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음 이지선 자매는 오빠가 운전하던 차를 타고 귀가하던 중 음주운전을 하던 갤로퍼에게 추돌을 당한 후 트럭과 충돌을 하는 교통사고를 만나 얼굴과 전신에 3도 화상을 입었습니다. 화상을 입은 얼굴을 치료하기 위해 10년 동안 피부이식 수술만 30번도 넘게 했습니다. 타지 않은 다리 쪽 피부를 떼어다 이식하는데 더 이상 쓸 피부도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얼굴에 대하여 원망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기자가 질문하였더니 그녀는 ‘본래 얼굴처럼 편하지 않지만 눈도 잘 감기고 입도 다물어지고 발음도 잘 나옵니다. 사고 나기 전에는 예쁜 것 좋아하고, 화장하고 거울 보는 거 좋아했던 자신이 사고 직후 일그러진 얼굴을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된 것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 마음을 갖게 된 것부터가 기적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지 자매는 자신의 불행보다 오히려 가해자인 운전자의 심적 고통을 염려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고가 난 날이 일요일 밤입니다. 가족들과 따뜻하게 보내야 할 시간에 혼자 소주를 다섯 병이나 마시고 운전했을 그 사람의 곤고하고 마른 가슴이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아프고 불편하지만 가족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 그 사람에 비하면 내가 훨씬 낫지 않습니까? 사고 당시 우리 가족은 누구를 미워하고 원망할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냥 어쩔 수 없는 천재지변처럼 사고를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미국 UCLA에서 사회복지학 박사 공부를 하는 그녀는 고국에 대한 향수를 느끼거나 가족들이 보고 싶으면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사고로 마디가 짧아진 손으로도 불편 없이 요리를 할 수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밥 한 그릇이 주는 따뜻한 위안에 기분이 좋아진다고 말하는 그녀에게 기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감사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감사의 표현이 지나치면 의심이 갑니다. 말끝마다 나오는 감사가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쇼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자칫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는 질문이었으나 지선 자매의 대답은 겸손하였습니다. “사람은 욕망의 동물입니다. 하나에 만족하면 더 좋고 큰 것을 원합니다. 작은 것에 대한 감사도 하루 이틀 아닐까요. 벌써 1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별것 아닌 일에 감사하는 것이 습관이 되고 일상이 되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하나씩 감사할 때마다 신기한 힘이 솟아납니다. 작은 것에 대해 감사하는 습관이 새 힘을 솟아나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토록 감사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했다면 애초 이런 사고를 피하게 해줬어야 하지 않느냐?” 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당연히 원망했습니다. 통증이 심할 땐 나를 살려주셨다는 하나님이고 뭐고 다 싫었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하루 한 가지씩 감사할 거리를 찾자고 제안하셨습니다. 내 발로 걸어서 화장실 간 날, 내 손가락으로 환자복 단춧구멍 하나를 채우게 된 날, 아랫입술과 윗입술이 겨우 닿아 오빠를 오까라고 부르게 된 날 등 감사 찾기를 했더니 진통제가 줄 수 없는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면서 고난 자체가 가장 큰 축복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평생 가질 수 없었던 보물들입니다. 즉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사랑이 얼마나 따뜻한지, 절망이 얼마만큼 사람을 죽일 수 있는지, 기쁨과 감사는 얼마나 작은 것에서부터 비롯되는지, 내가 앞으로 마음을 쏟고 시간을 바쳐야 할 영원한 가치는 무엇인지 지난 10년의 시간이 내게 알려주었습니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자신을 해치지 못할 것이라는 신앙 고백적 삶을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이 아닙니까? 베드로전서의 핵심주제는 고난입니다.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들이 실제로 겪고 있던 상황 때문입니다. 그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핍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난은 실재입니다. 고난의 주제는 성경이 반복해서 다루고 있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성경이 고난에 대해서 다루는 것은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 고난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13절입니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성경은 예수를 믿는다고 고난이 면제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고난은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고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배워야 합니다. 고난에 임하는 자세에 따라서 그 결과가 달라집니다. 고난을 당한 다해도 ‘누가 나를 해하리요’ 라는 당당한 자세로 나아가야 합니다. 본문은 고난을 당할 때 어떻게 해야 ‘누가 나를 해하리요’ 의 고백이 가능한 것인가 제시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의를 위하면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라는 말씀을 처음에 대했을 때 절망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헬라인의 관점처럼 그분의 공의로우신 성품과 관련해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자를 처벌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생각할수록, 루터는 도무지 구원의 소망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1519년에 이 구절을 다시 연구하면서 의가 관계적 의미라는 것, 즉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의를 뜻함을 발견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워서 죄인이 그 앞에 설 수 있게 하는 의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분을 만족시키는 의를 제공하셨다는 사실이 복음의 계시였습니다. 그리고 복음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의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루터는 비로소 모든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루터는 복음에 계시된 하나님의 의를 지키기 위해 로마 가톨릭에 저항하였습니다. 복음에 계시된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되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교황과 황제의 위협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위한다면 ‘누가 나를 해하리요’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14절입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께 산 소망을 두며 작은 일에도 감사한다면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고난을 당하더라도 선을 행하다가 받는 것이 악을 행하다가 받는 것보다 훨씬 복이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받는 고난이라면 거기에 바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 안에 살며 고난을 받는 사람의 감사와 소망이 고난 속에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놀라운 희망과 삶의 목적을 선물하고 그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있다면 고난은 도리어 많은 사람에게 큰 복이 됩니다. 