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에 대해 가르치신 예수님! (막 10:17-22)
오늘 본문에는 재물이 많은 사람 하나가 등장합니다. 인간적인 견지에서 보면, 그는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았으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도 알았고, 성경에 기록된 계명들도 다 지켰다고 자부했습니다. 또한 그는 영생을 사모했습니다.
따라서 언뜻 생각하면, 그가 구원을 받는 일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아니 영생을 얻는 일이라면, 그가 영순위에 해당하는 사람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영생을 얻으려고 예수님께 왔다가, 영생을 얻지 못한 채 되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매우 놀라서 서로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 뒤에 있는 26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27절에 예수님의 대답이 나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왜 사람으로는 할 수 없습니까?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의나 우리의 공로에 기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엡2:5 말씀과 같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한 엡2:8 말씀과 같이, 구원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사실은 성전에서 기도하던 바리새인과 세리를 비교하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고하여 자기의 의를 내세웠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공로를 자랑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와는 달리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에게 자기를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이 그에게 선물로 주시는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들어서 이 사실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 아이들의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아무런 공로가 없습니다. 그들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구원이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인 바, 믿음으로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재물이 많은 사람을 들어서, 똑같은 사실을 다시 한번 밝히셨습니다. 왜 재물 많은 사람이 구원받지를 못했습니까? 왜 그가 바라던 영생을 얻지 못했습니까? 그는 자신이 쌓아 가는 의와 공로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명심합시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우리의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부자 청년 관리의 질문입니다(17절).
막10: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때 예수님은 요단 강 건너편, 곧 베레아에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곳에 있는 어떤 집에서 어린 아이들을 안으시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그 집에서 나오셔서, 예루살렘으로 향한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 때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달려왔습니다. 오늘 본문 22절 말씀처럼, 그는 재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눅18:23 말씀을 보면, 그를 가리켜 큰 부자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마19:22 말씀과 같이, 그는 청년이었습니다. 또한 눅18:18 말씀처럼, 그는 관리였습니다.
마9:18 말씀을 보면, 회당장 야이로를 관리라고 불렀습니다. 따라서 아마 그 청년도 회당장이었을 것입니다. 젊은이가 회당장이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영향력이 있었으며,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에게 달려온 사람은 부자였고, 청년이었고, 또한 관리였습니다. 이 세 가지 사실을 합치면, 그는 부자 청년 관리였습니다. 다시금 오늘 본문을 보면, 이 부자 청년 관리는 몇 가지 면에서 훌륭했습니다.
첫째, 그는 예수님에게 달려왔습니다. 본래 유대인들은 뛰는 법이 없었습니다. 뛰다가 하체를 드러내면,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예수님에게 달려왔습니다. 그에게는 열정과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둘째, 그는 예수님 앞에서 꿇어앉았습니다. 그는 부자였습니다. 또한 관리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얼마든지 거드럼을 피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는 겸손한 자세로 예수님에게 나아왔습니다.
셋째, 그는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당시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멸시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예수님에게 귀신의 왕 바알세불이 지폈고,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고 모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존경했습니다.
넷째, 그는 예수님에게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관리, 곧 회당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가 아직도 영생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을 숨기려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서 솔직했습니다.
이렇듯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부자 청년 관리는 여러 면에서 훌륭했습니다. 첫째, 그에게는 뜨거움과 절실함이 있었습니다. 둘째, 그는 겸손했습니다. 셋째, 그는 예수님을 존경했습니다. 넷째, 그는 예수님 앞에서, 그리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솔직했습니다.
사실 부자 청년 관리는 젊은 나이에 많은 것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은 허전했습니다. 그는 채워지지 않은 것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습니다. 아직은 그가 영생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생이란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삶의 길이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단12:2 말씀처럼, 영생을 얻지 못한 자도 영원히 살면서 부끄러움을 당해야 합니다. 이렇듯 영생이라 함은 삶의 길이가 아니라, 삶의 질에 관한 문제입니다.
