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에 이르신 예수님! (막11:1-11)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이르시는 광경을 담고 있습니다. 흔히들 종려주일이라고 부르는 날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이르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주 금요일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예수님은 공생애의 마지막 주간을 맞이하신 것입니다.
막3:6 말씀처럼,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부터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때가 이르기까지, 예수님은 자신이 대적들의 손에 넘겨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 가지 방식으로 그들과의 충돌을 의도적으로 피하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셨습니다. 막3:6~7에 그 예가 나옵니다. 대적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거기를 떠나셨습니다. 그리고는 대적들이 없는 한적한 바다로 물러가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자기의 일을 알리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예컨대 막1:44에서, 막3:12에서, 막5:43에서, 그리고 막8:30에서 예수님은 자기의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일부러 대적들의 저항을 일으킬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눅4:29~30을 보면,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낭떠러지에 끌고 가서 떨어뜨리려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이적으로 그들의 눈을 감기시고, 또한 그들의 손을 얼어붙게 하셨습니다. 비슷한 예가 요7:44에도 나옵니다.
이와 같이 지금까지는 예수님이 대적들과의 불필요한 마찰을 의도적으로 피하셨습니다. 아직은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자신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이제는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막14:1~2 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수님의 대적들은 예수님을 죽이되 명절인 유월절은 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월절에 죽임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유월절 양으로 하나님께 바쳐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열렬하게 환영하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은 대적들의 증오심을 자극시키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목숨을 우리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오르시는 광경을 살펴보면서, 우리 모두 많은 은혜를 받기 바랍니다.
첫째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신 예수님입니다(1~6절).
막11: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예수님은 여리고에서 맹인 거지 바디매오를 고치시고 또한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여리고를 떠나셔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곁에는 열두 제자들을 비롯해서, 바디매오 등 허다한 무리가 함께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가까운 곳에 감람 산이 있었습니다. 감람 산의 기슭에는 벳바게와 베다니라는 두 개의 작은 마을이 위치해 있었습니다. 여리고에서 올라가자면, 먼저 베다니가 나옵니다. 그 뒤에 벳바게를 지나서, 예루살렘에 도달하게 됩니다.
따라서 아마도 이 때 예수님은 베다니에 이르셨을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 중 둘을 보내셨습니다. 눅22:8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두 제자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셔서 유월절을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때에도 예수님은 두 제자를 보내셨습니다.
막11: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막11: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만일 이 때 예수님이 베다니에 계셨다면, 예수님은 두 제자를 벳바게로 보내신 셈이 됩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그들이 맞은편 마을로 가면, 나귀 새끼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 나귀 새끼가 매여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그들에게 아직까지는 아무도 그 나귀 새끼를 타 보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현재의 상황뿐만 아니라, 과거의 상황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 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까지도 다 알고 계셨습니다.
낯선 마을에 가서 나귀 새끼를 임의로 풀어서 끌고 오는 것은 온당치 못하게 보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왜 이렇게 하느냐?”고 물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대답할 말을 미리 가르쳐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일을 낱낱이 다 알고 계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모든 것을 환히 다 아실 수 있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도 다 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형편에 처해 있으며, 우리가 어떤 문제에 매여 있는지를 다 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모든 문제에서 우리를 풀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리를 귀하게 쓰실 것입니다.
막11: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막11: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막11: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두 제자는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고, 맞은편 마을로 갔습니다. 과연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 곳에는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지시하신 대로, 그들은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풀었습니다.
그러자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눅19:33 말씀과 같이, 그 나귀 새끼의 임자들, 곧 그것의 주인과 그의 가족들이 그들에게 물었던 것입니다.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을 하려느냐?” 모든 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였습니다.
그래서 두 제자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주가 쓰시겠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대화는 이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더 이상의 질문도, 더 이상의 대답도 필요 없었습니다. 나귀 새끼의 임자들은 두 제자가 자기들의 나귀 새끼를 끌고 가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분명 나귀 새끼의 임자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벳바게나 베다니나 둘 다 작은 시골 동네로서, 서로 마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서로의 일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막14:3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베다니의 나병환자 시몬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베다니의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을 때, 그를 살려주셨습니다. 그러니 베다니의 바로 맞은편 마을 벳바게 사람들도 예수님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때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와서 자기들의 나귀 새끼를 예수님이 쓰시겠다고 말했습니다. 나귀 새끼의 주인들은 그 일을 무한한 영광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들의 나귀 새끼를 기꺼이 내놓았던 것입니다.
“주가 쓰시겠다.” 이 말씀에 감격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나귀 새끼를 내놓았습니다. 어떤 이는 자기의 다락방을 내드렸습니다. 어떤 이는 자기의 새 무덤을 내드렸습니다. 또한 어떤 이는 자기의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내어드리겠습니까?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리네. 사랑하고 의지하며 주만 따라 살리라. 주께 드리네 주께 드리네. 사랑하는 구주 앞에 모두 드리네.” 찬송가 50장 1절의 가사에 나오는 신앙적인 고백과 결단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입니다(7~10절).
막11: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두 제자는 나귀 새끼를 예수님에게 끌고 왔습니다.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였기에, 그 위에 안장이 얹혀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 제자는 예수님이 타시기에 편하도록,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았습니다.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먼 길을, 그것도 계속되는 오르막길을 걸어오셔서, 피곤을 느끼셨기 때문입니까? 아니었습니다. 이는 마21:4과 요12:15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선지자 스가랴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선지자 스가랴는 예수님보다 오백 년 앞선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슥9:9에서 왕이신 메시야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가실 것과, 그 때 사람들이 그를 열렬하게 맞이할 것을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왕들처럼, 멋있는 백마를 타지 아니하셨습니다. 검을 차지도 아니하셨고, 군대를 이끌지도 아니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로마와 싸우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슥12:10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찔림을 받으시며 죽임을 당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겸손하게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그러나 계19:11 말씀과 같이,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는 백마를 타고 오실 것입니다.
