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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바디매오를 구원하신 예수님! (막 10:46-52)

바디매오를 구원하신 예수님! (막 10:46-52)

 

 

오늘 본문은 마가복음 10장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가 가까워지자,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집중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따라서 마가복음 9장과 10장을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꼬리를 물면서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신 후에, 제자들에게 믿음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이 누가 크냐 하며 서로 다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겸손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이 편협하고도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관용을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들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이혼에 대해서 묻자, 예수님은 창조의 원리를 들어서 바리새인들과 또한 제자들에게 결혼과 이혼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들어서, 제자들에게 구원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부자 청년 관리를 들어서, 그들에게 영생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구원을 얻는 것, 곧 영생을 얻는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가르치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예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당하실 일을 제자들에게 자세하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런 후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기를 바라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영광의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열 제자가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서 화를 내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섬김을 가르치셨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그들에게 섬김을 몸소 보이신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맹인 거지 바디매오를 고치시고 구원하심으로, 그들에게 섬김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인 52절에서, 예수님은 바디매오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앞을 보지 못하는 바디매오의 눈을 고쳐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바디매오가 구원을 받은 것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았습니다. 믿음이 없어도 병 고침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구원받지를 못합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처음에 이어 다시 한번 제자들에게 믿음의 중요성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어야 예수님은 기뻐하십니다. 바디매오가 그의 믿음을 예수님에게 보여드렸듯이, 우리도 우리의 믿음을 예수님에게 보여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여리고에 이르신 예수님입니다(46절).


막10: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그 동안 예수님은 요단 강 동편, 곧 베레아에 계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오르시기 위하여, 그의 제자들과 함께 요단 강을 건너셨습니다. 그리고는 요단 강 서편에 있는 첫 마을 여리고에 이르셨습니다.

여리고는 요단 강에서 가까워, 곳곳에서 샘물이 솟아났습니다. 따라서 그 곳에는 물이 넉넉했습니다. 또한 여리고는 해발이 -250m이기에, 겨울철에도 따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예로부터 여리고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목이었습니다. 여리고와 예루살렘은 하룻길도 채 안 되는 거리였습니다. 로마는 예루살렘의 길목인 여리고에 세관을 설치했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삭개오가 바로 그 곳에서 일하던 세리장이었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이 여리고에 이르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 곁에는 제자들과 함께 허다한 무리가 따르고 있었습니다. 유월절을 맞아,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난 삼 년 간의 사역으로, 예수님의 소문이 널리 퍼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였습니다. 그런데 눅18:35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이와 같은 차이가 생겼을까요? 그 당시의 여리고는 옛 여리고와 새 여리고로 나누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옛 여리고를 지나셔서 새 여리고로 가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본문은 옛 여리고와 새 여리고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옛 여리고에서 나가셔서, 새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입니다.

그 때 마20:30을 보면,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눅18:35을 보면, 그 두 맹인 가운데 한 사람에게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막10:46은 그의 이름이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아람어를 사용했습니다. 아람어로 “바”는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컨대 바요나는 요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바돌로매는 돌로매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바디매오는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또한 많은 장애자들도 고치셨습니다. 그 가운데서 고침을 받은 사람의 이름이 밝혀지는 경우는 바디매오가 유일합니다. 왜 그럴까요? 나중에 바디매오는 성도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하튼 오늘 본문에 기록된 바와 같이, 본시 바디매오는 맹인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가 자라나면서 질병을 앓았든지, 또는 뒤에 사고를 당해서 실명했을 수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예루살렘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맹인을 보면서,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이와 같이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제자들의 질문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그 당시에는 사람이 맹인 된 것은 죄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맹인이 된 것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결과라고 여겼습니다. 그러기에 맹인들은 사회로부터 배척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연히 그 때의 맹인들은 구걸을 통해서만 연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바디매오를 가리켜 맹인 거지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요9:8을 보면, 예루살렘의 맹인도 역시 길에 앉아서 구걸하며 살아가던 걸인이었습니다.

