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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이윤재목사

겔47:1-12 겔47:1-12 생수의 강 2013. 4.29(일)

47:1-12 2013. 4.29()

생수의 강

계절의 여왕, 4월과 5월의 한복판입니다. 여러분은 일년중 가장 아름다운 생명의 계절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하십니까? 언제나 우리 불행은 행복을 뒤로 미루는 데서 옵니다. 그래서 톨스토이가 세 가지 질문을 물었습니다. 첫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둘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셋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 답은 이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 지금 이 시간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여러분의 행복을 위해 시원한 물가로 인도하고 싶습니다. 저는 물을 좋아합니다. 아마 물이 없는 이스라엘에서 물의 소중함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북쪽 끝에 헬몬산이 있습니다. 이 산에 눈이 오면 다음해 봄부터 녹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시원한 폭포가 흐릅니다(사진1). 이 물이 갈릴리호수로 들어가 이스라엘의 생물줄이 됩니다. 광야로 가면 드물게 이런 물도 있습니다(사진2). 사방이 광야인데 이곳에만 물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물속에 나무 하나가 서 있습니다. 아마 이것을 보고 다윗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를 말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엔게디는 광야의 끝자락, 사해 바다 옆에 위치합니다. 그런데 이 골짜기에 다윗폭포라고 불리는 폭포가 있습니다(사진3). 아마 이 근처 어디에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숨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쏟아지는 폭포밑에서 너무 너무 행복해 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생명을 물을 비유한 것은 이스라엘의 지리적 상황에서 볼 때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장 가깝게 이해하는 가장 이스라엘적인 표현방법입니다. 저는 그동안 1월 첫주부터 이 생명에 관해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졌고 우리는 우리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산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동안 드린 생명에 관한 말씀을 정리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생명으로 가득한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꿈을 꾸는 시간입니다. 우리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에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한 환상을 보는 것은 우리에게 큰 기쁨입니다.

 

먼저 생명은 물과 같습니다.

먼저 1절을 보십시오. 47:1, "성전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끝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 오늘 말씀은 선지자 에스겔이 본 물의 근원에 대한 말씀입니다. 에스겔이 살던 시대는 물이 없던 시대였습니다. 마실 물이 없어서 물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살리는 생수가 없어서 물이 없는 시대였습니다. 에스겔의 시대는 이스라엘이 바빌론의 지배를 받던 시대였습니다. 주전 587, 바빌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질풍노도와 같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와 이스라엘을 말발굽으로 밟고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리고 70, 이스라엘은 역사상 가장 고통스러운 시대를 살았습니다. 그 시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대였는지 겔37장이 잘 말해줍니다. 37:1-2,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얼마나 피폐하고 메마른 시대였으면 골짜기에 죽은 시체로 가득했겠습니까? 그 냄새나는 악취와 무기력, 그 시대는 분명 생명이 사라진 죽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겔47장으로 오면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하나의 환상을 보여 줍니다. 그 것은 생수의 환상이었습니다. 1절을 다시 보십시오. 47:1,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하나님은 에스겔을 환상가운데 성전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에스겔이 성전에 도착했을 때 성전을 주목하기 시작했고 그 성전에서 무엇인가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2절 뒷부분입니다. 47:2,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오른쪽에서 스며 나오더라”. 에스겔이 본 것은 생수였습니다. 맑고 시원한 생수가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물이 없어 메마르고 물이 없어 죽어가는 시대,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생수의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왜 죽음의 시대에 물이 필요할까요? 물이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물이 없으면 어떤 생명도 살 수 없다는 것을 아십니까? 사람의 생명은 대부분 물로 되어 있습니다. 몸의 70%가 물이라고 합니다. 태어날 때는 99%가 물이고 그 후로 점점 줄어들지만 죽을 때도 몸은 50%가 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물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 비가 없어서 물이 없는 상태가 가장 큰 저주입니다. 63:1절입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여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생명없는 삶은 마치 물이 없어 목마르고 곤핍한 삶과 같습니다. 107:4-5절입니다.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물이 없으면 피곤하고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최고의 축복은 하늘의 비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72:6절입니다. “저는 벤 풀에 내리는 비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같이 임하리니하나님의 복은 밭고랑에 물이 넉넉한 상태입니다. 65:9-10절입니다. “땅을 권고하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케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나이다.”