막11: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유월절을 맞이하여,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요12:9 말씀과 같이,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님이 계신 베다니로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도 보고, 또한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폈습니다. 왕하9:13 말씀처럼, 이는 오래 된 관습의 하나로 일종의 상징적인 행위였습니다. “나를 밟고 지나가소서. 나는 왕에게 복종하겠나이다.” 이런 뜻으로 왕이 지나갈 때, 백성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폈습니다.
그런데 이 때 큰 무리가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요12:12~13 말씀과 같이, 이미 예루살렘에 당도한 큰 무리가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예수님을 맞이하러 나왔습니다. 그래서 종려주일이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계7:9~10 말씀과 같이, 종려나무 가지는 구원의 기쁨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맞이하러 나온 사람들은 예수님이 베푸실 구원의 기쁨을 생각하면서, 자기들이 가지고 온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폈습니다.
막1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막11: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앞에서 가는 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맞이하러 나온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뒤에서 따르는 자들은 베다니에서부터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그들은 다같이 하나 되어 소리를 질렀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이는 시118:25~26 말씀을 자유롭게 인용한 것입니다. 호산나는 히브리어로 기록된 시118:25에 나오는 말씀 “이제 구원하소서”를 헬라어로 음역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는 구원을 간구하는 말씀입니다.
곧이어 그들은 예수님을 찬송하면서,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라고 불렀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일종의 메시야적 칭호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 곧 그리스도로 믿고서, 예수님을 찬송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14장을 보면,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사하려고 했습니다. 그 때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의 옷을 찢으면서, 황급히 그들의 행위를 말렸습니다. 사람은 결코 경배를 받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 경배를 받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찬송하며 경배하는 것을 전혀 금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찬송을 그대로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세토록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에서 그들의 찬송은 이와 같이 이어집니다.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 곧 다윗의 자손으로 믿었기에, 예수님이 자기들의 조상 다윗의 나라를 영광스럽게 회복시켜 주시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들의 외침은 이와 같이 끝맺음을 합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가장 높은 곳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가장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이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호산나”하면서, 자기들을 구원해달라고 외쳤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 곧 그리스도로 믿었습니다. 옳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것도 옳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을 구원해주실 줄로 믿었습니다. 이 또한 옳았습니다.
그런데 불과 며칠도 안 되어, 그들은 전혀 다르게 소리 질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니이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왜 그들이 갑작스럽게 달라졌습니까? 왜 그들이 백팔십 도로 달라졌습니까? 예수님이 그들의 바람을 들어주지 아니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시지 않자, 그들은 예수님에게 완전히 등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때는 유월절이었습니다. 유월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였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이제 예수님이 자신들을 로마에서 구원하셔서, 다윗의 나라를 회복해주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것은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양이 되셔서, 자기 목숨을 그들의 대속물로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결국 그들의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자,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예수님이 바라시는 것은 영혼의 구원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오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세속적이고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자, 그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영혼의 구원이 먼저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우선입니다. 그러면 다윗의 나라는 문제가 아닙니다. 영원토록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얻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원하는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이 바라시고 기뻐하시는 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예루살렘에 이르신 예수님입니다(11절).
막11: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이제 드디어 예수님은 최종 목적지인 예루살렘에 이르셨습니다. 마21:10 말씀과 같이, 그 때 예루살렘 온 성이 소동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환호하던 사람들이 지르는 함성소리가 온 천지를 진동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 길로 로마를 무찌르시고, 그들의 조상 다윗의 나라를 회복시켜 주시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잠잠히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둘러 보셨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신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는 성전 안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곳에서 매매하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을 보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의분을 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기 위하여, 그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셨습니다. 그로부터 삼년 뒤, 예수님은 유월절을 맞아 다시금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곳의 상황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막11:15 말씀을 보면, 그 다음날 예수님은 또다시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과 같이, 그 날은 때가 이미 저물었습니다. 아마도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도 그 날의 장사를 끝내고, 나갈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는 일을 다음날로 미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예루살렘 밖으로 나오셨습니다. 그리고는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가 사는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그 곳에서 그 날밤을 보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을 환호하던 사람들은 이미 다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로부터 불과 며칠 후, 그들은 성난 군중으로 돌변해 있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더 이상 “호산나 찬송하리로다”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쳤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로마를 무찌르시고 자기들을 로마의 속박에서 구원해주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공격하신 대상은 로마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성전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기대했던 바는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말았습니다.
막11:18 말씀처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증오도 극도에 달했습니다. 이는 막10:33에서 예수님이 이미 말씀하신 대로였습니다. 급기야 그들은 예수님을 빌라도 앞에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무리를 충동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르게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 이상 긴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행여 우리도 기복신앙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습니까? 기복신앙이라 함은 복을 받기 위하여 믿는 것을 가리킵니다. 기복신앙은 매우 위험합니다. 기대에 어긋나면, 쉽게 믿음을 저버리기 때문입니다.
참 믿음을 가지기 바랍니다. 참 믿음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합니다. 참 믿음은 살든지 죽든지 언제나 예수님을 존귀하게 합니다. 참 믿음은 육체의 욕심을 거부하고 전적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참 믿음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참 믿음은 하나님이 그 뜻대로 하시기를 바랍니다. 참 믿음의 성도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고, 성령님을 기쁘게 해드리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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