다시금 오늘 본문을 보면,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고 말씀합니다. 이유는 뻔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때 유월절을 맞이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맹인 거지 바디매오는 길 가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동정을 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자기의 무릎이나 길바닥에 펼쳐놓았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그 위에 한 푼씩 던져주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이렇듯 바디매오는 맹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의 그릇된 편견에 따라서, 그는 사람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는 뭇사람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길 가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는 거지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디매오를 외면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바디매오가 소리를 지르자, 예수님은 머물러 서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불러서 그를 고치시며,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죄인의 친구가 되셔서, 기꺼이 죄인을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를 결코 외면하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시며,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기꺼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돌보아주십니다.


둘째로, 소리 지르는 바디매오입니다(47~48절).


막10: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눅18:36 말씀과 같이, 바디매오는 무리가 지나감을 들었습니다. 그는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또는 자기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무슨 일이냐?” 그러자 눅18:37에서 그들은 이와 같이 일러주었습니다.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분명 바디매오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병자와 수많은 장애자를 고치셨습니다. 마가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벳새다의 맹인을 고치셨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맹인도 고치셨습니다.

따라서 바디매오는 자기도 고침을 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향하여 소리 질렀습니다. 허다한 무리 때문에, 자기가 작은 소리로 말해서는 예수님이 들으실 수 없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있는 힘을 다해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사람들은 바디매오에게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고 일러주었습니다. 사실 나사렛 예수라는 칭호는 그다지 특별하지는 않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나 아리마대 요셉처럼, 그 사람의 출신 지명과 인명을 합친 칭호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이 때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삼하7:12~13 말씀과 같이, 본시 다윗의 자손은 메시야 곧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칭호였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자손을 세우셔서, 그의 나라와 그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다윗의 자손은 솔로몬이 될 수가 없습니다. 솔로몬의 나라와 솔로몬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때 하나님이 말씀하신 다윗의 자손은 메시야 곧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자손은 일종의 메시야적 칭호였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였습니다. 마21:9을 보면,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메시야를 다윗의 자손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마21:15을 보면, 어린이들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임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22:41~42을 보면, 바리새인들도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임을 밝혔습니다.

이와 같이 그 당시 사람들은 모두 다윗의 자손이 메시야 곧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칭호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바디매오는 이 때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름으로, 자기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는 사실을 고백한 것입니다. 

눈이 성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눈이 먼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바로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차이입니다.  

바디매오의 믿음은 계속됩니다. 그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뒤에, 예수님을 향하여 이와 같이 외쳤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는 예수님에게 긍휼을 구했습니다. 이 또한 그가 보여준 믿음의 태도였습니다.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를 의롭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눅18:13 말씀처럼, 세리는 하나님께 자기를 불쌍히 여겨주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죄인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 때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였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자기를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바랐습니다. 이로써 그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에게 고백한 것입니다. 바디매오의 믿음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막10: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바디매오가 소리를 지르자, 많은 사람이 그를 꾸짖었습니다. 그러면서 그에게 잠잠하라고 말했습니다. 꾸짖다라는 동사가 미완료형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계속해서 그를 꾸짖은 것입니다. 그만큼 바디매오는 쉬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는 뜻입니다.

바디매오는 맹인이며 거지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멸시했습니다. 그들은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성가시게 한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가 소리를 지를 때마다, 그를 꾸짖으며 조용히 하라고 구박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잠잠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가 잠잠했더라면, 그는 일생토록 맹인 거지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역시 미완료형입니다. 그는 온 힘을 다하여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던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는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 곧 메시야이심을 믿었습니다. 또한 그는 긍휼이 풍성하신 예수님이 자기를 불쌍히 여겨주실 것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신앙 고백적인 외침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믿음을 꺾으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방해하려고 듭니다. 마귀는 우리가 예수님에게 나아가는 것을 막으려고 합니다. 그럴지라도 바디매오가 보여준 것 같이,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은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시50:15 말씀처럼, 환난 날에 예수님을 부릅시다. 예수님이 우리를 건지실 것입니다. 시81:10 말씀과 같이, 우리 입을 크게 엽시다. 예수님이 채우실 것입니다. 또한 렘33:3 말씀과 같이, 예수님에게 부르짖읍시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셋째로, 머물러 서신 예수님입니다(49~52절).


