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4:9-10 2013.5.26.(일)
고난을 넘어 승리한 사람
5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지난 한 주 목회자 세미나를 잘 마쳤습니다. 옛날 이중표 목사님때는 열명 이상 많은 강사들이 와서 다양한 강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롭게 하는 세미나는 제가 쓴 교재를 가지고 거의 제가 합니다. 이번에도 제가 17시간을 강의했습니다. 거의 순교할 뻔 했습니다. 힘은 들었으나 감사했던 것은 목회자들이 갈2:20의 말씀에 집중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침 8시부터 저녁 11시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집중해 준 것입니다. 강의 사이 사이에 목회자들을 많이 만났는 데 정말 여러 가지 어려움 가운데 오직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헌신하는 분들이었습니다. 젊은이가 떠난 농촌에서 할머니 몇 사람 모시고 목회하는 분들, 도시에서 힘들게 30명, 40명 데리고 목회하는 분들, 자녀가 중고등 학생, 청년이지만 잘 도와주지 못하고 스스로 아르바이트하며 자라는 가정, 물질적으로 힘든 가운데 정신적으로 더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 그래도 하나님의 일이라고 아침부터 밤까지 모여 최선을 다했습니다.
세미나 기간동안 마침 욥기를 읽었는 데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은 왜 오는가?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고난을 어떻게 이기며 어떻게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승리할 수 있을까? 꼭 목회자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은 저마다 고통과 상처를 안고 사는 데 어떻게 하면 상처를 이기고 영광에 이를 수 있을까? 고통은 무엇이고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이 주제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그림이 있습니다. “행복한 눈물”이라는 그림입니다(그림). 한때 이 그림은 사회적 논란을 많이 일으켰습니다. 주로 법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나 법적인 문제 말고 또 하나 문제가 있는 데 그것은 너무 비싸다는 것입니다. 현 시가로 200억이 넘습니다. 가로 세로 길이 1미터 밖에 되지 않는 그림이 200억이 넘다니. 그림에 문외한인 우리가 볼 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용을 볼 때 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자, 이 그림의 제목은 “행복한 눈물”입니다. 주제가 행복입니다. 주제는 행복인데 울고 있습니다. 보통 행복하면 울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웁니다. 너무 행복해서 우는 것일까요? 아니면 행복은 눈물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일까요? 행복과 눈물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반드시 눈물속에서 행복이 온다는 뜻일까요? 눈물없이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일까요? 아무리 봐도 잘 모르겠습니다. 고민하다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행복은 눈물과 함께 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주인공이 그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합니다. 이름은 야베스, 9절을 보실까요? 대상4:9,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오늘의 주인공은 구약의 야베스입니다. 도대체 야베스는 누구고 그가 우리에게 고통과 행복에 대하여 무엇을 가르칩니까?
오늘 말씀의 배경이 되는 역대상은 다윗왕의 치적에 대하여 쓴 내용입니다. 똑같은 이스라엘 역사라 해도 열왕기 상하는 다윗을 포함한 모든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룹니다. 그런데 역대상하는 다윗을 중심한 역사입니다. 사울 왕 이야기는 단 한 절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모두 다윗과 관련된 역사입니다. 그 중에서 1-4장은 그 시작입니다. 다윗의 왕정의 배경이 되는 족보가 나옵니다. 1장은 아담의 족보, 2장은 유다, 다윗의 족보, 3장은 솔로몬의 족보, 그리고 4장은 유다지파의 족보가 나옵니다. 대략 600여명이 나오는 데 그 중에서 두 절 이상, 자세하게 언급된 사람은 유일하게 야베스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와, 이 사람, 대단한 사람인가 보다”하고 성경을 찾아보아보면 야베스에 관한 기록은 오늘 읽은 9절, 10절, 단 두 구절밖에는 없습니다. 그 두 구절도 어머니가 그를 고통스럽게 낳았다는 것과 그가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기록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야베스가 다른 어떤 이스라엘 자손보다 존귀한 사람이었다는 말합니다. 다시 9절을 보시겠습니까?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질문은 이것입니다. 야베스는 왜 누구보다 더 존귀한 자였는가? 성경에 나오는 그 수수많은 인물, 다윗, 솔로몬, 유다 지파, 그 많은 사람들중에서 야베스가 더 귀중한 이유는 무엇인가?