 

왜 물이 생명입니까? 물은 인간에게 필요한 세 가지 체액을 만들어 냅니다. 눈물과 땀과 피입니다. 눈물은 슬플 때 흘리고 땀은 일할 때 흘리고 피는 아플 때 흘립니다. 그 결과 눈물은 슬픔을 이겨내고 땀은 가난을 이겨내고 피는 죽음을 이겨냅니다. 생명은 우리에게서 고난을 이겨내는 저력이요 부지런히 일하게 하는 능력이요 죽음을 이기게 하는 힘입니다. 물은 또한 시원합니다. 목마를 때 마시는 물은 뼈속까지 시원하게 합니다. 25:25-26,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같으니라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의 흐리어짐과 샘의 더러워짐 같으니라.”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가 얼마나 시원합니까? 생명이 그렇습니다. 생명은 우리를 맑게 하고 깨끗하게 합니다. 생명의 힘은 우리 속에서 우리 영혼을 시원하게 합니다.

 

물은 또한 영양분을 공급합니다. 몸속에 물이 들어가면 몸에 영양분을 만들어 생명을 유지시킵니다. 금식할 때 압니다. 인간을 유지시키는 힘은 물입니다. 밥을 안 먹어도 살지만 물을 안 마시면 죽습니다. 보통 남자는 7, 여자는 9일까지 물을 안 마셔도 산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 마시지 않으면 죽습니다. 물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 물이 어디에서 옵니까? 다시 1절을 보십시오.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생수는 성전 문지방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생수의 근원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의 샘입니다. 58:11,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이 생명입니다. 4:14,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I am the living water, 나는 생명의 물이다. 그런데 한 번 마시고 끝나는 물이 아니라 영생에 이르는 물이다. 하나님 떠나 어디에도 생명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입니다.

 

생수는 나를 먼저 적십니다.

에스겔에게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의 환상을 보여준 하나님은 그를 데리고 강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강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점점 물이 깊어 지더니 처음에는 발목까지 오르더니 다음에는 무릎까지, 조금씩 허리까지 차더니 마지막엔 헤엄쳐야만 건널 깊은 강이 되었습니다. 에스겔이 경험했던 강은 그가 직접 들어가서 경험한 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경험적입니다. 이론적이 아닙니다. 그 생명은 발목에 차고 무릎에 차고 허리에 올라 결국 우리 키를 넘깁니다.

 

물은 마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생명도 우리가 마십니다. 7:37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 와서 마시라”. 하나님의 생명은 마시는 것입니다. 생명은 물질이 아니고 인격이요 그나마도 신적인 인격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을 마시라고 합니다. “마신다는 말은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를 가진 예비엄마들이 느끼는 감동이 이런 것입니다. 아이가 엄마뱃속에서 발로 툭툭 찹니다. 어떤 때는 웃고 놉니다. 음식을 삼키면 아이가 먹는 것이 느껴집니다. 열달동안 이 느낌을 갖고 있다가 아이를 낳는 엄마에게 아이는 얼마나 사랑스러운 존재입니까? 그래서 엄마는 특별한 것입니다. 그러나 엄마안에 있는 생명은 엄마가 만든 것은 아닙니다. 생명은 받은 것이고 속에 들어온 것입니다. 영적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생명도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날 우리 속에 들어왔고 우리안에서 자랍니다. 언제 그 생명이 들어왔을까요? 태초부터 있던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님께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이 몸을 입고 세상에 왔을 때 그 생명과 함께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십자가에서 깨어졌습니다. 십자가에서 껍질을 깨어지고, 향유처럼 옥합을 깨어졌습니다. 그 결과 십자가에서 물과 피가 나왔습니다. 그것이 생명의 진액입니다. 그 생명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생명은 우리에게 들어왔고 우리는 그것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 받았습니다. 받았기 때문에 있고 받았기 때문에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폴 밀러는 <우리 사이를 거닐던 사랑>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사랑은 받는 것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것만 줄 수 있다.” 그렇습니다. 생명도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받지 않고는 줄 수 없습니다. 받은 것이 없다면 줄 것도 없습니다. 그 사랑 받은 자만이 그 사랑압니다.

