에서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하나님을 바라는 일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야곱이 부인들 중에 가장 사랑한 여인은 라헬입니다. 세겜을 떠나 브엘세바로 가는 중에 베들레헴을 지날 때 만삭이 된 라헬이 아기를 낳고 죽게 되었습니다. 라헬은 야곱에게 그 아기의 이름을 ‘베노니’ 즉 ‘슬픔의 아들’ 로 불러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아기의 아름을 베노니가 아닌 베냐민으로 불렀습니다. 베냐민은 하나님의 오른손에 붙들린 아들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야곱은 죽어가는 아내의 말을 들을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며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가 아닌 베냐민으로 지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 거기에 기쁨이 있고, 만족이 있고, 감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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