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의 작품 ‘성 프란치스코’에 이런 대화가 나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의 작품 ‘성 프란치스코’에 이런 대화가 나옵니다. 프란치스코의 동료 수사 레오가 질문했습니다. “프란치스코 형제, 당신은 다른 형제들에겐 쉽고 평탄한 길을 선택해도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정작 당신은 왜 고통스러운 오르막길을 택했습니까? 왜 하필이면 추위와 비와 눈 속으로 갑니까?” 그때 프란치스코는 대답했습니다. “레오 형제, 하나님은 항상 추위와 비와 눈 속에서 나타나십니다. 그러니 속 태우지 마세요. 평지에서는 부유한 영주들과 아름답고 매력적인 귀부인들을 만날 수 있고, 그 세계의 주인인 죽음과 당신의 육신인 가엾은 늙은 당나귀를 만날 수 있어요. 레오 형제, 그렇지만 진정한 형제는 산을 올라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등산 중에도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등산, 곧 오름의 길을 걷는 것과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산을 오르며 연약한 나와 광대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안병욱(安秉煜) 교수는 산에 오르기를 좋아 했습니다. ‘산의 철학’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이 우울해질 때는 산으로 가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륙색을 짊어지고 조용한 산길을 친구와 같이 걸어가노라면 인생의 우울이 어느 새 안개처럼 사리지고 맙니다. 그러기에 삶에 지치고 생에 권태를 느꼈을 때에 산에 오르는 것이 좋습니다.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정상을 향해 오를 때 생의 용기를 느끼고 건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정신이 피곤하고 인생이 무거운 짐으로 느껴질 때 산의 정기가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 시인은 본 시를 통해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이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라고 노래했습니다. 이 구절은 시편 15편 1절에도 나타납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라고 묻고 있습니다. 두 곳에서 함께 노래하고 있는 여호와의 산은 성전이 자리 잡고 있는 시온 산이며 그 거룩한 곳은 예루살렘 성전을 뜻합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산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고 새 힘을 얻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으로 기록된 여호와의 산에 올랐습니다. 그 곳에서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그는 하나님을 만나 뵙고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는 약속을 받게 됩니다. 아브라함이야말로 최초로 여호와의 산에 오른 산행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여호와의 산에 오르는 거룩한 등반자입니다. 또한 주의 성산에 머무는 경건한 산사람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산에는 아무나 오르지 못합니다. 시편기자는 본문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그렇다면 과연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는 어떠한 자가 되어야 합니까? 첫째로 손이 깨끗한 자 미국 정치가 대니엘 웹스터(Daniel Webster)의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려서 학교에 다니던 때 하루는 교칙을 어기어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그를 불러 세워놓고 벌을 주는데, 손바닥을 때리는 것이 보통 흔하게 쓰이던 체형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손이 형편없이 더러웠습니다. 그것 때문에 야단을 더 맞을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책상으로 불려가는 도중에 오른 손바닥에 침을 발라 양복바지에다 문질러서 닦았습니다. “손 내놔라!" 선생님이 호령하였습니다. 대니엘은 침을 칠해서 좀 닦은 오른 손을 내놓았습니다. 그 손을 보자 선생님은 즉시 말했습니다. “대니엘, 이 교실에서 이 손보다 더러운 손을 찾으면, 이번만은 너를 용서해주마” 그러자 즉각적으로 등 뒤에 숨겼던 왼손을 내 보이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여기 있습니다” 그 손을 보자 선생님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소리쳤습니다. “그만하면 됐다. 이번만은 용서해 두지. 네 자리에 가서 앉아도 좋다.” 본문 4절입니다.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여기의 손이 깨끗하다는 것은 행실이 올바른 자를 가리킵니다. 손은 사람의 백 가지 행실을 나타냅니다. 손의 정결과 부정은 곧 그 사람의 인격의 깨끗함과 더러움에 이어집니다. 인류는 깨끗지 못한 더러운 손 때문에 비극을 맛보고 슬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아담의 손은 범죄한 손입니다. 그 손으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손도 부정했습니다. 그 손으로 아벨을 쳐 죽였기 때문입니다. 아간은 그 손으로 도적질을 했고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약탈했으며 가룟유다는 그 손으로 은 30냥에 예수를 팔았습니다. 이 시대에도 손이 깨끗한 자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사회에 행실이 바른 자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테러와 살인, 성폭행과 가정파괴, 백주강도와 환경파괴, 어디서나 부정한 손들이 저지른 상처들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구약의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쟁으로 피흘린 손을 가졌다하여 성전을 짓는 데 실격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손이 깨끗한 지의 여부는 인생의 흥망과 상관관계를 가집니다. 그러므로 손이 깨끗해야 합니다. 그 손에 흠과 티가 없는 자라야 여호와의 산에 오르는 복이 있습니다. 둘째로 마음이 청결한 자 로버트 멍어(Robert Boyd Munger)의 작품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주님을 영접한 사람의 마음속에 주님께서 그리스도의 집을 짓고 사십니다. 서재, 주방, 거실, 작업실, 오락실, 침실이 잘 갖추어진 집입니다. 저자는 주님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 주위를 둘러봅니다. 서재에 들어가 보니 성경책이 있어야 할 서재엔 세상의 온갖 책들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하는 주방엔 돈, 학위, 직업, 명성 등의 부끄러운 음식들이 차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거실로 나왔을 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와 매일 거실에서 교제를 하자” 하지만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금방 잊어버립니다. 회사에 가고, 친구를 만나고, 학교에 가며, 내가 좋아 하는 취미 생활을 하고 자신의 일에 바쁘기 때문입니다. 작업을 하는 작업장은 썰렁하기만 합니다. 