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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장애, 장애가 아닌 풍성한 인생 길

장애, 장애가 아닌 풍성한 인생 길
마가복음 10:46-52

김필곤 목사

4월 20일이 무슨 날인 지 아시는 분 계십니까?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생일입니까? 아돌프 히틀러의 생일입니까?
19회 장애인의 날입니다. 1981년 '세계장애인의 해'를 계기로 4월 20일을 '장애인의 날'로 지키며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올해도 장애를 극복하고 힘있게 사는 사람들이 장애인 극복상을 받았습니다. 부산에서 자신도 장애인이며서 장애인에게 택시로 무료 교통 편 연 5천회 정도 제공해주면서 행복하게 사는 김정포씨, 14살 네 손가락 소녀 피아니스트 이희아양, 정신 지체 장애를 극복하고 전문 제빵 기술인이 된 서성철 씨 등이 그 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3일 후 23일 금요일 서울 송파구에서 23살 된 정신 박약인 아들을 둔 한 주부가 아들을 목 졸라 숨지게 하고 자신은 옥상에서 뛰어 내려 투신 자살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파출부로 다니며 아이를 기르고 있었는데 결국 자살로 인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이렇게 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캐나다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선천적 장애로 날마다 고통에 울부짖는 딸을 5년 동안 보다 못하여 뇌성마비 장애인 딸을 아버지가 살해를 하였습니다. 12살 뇌성마비 딸을 수 차례의 대수술을 시켰지만 말 한마디 못하고 먹지도 못한 채 날마다 고통의 비명을 지르기만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딸을 보다 못해 자신의 트럭에서 가스 중독사시켰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경찰에 자수했습니다. 경찰에서 그는 『죽이는 길만이 딸의 고통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라고 말했답니다. 결국 법정에 서게되었습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딸에 대한 그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를 알려주는 수많은 이웃들의 증언이 이어졌고 『용기가 있었다면 내가 먼저 딸아이를 죽였을 것』이라는 아내의 절규가 법정을 울렸다고 합니다. 작년에 자폐아를 둔 친구 목사님이 그 아이를 위해 목회를 포기하려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장애인이나 장애아를 둔 부모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Ⅰ.장애인이나 장애아 부모들이 격는 고통은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오늘 성경에 보면 바디메오라는 시각 장애인이 나오고 있습니다(46). 그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이렇게 애절하게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고통은 무엇입니까?
1. 육체적인 고통입니다.
오늘 본문은 소경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천적인 시각 장애인지, 후천적인 시각장애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보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대단한 불편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일시적으로 끝나지 않고 평생 간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장애인이란 "상해, 질병, 유전적 결함으로 말미암은 여하한 만성적인 신체적 혹은 정신적 불능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되고 있습니다. 정신 지체 (지능지수 69 이하), 시각장애, 청각 장애, 지체장애, 정서장애(행동 장애, 부적응 행동, 미숙아), 언어 장애,. 특정 학습 장애, 복합 장애, 자폐증 등 모두 신체적 정신적 결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장애인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결함은 손상으로 생각하게 되고, 불능, 불리로 받아들여 집니다.

2. 정신적 고통입니다.
신체 장애가 있는 사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의식의 장애가 옵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힙니다. 사람을 기피합니다. 죄의식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기 죄 때문이라고 합니다. 부정을 탓다고 합니다. 수치스럽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결국 사회로부터 분리되어 버립니다.