오늘 저는 저와 여러분이 오늘의 주인공 야베스처럼 하나님안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존귀한 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정말 야베스처럼 하나님앞에서 존귀한 자, 하나님안에서 다름 사람보다 더 귀중한 자가 되기 원합니까? 이를 위해서 우리가 알 것은 야베스라는 이름의 뜻입니다. “야베스”는 히브리어 “아짜브”, “슬프게 하다”, "고통을 주다“의 뜻에서 왔습니다. 이것을 명사로 하면 ”에쩨브", "슬픔, 고통“입니다. 따라서 ”야베스“란 이름은 ”고통,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슬픔과 고통을 가진 자를 존귀히 여기신다는 말일까요? ”야베스는 귀중한 자다“. 그래서 어떤 점에서 귀중한 자였을까 했더니 그 이름이 고통이다, 슬픔이다. 그래서 귀중한 자다.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 말이 됩니까? 오늘 말씀 9절을 다시 보면 그 어머니가 그를 낳고 야베스라 불렀는 데 그 이유는 내가 이 아들때문에 수고했더. 고생했다. 그래서 ”야베스“라 불렀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야베스는 어떻게 어머니를 괴롭게 했을까? 난산을 했을까? 아들 낳다가 어머니가 거의 죽을 뻔 했을까? 아마 그럴지 모르겠습니다. 자식을 낳다가 죽은 어머니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아내 라헬도 그랬지 않습니까?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가 죽어 베들레헴 길가에 묻힙니다.
만일 그런 것이 아니면 야베스는 어떻게 어머니를 괴롭게 했을까? 요즘 용어로 그 어머니가 미혼모였을까요? 아버지도 모르게 임신한 아이를 어머니가 억지로 낳았던 것일까요? 낳지 않으려고 애쓰다 어쩔 수 없이 아들을 낳은 뒤 눈물과 고통가운데 인생을 살았을까요? 그래서 그 아들이 태어나자 “너는 너를 고통스럽게 한 자다”. 그래서 이름을 “고통”이란 뜻을 가진 “야베스”라고 불렀을까? 그런데 히브리어 단어가 참 재미있습니다. ”고통“이라는 ”에쩨브“란 단어와 뜻은 같고 발음만 다른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아짜브“입니다. 이 말은 "신경”이란 말입니다. 옛날 히브리 사람들의 말은 대부분 신체 조직에서 온 것입니다. 예를 들면 “레브”, 이 말은 심장입니다. 동시에 사랑이란 뜻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심장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라쿰”, 어머니의 자궁입니다. 동시에 이 말은 긍휼입니다. 긍휼은 어머니가 자궁처럼 속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신경”입니다. 왜 고통이 신경일까요? 여러분, 가장 아플 때 어디가 아픈지 아십니까? 신경입니다. 허리 디스크, 허리 통증이 신경이 눌려서 아픈 것입니다. 치통도 치신경이 눌려 아픈 것입니다. “고통”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신경”이 아픈 것입니다. 신경이 아프니까 온 몸이 아픈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고통”입니다.
