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김기석목사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렘31:18-22
(2000/8/13)

인간의 본분
어떤 사람이 랍비에게 "축복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창세기 1장의 창조이야기와 관련된 수수께끼로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 닷새 동안은 일을 마치신 후에 이루어진 일을 보시고는 '좋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인간을 창조한 여섯째 날에는 '보시니 좋더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요. 여기서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요?" 랍비의 물음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인간이 좋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랍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그럴듯한 설명은 아니군요." 그리고는 창세기에서 '좋다'는 뜻의 단어 'tov'는 '완전하다'로 번역되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tov'라고 선언하지 않으셨어요. 인간은 불완전하게 창조되었어요.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가능성을 가지고 자기를 완성해가야 할 소명을 받은 존재예요. 기성품이 아니라, 자기를 실현해가야 할 존재로 지음받았다는 것, 이게 축복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사람 안에 있는 이 가능성이 문제입니다. 가능성은 선택을 전제합니다. 선택은 다른 것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여러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이게 인생의 고뇌가 아닐까요? 사람은 자기의 불완전한 부분을 죄로 채울 수도 있고, 아름다움으로 채울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아름다움이란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입니다. 제 자리를 떠난 것은 추해 보이지요. 세상에 불필요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세상에서 불필요한 것의 목록을 죽 머리 속에 떠올릴 겁니다. 파리, 모기, 질병, 눈물, 전쟁…하지만 그것은 우리 생각일 뿐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어떤 것도 불필요한 것이라고 규정할 수 없습니다. 그것도 다 필요해서 생겨났을 겁니다. 뱀을 다 잡았더니, 들쥐들이 극성을 부린다지 않습니까? 미국의 옐로스톤 국립공원에서 초식동물을 잡아먹는 늑대, 이리를 다 죽였더니, 덩치 큰 초식동물이 급속도로 늘어나서 식물 세계가 황폐하게 되었다지요. 결국에는 캐나다에서 육식동물들을 사다 풀어놓았더니 공원의 생태계가 회복되더랍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기묘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 자체로 한 몸인지도 몰라요.

문제는 그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존은 좋은 건가요, 나쁜 건가요? 사실 이 질문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존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평가가 달라질 수 있거든요. 오존이 성층권에 있으면 우주로부터 들어오는 자외선을 차단해주기 때문에 우리 입장에서는 참 좋은 거예요. 하지만 화석연료를 사용하면 오존이 발생하게 마련인데 지상에 있는 오존은 매우 파괴적인 오염물질입니다. 사람도 그런 것 같아요. 특별히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따로 있겠어요? 다 비슷하지요. 물론 사람의 성향이 다르다는 것은 인정해요. 하지만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 해도 그가 처한 상황에 따라 악마가 될 수도 있어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간수들이 다 악마였겠어요. 그들도 행복을 추구하는 평범한 사람이었겠지요. 하지만 그가 서있는 삶의 자리가 그를 악마로 만들었던 거지요.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무조건 미워할 게 아니라, '저 사람이 설 자리를 찾지 못했구나' 하고 생각해야 해요. 그가 설 자리에 서도록 도와주는 것이 사랑일 것이구요.

길들지 않는 짐승 같은 우리
지나친 일반화처럼 들릴는지 모르겠지만,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는 하나님 앞이에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 사람은 사람다와요. 하지만 사람 속에는 반역의 기질이 있어서 얌전하게 하나님 앞에서 살지 못해요. 사람은 끊임없이 일탈을 꿈꿔요. 일탈행위가 주는 짜릿함이 있지 않아요? 뭔가 상궤를 벗어난 일을 하면서 사람들은 해방감을 맛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탈은 일탈이에요. 그게 그의 삶일 수는 없어요. 잠시 동안 방황했다 해도 곧 자기 자리로 돌아가야 해요. 아버지 집을 떠났던 작은 아들도 결국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아요? 성경은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너나할 것 없이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참 우매한가봐요. 말로 타이를 때 깨닫는 법이 없어요. 꼭 매를 맞고, 고생을 해봐야 그때서야 돌아서요. 오늘 예레미야의 본문도 마찬가지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했던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어요. 고통은 사람에게 생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해요. "어쩌다 우리가 이 지경이 되었지?" 하고 묻던 그들은, 자기들이 겪는 민족적 비운은 하나님을 배신했기 때문임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탄식합니다.

주님, 우리는 길들지 않은 짐승 같았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를 가르쳐 주셨고, 순종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돌아갈 수 있게 이끌어 주십시오.
이제 우리가 주 우리의 하나님께 돌아갈 준비가 되었습니다.(18)

이스라엘은 자신을 길들지 않은 짐승, 곧 멍에에 익숙지 않은 송아지 같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멍에를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멍에는 타율이기 때문입니다. 자의가 아니라 남의 명령이나 구속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부모의 강압 때문에 하는 공부에는 즐거움이 없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하는 신앙생활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남들이 하니까 마지못해 따라 하는 봉사활동은 고역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멍에로 여기는 것들이 사실은 멍에가 아니라 우리 삶의 닻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의 고삐를 잡고 계실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람답게 살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고난과 시련을 통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은 고역으로서의 멍에가 아니라, 진정한 자유와 기쁨의 통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난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 안에 있는 행복을 새삼스럽게 발견하게 되었고, 주님께 순종함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구합니다. 자기들을 이끌어 돌아가게 해달라고요.

