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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1. 새 힘을 주신다 이사야40:27-31

2013.12.1.          새 힘을 주신다       이사야40:27-31

I. 잘 넘어지는 연습


옛날에 꾀많은 당나귀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무거운 소금가마를 짊어지고 먼길 오고 가는데 쓰임받던 당나귀였습니다. 어느날 개울을 건너다가 쭈욱 미끄러져 개울 한가운데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한참 버둥대다 일어나보니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렇게 무거웠던 소금가마가 많이 가벼워진 것입니다. 당나귀는 깨달았습니다.

‘아 물에 넘어지면 짐이 가벼워지는 구나.’

소금가마를 지고 개울을 건널때마다 한번씩 철퍽 철퍽 넘어졌다가 한참이나 드러누워 있다가 일어납니다. 그때마다 소금가마는 영락없이 가벼워졌습니다.

어느날 또 짐을 지고 개울을 건너갑니다. 그날의 짐은 덩치는 큰데 별로 무겁지는 않았습니다. 여느 때처럼 개울 가운데 철퍼덕 넘어졌지요. 한참이나 누워 버둥대다 일어나니까 허허 이거 보세요. 짐이 열배 스무배나 무거워진 겁니다. 그날의 짐은 소금가마가 아니라 솜 가마였습니다. 솜에 물이 묻어서 얼마나 무거운지 죽을 고생을 했다 하는 얘기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치 않는 자리에서 넘어지기도 하고 때론 자기 꾀에 넘어지기도 합니다. 넘어지지 말아야 될 자리에서 넘어져서 봉변을 당하기도 합니다. 특별히 신앙생활에서 넘어지거나 자빠지거나 쓰러져서는 안됩니다.


학생들이 유도를 배울 때 맨먼저 하는 일은 상대를 쓰러뜨리고 집어 던지는 훈련이 아닙니다. 넘어지는 훈련을 먼저 합니다. 하루내 한달내 제대로 넘어지는 훈련을 합니다. 소위 “낙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대로 넘어지는 훈련을 해야 다시 일어나 상대를 공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련한 축구선수는 공만 잘 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의 태클을 잘 피할 줄 알아야 합니다. 축구선수가 태클이 들어올 때마다 걸려 넘어지고 발목을 다치는 선수는 제대로 공격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내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넘어지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태클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넘어질 때마다 쓰러져 낙심만 하고 있으면 한 걸음도 전진할 수가 없습니다. 태클이 있을 때마다 상처받아 누워있으면 꿈을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공격이 있을 수 있는 것이고 실패하여 넘어질 때도 있는 것이고 많은 갈등의 골이 깊어질 때도 있는 것입니다. 때로 공격과 갈등, 비판을 어느정도 즐길 줄 알아야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교우들은 잘 넘어지고 또 일어날 때 벌떡 일어나서 승리하는 신앙생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II. 희망의 근거: 하나님


오늘 본문은 이사야서입니다.

이사야 1장부터 39장까지는 이스라엘이 실수하고 넘어지고 깨지는 이야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넘어져서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많이 듣습니다. 백성들 가운데 절망과 낙심 그리고 한숨소리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40장에 와서는 희망의 메시지가 선포됩니다.

지금까지 우울하고 어두웠던 메시지를 대신하여 밝고 빛나는 희망의 메시지가 선포되어집니다.


성경연구가들은 39장까지 그리고 40장부터 너무나 달라집니다. 내용도 너무나 달라집니다. 39장까지를 제1이사야서 40장부터를 제2이사야서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첫 번째 말씀 27절입니다.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름이 달라집니다.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사40:27) 왜 절망만 하고 있느냐. 그 얘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동안 몹시 피곤에 지쳐있었던 것 같습니다. 쓰러져 넘어져 있는 백성이 수를 헤아릴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젊은이들이 방황합니다. 지도자들은 나라가 갈 길을 제시하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두 쪽이 갈라져서 싸움만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며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28절 29절입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사40:28-29)


지도자들도, 어리석은 백성들도 하나님 앞에 돌아오면 하나님 안에 다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진보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이 딱 나누어서 한편에서는 우리가 앗수르를 붙들고 살아야 한다. 다른 한편은 아니다. 바벨론을 붙들어야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사회는 온갖 갈등으로 서로를 비난하고 원망했습니다. 바로 이때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외칩니다.


30절 31절입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40:30-31)


요즘 신문을 펼치고 방송을 보면 여야 정쟁에 종교계 보수단체와 진보단체까지 끼어들어 작금 정국과 우리사회는 혼란에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거기다 한국과 중국, 미국과 일본, 태평양 연안국가들의 갈등의 골이 날로 깊어져만 가고 있습니다.