야베스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일생동안 이 고통을 안고 살았습니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아프게 하고 자신을 아프게 했습니다. 마치 온 몸의 신경이 눌리듯이 질병이 가난이 불행이 불운이 그를 눌렀습니다. 그로 인해 어머니도 힘들고 형제들도 힘들고 자신도 힘들고 자신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도 힘들었습니다. 그는 타고날 때부터 고통을 안고 태어났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고통을 안고 태어났습니까? 여러분에게도 인생 고통이 있습니까? 사실 말이야 바로 하면 성경의 사람들중 고통이 없는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이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이삭은 물이 없어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야곱은 대적자가 많아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레아는 동생보다 못생겨서 고통스러워했고, 라헬은 자식이 없어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요셉은 죄없이 감옥에 가서 고통스러워 했고 모세는 백성들의 반역과 원망 때문에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 때문에, 라합은 천한 신분 때문에, 예레미아는 무너진 예루살렘 성 때문에, 에스겔은 포로잡힌 백성 때문에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다윗은 간음때문에 살인 때문에, 엘리야는 정처없는 쫓겨다니며, 요나는 물고기 배속에서, 욥은 파산해서, 막달라 마리아는 귀신들려서, 사마리아 여자는 남자들 때문에, 바울을 대적들 때문에, 요한은 귀양가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아담부터 지금까지 고통속에 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다 야베스입니다.
이번에도 제가 목회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말했습니다. 목회자 여러분, 여러분은 대부분, 어려운 여건에서 마음과 정신의 스트레스를 받으며 목회합니다. 그래서 고통스런울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의 새들백 교회 릭 워렌 목사님에 대하여 아십니까?(사진) 그가 미국을 대표하는 교회를 목회하는 분인데 그에게는 뇌기능 부전증이라는 병이 있습니다. 이 병은 호르몬이 과다 분비되는 병입니다. 그래서 늘 현기증이 나고 눈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설교하려고 강단에 올라가면 머리가 깨질듯이 아픕니다. 어떤 때는 도저히 아파서 설교를 못하고 내려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분은 늘 이렇게 기도한다고 합니다. “하나님, 이번만 살려주옵소서. 설교가 중단되지 않도록 한번만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강단밑에서 중보기도팀이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 목사님을 살려주십시오. 우리 목사님, 설교하다가 넘어지지 않게 해주십시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그래도 설교하다가 넘어지지는 않지 않습니까? 이번 설교가 마지막이다 염려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릭 워렌 목사님에게 더 큰 고통이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우울증으로 고생하던 아들 매튜란 최근에 자살한 것입니다. 이것은 목회자에게 엄청난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기다 아들의 죽음을 조롱하고 비방하는 악성 댓글을 워렌 목사님에게 계속 보내는 사람들 때문에 워렌 목사님은 더 큰 고통을 느끼고 있습니다. 누가 세상에 살면서 고통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다 있습니다. 문제는 고통이 우리에게 왔느냐 안 왔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그 고통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입니다. 야베스는 타고난 인생 고통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고통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습니다
야베스를 묵상하면서 제가 발견한 첫번째는 야베스는 자신의 고통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는 거의 본능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있는 현실적인 고통의 원인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에겐가 그 고통의 원인을 전가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책임의 원인이 어머니나 아버지에게로 갑니다. 그런데 성경을 아무리 봐도 야베스는 자기 고통의 책임은 누구에게 전가시킨 적이 없습니다. “아, 내 고통은 어머니 때문이다. 아버지 때문이다”.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야베스가 문제를 해결한 첫 번째 출발이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질병중의 하나는 나의 고통을 남의 탓으로 돌린다는 것입니다. “내가 못배운 것은 부모탓이다. 내가 무식하고 교양이 없는 것은 부모가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서 그렇다. 내가 가난하게 된 것은 아버지 때문이다. 내가 대학에 못간 것은 형 때문이다. 내가 불행한 것은 내 아내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심리학의 한계가 있습니다. 요즘 심리학이 교회와 신학에 들어와 유익을 끼친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심리학의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심리학은 죄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은 대신 인간의 “연약함”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연약함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대개의 원인은 가정에 있습니다. 어릴 때 부모가 가장 큰 원인입니다. 어릴 때 부모가 자녀를 대하는 태도, 자녀에게 한 말, 이것이 평생 자녀의 가치와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좋습니다. 그럴 수 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자녀는 책임이 없습니까? 모든 책임이 부모에게 있습니까? 심리학은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누구 누구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내 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시51:3, “무릇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시51:5, “내가 죄악중에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내 죄가 문제의 시작입니다. 설령 고통중에, 불행중에 부모에게서 온 것이 있을지라도 그 부모마저도 죄인입니다. 그래서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7절, 시51:7, “나를 우슬초로 씻으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회개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심리학은 “부모는, 어머니는, 어릴 때는, 환경은”하고 말하기 때문에 내가 돌아갈 데가 없습니다. 나를 그렇게 만든 어린시절로 돌아간들 지금의 형편이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나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나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께 돌아가야 해답이 있습니다. 내 고통과 불행의 책임이 내게 있고 하나님이 내 죄를 해결해준다고 믿어야 해답이 있습니다. 고통의 원인은 나에게서 찾지 않고 남에게서 찾는 한 문제 해결은 없습니다.