부자 청년 관리는 예수님에게 영생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가 떠난 후, 예수님은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그러자 제자들은 26절에서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고 서로 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떠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까? “영생을 얻는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구원을 얻는다.” 이들은 표현만 다를 뿐, 똑같은 뜻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영생을 바라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엉뚱한 곳에 가서 영생을 얻으려고 합니다. 요일5:20 말씀처럼, 예수님이 바로 영생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실 수가 있으십니다.
부자 청년 관리는 제대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에게 달려와서, 겸손하게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는 공손하게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유대교는 율법주의였습니다. 유대교는 율법이 명하는 것들을 행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유대교에 젖어있는 부자 청년 관리로서는, 자신이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를 예수님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행16:30을 보면, 빌립보의 간수도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그러자 행16:31에서 바울과 실라는 이와 같이 대답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따라서 우리도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의외의 대답을 하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18~19절).
막10: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부자 청년 관리를 깨우치시기 위하여, 먼저 그의 잘못을 한 가지 지적하셨습니다. 물론 그는 예수님을 존경하는 뜻으로,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선하다”는 말을 너무 쉽게 사용한다고 나무라셨습니다.
마19:16 말씀을 보면, 그가 “선하다”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선한 일을 하면 영생을 얻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선한 일을 하면, 선한 사람이 되며, 그로 인해 영생을 얻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말하자면 부자 청년 관리는 예수님에게만 “선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도 똑같이 “선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선하다”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함부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구원의 첫걸음은 자기가 악한 존재임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깨달아야, 자신의 죄를 회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자 청년 관리는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선한 일을 하기 때문에, 자신은 선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나무라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사람은 아무도 선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3:10~12에서 이 사실을 분명히 지적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이는 시편 14편과 53편에 있는 말씀들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외에도 사도 바울은 시편 5편, 140편, 10편, 이사야 59장, 그리고 다시금 시편36편에 있는 말씀들을 차례대로 인용하면서, 사람은 누구나 다 악한 존재이며 죄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선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부자 청년 관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서,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선하다”라는 단어의 올바른 개념을 모른 채, 막연하게 그 단어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가 “선하다”는 말을 아무렇게나 사용하는 것을 나무라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은연중에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가격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부자 청년 관리 스스로가 자신은 선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막10: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이 때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명들은 십계명의 두 돌판 가운데서 두 번째 돌판에 새겨진 것들입니다. 십계명의 첫 번째 돌판에 새겨진 계명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룹니다. 그리고 두 번째 돌판에 새겨진 계명들은 이웃과의 관계를 다룹니다.
십계명을 비롯하여 율법에 기록된 모든 계명들이 궁극적으로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선하시지만, 사람은 아무도 선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율법이 명하는 모든 계명들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갈3:24 말씀과 같이,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참 뜻입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 관리가 계명들을 지키지 못했음을 스스로 깨닫기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 관리는 자기가 율법이 명하는 계명들을 지키기 때문에, 자기는 선한 일을 하기 때문에, 자기는 선하다고 착각했습니다. 그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이와 같이 잘못된 생각부터 철저하게 사라져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자 청년 관리에게 몇 가지 계명들을 예로 들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분명했습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 관리 스스로가 자기는 죄인이며, 자기는 선하지 않고 악하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부자 청년 관리는 예수님의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율법의 참 뜻을 전혀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가르치시려고, 그에게 한 가지 극단적인 조처를 취하셨습니다. 말하자면 극약을 처방하신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입니다(20~22절).
막10:20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부자 청년 관리는 십계명의 두 번째 돌판에 기록된 계명들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그는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서, 또는 가식적으로 거짓되게 그러한 대답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나름대로는 솔직하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의 문제였습니까? 그의 문제는 율법의 깊고도 참된 뜻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피상적으로만 율법을 대했던 것입니다. 그는 율법이 명하는 계명들을 피상적으로는 지켰을는지 모릅니다. 그 때문에 그는 자기가 선하다고 착각을 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그에게 가시노릇을 하는 이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돈으로 불량배들을 사서, 그의 이웃을 실컷 패주었습니다. 그러면 그의 이웃이 죽지 않았다고 해서, 과연 그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켰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십니다.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시고,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을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율법의 참 뜻을 이와 같이 밝히셨습니다. “마음에 미움을 품으면 살인한 것이며, 마음에 음욕을 품으면 간음한 것이니라.”