3. 경제적 고통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바디매오처럼 거지가 되어 사람들의 동정에 의하여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설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더욱 소외되어 살아갑니다. 도와야할 가족에게 큰 부담으로 느끼게 됩니다. 장기 치료를 위해 정작 물질이 필요한데 물질을 소유하는데 많은 장애 요인이 있습니다. 사회 저소득 층에 속하게 됩니다. 신체적, 정신적 장애에다 경제적 빈곤으로 말미암아 2중 3중의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4. 견디기 힘든 것은 사람들의 편견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소리치며 주님을 부릅니다. 그때 사람들은 무엇이라 말합니까?(48) 시각 장애를 입지 않았다면 예수님께 나아가 볼 수 있기 때문에 소리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시각 장애인이기 때문에 바로 앞에 계셔도 소리를 쳐야만 합니다. 어디 계시는지 모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비 장애인은 그 장애인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꾸짖습니다.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존재로, 어리석은 존재, 열등한 존재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냉대를 받습니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옛날부터 그랬습니다. 고대에는 장애인들을 공동체의 유지, 존속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추방하거나 유기하는 것을 당연시했습니다. 특히 스파르타 사람들은 리쿠르구스 법전(Lycurgus,B.C 800년경)에서는 장애인과 노약자를 산중에 유기할 것을 명시하였습니다. 로마인들은 장애인을 강물에 던져 익사시키거나 투기장의 주인공으로 삼았으며, 또한 뚜렷한 장애를 보인 아동들은 광장에 목매달아 죽였고 후천적으로 장애를 입게 된 아동들도 살해하는 것을 허용하였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가정으로부터 소외된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환영받고 소용되어야 할 가족의 일원임에도 불구하고 단란한 가정의 칩입자나 파괴자의 취급을 받습니다. 특히 선천적 장애인의 경우, 집중적 보호를 받아야 할 신생아 시절에 장애아 탄생의 충격에 빠져 있는 부모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장애 자체에 대한 관심도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됩니다. 장애 아동의 부모 역할을 감당하기는커녕, 자신들의 절망 속에서 허덕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장애인은 가족 구성원 끼리의 관계를 통해 인생을 배우는 기회에서도 소외되고 성장해서 자신의 가정을 이루는 데에도 큰 어려움을 겪게 될 뿐 아니라 많은 경우에는 그것이 불가능하기도 합니다.
장애인은 이 세상의 출생 또는 장애 발생 시기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외로움과 절망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5. 더욱 심각한 것은 영적 소외, 영적 침체입니다.
장애인이 신앙을 갖는 확률이 적습니다. 심각한 것은 영적 장애입니다. 물론 교회의 무관심에도 책임이 있습니다. 장애라는 것은 쉽게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장기화되면 믿음의 사람도 영적 침체가 옵니다. 신앙의 열정이 사라지고 되는대로 살자라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믿음의 정열이 사라집니다. 만성적이기 때문에 절망하며 낙담합니다.

Ⅱ. 장애를 장애로 여기지 않고 풍성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장애라는 것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상대적입니다. 장애의 기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나라 보건 사회부 통계의 의하면 1995년1,053,000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UN에서는 세계 인구의 10%정도를 장애인으로 보고 있고 그것이 타당하다면 우리 나라는 약 4백 40만 정도가 장애인이라고 합니다. 이들 중 대부분의 장애인 90%는 후천적인 것입니다. 한국의 경우 교통 사고가 장애 발생 원인의 25%를 차지하는데 1996년에는 55,070명이 교통 사고로 장애인이 되었고(경찰청 보고서, 1997) 산재 사고로 인한 장애인은 해마다 약 3만명 이상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날 때부터 장애를 가지고 나온 사람보다 비 장애인으로 살다가 장애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말입니다. 어찌 보면 온전한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누구나 장애를 가지고 살고 있고 장애의 가능성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체적으로는 온전한 것 같지만 신체적 기능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수도 있고 정신적으로 장애를 가질 수도, 정서적으로 장애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결함의 요소를 결함으로 여기지 않고 풍성한 인생을 살 수 있는 길은 없겠습니까?