욥기가 물었던 질문이 이것입니다. 욥이 어느날 불행을 당합니다. 그러자 세 친구가 욥을 찾아 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욥은 왜 고난을 당하는가?” 어떤 친구는 욥이 죄를 지어서 그렇다고 했고 어떤 친구는 욥이 뭔가 숨겨 놓은 잘못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고 또 어떤 친구는 하나님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욥이 잘못해서 고통을 당한 것은 맞는 데 그 고통을 준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질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통도 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보통은 마귀가 우리에게 고통을 준다고 생각하는 데 하나님도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인간에게 고통을 줍니까? 성경적으로 말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통을 준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정확한 표현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가?”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필요하면 인간에게 고통을 허락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고통같은 나쁜 것을 허락하실까?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은 나쁜 분이 아닌가?
이에 대해 영국의 C.S. 루이스가 <고통의 문제>라는 책에서 좋은 설명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책임적으로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그가 지으신 세상과 사람을 사랑하시되 책임적으로 사랑하신다. 만일 하나님이 그가 지으신 세상과 사람이 문제가 있는 데 여전히 그 문제가 많은 모습에 만족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되기를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와 세상의 죄와 실수를 거절하고 개선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사랑은 책임적이 되며 하나님은 그렇게 할 자격과 권리가 있다. 고통은 잘못된 세상을 깨우시는 하나님의 확성기다”. “하나님은 잘못된 세상과 사람을 바로 잡기 위해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책임적인 사랑이다. 그것을 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되기를 포기하라는 것이다“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고통의 책임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고통이 올 때 누구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고통도 이깁니다.
자기 만족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야베스는 고통의 책임을 남에게 심지어 하나님께 돌리지 않았습니다. 용감하게 자기에게 돌렸습니다. 그래서 이겨냈습니다. 야베스가 잘한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자기 만족에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자기 만족은 이런 것입니다. “내가 이 정도면 됐다. 나에게 더 무엇이 필요하냐?”. 자기 만족은 그래도 아주 무서운 병입니다. “이 정도면 됐다” 여기에 뻐지면 성장도 진보도 고난도 없습니다. 거룩한 불만이 필요합니다. 거룩한 불만은 하나님의 높은 표준으로 나를 보는 것입니다. 가끔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오해가 있습니다. 그것은 욕심이 없는 것이 겸손이라는 오해입니다. “나는 욕심부리지 않아. 그저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살아”. 언뜻 들으면 굉장히 겸손해 보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을 작은 자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내가 작은 자가 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작은 자로 여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기 만족의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이 정도면 됐다 하며 너무 빨리 샴페인을 터뜨리면 몸은 편하지만 꿈은 죽습니다.
