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음 아프리카의 외진 마을에서 의료봉사를 하던 선교사가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마을에 외국 유학을 하고 돌아와 축산을 하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조국을 위해 일해야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인재였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독특한 결혼 풍습이 있었습니다. 청혼을 할 때 청년이 암소를 끌고 처녀의 집으로 가서 외칩니다. “암소를 받고 딸을 주세요” 일등 신부에게는 암소 세 마리, 괜찮은 신부에게는 암소 두 마리, 그리고 보통 신부라면 암소 한 마리로 결혼을 승낙 받을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선교사는 청년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청혼하러 암소 아홉 마리를 몰고 가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도대체 청년이 찾고 있는 처녀가 누구이며 누구의 집으로 가는 지 궁금하였습니다. 한참을 걷던 그가 허름한 집 앞에 멈춰 섰습니다. 그리고 딸을 달라고 외칩니다. 처녀는 마르고 약해보이는 초라한 여자였습니다. 암소 한 마리로 청혼할 상대에 불과하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선교사는 봉사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왔지만 청년을 생각할 때마다 왜 아홉 마리의 소를 몰고 보잘 것 없는 처녀에게 청혼을 했는지 궁금해지곤 했습니다. 그 후 세월이 지났습니다. 다시 그 마을을 찾아간 선교사는 사업가가 되어있는 그를 만났습니다. 저녁 식사에 초대를 받아 식사를 하며 암소 아홉 마리를 건넨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웃을 뿐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커피를 들고 한 여인이 들어왔습니다. 아름답고 우아한 여인이었습니다. 유창한 영어와 상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미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선교사는 마음속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다른 아내를 맞이했구나. 하긴 저 정도는 되어야 어울리지” 그 순간 그가 천천히 말을 시작했습니다. “저 사람이 그 때 청혼을 했던 여인입니다.” 선교사가 놀라는 모습을 보이자 그는 말을 이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적부터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마을에선 몇 마리의 암소를 받느냐가 여자들의 세계에선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사실 아내는 한 마리의 암소면 혼인을 승낙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사랑한 여인이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한 마리 암소 값에 정하고 평생을 사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두 마리나 세 마리를 받았던 처녀들과 비교하면서 움츠려져 살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몇 마리의 암소를 받았느냐가 평생 동안 자기 가치를 결정할 수 있기에 아홉 마리를 생각해낸 것입니다. 결혼하고 아내에게 공부를 하라거나 외모를 꾸미라고 요구한 적도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아내를 사랑했습니다. 아내가 차츰 저의 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나에게 암소 아홉 마리의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후 아내는 암소 아홉 마리에 맞는 존재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더욱 건강해지고 아름다워져 갔습니다. 아내는 결혼 할 당시의 모습보다 지금 자신의 모습을 더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수근 대던 마을 사람들도 아내의 밝은 미소를 사랑합니다. 누군가 당신에게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해야 합니다. 누군가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면 자신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해야 합니다. 그것이 제가 암소 아홉 마리로 배운 인생의 교훈이었습니다.”하나님은 암소 아홉 마리보다 귀한 외아들을 우리에게 주시며 최고의 가치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본문에 포도원 주인은 품꾼을 얻고자 새벽에 나섭니다. 하루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약속하고, 품꾼들을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삼시에 나가보니 장터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일은 시작했지만, 주인은 그들도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도록 했습니다. 육시와 구시에도 그리했습니다. 십일시에도 나가보니 아직까지 서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일을 끝마칠 무렵인데도 포도원에 들어가라고 말합니다. 저물어 주인은 품꾼들을 불러 삯을 지급합니다. 나중에 온 자로부터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고 합니다. 나중에 온 사람들도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한 시간도 채 일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온 자들은 더 많은 삯을 받으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원망합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기 위한 대목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고 싶어 하십니다. 늦게까지 일을 얻지 못해 기다렸을 품꾼도 긍휼로 대하셨고 먼저 온 자들에게도 합당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품꾼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을 누구도 원망할 수 없다는 교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에 따라 은혜를 베푸십니다. 가진 능력을 보고 쓰지 않으셨습니다. 은혜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거기에 기쁜 마음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불평이 아니라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랑은 잊어가고, 형식적 신앙생활만 남지는 않은 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신앙은 의무감에서 감당하는 고역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함에서 오는 기쁨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품꾼은 우리의 모습이요, 주인은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나중 온 품꾼은 특별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나중 된 자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은혜는 과연 어떠한 은혜입니까?
