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에 대해 답하신 예수님! (막 11:27~33)
오늘 본문에서 자주 사용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권위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말에 두 번 나타나며, 또한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도 두 번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주제가 되는 단어가 바로 권위입니다.
우리도 권위라는 말을 흔하게 사용합니다. 예컨대 가정에서는 부모의 권위,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권위, 또한 직장에서는 상사의 권위를 말합니다. 이렇듯 사람마다 나름대로의 권위를 가지기도 하며, 또한 이런저런 권위 아래 놓이기도 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권위는 우리와는 다릅니다. 마28:18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헬라어로는 권세나 권위가 똑같은 단어입니다. 말하자면 우리와는 달리 예수님의 권위는 절대적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봅니다. 막1:22 말씀과 같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권위 있는 자와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처럼 남들의 권위를 빌어서 가르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의 권위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막2:10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있으십니다. 또한 마10:1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을 내쫓으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는 권능도 있으십니다. 물론 권세와 권능은 헬라어로 권위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또한 요1:12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자기를 믿는 자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는 권세 곧 우리를 구원하시는 권위도 가지고 계십니다. 반면에 요5:27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자기를 믿지 않는 자를 심판하시는 권한 곧 권위도 있으십니다.
아울러 요10:18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심을 밝히셨습니다. 또한 요17:2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만민을 다스리시는 권세도 있으십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권위는 모든 면에서 절대적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려 들지를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권위를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더 많이 알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더 깊이 배우고, 예수님을 더욱 더 본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박해를 받으셨습니다(27~28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예수님의 권위는 절대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권위에 도전하며, 예수님을 박해했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도 우리의 권위에 도전하며,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막11:27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거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고난주간의 첫째 날,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둘째 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심판하셨습니다. 이제 셋째 날, 예수님은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처럼 예루살렘에서 나가셨다가, 다시금 예루살렘에 들어오시곤 하셨습니까? 유월절을 맞이하여, 세계 각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성 안에서 거처를 마련할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밤에는 성 밖으로 나갔다가, 낮이면 다시 성 안으로 들어오곤 했습니다. 예수님도 날이 저물면,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그 곳에는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와 그의 두 누이가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밤이 되면, 예수님은 베다니로 가셔서 그 곳에서 유숙하셨습니다. 그리고 낮이 되면, 예수님은 다시금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니까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예수님은 이번에 세 번째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성전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는 성전에서 거니셨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거니신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전날 자신이 심판하셨던 성전의 광경을 다시금 확인해보시기 위해서였습니까?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마21:23을 보면,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시자, 분명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몰려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성전에서 거니시면서, 그들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행1:3 말씀처럼,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셨을 것입니다. 또한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눅20:1을 보면, 예수님은 그들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믿음으로 들어간다는 복음을 전하신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관심은 사람들이 안고 있는 정치적이며, 경제적이며, 사회적인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관심은 오로지 그들의 영적인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를 바라셨습니다.
그 전날 이미 예수님은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린 예루살렘 성전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예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그들에게 베푸신 자비와 긍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예수님에게 나아온 자들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유대인들의 최고 의결 기관인 산헤드린을 구성하고 있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산헤드린을 공회라고 번역합니다.
유대인들의 최고 의결 기관인 산헤드린 곧 공회는 의원 수가 70명입니다. 여기에 의장을 포함시키면 모두 71명이 됩니다. 대제사장들은 주로 사두개파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서기관들은 주로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기타 사두개파나 바리새파에 속하지 않으면서 공회 의원이 된 사람들을 가리켜 장로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무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로 구성된 산헤드린 곧 공회는 유대인들의 최고 의결 기관으로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을 내린 곳이었습니다.
이제 산헤드린이 보낸 공회 의원들이 예수님에게 가까이 나아왔습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받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대적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막11:28 이르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
그들은 당장 예수님을 죽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눅19:48 말씀과 같이, 백성이 다 예수님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그들은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백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예수님에게 짐짓 두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첫째 질문입니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그들은 성전을 관할하는 권위가 자기들에게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전날 예수님은 임의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또한 그 날도 예수님은 성전에서 거니시며, 그들의 허락도 없이 백성들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이의를 걸었습니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다시 말해서 예수님에게는 그런 일을 할 권위가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둘째 질문입니다.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 무슨 뜻입니까? “성전을 관할하는 것은 우리의 권위이다. 그런데 우리 중 아무도 너에게 이런 일 할 권위를 준 적이 없다. 그러니 너는 지금 불법을 행하고 있다.” 이런 뜻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기대하는 대답이 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권위로 이런 일을 하노라.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셨노라.”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며, 언제나 자신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른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며, 신성 모독 하는 말을 한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막14:64 말씀과 같이, 유대인들에게 신성 모독 하는 말을 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는 자로 정죄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바라는 의도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에게서 시달림을 받고 계십니까?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신 예수님에게도 대적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도 박해가 있었습니다. 사람들 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낙심하지 맙시다. 그럴수록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을 생각하기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박해를 이기셨습니다(29~32절).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예수님이 박해를 이기셨기에, 우리도 얼마든지 박해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박해를 당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합시다. 그러면 예수님이 어떻게 박해를 이기셨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막11: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답하시기 위하여 입을 여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들의 의도를 환히 알고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와 같이 대답하기를 바랐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권위로 이런 일을 하노라.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셨노라.” 그러면 그들은 예수님이 신성 모독 하는 말을 했다고 주장하면서,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하는 자로 정죄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말하자면 예수님은 그들의 악한 의도가 밖으로 드러나도록, 그들에게 하나의 맞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막11:30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내게 대답하라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물론 이 때의 요한은 세례 요한을 가리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앞서 와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모든 사람들에게 증언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세례 요한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어,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의 세례라 함은 예수님을 증언한 요한의 사역 전체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간단했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예수님의 질문은 이러한 의도였습니다. “요한이 나에 대해 증언한 사역이 신적이냐 아니면 인적이냐?”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쐐기를 박듯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대답하라.”