막10: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바디매오가 외치는 소리를 들으시고, 예수님은 가시던 길에서 머물러 서셨습니다. 여기서 “머물러 서다”라는 동사가 분사형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서두르지 아니하시고, 충분한 시간을 그 곳에 머물러 서셨다는 뜻입니다.

막10:32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시고 앞장서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간구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긍휼이 풍성하셔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그를 부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눅18:40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그들에게 바디매오를 예수님에게 데려오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급히 바디매오에게로 가까이 다가갔을 것입니다.

그들은 바디매오를 부르면서,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많은 사람이 바디매오를 멸시하며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따뜻한 말로 그를 격려했습니다. 우리도 남을 무시하지 말고, 늘 위로하는 말로 세워주기를 바랍니다.


막10: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님이 부르실 때, 바디매오는 겉옷을 내버렸습니다. 낮에는 의복으로, 밤에는 침구로 사용되는 겉옷이었습니다. 또한 무릎이나 길바닥에 펴놓고, 동냥을 하는데 필요한 겉옷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해서, 바디매오는 겉옷을 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바디매오는 앉은자리에서 즉시 뛰어 일어났습니다.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즉각적으로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것입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이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실 때,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른 것과 같았습니다.  

이제 바디매오는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아마도 그를 데리러 간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그는 뛰듯이 예수님께 나아왔을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이 죄인인 자기를 불러주셨다는 사실에 너무도 감격했을 것입니다. 

그 날 예수님 곁에는 허다한 무리가 있었습니다. 저마다 소원하는 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의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단지 예수님에게 자신의 믿음을 적극적으로 보여주었던 바디매오만 예수님을 일대 일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막10: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바디매오는 맹인이며 거지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죄인으로 취급해서, 그를 멸시하며 되도록 멀리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가까이 부르셨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이와 같이 물으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상점이나 식당에 가면, 종업원이 손님에게 공손한 자세로 물어봅니다. “무엇을 원하세요?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마찬가지로 다윗의 자손이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맹인 거지이며 죄인인 바디매오에게 섬김의 자세로 그와 같이 물어보신 것입니다.

막10:36에서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들은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기를 구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높은 자리에 앉아서 남들의 섬김을 받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섬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오신 것도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심임을 밝히셨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예수님은 바디매오 앞에서 섬김의 태도를 취하시며, 제자들에게 실제로 섬김을 보이신 것입니다. 

곧이어 바디매오의 간청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다정하게 물으시는 말씀을 듣고서, 바디매오는 큰 용기를 얻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디매오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와 같이 예수님에게 아뢰었습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 때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요20:16 말씀과 같이, 히브리 말로 랍오니입니다. 랍비와는 달리 랍오니는 하나님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하는 단어였습니다. 그러니까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자기의 눈을 고치실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자기를 불쌍히 여기실 것도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야고보와 요한과는 달리, 바디매오가 원하는 바는 높은 자리에 앉아 남들의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면서, 오직 예수님의 긍휼을 구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믿음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예수님에게 아뢰었습니다.


막10: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믿음에 응답하셨습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님은 바디매오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의 눈을 고쳐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 모두가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렇듯 믿음이 없어도 얼마든지 병 고침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바디매오의 눈을 고치시고, 또한 그를 구원하신 증거가 나옵니다. 먼저 바디매오는 곧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기에, 이 때 바디매오의 눈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바디매오는 그 즉시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길에서 따랐습니다. 본시 그는 길 가에 앉아서 구걸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금 그 자리로 되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 때로부터 그는 예수님을 길에서 따랐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 뒤 어쩌면 그는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모인 백이십 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된 것은 그만큼 그가 초대 교회 성도들 사이에 잘 알려진 인물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 이상 긴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우리도 전에는 영적으로 눈먼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이 우리 곁을 지나가셨습니다. 그 때 성령님의 감동하심으로, 우리도 소리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은 우리의 소리를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머물러 서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시며,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 결과 오늘도 우리는 이 자리에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길 가에 주저앉아 있지 맙시다. 겉옷을 내버립시다. 뛰어 일어납시다. 예수님에게 달려갑시다. 그리고는 날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을 본받으며, 영원한 천국까지 예수님을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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