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음 ‘목사님! 전도가 너무 쉬워요’는 손현보 목사의 저서입니다. 이 책에 ‘고추밭을 뽑힌 권사님’이라는 일화가 나옵니다. 권사 임직을 할 때 손목사가 당부합니다. “권사의 직분은 중요한 사명입니다.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 하나님이 주신 직분이 더 중요합니다. 새벽기도에 나오셔서 교회를 위해 기도하십시오.”그런데 임직한 권사가 기도를 나오지 않습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바쁘다고 합니다. 성도들에게 물으니 “그 권사님은 고추 농사를 지으십니다. 얼마나 지극 정성으로 고추농사를 지으시는지 근방에서 제일일 겁니다. 아침저녁으로 고추밭에 가서 벌레도 잡고, 물도 주고, 약도 쳐주느라 바쁘답니다.”권사를 불러 다시 물었습니다. “권사의 직분도 제대로 못하면서 고추밭은 날마다 가신다면서요? 고추농사 때문에 바쁘시다면서요? 그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고추에는 관심이 있고 하나님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까?” 아무리 설득해도 바뀌지 않습니다. 어느 날 기도를 하는데 “네가 하나님의 종이라면 그대로 두면 안 된다. 고추를 다 뽑아버려라”는 마음을 주십니다. 그건 좀 심하다싶어 그냥 넘어가려는데 계속해서 그 마음이 떠나지를 않습니다. 고추밭을 찾아갔는데 고추농사가 잘되어 있었습니다. 손목사는 웃통을 벗고 손으로 고추를 뽑기 시작했습니다. 두세 시간 뽑으니 손에 물집도 잡히고 너무 더워 더 이상 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 남겨두고 돌아갔는데 난리가 났습니다. 권사가 고추밭을 보고 “내가 누구하고 원수를 졌기에 이런 일이 생기나?”라며 실성한 사람처럼 되어 있다는 겁니다. 손목사가 갔더니 권사가 분을 내며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평생 원수 진 사람이 없는데 어떤 죽일 놈이 고추를 다 뽑아놓았습니다. 혹시 그 놈이 집에 불이라도 놓으면 어떻게 합니까?” “권사님, 실은 그 죽일 놈이 접니다.” “왜 목사님이?” “권사님은 지금까지 수십 년 예수 믿고 권사까지 되셨는데,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죽으신 것 때문에 감격한 적이 있습니까? 권사님은 고추밭 때문에 심장이 떨리고 치가 떨린다고 하셨는데 예수 믿고 이렇게 심장이 떨린 적이 있으셨나요? 옆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이 안타까워 고추밭 뽑힌 것처럼 가슴이 찢어진 적이 있습니까?” 그러자 그가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더니 손목사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고추가 뭐라고...” 다음날부터 새벽기도를 나오기 시작했으며 열심히 전도를 하더니 세례 받게 한 사람이 11명이나 되었습니다. 사람마다 고추밭은 다를 것입니다. 직장이나 사업일 수 있고, 자녀일 수도 있습니다. 바쁘게 만들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몰두하지 못하게 한다면 다 고추밭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데 걸림이 된다면 스스로 뽑아야 할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젊음, 재물, 명예를 다 얻었지만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한 채 살아가는 불신 세대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청년은 바리새인들처럼 공적에 의해 의롭게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랍비들은 계명 중에도 영생에 이르는 계명이 있는 가하면 영생에 지장이 없는 어겨도 별 상관없는 계명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기도와 율법과 시편암송, 노인들에 대한 공경을 통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청년은 메시야 왕국에서 영생할 수 있도록 하는 고상한 행위가 무엇인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대답을 들은 청년은 재물을 더 의지하였기에 순종치 못하고 근심하며 돌아가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같이 주님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주 사랑 거친 풍랑에도 깊은 바다처럼 나를 잠잠케 해 주 사랑 내 영혼의 반석 그 사랑 위에 서리” 우리가 주인 삼은 것들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들로 인하여 바빠진 것은 아닙니까? 자신이 만든 신앙의 틀에 갇혀 자신이 원하는 행위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드러난 외형적 크기나 숫자가 아닙니다. 신앙의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의 질문에 대답하신 예수의 명령은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계명을 지키라
유대인들이 전해주는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자기가 언제 죽을지 가르쳐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거절하셨지만 워낙 아끼는 사람인지라, 최후의 날은 안식일이 될 것이라고 귀띔하셨습니다. 그 날 이후 다윗은 안식일마다 계명을 연구하는 데 시간을 바쳤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이 정하신 날이 되자 죽음의 천사가 다윗을 찾아왔습니다. 다윗은 계명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탈무드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든 계명에 매달리고 있는 동안에는 죽음조차 범접할 수 없었습니다. 천사는 틈을 노렸지만 다윗은 좀처럼 틈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천사는 마침내 계략을 꾸몄습니다. 정원에 있는 나무를 흔들어 살랑거리는 소리를 냈습니다. ‘저 소리의 정체가 뭐지?’ 궁금증을 참지 못한 다윗은 사다리를 세워놓고 나무에 오르다가 미끄러져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충격 때문에 계명인 토라를 암송할 수 없었고 그 순간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유대인들이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현실이 아무리 힘겨워도 하나님의 계명을 놓치지 않는 한 유대 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계명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았기에 어떤 시련 가운데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랍비가 제자들에게 들려주는 계명을 통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으로서의 자부심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계명을 지키며 사는 것이 생명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7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계명을 지킴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들어갈 자, 곧 구원 받을 자는 계명을 지키는 생활을 하는 자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되는 계명을 다 지킴으로 영생의 삶을 살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계명의 명령자이신 하나님과 계명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야 합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맹목적이고 외형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계명의 정신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계명의 참된 순종만이 생명에 들어가는 길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계명의 문자적 해석이나 실행이 아니라 계명의 영적 깊이와 넓이를 이해하는 일이 중요함을 알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입니다. 