욥기의 주제가 이것입니다. 욥기는 욥이 반드시 죄가 있어서 고난이 온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친구들은 “죄없이 망한 자가 누구냐? 까닭없이 망한 자가 누구냐? 욥이 그렇게 고난을 당했다면 욥이 뭔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갰느냐?” 하고 공격합니다. 소위 인과응보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반드시 고난이 죄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위해서 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욥기의 주제가 욥23:10입니다. “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여기 “정금”이란 말이 나옵니다. 지금 하나님은 욥을 고난을 통해 금덩어리 보석을 만들고 있습니다. 정금을 만드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금광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금광을 찾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금광을 찾았어도 금이 바로 나오지 않습니다. 금광을 발견하면 그것을 정금으로 만들기 위해 원석을 부수어야 하고 불에 녹여야 하고 불순물을 제거해야 합니다. 이 불이 녹이고 불순물을 제거하는 과정이 고난이요 훈련입니다. 꼭 죄떄문에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가 없는 의인가운데 그렇게 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돌에도 잡석이 있고 보석이 있습니다. 잡석은 깨뜨릴 필요가 없습니다. 깨뜨려도 나올 금이 없습니다. 잡석은 보기는 좋아도 깨뜨리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보석같은 인생이기 때문에 그 속에 있는 순금을 건져내기 위해 깨뜨립니다. 깨뜨릴 뿐 아니라 뜨거운 불에 넣고 달구고 녹입니다. 6천도 이상의 뜨거운 불에 들어가 물처럼 녹아집니다. 그래야 거기서 목걸이도 나오고 금반지도 나옵니다. “이 정도면 됐다”자기 만족에 빠지면 불속에 들어갈 필요가 없는 대신 보석도 되지 못합니다. 안전한 잡석으로 그냥 남아 있습니다. 야베스처럼 자기 만족에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거룩한 불만을 품으세요. 내 안에 위대한 보석이 있다고 믿으면 불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내 속에 위대한 보석을 얻기 위해 자기를 깨뜨려야 합니다.
미국교회 통계를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미국 교회는 지금 교파와 상관없이 70여명이 평균출석교인입니다. 큰 교회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미국교회가 평균 70명 출석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정도의 숫자면 교회가 유지되는 데 별 지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70명 정도 되면 교회 전기세, 세금, 교역자 생활비를 지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도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만족을 경계합시다. 내 속에 무한한 하나님의 보화가 있음을 믿읍시다.
기도로 자기 한계를 뛰어 넘었습니다.
야베스의 위대함은 기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야베스는 세 가지를 기도합니다. 첫째로 하나님, 제 삶의 지경을 넓혀 주옵소서. 둘째, 주의 손이 나를 도우소서. 셋째 나의 삶을 보호하사 환란과 근심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성경을 아무리 봐도 야베스가 어떤 특별한 능력이나 재능이나 은사가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가 부자도 아니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아니고 그야말로 그는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나 하루 하루 고통가운데 살아가는 우리와 똑같은 보통 사람입니다. 그 보통사람이 어떻게 자기를 넘어설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고통의 현실을 딛고 희망찬 미래로 나아가게 할 수 있을까요? 기도입니다.
자, 기도의 내용을 보십시오. 첫째로 10절, 대상4:10,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지경을 넓혀달라는 이 기도를 어떤 사람은 기복적이라고 합니다. 기복은 받는 사람 입장에서 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복도 있지만 시복도 있습니다. 받는 복보다 중요한 것이 주는 복입니다. 아무리 받고자 해도 주고자 하는 사람이 없으면 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한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줄 수 있습니다. 부모가 주고 싶을 때 많이 받는 자식이 효자입니다. 쭈삣 쭈삣하며 안받으면 겸손한 것이 아니라 불효하는 것입니다. 시2:8절의 말씀을 아십니까?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라”. “이방나라”는 옛날 성경으로는 “열방”입니다. 우리는 기껏해야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집, 좋은 배우자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all nations, 모든 나라를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차원이 다르고 스케일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십니다. 기도는 자기 한계를 뛰어 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지경의 한계를 뛰어 넘습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사업의 지경, 지식의 지경, 사랑의 지경, 능력의 지경을 뛰어 넘습니다.