 

우리가 받은 생명은 우리안에 있습니다. 기독교와 일반 종교의 가장 큰 차이가 여기 있습니다. 기독교는 안에 있고 일반 종교는 밖에 있습니다. 7:38절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다같이 그 배에서”. “가 의미하는 것은 우리 입니다. 우물물이 우물안에 있듯이 하나님의 생명도 우리 안에 있습니다. 2: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리스도는 내 안에 사십니다. 밖에서 예수님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좋은 것은 안에 있습니다. 1:27절입니다. “이 비밀은 너희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예수님안에 영광이 있습니다. 이집트의 사막교부 안토니가 말했습니다. “진리를 찾기 위해 바다를 건너지 말라. 진리는 네 안에 있느니라”. 이 말을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떠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진리는 어디를 가도 결국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탕자로 살다가 회개하고 돌아온 성 어거스틴이 훗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제가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그렇게 오래 계셨으면서 날마다 새로운 분, 제가 하나님을 밖에서 찾고 있을 때 하나님은 제 안에 계셨습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찾으러 오랫동안 밖에서 방황했습니다. 플라톤 철학에서, 마니교에서, 수사학과 학문에서, 그리고 인생의 쾌락에서 하나님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회개하고 돌아와 보니 뜻밖에 하나님은 그와 가장 가까운 곳에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안에 있기 때문에 가끔 우리는 우리안에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 버립니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너무 가깝게 있기 때문에 때로는 없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문제도 생명도 다 내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한 환자가 의사를 찾아와 말했답니다. “선생님, 온몸이 다 아픈데 아파도 너무 아파요. 원인을 알려주세요”. 그래서 어디가 아프냐고 했더니 손가락으로 여기 저기를 누릅니다. 팔을 눌렀더니 하고 아프다고 비명을 지릅니다. 다리를 만지더니 아이구하며 소리를 지릅니다. 얼굴을 만지더니 아얏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면서 여자가 말합니다. “선생님, 보세요. 재가 얼마나 아픈지”. 그러자 의사가 웃으면서 말합니다. “아주머니는 몸의 여기 저기가 아픈 것이 아니라 딱 한 군데가 아픕니다. 아주머니 손가락을 보세요. 손가락이 부러졌잖아요”. 환자는 다른 데가 아픈 것이 아니라 손가락이 부러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손으로 모든 곳이 아팠던 것입니다. 문제는 언제나 나에게 있습니다.

 

문제는 내 안에 있으면서 또한 생명도 내 안에 있습니다. 3:3절입니다.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저도 많이 속았습니다. 아무리 봐도 제 안에 무엇이 있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열등의식속에 살았습니다. 2005, 고 이중표목사님이 저에게 이 목사가 한신교회 목회해했을 때도 저는 못한다고 했습니다. 남들이 들을 때는 굉장히 겸손한 사람이구나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제 안에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골3:3절을 읽고 제 안의 거짓 겸손의 함정에서 벗어났습니다. “, 내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것이 아니라 감춰져 있구나. 그래서 잘 안 보였구나. 안 보인 것이지 없는 것이 아니구나”. 그때부터 열등의식을 극복하고 자신감을 회복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 많은 노력과 훈련으로 깊은 생명을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안에 생명이 있다는 사실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생명은 우리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그 속으로 깊히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이 피상적이 됩니다. 그래서 두 귀절이 중요합니다. 25:2절입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하나님의 일은 숨겨져 있습니다. 안 주시려고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라고 숨겨져 있습니다. 또 롬11:33절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안에 있지만 그것은 우리 지식과 경험으로 쉽게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깊습니다. 들어갈수록 더 깊어집니다. 처음에는 발목까지 찹니다. 그래서 이 정도는 해볼만 하네했습니다. 조금 더 들어갔더니 이제는 무릎까지 찹니다. “, 조금씩 깊어지네하고 긴장했는 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허리까지 차고 더 들어갔더니 키를 넘깁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못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물을 지배했다가 나중에는 물이 나를 지배합니다. 겉으로 볼 때는 별 것이 아닌 것 같은 데 그렇게 물이 깊은 줄 몰랐습니다. 2천년 교회사의 전통적인 영적 훈련에서는 이 세 단계를 이렇게 표시합니다. 정결, 하나님앞에 내가 누군지 보는 것입니다. 조명, 하나님앞에 선 나에게 성령의 조명이 비췹니다. 그러면 그 조명앞에 죄를 드러내고 연악함을 고백합니다. 연합, 마지막이 연합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되는 단계입니다. 내가 하나님안에 있고 하나님이 내 안에 있는 단계입니다. 이렇게 깊습니다. 그래서 내 안에 계신 예수님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은 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깨닫는 것이 다시 롬11:33절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이 말을 이사야의 말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45:3,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 우리안에 감추인 하나님의 생명은 흑암중에 숨긴 보화입니다. 은밀한 곳에 숨기운 재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믿는 사람이 되는 것과 깊은 영성의 사람이 되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기만 하면 누구나 예수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깊은 영성의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과 깊히 사귀는 사람입니다. 밖에서 서성대지 않고 감추어진 생명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발목에서 무릎으로 허리에서 어깨로 들어갑니다. 들어갈수록 하나님의 생명은 더 크고 놀랍습니다. 교회사에 나오는 영성의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생명안으로 깊히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그 중 하나가 18세기 프랑스의 잔느 귀용입니다. 고난의 풀무속에 산 이 여인은 평생 자기 안에 계신 예수님의 신비한 생명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믿음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안으로 깊히 들어가려고 하면 할수록 걸리는 것이 자기 자신, 곧 자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자기 포기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라. 당신이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그것은 당신이 얻을 하나님의 생명에 비하여 지극히 작은 것이 아닌가? 당신은 당신을 포기한 만큼 당신 자신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당신을 잃은 만큼 하나님을 얻을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을 얻는 것만큼 가장 크게 얻는 것은 없다”. 그가 했던 가장 중요한 말은 이것입니다. “생명의 샘의 근원인 예수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래야 생수의 강이신 예수님이 당신을 통해 흐를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음을 믿습니까? 안에 감춰져 있는 생명의 샘인 예수님의 깊이로 날마다 가까이 가겠습니까? 그 생명을 밖에서 찾지 말고 안에서 찾겠습니까? 예수님안으로 들어가 발목을 적시고 무릎을 채우고 허리까지 차올라 마침내 그 생명의 샘이 여러분을 움직이기 하겠습니까?