둘째로 소유를 나누라 카이로 빈민가에서 23년을 보내고 1993년 프랑스로 돌아온 엠마뉘엘(Soeur Emmanuelle) 수녀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곳이라 할 수 있는 이집트 카이로의 빈민가에서 23년을 보냈습니다. 물도 전기도 없는 낡은 양철집에서 가난한 자들과 고락을 함께 했습니다. 카이로 시 주변 공동묘지에 찾아가 그 곳에서 생활하는 빈민들을 섬겼습니다. 그 곳 사람들은 가난한 중에도 언제나 즐겁고 유쾌했습니다. 구차하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서로 섬기고 돌봐주며 서로 나누었습니다. 엠마뉘엘 수녀도 그들의 그런 모습을 보며 기쁨과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로 돌아온 엠마뉘엘 수녀는 뜻하지 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물도 전기도 없는 가난한 카이로 빈민들은 삶의 기쁨을 누리고 살아가고 있는데 반해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부유한 프랑스 사람들은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세금도 불만이요 행정관리에도 불평이요 교통요금이나 휘발유 가격에도 부아를 끓였고 학교 교육의 질에도 못마땅해 했고 아이들이나 배우자에게도 짜증이었습니다. 카이로 빈민에 비교하면 프랑스 국민들은 최상의 문화와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카이로 빈민에 비하면 프랑스 사람들의 월급이나 일자리는 최상이요 최고였습니다. 그런데도 사회 계층의 꼭대기에서부터 밑바닥에 이르기까지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누는 마음이 없는 사회는 풍요로움 가운데서도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2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여기의 ‘온전하다’는 ‘텔레이오스’ 인데 도덕적 완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능과 부족을 통감하고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께 의탁함으로 이루어지는 온전입니다. 예수께서는 재물과 하나님을 함께 섬길 수 없음을 아셨습니다. 재물이 많을수록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의지하게 되어 차차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됩니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라는 명령은 천국에 관한 종말의식을 갖지 않는 다면 실천이 불가능합니다. ‘가서 팔아 나누라’는 것은 온전함을 얻기 위한 전제조건이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율법을 순종하면서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온몸과 뜻과 정성으로 행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회개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늘의 보화를 언급하시면서 부자 청년의 마음이 땅의 재물에서 해방되는 순간부터 영생의 삶이 보장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를 따르라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 선교사는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의 가슴에 감동을 주는 선교사입니다. 탁월한 수재였기에 25세의 나이에 모교로부터 교수 초빙을 받았습니다. 같은 해 보스톤에 있는 큰 교회로부터 담임목사 청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두 곳을 다 거절했습니다. 선교사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결혼한 지 보름 만에 아내와 함께 인도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인도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선교사라는 이유로 쫓겨났습니다. 다시 배를 타고 미얀마로 떠났습니다. 항해 도중에 아내는 유산을 했고 랑군에 도착했을 때는 들것에 실려 배에서 내려야만 했습니다. 그곳에서 저드슨 부부는 복음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아이를 낳았는데 몇 달되지 않아 열병으로 죽였습니다. 그러나 저드슨은 낙심하지 않고 사역에 최선을 다하다가 그만 감옥에 끌려 들어갔습니다. 창문이 없는 캄캄하고 더러운 감방에서 고생을 했습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아내는 건강을 해쳐 그가 출감한 직후 3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저드슨은 낙심하지 않고 복음을 위해 사역하다가 자신도 병들어 견딜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요양을 하려고 고국으로 가는 배를 탔지만 병이악화되어 선상에서 숨지고 말았습니다. 저드슨의 삶은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차라리 대학교수로 갔더라면, 차라리 큰 교회 목회자가 되었다면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 그러나 저드슨 부부는 진정한 복을 놓치고 싶지 않아 세상 복을 포기하였습니다. 불교 국가인 마얀마에서 최초로 성경을 만들어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데에 쓰임 받았습니다. 1850년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어갔으나 100년 후 교인들이 20만 명이 넘는 결실을 보았습니다. 부인은 가장 귀감이 되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저드슨 부부야말로 진정으로 주를 따른 자의 모습이 아닙니까? 본문 2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계명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행위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따르는 것으로 이루어져야 됨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의 명령은 궁극적으로 예수를 따르는 제자직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의 길을 제시하실 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합니다. 세속적인 기대와 세상적 인연에서 해방되어 오직 예수께 자신의 전부를 맡기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고 더불어 사는 삶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은 잠시 보장된 현재 때문에 영원히 보장된 영생을 잃어버리는 선택을 하였습니다. 에콰도르의 아우카족 선교를 하다가 순교한 짐 엘리엇(Jim Elliot)은 일기에 다음과 같은 구절을 남겼습니다. “영원히 남을 것을 소유하기 위하여 영원히 잡을 수 없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 (He is no fool who gives what he cannot keep to gain what he cannot lose)” 누가 진정한 부자입니까? 여전히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잠깐 있을 것을 영원히 있을 것처럼 붙잡고 있는 어리석은 부자청년의 모습은 아닙니까? 영원한 것을 위해 일시적인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영원히 남을 것을 위하여 세상적인 것을 포기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계산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고 감사로 주를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고집스러운 신앙의 틀을 벗어나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어리석은 부자 청년의 모습이 우리 가운데 있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부디 예수께서 명령하시는 뜻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계명을 삶으로 지키시기 바랍니다. 가진 소유를 나누는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끝까지 주를 따라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