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음 평양신학교 교장을 지냈던 채필근(蔡弼近) 목사는 한학과 동양학은 물론 해박한 신학과 철학을 겸비한 신학자였습니다. 본래 채 목사는 철저한 유교가정에서 자랐으며 유교경전에 심취했습니다. 그런데 14살 되던 1898년도에 아버지가 먼저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당시 소년 채필근의 심정은 아버지를 이단에게 빼앗긴 것 같은 슬픔으로 가득했습니다. 개종한 아버지는 600여권의 책을 쌓아 놓고 공부하던 유명한 한학자이셨기 때문입니다. 채필근은 공자에게 이렇게 하소연했습니다. “공자시여, 아버지가 그리스도교를 공박하고 유교를 옹호하는 글을 쓰시겠다더니 기독교 경전 성경을 보시다가 불행하게 그리스도교에 빠지셨습니다. 공자의 말씀에 이단을 공부하면 해롭다고 하심이 이것을 가리키심인 듯합니다. 그러나 저는 결코 공자의 도를 버리지 않기로 맹세합니다.” 그로부터 1년 후 아버지가 채필근을 부르더니 “내일은 주일이니 예배당에 함께 가자” 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난생 처음 아버지를 따라 예배당에 갔습니다. 그 날 집으로 돌아온 채필근은 공자께 다시 호소하였습니다. “공자님, 정말로 죄송합니다. 당신의 가르침 중에 아버지가 잘못하면 간하고 간하여도 듣지 않으면 울면서 좇으라고 하셨지요. 세상을 떠나시면 3년까지 고치지 말라고 하셨지요. 저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 3년상을 치르고 틀림없이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러나 채필근은 끝내 공자한테 돌아가지 않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훗날 채필근 목사는 ‘공자께’ 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시 공자에게로 돌아오겠다던 맹세를 지키지 못해 미안합니다. 그러나 나는 공자가 살아 계시다면 반드시 그리스도교에 귀의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공자나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같은 성인들도 만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이신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본 시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와 방법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과거의 비참한 역사를 거울로 삼아서 외식으로 찬양하지 말고 진실하게 예배할 것을 권고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배와 찬양이 들어있는 본시는 예배 중에 사용하기 위해 지어진 노래입니다. 전반부는 찬송 인도자의 지시에 따라서 회중이 부르는 노래로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이유가 기록되어 있으며, 후반부는 인도자의 독창으로 이스라엘의 역사적 교훈을 상기시키면서 바른 예배 자세를 갖추도록 교훈하고 있습니다. 본문 6절입니다.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여기의 “무릎을 꿇자” 는 히브리어로 ‘바락’이라는 말로 존경과 복종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이 되지 않으면 복종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에 거하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기대를 사모하는 열망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바른 예배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배로 부르시며 그 앞에 무릎을 꿇으라 명하십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왕이신 하나님이시니 헨델(George Frideric Handel)의 메시야(Messiah)가 초연된 것은 1742년 4월 13일 아일랜드의 더블린(Dublin)에서였습니다. 자선음악 단체 필하모니 협회에서 헨델을 초청하여 발표회를 갖도록 주선했던 것입니다. 연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이듬 해 1743년 런던에서 메시야가 연주되었습니다. 그 연주회에 국왕인 죠지 2세(George II)가 참석했습니다. 국왕은 할렐루야 합창 중에 ‘전능의 주가 다스린다’는 부분에 서 압도되어 왕관을 벗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청중들도 따라서 일어났습니다. 그 때 이후 할렐루야가 연주되면 일어나는 관례가 생겼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온 세상을 다스리실 뿐만 아니라 주인이시기에 누구라도 일어나 경배하게 됩니다. 본문 3절입니다.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여기의 ‘크신’은 ‘가돌’이란 원어로 ‘위대한’을 뜻하는데 백성의 목자 되시는 크신 권능의 하나님을 암시하는 형용사입니다. 여호와는 다른 이방민족이 섬기는 모든 헛된 우상들보다 크신 왕이시기에 큰 소리로 감사하며 예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난 위대한 왕이십니다. 땅 위의 나라들은 제한적 영역을 가지며, 그들이 섬기는 신도 역시 제한성을 가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이방 신들보다 위대하시며 홀로 뛰어나신 절대자이십니다. 왕이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표현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음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고 그로부터 온다고 믿으면 그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만 경배하여야 합니다. 다함께 ‘왕이신 나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왕이신 하나님을 높이며 무릎을 꿇고 경배하여야 합니다. 둘째로, 지으신 하나님이시니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이 어렸을 때 하나님의 창조에 대하여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워싱턴이 하나님의 창조를 믿도록 지혜를 발휘했습니다. 뒷동산에 워싱턴의 이름을 따라 꽃씨를 뿌리고 꽃이 피어 아름다운 모습이 되게 했습니다. 워싱턴을 데리고 동산에 올라가 그 광경을 보게 했습니다. 그리고 워싱턴에게 “이 모든 것이 저절로 생기다니, 너무나 신기한 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워싱턴은 “이것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부모님이 저를 놀라게 하려고 만드신 것이지요? 이게 어떻게 저절로 생겨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워싱턴의 부모는 “너는 이 작은 일도 그냥 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어떻게 광대하고 정교한 우주를 그냥 되었다고 말하느냐?” 워싱턴은 그제서야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창조를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만물은 하나님께서 만드셨기에 지음 받은 피조물은 마땅히 무릎을 꿇고 경배하여야 할 것입니다.