 

생명의 강은 흐른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고 그 속으로 깊히 들어가도 한 가지를 잊으면 생명과 상관없습니다. 그것은 흘러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강속에 들어갔을 때 그는 놀라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물이 흐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8절입니다. 47:8,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성전에서 뚝뚝 떨어져 에스겔을 적신 물이 동쪽으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강은 곧 바다를 이루었고 바다는 되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물이 흐르는 곳마다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9절입니다. 47:9,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성경에서 바다를 말할 때 바다는 대개 세상을 가르칩니다. 성경의 바다는 세상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바다는 지금보다 훨씬 무서웠습니다. 지금은 큰 배도 많고 배가 아니면 비행기로 가지만 옛날에는 배밖에 없었습니다. 그 작은 돛단배로 그 대양을 지날 때 사람들은 무서워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다에 리워야단이라는 용이나 악어가 산다고 믿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바다의 공포는 여러번 나타납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때 많은 애굽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전에 노아홍수가 있었습니다. 노아 홍수는 4040야를 비가 퍼부어 온 세상을 물로 뒤덮은 사건이었습니다. 노아 8식구가 구원받았지만 바다는 모든 생명을 집어 삼켰습니다. 요나도 바다의 공포를 느끼게 해준 사건입니다. 요나가 바다에 빠져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간신히 살았습니다. 갈릴리 바다 풍랑도 바다의 무서움을 말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집채만한 풍랑이 불어 치자 모든 제자들은 무서워 떨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로 갈 때 지중해의 유라굴라 때문에 죽을 뻔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 마지막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가 재미있습니다. 거기에는 다 있는 데 바다가 없습니다. 21:1절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왜 천국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있는 데 바다는 없을까요? 상징입니다. 바다에 있는 공포, 무서움, , 악이 더 이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흘러 나온 하나님의 생수가 강을 통해 바다로 흘러가자 그 바다에는 더 이상 용이 없습니다. 리워야단도 없고 악어도 없습니다. 요나를 삼켰던 큰 물고기도 없고 집채만한 풍랑도 없고 심지어 파도도 없습니다. 대신 끝없이 열린 아름다운 열매와 싱싱한 물고기와 시들지 않은 무성한 잎사귀만 있습니다. 다시 12절 보시겠습니까? 47:12,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이루어지는 세상의 마지막 꿈을 보여줍니다. 성전에서 흐르는 생수가 모든 죽음, 모든 공포, 모든 질병, 모든 죄악을 이기고 결국 최후 승리하는 꿈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일은 물이 흘러갈 때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물이 가만히 있을 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물이 성전에서 나와 바다로 흐를 때 나무가 살아나고 고기가 살아났습니다. 바닷물이 살아나고 각종 생명들이 살아 났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생명도 흘러야 세상을 살린다는 것을 믿습니까? 내 속에 있는 생명이 적지만 그것이 흐르면 흐를수록 커지고 많아진다는 것을 아십니까?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처음 나올 때 뚝뚝 떨어졌습니다. 그러다가 흘러가면서 많아졌습니다. 동으로 남으로 북으로 흐르다가 강이 되고 강은 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섭던 바다는 낙원이 되었습니다. 8절이 중요합니다.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 나리라”. 바다를 살리는 꿈, 세상을 살리는 꿈, 성전에 흘러온 하나님의 생명, 예수님을 통해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 그 생명이 흐르면 세상을 살리는 꿈, 그러자면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해야 합니다. 절대적인 순종이 필요합니다. 사막교부 아바 벨로스의 미우스가 한 말이 중요합니다. “순종은 순종을 낳는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면 하나님도 그의 요청 앞에 순종하신다”. 우리안에 있는 생명은 우리의 겸손한 순종을 통해 흘러갑니다.