그리고 어떠한 해로움도 그를 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둘째로 주로 삼으면 관계 전문가로 유명한 게리 스몰리(Gary Smalley)는 ‘관계 필터링’이란 저서에서 자신의 힘들었던 시절을 진솔하게 기록하였습니다. 한동안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었습니다. 사역은 커져갔고, 재정적으로도 풍족해 졌으며 명성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차츰 관계들이 틀어지기 시작합니다. 아내와 대화가 끊기고, 자녀들과도 소원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사역하던 사람들과도 소통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조바심이 생겨나게 되고, 모든 것이 뒤죽박죽 헝클어져 버린 것만 같았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원인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었으며, 특히 자신에게서도 별 문제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성공하게 되면서, 모든 것을 자신이 이루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일을 독단적으로 결정하였습니다. 작은 일을 결정할 때도 결정권을 하나님께 맡겼던 자신이 점차 큰 일 조차도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았던 것입니다. 세상적인 성공을 이루게 되면서 하나님 중심의 삶에서 자기중심의 삶으로 변했습니다. 결국 게리 스몰리는 자신의 문제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문제 해결을 위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려고 아침마다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주로 삼는 기도입니다. “첫째, 모든 기대 수준을 가능한 제로까지 낮추면서 하루를 시작하기를. 둘째,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받아들이길. 셋째, 모든 당황스런 경험은 하나님을 경배할 기회로 삼기를. 넷째,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면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지를” 묻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본문 15절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그리스도를 주(主)로 인정하십니까?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삶의 주인이라면 왜 염려하십니까? 주께서 배 안에 계신데 풍랑을 만나든 폭풍이 몰아치든 무엇이 두렵습니까? 주께서 내가 타고 있는 배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인생의 배를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항해하실 것이며 어떠한 해로부터 보호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삶의 모든 부분에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이 빼앗아갈 수 없는 평안이 임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하는 것이 내면적인 것이라면 소망의 이유를 변증하는 것은 외적인 것입니다. 여기서 변증은 삶에서 주되신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하고 그 후에 구체적으로 변증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로 삼을 때 누가 우리를 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고난 중에도 삶의 이유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여야 합니다. 셋째로 선을 행하면 인종차별 철폐 운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남아공화국의 투투(Desmond Mpilo Tutu) 대주교 이야기입니다. “어쩌다 성공회 주교가 되고 인종차별 철폐 운동을 하게 되었냐?”의 질문을 받고 그는 어렸을 때 경험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길을 걷는데 성직자 차림의 훤칠한 백인이 다가왔습니다. 당시 남아공은 철저한 인종차별 국가였기에 흑인들은 백인이 지나가면 한쪽으로 물러나 고개를 숙이고 백인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투투와 어머니도 한쪽으로 물러나려고 하는데 그 백인이 재빨리 먼저 한쪽으로 비키고는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한 뒤 투투와 어머니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놀란 어린 투투는 어머니께 물었습니다. “저 백인이 왜 저러는 거에요?” 이때 어머니의 대답은 투투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저 사람은 성공회 주교인데 성경에서 선을 행하라고 배웠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에게도 친절하고 공손하게 대하는 거란다” 그때 어린 투투는 나중에 반드시 성공회 주교가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한 사람의 선행이 한 아이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이라는 국가의 미래를, 그리고 세계를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나 한 사람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나 하나 잘 한다고, 혼자 선행 베풀고, 사랑을 베푼다고 무엇이 바뀔까 생각하며 포기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작은 선행이 냉랭한 세상을 바꾸어 놓게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과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낙심하지 말고 선을 행하여 때가 이르매 거두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 17절입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일시적입니다. 일시적인 고난이 하나님의 사람을 영원히 해롭게 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육체적 고난이 영적 생활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시적 고난이 그리스도인이 상속할 하늘의 기업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한다고 모든 사람들이 호의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그리스도인의 선한 삶이 세상 사람들의 적대감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어떤 이유를 붙여서라도 핍박하며 해치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는 것이라면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선을 행하는 자신을 해할 수 없는 계획입니다. 하나님은 당하는 어려움을 통해서 성숙시키시고 삶의 폭을 확장시키시려는 계획이 있습니다. 어느 날 꾀꼬리가 풀이 죽어 있어 현자가 물었습니다. “꾀꼬리야! 너 왜 요새 노래가 없니?” 꾀꼬리가 불평하며 말했습니다. “개구리 소리가 하도 커서 제 소리가 소용없잖아요?” 그때 현자가 말했습니다. “네가 조용히 있으니까 개구리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거야.” 세상이 악하다고 침묵하거나 불평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장 소중한 일은 탄식소리가 나는 곳에 가서 희망찬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어떠하든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누가 나를 해하리요’ 노래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이 큰 것에 길들여져서 하나님의 은혜가 작아 보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작아 보여도 그 은혜가 세상의 대적들을 잠재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답게 살려고 하는 믿음을 통해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우리를 해할 수 없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부디 하나님의 의를 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선을 행하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