1. 자신의 장애 극복할 수 없는 것이라고 포기하지 말고 예수님이 내 장애의 치유자라는 사실을 믿고 주님으로부터 근본적인 치유를 받아야 합니다.(47,52).
1)그는 자신을 불쌍한 존재인 것을 인정했습니다(46). 그러나 그것이 포기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이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변화된 상황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있지 않은 것을 보고 절망하고 있는 것을 보고 비교하는데 문제가 심각합니다. 만약 우리에게 장애가 있으면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기 싫어 결혼식에 대려가지 않습니다. 숨기려고 합니다. 노출시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애는 죄가 아닙니다. 장애는 수치가 아닙니다. 부족이 아닙니다. 단지 차이에 불과합니다. 상태의 차이입니다. 꽃이 한 송이 밖에 없다고 많은 꽃망울을 가지고 있는 나무 앞에서 수치스럽게 생각할까요?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비교의식의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예수님을 자신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실 분으로 믿고 예수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가 군중으로부터 들은 소리는 무엇입니까? 47절을 보십시오. 나사렛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당시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사람들이 할 정도로 나사렛은 그렇게 뛰어난 사람이 나올 곳으로 여기지 않은 곳입니다. 이 말을 들은 그의 예수님에 대한 마음의 자세는 단순히 예수님을 자연인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예수님을 부르십니다. 사람들은 나사렛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소경은 대조적으로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메시야가 다윗의 후손으로 날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하는 말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해석해 주고 있습니까? 52절을 보십시오.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구세주로 믿는 믿음과 내 인생의 치유자라고 믿는 믿음 말입니다. 사람들은 장애인을 짐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조금 나으면 동정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동정하는 정도에서 끝내시는 분이 아니라 치유하여 정상적인 삶을 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믿는 사람들의 장애를 치유시키셨습니다. 선천적인 시각 장애인이 치유를 받습니다(요9:1-41). 간질에 걸린 아이가 치유를 받습니다. 중풍으로 누워 있는 자가 치유를 받습니다. 선천적 지체장애인의 치유(행3:1-4:22)를 받습니다. 18년 동안 허리를 펴지 못했던 여인(눅13:10-17)이 치유를 받습니다.
바로 앞 장을 보십시오. 간질 병을 앓고 있는 아이를 치유할 때 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막 9:23)
믿음은 위대한 능력을 나타냅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근본적으로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마 21:21)