하나님의 정념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은 안쓰러워하십니다.

에브라임은 나의 귀한 아들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이다.
그를 책망할 때마다 더욱 생각나서, 측은한 마음이 들어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주의 말이다.(20)

주님은 회개하고 돌아오는 백성들을 측은히 여기십니다.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하나님은 무정한 초월자가 아니예요. 인간의 기쁨이나 슬픔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자족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정념(pathos)을 가지고 계세요. 우리 때문에 웃고 우신다는 말이에요. 민주화 운동의 열기가 고조되던 80년대 초반, 종로 5가 기독교회관에서는 민주화를 위한 목요 기도회가 늘 열렸습니다. 어느 날인가는 지금 국회의원인 김근태씨의 아내인 인재근씨가 그 기도회에 참석해서 자기 남편이 당한 고문의 실상을 증언했습니다. 고문에 의해 황폐해진 남편을 보고 온 이야기를 하면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눈물을 닦고는 이제 울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대신 남편이 못 다한 일을 이루기 위해 싸우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다 숙연해졌습니다. 문익환 목사님께서 축도를 하셨는데, 그 기도가 우리 모두를 울렸습니다.

"하나님, 당신도 우리처럼 가슴이 찢기는 아픔을 느끼십니까? 하나님, 듣고 계십니까? 이 땅의 아들과 딸들의 울음소리를. 당신도 울고 계시지요? 하나님, 부족하지만 우리가 당신의 눈물을 닦아드리기 원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의 용기를 주십시오."

저는 그 때 절감했습니다. 땅의 현실 때문에 하나님도 함께 아파하신다는 사실을. 내가 믿는 하나님은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분이심을.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린 예레미야는 이제 백성들에게 권고합니다. 이전에 지나갔던 길과 대로에 푯말을 세우고 길표를 만들어 세워 놓고 돌아오라구요.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해서는 어디서부터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는지 유심히 살펴보아야 해요. 그리고 우리 마음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는 것들을 몰아내야 해요. 옷을 갈아 입으려면 먼저 벗어야 하듯이 옛 삶을 청산하지 않고는 새 삶을 살 수 없어요. 병든 터전 위에 새로운 인생의 집을 지을 수는 없지 않겠어요.

예언자는 주님께서 돌아선 그의 백성들을 위해 시작하신 새 일을 선포합니다.

주께서 이 땅에 새 것을 창조하셨으니 그것은 곧 여자가 남자를 안는 것이다.(22)

"여자가 남자를 안는다." 제가 이 본문을 정하고는 몇 사람에게 물어봤어요. "여자가 남자를 안는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고요. 그랬더니 다들 그래요. "좋은 데요." 뭐가 좋으냐고 물었더니 그냥 웃어요. 그래요. 좋은 것은 설명이 필요 없어요. 여자가 남자를 안고 가는 것, 이게 구원이에요. 여기서 여자는 성으로서의 여성이 아니에요. 여자는 '사랑'이구, '연민'이에요. 하나님은 죄지은 백성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면서 그들을 품에 안으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새 역사는 '사랑'과 '연민'이 우리 속에 있는 '반역의 기질'을 안고 가는 데서 시작되는 거예요.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예요. 허물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하지만 우리는 자꾸 완성을 향해 가야 해요. 그게 인간의 본분이니까요. 가다 보면 실수도 많이 하고, 남에게 상처를 입힐 때도 많아요.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다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있어요.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속으로는 울고 있는 이들이 많아요. 우리는 이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따돌리고, 짓밟았던 옛 삶을 청산하고, '사랑'과 '연민'으로 서로를 보듬어 안고 나가야 해요. 그게 여자가 남자를 안는 세상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어요. '사랑'과 '연민'으로 남자를 보듬어 안을 때, 그 남자는 곧 하나님이기도 해요.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이 가르쳐주셨지요? 주님은 가장 작은 자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신다고요. 우리가 사랑으로 가장 작은 자, 상처 입은 자, 방황하는 자를 부둥켜 안을 때, 사실 우리는 하나님을 부둥켜 안는 거예요. 하나님을 부둥켜안는 것은 결국 인간이 되는 길이구요. 우리가 지향해야 할 새 세상은 "여자가 남자를 안는" 세상, 곧 사랑과 연민의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는 세상입니다. 그 길 위에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참 사람의 길 위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손을 잡게 될 것입니다. 그 길을 걸어서 마침내 하나님께 이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그 길의 사람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추천 설교 > 김기석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부심의 덫  (0) 2017.02.15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  (0) 2017.02.15
그대에게로 가는 길  (0) 2017.02.15
멍에가 무거울 때  (0) 2017.02.15
희망 만들기  (0) 2017.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