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음 두 팔과 두 다리가 없이 태어난 닉 부이치치(Nicholas J. Vujicic), 그는 최근에 ‘플라잉’이란 책을 썼습니다. 플라잉(flying)은 ‘나는 것’을 의미하는데 부제는 ‘믿음의 날개로 날다’입니다. 사지가 없는 닉 부이치치, 남들이 보기에 또 자신이 보기에도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생각이 드는 것은 너무도 정상입니다. 그러나 닉 부이치치는 고백합니다. “인생에는 보이지 않는 날개가 있다. 그 날개는 바로 믿음의 날개이다. 불완전하기로 치자면, 나만한 인간이 또 있을까 싶다. 내게도 즐거운 날과 서글픈 날이 있다. 벽에 부딪혀 쓰러지고 자빠지기 일쑤다. 그렇지만, 한없이 연약해지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권능은 가장 뚜렷이 드러난다. 신앙을 행동으로 옮기기만 하면 누구라도 세상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한 존재가 된다.” 부이치치는 세상에서 겪는 온갖 장애와 고난은 우리를 날지 못하게 하는 중력과 같다고 표현합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는 중력의 법칙을 적용받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게 하는 힘이 중력입니다. 그냥 떨어지면 몸을 크게 다칩니다. 중력의 법칙을 이기고 세상을 날아오르는 방법은 바로 믿음의 날개를 펴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백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내 안에 살아계신다.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영광받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나를 향한 특별한 목적과 계획이 있다.’ 그리고 왕이신 하나님을 믿고 믿음의 날개를 펼 때 어떤 폭풍이 몰아쳐도 추락하지 않고 날 수가 있습니다. 사지가 없는 사람도 하나님께 존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닉 부이치치, 그는 40개국 이상을 다니며 전 세계인에게 희망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 있는 자리에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삶,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있는 그 자리를 천국으로 만들어가는 모습, 이는 믿음의 날개를 폄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은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왕이신 하나님을 믿고 날개를 펴며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다스리는 왕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정한 왕은 누구입니까? 우리를 만드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시고, 이끌어 주십니다. 그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보호하시며 왕이 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이 왕이심을 잊어버릴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왕이 없이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따라야 할지 모르고 방황하며 살아갑니다. 심지어 세상적인 것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려 합니다. 물질과 쾌락이 왕 노릇합니다. 때로는 명예와 권력이, 지위와 인기가 왕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왕들은 금방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왕은 누가 되어야 합니까? 누구를 왕으로 섬기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왕이십니까?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며 ‘왕이신 나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다” 본문을 보니 다윗은 자신이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왕으로 모셨습니다. 그 결과 자신뿐 아니라 후손도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나아가 이스라엘 민족까지도 복이 임했습니다. 다윗은 어떻게 행했습니까? 왕이신 하나님을 고백하며. 어떻게 다짐하였습니까? 첫째로 내가 높이리라
프레드릭 헨델(George Frideric Handel)이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정신적,물질적 타격으로 더 이상 희망을 갖지 말자고 스스로를 위안 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제게 소생하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가 사람들로 하여금 저를 버리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저를 버리십니까?” 한없는 슬픔 가운데 산책을 마치고 초라한 숙소로 돌아 온 그에게 소포가 와 있었습니다. 한 묶음의 오라토리오 가사였는데 친구인 찰스 제넨스 시인이 보낸 것이었습니다. 헨델은 가사를 훑어보면서 가슴을 찔러 오는 대목에 눈이 멈쳤습니다. “위로하라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오 주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주의 영광은 드러나고야 말리라 그 육체가 그 영광을 보리라”는 이사야 40장의 말씀을 인용한 대목이었습니다. 헨델은 나와 같은 사람을 통해서도 영광 받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 떠오르는 영감을 오선지에 옮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날은 8월24일 저녁이었습니다. 그로부터 22일 동안 헨델은 침식을 잊고 작곡하였습니다. 그 곡이 바로 우리 모두의 심령을 뒤흔드는 대곡 ‘메시야(Messiah)’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통해 나를 드러내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드러내며 높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왕이신 하나님을 높일 때 비로소 감격과 기쁨이 있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다윗은 변함없이 하나님만 높이겠다고 다짐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한순간 잘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긴 시간동안 변함없이 계속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특히 변함없이 하나님을 높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어떠한 경우라도 하나님을 높이겠노라고 고백합니다. 실제로 일생동안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어렸을 때나 노인이 되었을 때나, 비천한 양치기로 살았을 때나 왕의 보좌에 앉았을 때나, 가난했을 때나 부귀영화를 가졌을 때나, 하나님을 높이는 신앙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물론 다윗도 힘들고 어려운 날들이 있었습니다. 블레셋이 침략하였을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생명을 걸고 골리앗과 싸워 이겼지만,그 영광은 잠간이었고, 사울왕의 정적이 되어 긴 세월동안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에도 하나님을 높이려는 다윗의 신앙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숱한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라 믿었기에 결코 교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만 높였습니다. 