주님의 도움 없인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방식으로 하려고 하기 때문에 뭐든 금방 포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집에 있는 오락실에는 주님의 출입을 금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보이기에는 너무나 부끄러운 것들이 많고, 주님과 함께하면 세상 것들을 즐기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술, 담배, 도박 외에도 주님보다 우선하는 모든 것들에 해당하는 개인적인 것들이 그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가 네 곁에 있으면 재미있는 것을 즐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내가 온 것은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임을 기억하거라” 주님과 모든 방을 돌아본 후 최종적으로 침실로 향합니다. 침실엔 비밀스럽게 여기는 은밀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성(性)입니다. 이렇듯 주님을 영접한 사람의 마음속에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마음속에 계시는 이상, 주님께서는 이것들을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로 바꾸어 주십니다. 방 귀퉁이에 있는 벽장에 몰래 담아뒀던 부끄러운 과거와 잘못들도 주님께서 깨끗이 청소해 주십니다. 마지막으론 내 마음속 그리스도의 집을 주님의 이름으로 명의 이전을 하게 됩니다. 스스로 집을 관리할 자신이 없기에 열쇠를 드리며 간청합니다. “주님, 당신은 손님이었고 제가 주인이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하인이 되겠습니다. 당신이 집의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명의 이전이 되고 나서야 저자는 진정한 평화가 영혼에 임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마음이 청결한 삶은 모든 것의 주권을 그리스도에게 넘겨드리는 모습을 말합니다. 본문 4절입니다.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여기의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동기의 순수성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겉과 속이 다른 존재입니다. 격식을 갖추어 예배를 드리면서도 오래 믿은 자라는 체면으로 예배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선량하고 부드럽게 행동하면서 속으로는 사악하고 날카로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거룩한 모양을 하면서 은밀한 곳에서 죄악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겉으로 순종하는 것 같은데 마음으로는 이미 불순종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순종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체면이나 위치 때문에 마지못해 순종하는 모습이 아닙니까? 예수께서 산상설교의 첫 머리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나라를 볼 것임이요’ 라고 했습니다. 율법의 행위 이전에 마음의 청결을 크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하나님을 봅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시민권이 하늘에 있습니다. 세상에 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됩니다. 세상을 바르게 살며 하나님의 나라로 말미암아 즐거워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만이 세상의 권력 앞에서 바로 설 수 있습니다. 물질 앞에서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온갖 부정한 옥심의 유혹을 물리 칠 수 있습니다. 부디 마음을 청결히 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오르는 은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거짓 맹세하지 않는 자 프랑스의 작가 빅톨 유고(Victor Hugo)는 젊은 날에 탕자의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파리 세느강에 한 어린 소년의 시체가 떠내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방탕한 생활을 막기 위해 죽음으로 항거한 사랑하는 딸의 시체였습니다. 이때 유고는 “내가 다시는 세상열락을 즐기지 아니하리라”고 결심합니다. 심기일전한 그는 사회복지사업으로 딸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했습니다. 교육부장관이 되었을 때는 자유와 평등 박애를 상징하는 3색 국기를 창안했고, 노년에는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 작품을 내놓았습니다. 그는 어린 딸과의 약속을 지킴으로 역사에 기록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누구나 약속하는 일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에 신실을 다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한 맹세와 약속에 대해 분명히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4절입니다.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거짓맹세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말을 지키지 않는 불성실한 태도를 갖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뜻을 허탄한 데 두고 거짓된 인생을 사는 사람은 고통을 겪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자기가 한 말과 맹세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습니까? 한 해를 시작하면서 주님을 열심히 섬기겠노라 맹세하고 그 약속을 지키고 있습니까? 열심히 봉사하겠노라 약속하고 도무지 나타나지도 않는 것은 아닙니까? 무릇 거짓말은 사탄의 것입니다. 죽음을 부르는 재앙입니다. 오직 이익만을 위해 거짓말을 내뱉으며 거짓 맹세를 일삼는 사람은 여호와의 산에 결코 오를 수 없습니다. 1598년 낭트칙령(Edict of Nantes)에 의해 프랑스에 처음으로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을 때 유명한 루블(Louvre)에서의 예배는 바로 본 시편의 말씀으로 개회되었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않는 자로다.” 구원받은 백성이면서 여호와의 산에 오르는 자로 살아가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판가름 날 것인데 그렇게 마구잡이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세상은 거짓과 진리가 뒤섞여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차이가 점점 없어집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백성이라면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로 살아가시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등산가들은 깨끗한 마음으로 산에 올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사고가 없다는 것입니다. 험한 산에는 아무나 떼 지어 몰려가는 곳이 아닙니다. 히말라야 산맥(Himalaya)에는 해발 8천m가 넘은 봉우리가 14개나 있습니다. 그 중 알려진 것의 하나가‘애나푸르나’입니다. 이 산의 정상에 올랐던 모리스 에르조그(Maurice Herzog)는 동상에 걸려 열 손가락 모두와 발 가락 몇 개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하기를 “그 산이야말로 우리의 남은 생애를 바쳐 올라갈만한 보물이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는 누구입니까? 성산에 오르기 위해 온갖 희생을 무릅쓰는 산악인들처럼 어떻게 행하여야 합니까? 우선 손을 깨끗이 하여야 합니다. 마음이 청결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거짓 맹세하지 말고 성실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육신과 정신과 영혼이 깨끗한 자가 되어 여호와의 산에 오르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