렘17:9 말씀과 같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입니다. 늘 깨끗한 마음으로만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부자 청년 관리가 율법의 참 뜻을 깨달았다면,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계명을 다 어겼습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한번 생각해봅니다. 한 때는 바울도 율법을 피상적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빌3:6 말씀처럼, 그는 자신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부했습니다. 그 때 바울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자 청년 관리와 똑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바울이 율법의 참 뜻을 깨달았습니다. 롬7:7 말씀처럼, 그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롬7:10 말씀처럼, 그는 율법을 지키지 못했음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사망에 이르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자 청년 관리도 이것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실상 그는 계명들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죽어야 했습니다. 율법의 역할이 범죄한 자를 죽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여전히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막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부자 청년 관리는 율법의 참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계명을 어겼으면서도, 계명을 다 지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죄인이면서도, 자신을 선한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한 부자 청년 관리를 바라보시면서,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눅19:41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멸망이 가까웠는데도, 예루살렘 성이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때도 예수님은 깨닫지 못하는 그를 바라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단도직입으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왜 예수님은 이처럼 말씀하셨습까? 예수님은 부자 청년 관리가 이웃과 관련된 계명들뿐만 아니러 하나님과 관련된 계명들도 어기고 있음을 깨닫기 바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부자 청년 관리는 어떠했습니까? 그는 다른 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의 신은 재물이었습니다. 재물이 그의 우상이었습니다. 그는 입으로만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불렀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외식일 뿐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우상은 그의 독자 이삭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셨습니다. 부자 청년 관리의 우상은 재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있는 재물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부자 청년 관리에게 한 가지가 부족하다고 말씀하셨을까요? 그에게 부족한 한 가지란 과연 무엇입니까? 그가 바라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 그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한 가지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킵니까?
신6:5을 보면,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하면 다른 신을 섬기지 않을 것이며, 우상을 만들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않을 것이며,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자 청년 관리에게 부족한 것 한 가지는 무엇이었습니까? 한 마디로 그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그의 신이며, 그의 우상인 재물을 제거하고, 모든 것을 다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하셨던 것입니다.
다시금 오늘 본문으로 되돌아옵니다. 오늘 본문 21절 하반부 말씀입니다.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하면.” 다시 말해서 “네게 아직도 부족한 한 가지, 곧 재물의 우상을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만 섬기면”이라는 뜻입니다.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늘에서의 보화”는 무엇을 가리키겠습니까? 바로 부자 청년 관리가 얻기를 바라던 영생입니다. 왜냐하면 영생을 얻으면, 하늘에 있는 모든 보화를 다 소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부자 청년 관리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사실상 지금까지 부자 청년 관리는 재물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재물이 그가 믿는 신이요, 그가 섬기는 우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소유를 다 팔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판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명하셨습니다. 재물이라는 신과 우상을 완전히 제거하라는 뜻입니다. 그런 후에는 더 이상 재물을 따르지 말고, 영생이신 예수님을 따르라고 명하셨습니다.
막10: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부자 청년 관리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갔습니다. 그는 영생이신 예수님이 아니라 정함이 없는 재물을 택했습니다. 그는 현세 때문에 미래를, 잠깐 때문에 영원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는 땅의 것에 집착해서 위의 것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비유입니다.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고, 극히 값진 진주와 같습니다.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그것을 얻어야만 합니다. 세리장 삭개오는 그렇게 했습니다. 바울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 관리는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넓은 길, 멸망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우리에게 있는 우상을 다 제거합시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따라서 좁은 길을 걸어갑시다. 그리해서 우리 모두 영생에 이르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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