본문 5절입니다. “바다도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으로 지으셨도다.” 시인은 하나님의 뛰어난 주권과 우월성을 강조하며 모든 이방신들이 숭배하는 대상도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물에 포함되며 그 지배권을 가지신다고 주장합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2장 10절입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습니다. 예배는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창조주를 대면하는 기쁨을 얻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는 감격으로 예배자에게 주시는 특권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돌보신 하나님이시니 토니 캠폴로(Tony Campolo) 목사가 오레곤에서 목회할 때의 일입니다. 어느 교인이 암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캠폴로는 그를 위해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일주일 후 환자의 아내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여보세요. 목사님이 남편의 암을 위해 기도해주셨지요?” 캠폴로 목사는 암이 낫았나 기대하였는데 그녀가 말합니다. “남편이 죽었어요!” 순간 캠폴로는 그녀가 따지려고 전화한 줄로 알고 긴장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언짢게 생각하지 마세요. 당시 남편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자녀와 손자들의 성장을 보지 못하고 죽을 생각을 하니 억울하다며 하나님을 원망하며 저주했지요. 우리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함께 있는 것이 심히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기도 해주신 후 남편에게 평안과 기쁨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남편의 마음을 만져주신 것이지요. 목사님! 지난 3일 동안은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노래했고, 웃었고, 성경을 읽으며 기도했어요. 목사님이 남편을 위해 기도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려고 전화했습니다.” 어리둥절해 하는 캠폴로 목사에게 그녀는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치료되지는 않았지만 치유되었어요 (He was not cured, but he was healed)” 하나님이 돌보신 결과가 아닙니까? 본문 7절입니다.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주인이시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양입니다. 여기의 ‘양’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셔서 구체적으로 인도하시며 필요를 공급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관계를 가지시고 내재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의 기르시는 백성으로 삼으시며 그의 손에 있는 양처럼 돌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믿을 때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경배하게 됩니다.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에서 행했던 불평을 경고와 표준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장소에 붙여진 이름들은 사건을 상기시키는데 ‘므리바’는 다툼을 의미하고 ‘맛사’는 시험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어 고생할 때에 하나님이 계신가 안 계신가를 시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 안에 있는 사실을 의심하였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광야에서 조상들이 했던 실수를 회상하면서 하나님을 의심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돌보시는 백성임을 믿고 오로지 무릎을 꿇고 경배하여야 할 것입니다. 목공이었던 에드워드 모트(Edward Mote)는 16살에 예수를 영접하고 열심히 일하여 가구점 하나를 경영하게 되었습니다. 바라던 소원을 이룬 모트는 힘들 때마다 찾았던 홀본 언덕에 올라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넓게 펼쳐진 언덕에서 마을을 바라보다가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주님, 조금은 성공했지만 이런 성공은 언제라도 흔들릴 수 있는 것을 압니다. 흔들릴 수 없는 반석은 오직 주님 한 분뿐이십니다. 반석이신 하나님만 의뢰하고 살겠사오니 한 평생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자로 살게 하소서” 기도를 마친 그의 마음에 하늘의 평강과 기쁨이 내렸습니다. 모트는 집에 돌아온 즉시 한편의 찬송시를 만들었습니다. 찬송가 488장입니다.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주 나의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자들의 진정한 찬양의 고백이 아닙니까? 요한 웨슬리(John Wesley)는 ‘하늘나라는 무릎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무릎 꿇는다는 것은 기도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삶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고 전적으로 맡기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색이나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 경배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태도가 바르지 못하다면 절대로 그 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 바른 태도가 무엇입니까?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우선 감사의 노래를 불러야 하고, 이어 무릎을 꿇어 경배하여야 합니다. 부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다스리는 왕이신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시기에 그리고 우리를 돌아보시는 사랑의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 예배함으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뵙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