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롬 8:31~39
부르스 올슨(Bruce Olson)은 400년 동안 외부 사람이 들어가지 못했던 콜롬비아 정글의 모틸던 부족에게 복음을 전한 선교사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는 16살 때 선교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모틸던 부족에게 아무도 복음을 전하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져 19살 때 그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기주의적이며 잔인한 모틸던 부족은 접근해오는 사람들을 죽이고, 아이들이 고아가 되면 표범에게 던져 죽게 하고, 나이 많은 노인들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정글을 헤치고 들어간 올슨 선교사는 화살을 맞고 붙잡혀 있다가 간신히 탈출했습니다. 그러나 치료를 받고 다시 들어갔습니다. 붙잡혀서 매를 맞고 창에 찔리며 온갖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는 하나님의 권세를 믿었습니다. 모틸던 부족들은 그의 얼굴에 늘 기쁨이 있는 것을 신기하게 여겼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여기에 왜 들어왔는가?” 호기심이 생긴 그들은 대화를 하면서 하나 둘 하나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후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했으며 노인까지 돌보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부족 마을에 최초로 보건소와 학교가 세워졌습니다. 자기 부족만 아니라 이웃 부족까지 돌보게 되었습니다. 포악했던 부족 마을이 복음의 센터가 되어 인근 지역을 변화시켰습니다. 한번은 올슨 선교사가 반군의 총을 맞고 붙잡혔습니다. 4개월 동안 묶여 지냈지만 웃음을 잃지 않자 반군들이 “도대체 무엇 하는 사람이요? 왜 이 정글에 들어와 있소?” 라고 묻자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요리법도 가르쳐주고, 글도 가르쳐주고, 치과 진료도 해주었습니다. 얼마 후 게릴라 120명 전원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올슨 선교사는 온갖 위험 속에서 40년 동안 부족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밀림을 찾아간 기자가 물었습니다.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데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까? 하나님께 원망이 들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그가 대답합니다. “저는 그런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구출되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책임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대신 제가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움을 견딜 수 있었던 특별한 비결은 없습니다. 다만 저는 매일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오늘 저는 살아있습니다. 저는 시간을 창조적으로 사용하고 싶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당신에게 잘 쓰임 받겠습니까?” 나이 칠십이 되어 “은퇴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라고 물었더니 대답합니다. “은퇴라니요. 저는 아직 젊습니다. 물론 자만하지 않습니다. 저는 밀림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살아있는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저를 이곳으로 데려오신 분은 하나님이었습니다. 혼자서는 결코 이곳에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 혼자서는 온갖 문제들, 끝없는 괴로움, 위험과 싸워 이겨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강한 임재를 경험하지 못했더라면 집을 떠나는 일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저를 위하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위하심이 함께 했기에 잔인한 부족을 변화시키고 복음의 타운으로 만든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단의 대적 앞에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바울은 사단의 대적 행위 앞에 반어적 질문법을 사용하여 성도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권을 주셨습니다. 이는 남을 파괴하거나 억압하는 특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이 특권을 누리는 자는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는 자이며 주위에 있는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어떠한 특권을 누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첫째로 누가 대적하리요
김장환 목사는‘하나님을 바라보라’는 저서에서 ‘10대 해방자’라는 선교단체를 이끄는 세익 게이터(Sehik Gator)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중 3때부터 마리화나를 피우기 시작했고, 아편을 맞는 마약사범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17세 때 이미 전과가 17범이 되었습니다. 딱하게 여긴 아버지가 기도하던 중, 아들과 헤어진 며느리를 데리고 함께 부흥회에 참석했습니다. 그 날 저녁‘심판’에 대한 설교를 듣는 데 성령이 역사하심으로 아들도 며느리도 예수 믿고 새 가정을 꾸리게 되었습니다. 아들은 신학을 공부한 후, 청소년들을 이끄는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세익 게이터가 말합니다. “수많은 대적이 나를 넘어뜨리려 하였고 악한 마귀가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수와 미워하는 악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말씀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궁극적인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본문 31절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바울사도는 세상에 존재하는 무엇이라도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를 대적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왕이 지극히 아끼는 사람에게 아무도 함부로 못하듯이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만물이 어떠한 힘이나 압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존재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직접 성도를 위하신다고 바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특별히 위하시는 존재인 성도와 맞서 대적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위하시고 우리를 지탱하시는 분이되심으로 담대하게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세상의 모든 것을 허락하셨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성도에게 주어진 놀라운 특권입니다. 우리가 이런 근본적인 특권을 인식하고 누리고 살 때 얼마나 큰 힘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기에 패배하지 않습니다.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안 되는 것 같고 문제가 있는 것 같아도 결국 잘 되기 위한 과정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께서 비로소 역사를 시작하실 것입니다.