2. 어떤 장애 요소가 있다 할지라도 세상을 의식하며 소극적, 부정적이 될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이지 않았습니다. 아주 적극적이었습니다.
소경이고 거지라고 해서 열등감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모습을 본문에서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마음 속으로는 예수님께 가면 될 텐데 생각하며 뒤에 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겠습니까? 자기는 예수님께 나갈 수 있는 조건이 분명 잘 가추어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어떻게 예수님께 나갈 수 있겠습니까? 그는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입은 있었습니다. 없는 것 보며 포기하지 않고 있는 것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예수님께 메어 달렸습니다.
물론 장애보다 더 심각한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시각입니다. 그들의 편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꾸짖어 잠잠하라해도 잠잠할 수가 없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쥐구멍을 찾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합니까? 48절 보십시오.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시니까 어떻게 합니까? 50절을 보십시오. 겉옷을 내어 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그리고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보기를 원합니다. 아마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큰 소리로 보기를 원합니다. 라고 고함을 쳤을 것 같습니다. 그가 걸치고 있는 겉옷은 아마 그의 전 재산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보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우선 순위를 알고 적극적으로 예수님께 나아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장애를 극복하고 풍성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비결 중의 하나입니다.
문제는 비장애인이나 장애인이나 장애인을 둔 가정들이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①장애인은 성격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②장애인은 무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③장애인은 사회에 유익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④장애인은 늘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곡된 자본주의적 사고에 의하여 장애의 결과를 부정적으로 예측합니다. 그리고 차별합니다. 이 사고 구조를 바꾸어야 합니다.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시력 장애인 이삭을 축복의 전달자로 사용하였고, 시력 장애를 가진 바울을 세계 선교를 위해 사용하였고, 지체 장애인 야곱에게 축복의 증거를 보여 주었으며, 언어 장애인 모세를 사용하였습니다. 오른손 지체 장애자 에후를 사용하였습니다. 범죄하고 시각장애자가 된 삼손의 기도를 응답해 주었습니다. 장애는 결함이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식의 차이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실 장애와 비 장애는 단지 시간과 공간의 차이일 뿐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냐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냐는 것입니다.
메시야의 작곡자 헨델을 아실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이발사 겸 의사였습니다. 그는 아들을 법률 공부를 시키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헨델을 음악을 공부하였고 25세에 유명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737년 파산한 뒤에 헨델은 중풍과 건강의 악화로 고통을 당하였고 56세가 되었을 때, 거의 파산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때 23일간 기도하면서 때로는 음식을 전폐하면서 작곡에 몰두하여 "할렐루야"를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는 68세 때 완전히 실명하였지만 좌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도하며 위대한 음악을 남기고, 장애에도 불구하고 음악 연주회를 지속하였습니다. 그는 루터교 목사님의 딸인 어머니의 신앙의 영향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중풍과 허약한 육체, 시각 장애를 격으면서도 "내가 나서 자라난 신앙 안에서 살다가 죽겠노라"고 말하며 끝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정열적으로 감당하였습니다.
실낙원의 저자 밀톤을 아실 것입니다. 밀톤은 1652년 실명하였습니다. 어려움은 계속 탁쳐왔습니다. 아내는 떠나고, 아들은 죽었습니다. 자신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질 뻔했습니다.
그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실명한 상태에서 서사시를 쓰는 일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딸로 하여금 한구절 한구절 받아쓰게 하여 "실락원(Paradise Lost)"을 1667년에 완성하였고, 이어서1671년 복락원(Paradise Regained)과 투기사 삼손(Samson Agonistes)을 합본으로 완성했습니다.

