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음 박종월 장로의 저서‘1004번 안경 버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아이가 있었습니다. 항상 먹을 것을 찾아 헤매 '묵보'라는 별명이 붙어버린 그에게 세상은 절망으로만 가득해 보였습니다. 청년이 되어 서울로 올라온 그는 서울역에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주먹으로 살아남는 방법을 배웠으나 결국 수배자가 되고 맙니다. 망가져버린 그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은 아내의 눈물의 기도를 통해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초등학교만 나온 그와 아내는 50세에 고등학교 졸업 검정고시와 대학 입학 검정고시를 거쳐 수학능력시험을 치르고 안경광학과에 입학하여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2년부터 자신의 달란트를 이용하여 안경 전도라는 특수한 봉사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박종월 장로는 7년간 지구 두 바퀴 반의 거리를 다니며 1만 4천 명에게 안경을 맞춰주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달한 감동적인 안경 전도 이야기를 통해 아픔뿐인 삶에 짓눌린 모든 사람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특히 25인승 버스를 ‘달리는 안경원’으로 고쳐 전국을 찾아다니며 어르신들의 눈을 검안한 다음, 안경을 맞춰 드리며 육의 눈을 밝혀드릴 뿐 아니라 복음을 전달하여 영의 눈을 뜨게 하는 박종월장로와 안효숙권사 부부의 삶과 신앙은 나눌수록 커지는 기쁨과 감사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박장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수를 만나고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내 삶이 나를 위한 삶에서 주님과 이웃을 위한 삶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한 사람의 평신도 사역자를 통해서 무려 1만 4천명이 아름다운 섬김을 받고 복음을 들었습니다. 어찌 이러한 평신도 사역을 교역자들의 사역보다 작다 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을 들은 한 사람, 아니 복음을 듣고 변화된 평신도 사역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을 바꾸어 가고 계신 것입니다. 평신도는 희랍어로 ‘라오스’인데‘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에는 제사장과 백성의 계급이 있었지만 신약시대에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목사가 교회를 향해 파송된 성직자라면 평신도는 세상을 향해 파송된 성직자입니다. 이 시대는 평신도 사역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때입니다. 평신도가 사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평신도가 일군이 되어야 합니다. 평신도가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평신도는 광범위한 삶의 현장에서 다양한 직종을 가지고 일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를 살펴보면 사도들의 역할도 컸지만 평신도들의 역할도 컸습니다. 교회는 1%의 교역자와 99%의 평신도가 존재합니다. 평신도들이 깨어 일어나 세상을 복음화 시켜나가는 주력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사울은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갔다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예수를 증거 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를 핍박하던 자가 도리어 예수를 전하자 유대교의 핍박하던 자들이 가만두려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그들의 핍박을 피해 다메섹에서 도망쳐 하나님의 사역을 준비하였습니다. 사도들에게 예수의 부르심을 받았음을 이야기했지만 사도들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제까지 핍박자로서 스데반을 죽인 자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니 믿어 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때 바나바가 나섰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부름 받았음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사울로 인해 오해를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을 극구 변호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을 교회로 인도하여 교인들과 교제하도록 해주었습니다. 바나바가 중재자의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바나바의 중재로 사울은 사도들에게 소개되었습니다. 사울이 바울되어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 받아야 할 평신도는 바나바입니다. 초대교회가 부흥했던 요인은 바나바와 같은 평신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나바가 어떤 사람이기에 본이 되었습니까? 첫째로 섬기는 사람이기에 요한 웨슬리(John Wesley)는 섬기는 일을 실천한 선구자입니다. 