평생토록 왕이신 하나님을 높이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내가 송축하리라 어느 날, 저드슨 콘월(Judson Cornwall) 목사가 예배를 인도하다가 뒷좌석에 앉아 있는 친구를 발견했습니다. 신학교 동창으로 오래 전에 남미 선교사로 지망하였던 친구였습니다. 그는 그를 알아보고 설교를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설교 대신 간증을 하였고 성도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예배가 마친 뒤, 목사는 그 친구에게 부흥회를 인도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부흥회 첫날 친구는 아코디언을 메고 시편 한 편을 읽고 성도들로 하여금 따라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곡조를 붙여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부흥회 둘째 날도, 셋째 날도 시편의 시에 새로운 곡조들을 붙여 형식과 격식에 매이지 않고 주님의 높으심과 위대하심을 송축했습니다. 처음에는 낯선 인도에 당황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찬양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모두 엎드려 회개의 기도를 드리고 어떤 이는 손을 들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 주님을 찬양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후 성도들의 신앙은 뜨거워졌으며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송축하는 일은 우리의 신앙가운데 가장 기본으로 하여야 할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2절입니다.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여기의 송축은 원어로 ‘바라크’인데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께 무릎 꿇고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것을 뜻합니다. 다윗은 살아있을 동안만 아니라 내세에도 하나님을 송축할 다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선한 길로 인도하실 뿐 아니라 생사화복도 주관하시는 분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능력의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송축하는 일이야말로 마땅한 본분임을 다윗은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송축하며 사십니까? 날마다 하나님을 송축하여야 합니다. 영원하시며 우리를 향하신 목적이 변함 없으신 하나님을 송축하여야 합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하루 세 번씩 본 시편을 낭송하며 왕이신 하나님을 송축했다고 전해집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역사는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끊임없이 송축되어야 합니다. 왕이신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왕이신 하나님 안에 보람이 있고, 왕이신 하나님 안에 축복이 있기에 하나님을 영원히 송축하여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내가 선포하리라 풀러 신학대학의 신약학 김세윤 교수는 현대교회와 교인들에게 ‘캘리포니아 복음을 경계하라’고 지적합니다. 캘리포니아 지역은 미국에서 부유한 지역에 속합니다. 따뜻하고 기후도 좋아서 많은 사람들이 살기에 쾌적한 도시입니다. 캘리포니아 복음이란 풍요롭고 향락적인 삶을 축복하면서 교제를 나누고 그러한 모습의 행복을 전하는 복음을 의미합니다. 교회생활을 하면서 음악회나 쇼를 많이 보여주고 교인들이 좋아할 만한 일과 행사를 진행합니다. 교인들의 부담을 최대한 줄여주고 희생과 고난을 요구하거나 가급적 말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십자가의 복음은 낭만적인 삶을 베푸는 선물이 되었고 우리가 따라야할 하나님의 계명 그리고 종말의 심판은 말하지 않거나 매우 유한 표현으로 스치듯 지나칠 뿐입니다. 윤리나 징계는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신앙양심은 점점 무디어지고 절대적 가치관은 평안과 좋은 삶에 그치고 맙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신앙이 아니라 자신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잘못된 신앙의 모습만 반복할 따름입니다. 모름지기 성도들은 왕이신 대대로 나님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4절입니다. “대대로 주께서 행하시는 일을 크게 찬양하며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 하나님의 행하신 사역은 땅 위에서 항상 찬양되어야 합니다. 여기의 ‘대대로’는 ‘한 세대가 다른 세대에게’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사역에 대한 전달은 세상 끝 날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나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유익이 되지 않으면 예수를 파는 몰염치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대대로 선포해야 합니다. 영원한 주로 선포하여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약속의 땅에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평안이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왕 되심을 선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 신앙에 기쁨과 즐거움이 없습니까? 아직도 하나님이 나의 왕이심을 선포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까?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와 햇빛이 대지를 녹일 때 목동들은 양을 끌고 나가 길게 자란 양털을 깎는다고 합니다. 그 일은 일일이 손으로 깎아야만 하는 중노동이었습니다. 한 마리 한 마리 털을 깎는 도중에 추위가 몰아치고 눈보라가 날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목동들은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할까 머뭇거리다가 털을 다 깎은 양, 절반 정도 깎은 양, 하나도 못 깎은 양으로 구별하여 우리 안에 몰아 습니다. 그리고 눈보라가 지나가고 따뜻한 햇빛이 비칠 때 다시 들을 끌어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털을 다 깎은 양은 살아 있지만 절반 정도 깎다 만 양들은 감기에 걸리고 죽어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결단이 부족하여 머뭇거리다가 일을 그르친 경우를 보여 준 것입니다. 어쩔 줄 모르고 시간만 허비하다가 실패하는 경우가 있지는 않습니까?신앙은 결단입니다. 과연 나의 왕이신 하나님을 선포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선포하여야 합니다. 다윗은 왕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어떻게 하리라고 다짐하였습니까? 날마다 주를 높이리라 다짐했습니다. 영원토록 하나님을 송축하리라 다짐하였습니다. 그리고 대대로 하나님의 왕이심을 선포하리라 다짐하였습니다. 부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하나님을 높이며, 그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 하나님만 선포하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