첫째로 불러주신 은혜 성 프란치스코 (Saint Francisco)에게 한 제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의 생애 속에 놀라운 기적이 나타날 수 있는 이유와 선생님이 가지신 성자와 같은 인격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그 때 프란치스코는 대답을 했습니다. “그거야 간단하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지구를 내려다보셨지. 그리고 가장 추한 사람은 누구인가? 가장 불결한 삶으로 고통하고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찾으셨네. 하나님의 눈길은 나에게 머물렀지. 나를 본 순간 하나님은 박수를 치셨지. 저 사람이야! 저 사람을 불러 내가 사람의 생애를 놀랍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지.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이유라네” 스스로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자학하고 있습니까? 더럽고 추한 죄인이라고 부끄러워하고 있습니까? 주님은 부족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것이 어찌 큰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본문 6절입니다. “제 십일 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하나님은 은혜로 사람을 부르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먼저 되었다는 경력, 먼저 자리를 잡았다는 텃세, 경험이 있다는 것을 앞세우고 우월감을 가지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사실에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 있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회에서 쌓아올린 스펙, 경력으로 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아닙니다. 은혜의 하나님 앞에 우월감은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세우셨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먼저 예수를 믿게 하여 우리를 세우셨습니다. 먼저 교회에 뿌리를 내리게 하시고 일꾼으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것인데 우월감이 왜 필요합니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아무 자격도 없는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만이 나와야 함이 마땅합니다. 둘째로 맡겨주신 은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무수한 고난 끝에 백화점 왕이 되고, 재무부 장관, 미국의 10대 재벌에 들어가고, YMCA를 창설한 존 워너메이커(John Wanamaker)는 100만 달라를 드려 예배당을 건축하고 봉헌식에서 눈물을 흘리며 고백했습니다. “제가 교회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 모두 줄을 서서 추수감사 예물을 바치는데 가난했던 나는 빈손으로 온 것이 괴로웠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벽돌을 굽는 아버지 공장으로 찾아가 벽돌 한 수레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목사관을 찾았습니다. 잠버드 목사는 내게 손을 얹고 축복 기도를 해주셨습니다. 그 후 30여년이 지난 오늘 하나님의 축복으로 혼자의 힘으로 100만 달라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었으니 이 큰 은혜를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부르시고 많은 일을 맡겨주셨기 때문에 얻어진 축복입니다.” 본문 7절입니다.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시니” 주인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그냥 하루를 보냈을 것입니다. 일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비극입니까?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할 일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합니다.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써 주시기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들을 쓰실 때 원칙이 있습니다. 손익의 계산이 없이 종들에게 일을 맡기십니다. 본문에 보니 나중에 쓴 품꾼은 한 시간만 일하였습니다. 이는 일을 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돕기 위해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익을 생각하고 일을 맡기신다면 우리는 일을 맡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자격도 없는 우리에게 일을 맡겨주심이 어찌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셋째로 공평하신 은혜 뇌성마비 송명희 시인은 몇 미터 떨어진 용변기에 앉기 위해서도 온 몸이 부르르 떨리고, 땀이 범벅이 되고, 용변을 극도의 인내로 참으며 엄청난 사투를 벌인다고 합니다. 또한 그녀는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한 마디 말을 하려면 온 몸 전체의 힘을 목에 싣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에야 간신히 띄엄띄엄 말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시에서 자신을 그렇게 만들어주신 하나님을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누구에게나 기회를 똑같이 주십니다. 그러므로 내게 있는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인정하고, 주어진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은혜를 생각하며 일해야 합니다. 본문 14절입니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우리는 일한 만큼 받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포도원 주인은 노동 시간에 맞게 삯을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절박한 처지에 있는 형편에 맞게 대우를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계산법입니다. 어쩌면 공정하지 않는 것이 은혜일 수 있습니다. 그 예로 우리는 구원 받을 자격이 있어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자비 덕분입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노력이라도 크게 여겨주시고 후하게 셈을 쳐주십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공평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불만을 가져서는 결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율법이 아닌 은혜로 다루시는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시간의 양으로, 봉사의 양으로 공평하신 하나님을 대적하며 불평과 원망을 앞세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아닌 은혜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공평에 감사해야 합니다. 은혜의 감격으로 일해야 합니다. 공적과 보상에 익숙하게 되면 의무적 섬김이 되고 일터는 결국 싸움판이 되고 말 것입니다. 먼저 된 이는 약속대로 삯을 받고 은혜로 일하게 된 이는 주는 대로 받는 것이 하나님의 계산법입니다. 천국은 일한만큼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시는 대로, 처분하는 대로 주인의 뜻에 맡기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다 맡겨야 합니다. 봉사는 시간을 많이 했느냐의 양이 문제가 아닙니다. 주어진 일을 감당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나 같은 사람을 충성되이 여겨 일을 맡기셨다는 태도와 마음을 보십니다. 직분을 받았다면 억지로 봉사하지 말아야 합니다. 남보다 헌금 더하고 기도 더하는 삶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보이려고 하거나 보상을 요구한다면 어찌 복이 되겠습니까? 은혜로 주시는 삯에 감사해야 합니다. 토레이(R. A. Torrey) 박사가 호주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 강단에 쪽지가 올라왔습니다. “박사님, 저는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습니다. 3대 째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며 25년 동안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했고, 20년 동안 장로로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습니까?”그때 토레이 박사가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공로를 내세워 기도하고 있습니다. 공로의식을 버리기 전까지 기도는 절대로 응답되지 않을 것입니다.” 품삯을 구하지 말고 은혜를 구하여야 합니다. 자신의 공로를 바라보며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통해 감격으로 일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과연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먼저 된 자로서 불러주신 은혜, 일을 맡겨주신 은혜, 분에 넘치는 공평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망각하고 원망부터 하는 것은 아닙니까? 혹여 먼저 되었는데 나중 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나중된 자의 은혜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자격을 보지 않고 불러주신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능력을 보지 않고 일을 맡기신 은혜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일의 양보다 후하게 베푸시는 공평하신 은혜에 감사함으로 충성을 다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