둘째로 누가 정죄하리요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종교개혁을 행할 때 일화입니다. 한번은 서재에 있는데 마귀가 나타나더니 종이 한 장을 던져 줍니다. 종이에는 루터가 범한 죄의 목록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루터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었고 앞이 캄캄해지며 맥이 풀렸습니다. 과거 일이라 잊어버리고 있었던 부끄러운 죄까지 자세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마귀가 루터에게 “이렇게 더러운 네가 무슨 종교개혁을 한다고? 너나 바르게 살아라. 너의 죄를 어떻게 할 것이냐”라며 협박했습니다. 그러자 루터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 순간 괴로워하는 루터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루터야! 너의 모든 죄는 나의 피로 깨끗이 씻었다. 그러므로 너를 정죄 할 자가 아무도 없느니라.” 루터는 정신이 들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본문의 성구가 생각났습니다. 얼마나 기뻤던지 마귀를 향하여 잉크병을 집어던지며 크게 소리쳤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누가 나를 정죄하겠느냐?” 루터가 외치는 순간 마귀는 사라졌습니다.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하고 낙심시키는 것이 마귀의 근본입니다. 이러한 마귀의 궤계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34절입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여기의 정죄한다는 것은 고소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무죄를 선언하셨기 때문에 누구도 성도들을 고소할 수 없습니다. 비록 과거에는 타락한 존재였지만 그리스도의 보혈로 이미 무죄한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욱 확실한 보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는데 감히 누가 성도를 고소할 수 있습니까?
선지자 이사야는 이사야서 50장 9절을 통해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자녀들을 정죄할 수 없으며 혹 정죄한다 해도 그것은 좀에게 먹혀 힘없이 해어지는 옷과 같은 세력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과 죄책감이 있을 때 예수의 피가 우리를 죄에서 자 하게 하시며, 사망과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모든 상처와 죄의식에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더욱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누가 끊으리요
27세에 죠지 루이스 프렌티스 목사와 결혼한 엘리자베스 프렌티스(E. Payson Prentiss)는 병약한 몸으로 누워있는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결혼한 지 11년 되던 해, 전염병으로 두 자녀를 다 잃어버리는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그녀는“하나님께 헌신된 목회자의 가정이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느냐?”며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랑하는 프렌티스야, 많이 슬프냐?” “예, 무척 슬픕니다.” “그러면 너에게 묻겠다. 너는 저주와 사망을 대신하여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너 대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건에 대하여 슬퍼해 본적이 있느냐?” 프렌티스는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몰랐던 가슴을 치며 회개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세상의 기쁨만 위했습니다. 이제 하나님만 바라보겠습니다. 이것이 평생의 소원이 되고 기도제목이 되게 하옵소서” 그녀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찬송시를 써내려갔습니다. 그것이 찬송가 314장입니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엎드려 비는 말 들으소서 내 진정 소원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이전엔 세상 낙 기뻤어도 지금 내 기쁨은 오직 예수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이 세상 떠날 때 찬양하고 숨질 때 하는 말 이것 일세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그 후 하워드 돈(W. Howard Doane)에 의해 작곡된 찬송은 미국 대부흥운동 당시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다만’‘내 진정’‘더욱 사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환난에서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 핍박과 기근과 적신과 위험에서도 여전히 함께 하시는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였습니다. 현재의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현재의 그 누구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결코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본문 35절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여기서‘어떤 일들이’라 표현하지 않고 ‘누가’라고 한 것은 어려움들이 사람을 통해 오기 때문입니다. 환난은 다른 사람들이 가져다주는 고난입니다. 곤고는 환난을 통해 마음속에 다가오는 괴로움입니다. 박해와 기근, 적신, 위험, 칼 같은 어려움은 핍박하는 사람들을 통해 받는 고통입니다.
그 어떤 괴로움도, 그 어떤 환경도, 그 어떠한 고통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사 넉넉히 이기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된 사랑의 끈을 끊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는데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습니까? 세상이 우리를 버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끝까지 우리를 위하시기 때문입니다.
구필화가 한미순은 ‘홀로 있어도 혼자가 아닌’ 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입에 붓을 물고 화선지에 선을 긋는 순간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꼈습니다. 치아가 뻐근하고 입에선 침이 흘러나와 여간 고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입안이 다 헐어 하루에도 수십 번 붓을 뱉어버리고 싶었지만,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다시 붓을 물었습니다.” 그녀는 세계 구족 화가협회에 등록되어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지원까지 받았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입으로 그림을 그리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절망 가운데도 저는 항상 감사드립니다. 뜻밖에 찾아온 사고로 인한 전신마비의 고통 가운데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절망하며 삶을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음에 감사했습니다. 돌아보니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언제나 함께 했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홀로 있어도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위하시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내게 생명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절망의 상황에서 원망과 불평을 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절대 감사로 나아가는 그녀야 말로 하나님이 위하시는 자의 모습이 아닙니까?
더 이상 과거에 붙잡혀 있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사랑받는 모습을 보며 믿음으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는 존재임을 믿기에 가슴을 펴고 크게 외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누가 나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누가 나를 정죄하리요? 하나님과 하나 되었는데 누가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담대하게 선포함으로 넉넉히 이기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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