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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섬김을 가르치신 예수님! (막 10:41~45)

섬김을 가르치신 예수님! (막 10:41~45)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가 가까웠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데리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러자 눅19:11 말씀과 같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만 생각했습니다. 

마19:28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들도 자연히 열두 보좌에 앉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제자들은 자신들이 얻을 영광을 잔뜩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본래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회적으로 비천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시골 출신이었습니다. 많이 배우지도 못했습니다. 직업도 하찮았습니다. 그들은 여태껏 낮은 자리에서 늘 다른 사람들을 섬기면서 살아왔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곧 그들은 높은 보좌에 앉아서, 남들을 다스리며 살게 될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얼마나 꿈에 부풀었겠습니까? 그러한 환상에 사로잡혀서,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당하실 일은 별로 안중에 없었습니다.   

그러더니 그들은 서로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크냐?” “누가 첫째냐?” “누가 으뜸이냐?” 그들은 저마다 높은 자리에 앉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급기야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어머니까지 모시고 와서,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기를 구했습니다.

눅22:24 말씀과 같이, 그들의 다툼은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유월절 만찬을 앞두고, 아무도 예수님의 발을 씻어 주지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오히려 예수님이 그들을 섬기셨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에게 나아와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기를 구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영광에 이르는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영광의 길은 고난을 통해서 영광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후에 되어진 일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다른 제자들이 화를 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섬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자신이 오신 것도 섬기기 위함임을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며 예수님이 본을 보이신 대로, 늘 우리 자신을 낮추며 섬기는 일에 힘씁시다. 그래야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시며, 우리를 더 귀하게 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세상 나라의 방식입니다(41~42절).


요18:36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엄연히 다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먼저 예수님은 세상 나라의 방식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막10: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열 제자가 듣고.” 그 때 열 제자도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 곁에 있으면서,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에게 간청하는 말을 다 듣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이 그 두 사람에게 영광의 길을 가르치시는 것도 다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끝나자, 나머지 열 제자가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었습니다. 그들이 화를 낸 까닭은 무엇이었습니까?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에게 무례한 요구를 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까?

겉으로는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도, 자기들 중에서 누가 크냐 하며 다투었습니다. 그러니까 열 제자의 마음에도 크고자 하는 심리가 똑같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야고보와 요한이 했던 것처럼, 열 제자는 예수님에게 적극적이며 노골적인 간청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고 싶어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계속해서 누가 크냐 하면서 서로 다투었던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막9:50에서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짐승은 죽여서 제물로 드렸습니다. 곡식과 같은 소제물에는 소금을 쳤습니다. 그러니까 서로 화목하기 위해서는, 소금을 치듯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했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그들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높이며, 제각기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었습니다. 아직도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막10: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셨습니다. 그들의 잘못을 고쳐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야단 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내하시면서, 그들이 잘 알아듣기 쉽게 또다시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참으로 온유하신 예수님입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이방인의 집권자들과 그들의 고관들이 행동하는 방식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집권자라 함은 권세를 잡은 자입니다. 그러니까 로마의 황제 가이사나 로마의 총독 빌라도가 이방인의 집권자들입니다. 또한 분봉 왕 헤롯도 이방인의 집권자에 해당했습니다. 헤롯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두매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은 그들을 임의로 주관합니다. 여기서의 그들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다스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집권자들의 신하나 백성들을 일컫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은 그들 위에 군림하면서, 마음대로 그들에게 권력을 휘두릅니다.

예컨대 분봉 왕 헤롯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의 생일 잔치 때,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기의 권세를 과시하려고, 뭇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결국 헤로디아의 딸이 요구하는 대로, 분봉 왕 헤롯은 세례 요한의 머리를 그에게 내주었습니다. 이렇듯 이방인의 집권자는 임의대로 권세를 휘두릅니다. 그렇게 해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높아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에 이어서 그 고관들이 나옵니다. 고관들이라 함은 높은 관직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도 역시 아랫사람들에게 권세를 부립니다. 그래야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바사 나라의 고관 하만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유다인인 모르드개가 자기에게 무릎을 꿇지도 않고 절하지도 아니함을 보고서 매우 노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르드개를 나무에 매달고, 더 나아가 유다인들 전부를 멸하려는 음모를 세웠습니다.

그러다가 하만은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준비했던 나무에 오히려 자신이 매달리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이방인의 집권자들과 또한 그들의 고관들은 허세를 부리면서 헛된 영광을 구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나라의 방식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이방인의 집권자가 아니십니다. 또한 제자들도 그의 고관들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따라야 할 것은 세상 나라의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따라야 할 것은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며, 하나님 나라의 원리였습니다. 


둘째로,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43~44절).


막10: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막10: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방인의 집권자들처럼 남들을 임의로 주관하거나, 그 고관들처럼 남들에게 권세를 부리면 안 됩니다. 세상 나라의 방식과 하나님의 나라는 방식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유적으로 말씀드리면, 세상 나라의 방식은 피라미드형입니다. 위에 있는 사람이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임의로 주관하며, 그들에게 권세를 부립니다. 그러다 보니까 세상 사람들은 남들을 짓밟고서라도,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 기를 씁니다. 

이와는 달리 하나님 나라의 방식은 역 피라미드형입니다. 아래에서 남들을 섬기는 사람이 큰 자입니다. 또한 가장 낮은 자리에서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사람이 으뜸가는 자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기를 힘씁니다.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십니다. 43절 하반부의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이는 마23:12 말씀과 같이,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진다는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44절에서 예수님은 같은 내용의 말씀을 한번 더 반복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그러니까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진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신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끝 부분을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번역했습니다. 마치 으뜸이 되기 위해서는 종이 되어야 한다는 뜻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원문에는 단순한 미래형이 사용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으뜸이 되려고 자기를 높이면, 종처럼 낮아진다는 뜻입니다.