그의 주변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을 먹이고 입히고 치료하고 가르치는 것이 전도자 웨슬리의 생활이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요, 가난한 사람들의 목자요,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사도로 살았습니다. 웨슬리의 경대서랍 속 안쪽 깊은 곳에 비밀 서랍이 있었는데 그곳에 항상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기 위해 준비된 돈이 있었습니다. 웨슬리는 의심이 많던 부인이 눈치 채지 못하게 비밀서랍의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데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웨슬리는 의학을 공부하고 치료법을 연구하여 고통 받는 병자들을 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특히 돈이 없어 병원에 못 가는 사람들을 찾아가 병을 진단하고 치료를 시도하였습니다. 초기 감리교 집회소들은 대부분 신앙훈련 모임만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친교와 도움과 정보를 얻는 센터요, 가난한 집 자녀들의 학교요, 약국과 병원이요, 가난한 상인들을 위한 신용협동조합이었습니다. 예수가 가는 곳마다 언제나 가난한사람들, 장애인들, 병자들, 어린아이들과 과부들 같은 소외계층의 사람들이 따랐던 것처럼, 웨슬리의 경우도 같았습니다. 성경적 개념에서 지도자는 다른 사람을 잘 섬기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27절입니다.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바나바는 구브로 사람으로서 상당한 부자였습니다. 초대교회에 재산을 팔아 교회에 헌납하여 과부들을 위하여 구제할 수 있도록 하였다는 것은 큰 사건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요셉의 본명대신 바나바 즉 권위자, 격려자, 위로자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바나바의 이름을 통하여 바나바의 섬김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의 자세를 가지고 주님의 교회를 제대로 섬기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섬기는 것을 종으로서가 아니라 자기를 드러내는 기회로 이용하려는 유혹이 항상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거듭난 성도들은 주께 대한 믿음을 고백할 때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고 주의 뜻대로 살겠다고 다짐을 해야 합니다. 종의 자세로 섬기십니까?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불평하거나 자랑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주님을 더 잘 섬길 수 있을까 궁리하십니까? 묵묵히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십니까? 바나바는 스스로 종이 되어 섬기는 모델이었습니다. 바나바의 섬김을 본받는 하나님의 공동체에 필요한 평신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세우는 사람이기에 1892년 동유럽의 한 마을에 소년이 태어났습니다. 소년이 어렸을 때 성당에서 신부를 도와 성만찬의 포도주 잔을 들고 있다가 실수로 포도주를 바닥에 쏟았습니다. 이것을 본 신부는 소년의 뺨을 때리며, “칠칠치 못한 녀석! 잔도 제대로 못 들어? 그따위로 하려거든 당장 나가!”하며 교회에서 쫓아버렸습니다. 소년은 교회를 영영 떠나버렸고 나중에 무신론자요 공산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그 소년이 바로 유고의 독재자가 된 티토(Josip Broz Tito)였습니다. 1895년 미국 일리노이에서 한 소년이 태어났습니다. 이 소년도 어렸을 때 신부를 도와 성만찬의 포도주 잔을 들고 있다가 실수로 포도주를 바닥에 쏟았습니다. 이것을 본 신부는 소년에게, “괜찮아. 나도 어렸을 때 그런 실수를 한 적이 있어. 다음번에는 잘할 거야. 너는 앞으로 커서 훌륭한 신부가 될 거야” 따뜻한 격려의 말을 해주었습니다. 소년은 나중에 커서 미국인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신부가 되었습니다. 그 소년이 바로 풀턴 쉰(Fulton J. Sheen) 대주교입니다. 똑같은 실수를 했으나 한 소년은 비난을 받고 교회를 떠나 무신론자인 독재자가 되었고, 다른 한 소년은 격려를 받고 인정받는 종교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수하고 잘못이 보여도 격려하는 마음으로 다른 이를 세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1장25-26절입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바나바는 바울보다 복음에서 앞섰습니다. 교회에서 앞섰습니다. 직분에서 앞섰습니다. 선교에서 앞섰습니다. 긍휼히 여기고 위로하는데도 앞섰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자신을 알아주기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나서기보다 다른 사람을 세워 그를 더 빛나게 만들었고, 자신이 세운 사람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빛나게 만들었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이야말로 안디옥 교회에 합당한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울을 찾으러 멀리 떨어져 있는 다소까지 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나바는 사울이 하나님으로부터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동역자로 사울을 세우기 위해 다소까지 직접 갔던 것입니다. 바나바는 세우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 바울이 되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후에 안디옥교회는 바나바와 사울을 이방인 선교사로 파송하게 되었습니다. 