리나라는 지금 세계 그 어느나라 어느 민족보다 갈등지수가 높습니다.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입만 열면 비판 비난입니다. 세계에서 갈등지수 제4위 국가가 대한민국입니다. 계층간의 갈등, 보수진보의 갈등, 세대간의 갈등, 지역간의 갈등, 남북의 갈등...  이 갈등 구조를 지키기 위해 소요되는 비용이 국가 1년 예산에 버금가는 막대한 비용이 든다고 합니다.

최근 국정원 댓글 사건을 두고 벌어지는 일년의 사태를 두고 어떻게 봐야 하느냐고요?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도자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종교, 특히 기독교의 예언자적 사명 중 하나입니다. 나무랄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정체성마져 흩으려 트리면서 너무 쉽게 비판하는 것은 삼가고 조심해야 될 일입니다.

더더구나 미리 심판을 내리고 종교가 어느 정파를 대변하는 전위부대적 역할을 하는 것은 에언자적 사명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보수단체의 어떤 성명이든 진보단체의 성명이든 여러분 그것이 어떤 신학적 올바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성향일 뿐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정치보다 훨씬 더 높은 자리에서 나라와 민족 역사가 나아가야 될 방향을 바른 길로 제시하고 우리가 그 길로 백성들을 인도해 가야 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본문에 나오는 “소년”은 앗수르를 얘기합니다. “장정”은 바벨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진보와 보수가 나누어서 서로들 이 나라 의지하자, 저 나라 의지하자. 이 길로 가자, 저 길로 가자. 가진 자들 편에 서야 된다. 민중편에 서야 된다. 싸움 하는 것. 이때 선지자가 나타나서 말합니다.

“하나님이 심판의 몽둥이를 드시면 바벨론도 앗수르도 망한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만 영원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만이 역사의 주인이시다.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야 된다.”

너무 원론적인 얘기라고요? 그러나 기억하세요. 이것만이 진리입니다.


우리 민족이 일제강점기에 있을 때 백성들이 절망하고 좌절하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잠자던 민족정신을 일깨웠고 절망하던 백성들에게 희망을 선포했습니다. 해방이후 6.25이후 백성들이 가난에 시달리고 있을 때 방황하고 있을 때에 절망하던 백성들에게 희망을 선포했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교회만이 이 민족의 소망입니다.”

외치면서 위정자들이든 백성이든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 가는 사명이 교회에 있습니다.


III. 하나님을 앙망하라


하나님 안에서 새희망을 찾은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하나님을 앙망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새 힘을 얻으리니」입니다.


마치 풀과 나무들이 태양을 향하여 하늘을 향하여 뻗어 올라가듯이, 우리의 믿음이 성장되고 뻗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꽃이 태양을 바라보다가 열매를 맺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모하고 바라보는 사이에 우리 인생에 아름다운 열매가 맺혀지는 것입니다.

불꽃이 하늘을 향하여 타오르듯이 우리 삶의 열정이, 우리 가슴속에 기도의 불덩어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타오를 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젊은이가 등산을 하기 위해 산 속에 들어갔습니다. 길을 잃고 한 나절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산을 향해 올라가다가 숲이 너무나 깊고, 또 산세가 험하고 복잡해서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아무래도 돌아가야 되겠다 싶어서 언덕 밑으로 내려왔습니다. 더 길이 복잡해 졌습니다. 도무지 길을 찾을 수가 없고 마을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때 한 현인이 나타나더니 “젊은이 길을 잃어버렸구만. 길을 잃어버릴 수록, 앞이 보이지 않을 수록 내려가면 점점 더 망한다네. 더 깊은 어려움에 빠진다네. 이보게. 이럴 때 일수록 언덕 위로 올라 가게나. 정상에 올라가면 언덕이 보이고, 저 마을이 보이고, 내려갈 길이 보인다네.”


여러분, 앞길이 캄캄해져 갈 때, 시대가 암담해져만 갈 때, 역사가 암흑가운데 헤매고 있을 때, 우리 믿음이 올라가면 길이 나타납니다. 길이 보입니다. 가야 할 길이 열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어려울수록 사업을 확장한 것 귀한 일이지요 그러나 우리믿음의 그릇을 확장해야 합니다.

세상적으로 올라가는 것,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애쓰는 것 마땅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믿음을 향상시켜야 할 때입니다.

신앙이 치솟아 올라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야할 길을 보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