약4:10 말씀입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자기를 낮추면, 높아집니다. 하나님이 높여주시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자기를 높이면, 낮아집니다. 하나님이 낮추어버리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원리는 간단합니다. 자기를 높이면, 낮아집니다. 자기를 낮추면, 높아집니다. 하나님이 그와 같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언제나 자기를 낮추는 자가 크고도 귀하게 쓰임을 받습니다.

예컨대 창18:27에서 아브라함은 자기를 티끌이나 재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은 순순히 자신을 번제로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습니다. 창32:10에서 야곱은 하나님이 그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창세기 50장에서 요셉은 형들에게 복수하지 않고, 오히려 울면서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했습니다. 출3:11에서 모세는 자신이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수7:6에서 여호수아는 옷을 찢고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썼습니다. 삿6:15에서 기드온은 자신을 가리켜 극히 약하고 가장 작은 자라고 말했습니다. 대상29:16에서 다윗은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서 준비한 모든 것이 다 주의 손에서 왔다고 고백했습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사람들은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을 낮추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그들을 높이시며, 그들을 크고도 귀하게 쓰셨습니다. 그 결과 그들 모두가 믿음장인 히브리서 11장에 신앙의 위인들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신약시대도 동일합니다. 요1:27에서 세례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눅5:8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했습니다. 행20:19에서 바울은 자기가 모든 겸손으로 주를 섬겼다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임을 받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가 크고도 귀하게 쓰임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겸손한 자를 기뻐하시며, 하나님이 자기를 낮추는 자에게 더 많은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더 큰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일부러 우리를 더 낮추실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허락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마가나 데마가 바울을 떠나게 하심으로, 바울로 하여금 전적으로 하나님만 바라보게 만드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여 우리는 아직까지 세상 방식에 따라 살지는 않습니까? 남을 흉보고 헐뜯어야 내가 높임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그런 것은 세상 사람들이나 하는 유치한 짓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낮추어버리십니다.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방식을 따라, 종처럼 낮은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힘씁시다. 그래야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십니다. 그래야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많은 은혜를 베푸시며, 우리를 더 귀하게 더 크게 사용하십니다.  


셋째로, 섬김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입니다(45절).


요일2:6 말씀처럼, 예수님 안에서 산다고 하는 자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섬김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섬김 자체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삶도 역시 섬김의 삶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막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때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서 인자라고 부르셨습니다. 문자적으로 “인자”(人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키실 때, 인자라는 칭호를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만 인자라는 단어가 팔십 번 이상이나 등장합니다. 

단7:13~14 말씀과 같이, 본시 “인자”는 메시야적 칭호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야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메시야는 히브리어이고, 그리스도는 헬라어입니다. 둘 다 똑같은 뜻입니다. 그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에서는 왕을 세울 때, 그 몸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으시고, 왕으로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실 뿐만 아니라, 만왕의 왕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만백성의 섬김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방인의 집권자들처럼 그들을 임으로 주관하지도 아니하시고,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지도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요18:33에서 로마의 총독 빌라도는 이와 같이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빌라도의 눈에는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처럼 보이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비아냥거리는 듯이 그런 질문을 예수님에게 던졌습니다.

빌라도가 그런 말을 한 까닭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을 넘긴 자들이 바로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고발만 했지, 아무도 예수님을 옹호하려 들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니 어찌 예수님이 그들의 왕이 될 수 있는가 라는 뜻이었습니다.

빌라도가 생각하기로는, 왕이라면 당연히 섬김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요18:36 말씀처럼,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세상 나라의 방식대로 섬김을 받지 아니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방식대로 섬김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컨대 예수님은 말씀으로 섬기셨습니다. 기도로 섬기셨습니다. 병을 고쳐주심으로 섬기셨습니다. 굶주린 자들을 배불리 먹여주심으로 섬기셨습니다. 또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으로 섬기셨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섬김의 극치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45절 하반부 말씀입니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라.”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최고의 섬김이며, 최대의 섬김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어떤 강요에 의해서 자기 목숨을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10:11 말씀과 같이,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들을 위하여 기꺼이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신 것입니다. 

요15:13에서 예수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예수님은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리함으로 예수님은 가장 큰 사랑으로 우리를 섬기신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주심으로 우리에게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벧전2:21 말씀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은 그보다 훨씬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남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희생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은 그들의 죽음과는 명백하게 다릅니다. 벧전2:24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에게 섬김의 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대속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그를 믿고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대속물이 되셨습니다. 

원래 대속물은 노예나 전쟁의 포로를 석방시키기 위하여 지불하는 몸값을 의미했습니다. 노예나 전쟁의 포로가 그 돈을 지불할 능력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대신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 때 지불하는 몸값을 대속물이라고 불렀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본시 우리는 죄의 종이었습니다. 사탄의 노예였습니다. 사망의 포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가련한 우리의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그리함으로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사탄과 사망으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에게 자기 목숨을 우리의 대속물로 주셨습니까? 고전5:7 말씀처럼, 예수님은 유월절 양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롬8:1~2 말씀처럼,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 이상 긴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빌2:8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까지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지극히 낮추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빌2:9~10 말씀처럼, 하나님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님의 이름에 꿇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종으로 섬기는 자가 큰 자요 으뜸 된 자임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이렇듯 현재의 섬김은 장래의 영광과 정비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본을 보이신 대로, 우리도 늘 겸손한 마음으로 모든 이들을 섬기면서 삽시다. 그리해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받아, 더 크고 더 귀하게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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