남을 세워주려고 하는 바나바와 같은 평신도가 있기에 이방 선교가 가능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바나바처럼 남을 세우는 평신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헌신된 사람이기에 돼지와 소가 서로 주인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먼저 돼지가 소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말이야, 기분이 나쁜 것이 한둘이 아니야. 나나 자네나 주인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주지 않는가? 내 몸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지. 삼겹살, 목살, 등 부위별로 나를 맛있다고 먹고, 심지어 내 머리까지 눌러서 먹고, 내장까지도 버리지 않고 다 먹지 않나? 내가 이렇게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는데 왜 나를 미련하다고 말하면서 자네는 그렇게 예뻐하는가?”돼지의 말을 듣던 소가 대답을 했습니다. “글세, 자네 말이 맞기는 하군, 그런데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나는 살아 있을 때 주인을 위해 논도 갈고, 밭도 갈고, 짐도 날라주고, 태워주고, 젖도 짜내서 마시게 하지만, 자네는 살아있을 때 주인을 위해 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고, 단지 먹기만 할 뿐이 아닌가? 그러니 나를 자네보다 더 사랑할 수밖에 없지.”살아있는 동안 자신을 희생하여 헌신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공산주의자가 말했습니다. “나는 기독교인들을 경멸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들을 위해 피 흘려 죽었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자신들을 위해 죽은 그분을 위해 헌신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공산주의가 나에게 피 한 방울을 흘려주지 않았지만 공산주의를 위해 내 생명을 바칠 수 있기 때문이다”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를 위해 무엇을 헌신할 수 있습니까? 사도행전 4장 36절입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바나바의 형일 것으로 추측되는 마가의 부친은 상당한 재력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나바 자신도 밭을 팔아 교회에 바치는 것을 보면, 바나바 역시 상당한 재산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재력이 어느 정도였는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재산을 주님의 교회와 복음을 위하여 헌신했다는 사실입니다. 120명이 들어갈 수 있는 다락방을 최초의 예배당으로 드린 것이나, 누구보다 먼저 자신의 토지를 팔아 교회에 바친 것들이 바로 바나바의 헌신을 보여 준 것입니다. 바나바는 물질만 헌신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생애를 바쳐 복음의 일군으로 살았습니다. 이방을 위한 본격적인 선교사로 헌신한 것은 바나바가 처음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시간과 물질을 얼마나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복음을 위해서 아낌없이 드리는 헌신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신앙입니다. 바나바의 헌신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1960년대 인도네시아에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공산주의자들이 국가를 전복하려던 상황이었는데 3천개의 섬중에 인구 100만명밖에 안 되는 티몰섬에서부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1년 동안에 무려 8만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부흥 운동의 시작은 라투왈루라는 평신도의 기도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웨일즈 부흥 운동은 13년간 하루 같이 성령 충만하기를 기도해 왔던 광부 출신 평신도 이반 로버츠 (Evan Roberts)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하나님! 저를 깨뜨려 주시옵소서. 저를 부수어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로 9개월 만에 10만 명의 사람들이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평신도는 교회의 주체입니다. 평신도라고 해서 정기적으로 교회에 와서 예배에 참여하고 돌아가면 의무가 끝난다고 생각하는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교인이라기보다 관람객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평신도들이 잠자는 교회는 결코 비전을 가질 수 없습니다. 구경꾼들로 가득 찬 교회는 미래에 대한 비전이 없습니다. 평신도 사역자가 깨어있어야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바나바 같은 평신도가 필요합니다. 부디 섬기는 평신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세우는 평신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헌신하는 평신도가 되시어 교회를 부흥시키는 주체가 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