 

우리안에 생수가 흐르면 치유가 일어납니다. 12절 뒷 부분을 보십시오.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여기서 약재로는 히브리어 리트루파입니다. 이 말은 라파”, “치료하다에서 온 말입니다. 우리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은 세상을 치료합니다. 우리가 가면 세상은 치료됩니다. 우리안에 생수가 흐르면 세상을 평화로와 집니다. 죄는 사라지고 전쟁은 그칩니다.

 

생수가 흐르면 평화가 일어납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평화가 필요합니다. 1945년부터 1995까지의 50년동안 지구상에는 80번의 전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전 세계적 28군데에서 전쟁과 갈등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전쟁은 무기로 사람을 찌르고 죽입니다. 가인이 처음 사용한 무기는 돌이었고 사람들은 그 후에 쇠로, 금속으로, 원자로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전쟁의 마음은 단단한 돌같은 마음입니다. 돌과 쇠를 부수는 힘은 다른 것이 아니라 물입니다. 단단한 밭고랑에 새 생명을 내는 힘은 하늘의 단비입니다. 64:10입니다.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고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주시나이다”. 하나님의 생수만이 이 세상을 부드럽게 할 수 있습니다. 전쟁을 막는 힘도 하나님의 생명이요 평화를 가져오는 힘도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우리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가면 이 한반도를 평화의 나라로 만들 수 있습니다. 47절을 지금 전쟁과 핵의 공포로 가득한 이 민족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이 한반도에 차고 넘치면 바닷물이 살아 납니다. 어부들의 열심히 고기가 심히 많아 집니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모든 영혼이 구원받는 일이 일어납니다. 전쟁은 사라지고 평화가 옵니다. 강 좌우에 시들지 않은 잎사귀와 달마다 새 열매가 맺힙니다. 주여, 이 나라가 그렇게 되게 하여 주옵소서. 전쟁은 사라지고 평화가 정착하는 나라, 수많은 물고기와 열매로 굶주린 세상을 먹이는 나라, 생명수 강가에서 모든 민족이 길이 살겠네. 나 길이 살겠네를 목놓아 부르는 나라, 그 화려하고도 아름다운 나라, 그 꿈, 그 환상, 그 비전을 우리에게 주옵소서.

 

 

 

 

 

 

 

 

47:1-12 2013. 4.29()

생수의 강

헬몬산 폭포(사진1)

시냇가에 심은 나무(사진2)

다윗폭포(사진3).

 

먼저 생명은 물과 같습니다.

47:1, "성전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끝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

37:1-2,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47:1,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47:2,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오른쪽에서 스며 나오더라”.

63: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여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107:4-5,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72:6, “저는 벤 풀에 내리는 비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같이 임하리니

65:9-10, “땅을 권고하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케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나이다.”

25:25-26,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같으니라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의 흐리어짐과 샘의 더러워짐 같으니라.”

58:11,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4:14,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생수는 나를 먼저 적십니다.

7:37,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 와서 마시라”.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1:27, “이 비밀은 너희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성 어거스틴, “하나님, 하나님을 제가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그렇게 오래 계셨으면서 날마다 새로운 분, 제가 하나님을 밖에서 찾고 있을 때 하나님은 제 안에 계셨습니다”.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25:2,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45:3,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

 

잔느 귀용, “한번 생각해보라. 당신이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그것은 당신이 얻을 하나님의 생명에 비하여 지극히 작은 것이 아닌가? 당신은 당신을 포기한 만큼 당신 자신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당신을 잃은 만큼 하나님을 얻을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을 얻는 것만큼 가장 크게 얻는 것은 없다”.

 

생명의 샘의 근원인 예수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래야 생수의 강이신 예수님이 당신을 통해 흐를 것입니다”.

 

생명의 강은 흐른다

47:8,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47:9,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47:12,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아바 벨로스의 미우스, “순종은 순종을 낳는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면 하나님도 그의 요청 앞에 순종하신다”.

 

64:10입니다.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고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주시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