야베스는 또 기도합니다. 둘째,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셋째. “나로 환란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야베스는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은 또 많은 책임을 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많은 축복은 많은 압력과 함께 오고 많은 압력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합니다. “주여, 주의 손이 나를 도우소서”. 여러분 어떻습니까? 더 많은 비판을 받더라도 더 많은 성공을 원합니까? 아니면 차라리 비판 받지 않고 성공도 안하기를 원합니까? 비판을 받을만큼 성공해야 합니다. 마귀의 공격을 받더라도 더 많이 주께 가기 원합니까? 마귀의 공격없이 안전하게 살기를 원합니까? 적어돟 마귀가 공격할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무거운 짐을 지더라도 하나님께 헌신하며 더 많이 봉사하기 원합니까? 무거운 짐 안지고 헌신도 봉사도 안하기 원합니까? 무거워 쓰러지더러도 하나님께 헌신하고 살아야 합니다. 더 큰 복을 사모하십시오. 더 큰 봉사를 꿈꾸십시오. 더 큰 희생을 소원하십시오.
기도가 무엇입니까? 자기 한계를 뛰어넘는 영적인 방법입니다. 자기 속에 있는 것으로 자기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자기를 넘어서야 합니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한 다른 희망도 출구도 없습니다. 몇 년 전 신문에 고래 삼백 마리가 갑자기 죽었다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고래들이 정어리를 쫓아가다가 갑자기 커다란 그물에 갇힌 것입니다. 한 논설자가 이렇게 논평했습니다. “조그만 정어리가 바다 거인들을 죽음으로 인도했다. 작은 것을 좇다가 고래들이 참변을 당했다”. 제가 2002년 앞에서 오는 차와 부딛쳐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왜 그랬나 나중에 보니까 운전하는 아버지옆에 아들이 앉았는 데 아들이 물병를 떨어뜨렸습니다. 그 물병줍다 사고가 난 것입니다. 운전수는 그 날 적어도 물병보다는 큰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언제나 작은 것을 바라보면 사고납니다. 기도는 작은 것을 보던 눈을 그치고 큰 것을 보는 것입니다. 기도는 나보다 크신 하나님이 나를 넘어서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방법입니다. 야베스, 고통가운데 태어나 평생 고통속에 살았지만 고통이 그를 실패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고통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돌렸습니다. 자기는 다 됐다고 값싼 자기 만족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자기 속에 위대한 보석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기쁘게 훈련받았습니다. 그리고 자기보다 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가 기도하자 자기 한계의 지경을 벗어 났습니다, 야베스,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우리도 야베스처럼 될 수 있습니다. 힘을 내십시오. 담대하십시오.
대상4:9-10 2013.5.26.(일)
고난을 넘어 승리한 사람
“행복한 눈물”(그림).
대상4:9,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아짜브”=슬픔, 고통
”아짜브“=신경
릭 워렌(사진)
고통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습니다
시51:3, “무릇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시51:5, “내가 죄악중에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51:7, “나를 우슬초로 씻으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C.S. 루이스, <고통의 문제>,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책임적으로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그가 지으신 세상과 사람을 사랑하시되 책임적으로 사랑하신다. 만일 하나님이 그가 지으신 세상과 사람이 문제가 있는 데 여전히 그 문제가 많은 모습에 만족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되기를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와 세상의 죄와 실수를 거절하고 개선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사랑은 책임적이 되며 하나님은 그렇게 할 자격과 권리가 있다. 고통은 잘못된 세상을 깨우시는 하나님의 확성기다”.
자기 만족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욥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잡석이 있고 보석이 있다.
기도로 자기 한계를 뛰어 넘었습니다.
대상4:10,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시2:8,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라”.
기도=자기 한계를 뛰어넘는 영적인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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