3. 자신의 장애를 장애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차이로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장애받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만큼 풍성한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장애를 장애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조금 발전하면 차이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장애 역시 하나님이 주신 기회로 은혜, 선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렇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겠지요. 그러나 장애는 결코 내가 장애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적어도 내 자신에게 있어서는 장애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장애는 때로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일 수도 있습니다. 바디매오가 시각 장애를 치유받고 어떻게 살아갑니까? 그의 인생은 변했습니다. 5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좇았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그가 예수님께 충성하며 제 2의 인생을 살았겠습니까? 기적을 체험하였는데 적당히 살았겠습니까? 저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지만 그의 인생은 완전히 변했을 것입니다. 이제 시각 장애인이 아닙니다. 거지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좇으며 주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만약 바디메오가 시각 장애인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변할 수 있었을 까요? 아마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장애로 인하여 그는 예수님을 만났고 기적을 체험받았습니다. 장애가 아니었다면 그는 기적을 베푸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여리고 강도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성경에 기록되어 수많은 기독교인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가 시각 장애자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될 수 있었겠습니까?
요한 복음 9장 1절을 보십시오. 선천적인 시각장애자입니다. 제자들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누구죄로 이렇게 저주를 받았냐는 것입니다. 자기 죄입니까? 부모죄입니까? 그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도 장애자를 율법을 어긴 죄의 대가나 하나님의 저주로 인식하였습니다.(민12:1-10; 레12:17-23; 13:45-46 등). 그러나 예수님의 시각은 달랐습니다. 한센씨 병에 걸리면 격리 수용하였습니다. 사회와 차단시켰습니다. 불구가 되면 부정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애를 무조건 죄(자범죄)의 결과로 생각하는 그릇된 사회의 인식을 바로 잡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 보이시기 위하여 장애인이 되게 하셨다고 천명하셨습니다.(요9:1-3). 장애인을 도와 주는 자원봉사자를 귀하게 보시며 칭찬하였습니다.(마9:1-7; 막2:2-5; 요5:2-9). 장애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측은히 여기셨다(마14:14; 막1:41, 7:32-35; 눅7:11-15). 장애인을 잔치에 청하고 교제할 것을 명하였습니다.(눅14:12-14). 예수님께서는 장애인들이 당하는 고통의 문제들을 바쁘다고 미루시거나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마1:32-34, 8:5-7, 20:29-34; 눅5:12-13, 6:6-10).
디모데 전저 4장 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딤전 4:4)" 우리가 장애도 기쁨으로 받으면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고 행복을 방해하는 것도 아니고, 불편한 것도 아니고 저주받은 것도 아니고 숨겨야 할 것도 아닙니다.
시각 장애를 가지 바울의 자세를 보십시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12:7)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고후 12:8)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9)"
신체가 손상되고, 정신이 손상되었다 하더라도 개개인이 갖고 있는 능력에 따라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며, 사회에 진출하여 저마다의 존엄을 누려야 합니다. 비록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중증의 장애인도 그들이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사회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며, 비장애인들과 부딪기며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장애가 있던지 없던지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며,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께서 이 시대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실명, 이는 매우 끔직한 일이기도 하고, 회복할 수 없는 절망을 가져다 주기도 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실명을 한 직후, 아니 실명을 했다는 것을 깨달은 직 후 어느 기간 정도는 심각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에게는 육의 눈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혜의 눈,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영의 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리고 이 눈이 더욱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인생을 180도 바뀌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의 위력이요,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다 준 최대의 선물이기도 합니다.
얼마전 팔 다리가 없는 중증 장애를 극복한 [오체 불만족]의 저자, 오토다케 히로타다 씨가 장애인의 날(20)을 앞두고 방한하였습니다. 그는 와세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장애인과 고령자들을 위한 [마음의 장벽 없애기(Barrier Free)] 운동에 매진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출산 후 그의 어머니는 처음 그를 보고 "어머, 귀여운 우리 아기."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4년간 담임을 맡았던 다카기 교사는 휠체어를 못 타게 했고, 반 아이들에게도 특별 대우를 하지 않도록 했다고 합니다. 남의 도움 없이 밥을 먹고, 학교에 다니는 법을 배웠습니다. 술에 취한 친구를 전동 휠체어에 태워 지하철까지 바래다줄 정도였습니다.
그는 "신체는 불만스럽게 태어났지만, 인생은 행복하다"는 자서전을 써서 일본 열도에 화제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그의 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참 이상하다. 하지만 장애자란 생각은 한번도 안해 봤다. 난 성격상 튀는 놈인가 보다." “처음부터 팔다리가 없이 태어났기 때문에 이런 생활이 불편하지 않다”"키가 큰 사람, 작은 사람, 말라깽이, 뚱보가 있듯 팔다리 없는 것은 나만의 개성”
우리의 찬송가를 보면 화니제인 크로스비라는 이름을 자주 발견할 것입니다. 그녀는 약 9천편의 찬송시를 작곡했고 이 중에 약 35편이 우리 찬송가에 실려 있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매우 불행하게 보냈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할머니가 동정을 받아가면서 연명을 하였습니다. 생후 일개월 반만에 실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생후 1개월 반만에 크로스비는 감기에 걸리고, 눈병이 났는데, 식모가 뜨거운 겨자 파포를 크로스비의 눈에 댄 것이 화가 되어 크로스비는 이후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앞을 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크로스비는 일생동안 세상의 광명을 본 기억조차 없습니다. 그런데도 크로스비는 그의 실명을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 중의 하나라고 했습니다. 결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실명했기에 세상 것을 생각하지도 않고 시를 쓰는데 지장을 초래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영의 눈이 더욱 밝아졌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빛은 보지 못했지만 참된 빛인 그리스도를 보았던 것입니다.

출처 : 양로원 갑천뉴스타트
글쓴이 : 엘리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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