눅7:30 말씀과 같이,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왔음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대답은 뻔한 것이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사람으로부터다.” 그러나 그들이 선뜻 그렇게 대답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막11:31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막11:32 그러면 사람으로부터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하는지라
그들은 서로 의논했습니다. 이 때 사용된 동사의 시제가 미완료형입니다. 동작이 완료되지 않고 계속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그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한 동안 심도 있게 의논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대답하기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라고 말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그렇게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라고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반대로 그들의 대답이 사람으로부터라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깁니다. 따라서 그들은 신성 모독 하는 말을 하는 셈이 되고 맙니다. 그 결과 눅20:6 말씀과 같이, 사람들은 그들을 돌로 칠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섣불리 그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백성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이렇게 대답할 수도 없고, 저렇게 대답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의 질문을 던지심으로,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며 대적하는 자들의 박해를 이기셨습니다. 롬11:33 말씀처럼, 예수님의 지혜와 지식은 깊고도 풍성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계교는 예수님의 지혜 앞에서 무용지물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박해를 받고 계십니까? 약1:5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합시다. 그리하면 마10:19~20 말씀처럼, 성령님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며 우리에게 할 말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모든 박해를 능히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믿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셨습니다(33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이 가지신 권위는 절대적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권위로 자기를 믿는 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구원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권위로 자기를 믿지 않는 자들은 모두 다 정죄하시며 심판하십니다.
막11:33 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산헤드린 곧 공회는 유대인들의 최고 의결 기관이었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아니면 사람으로부터냐? 이러한 질문이 그들에게 제기되었으면, 그들은 당연히 그 질문에 대한 결론을 내려주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임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내심 그들은 요한의 세례가 사람으로부터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백성들이 자기들을 돌로 칠까봐 두려워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궁여지책으로 이와 같이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We don't know." 머리를 맞대고 서로 의논한 결과, 그들이 내린 결론이라곤 고작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살아남으려고 비겁하게 발버둥을 쳤던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그들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찾는 일에는 전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진리를 깨달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의 마음은 길 가와 같았습니다.
만일 그들의 마음이 좋은 땅이었다면, 만일 그들에게 들을 귀가 준비되었다면,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참으로 비극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I am done.” 이제 예수님은 더 이상 그들에게 하실 말씀이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설사 예수님이 진실을 그들에게 일러주어도,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마7:6 말씀과 같이, 어찌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며, 또한 어찌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입을 다물어버리셨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그들을 버리신 것입니다. “이제 너희는 끝났다. 앞으로 너희를 기다리는 것은 심판뿐이다.” 이런 뜻이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그들이 당할 일은 심판과 멸망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뒤를 있는 마가복음 12장을 보면, 실제로 예수님이 그들을 심판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먼저 예수님은 하나의 비유를 들어, 그들을 총체적으로 심판하셨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그리고 서기관들을 개별적으로 심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 이상 긴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오늘 주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예수님의 말씀을 단순히 과거적이고 역사적인 것으로만 여기지 맙시다. 예수님은 살아 계셔서 오늘도 우리 각자에게 현재적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처럼, 마음을 닫고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면 안 됩니다. 그러다 보면 “나는 더 이상 너에게 할 말이 없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기다리는 것은 심판과 멸망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절대적입니다. 그러므로 베다니의 마리아처럼, 늘 예수님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그리하면 살아 계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며 우리의 삶에 역사하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요16:33 말씀을 읽어봅니다.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살아가다 보면, 우리가 사람들 때문에 환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신 예수님도 박해를 받으셨습니다. 하물며 왜 우리에겐들 우리의 권위에 도전하여 우리를 박해하며,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이 없겠습니까?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딤후3:12 말씀처럼,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기 마련입니다. 그럴지라도 겁내지 말고 담대합시다.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시고 박해를 이기셨기에,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이기며 박해를 이길 것입니다.
사람들이 힘들게 할 때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께 다 맡깁시다. 대적자들을 심판하신 예수님이 모든 것을 갚아주실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우리로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의 평안이 늘 우리와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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