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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이윤재목사

마5:13-16 빛과 소금의 선한 영향력 2013.6.9(일)

5:13-16 2013.6.9()

 

빛과 소금, 선한 영향력

 

아름다운 6월의 둘째 주일입니다. 서로 악수하면서 축복합시다.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이렇게 물어 봅시다. “당신은 누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았습니까?” 사람은 누군가로부터 영향을 받고 삽니다.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것은 누군가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영향은 받는 것뿐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영향은 주고 받습니다. 영향은 마치 물처럼 흘러가고 흘러옵니다. , 다시 한번 악수하며 이야기해 볼까요? “하나님의 사랑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합니다”. 우리가 서로 악수하면 우리 사이에 흘러가는 것이 있습니다. 사랑이 흐릅니다. 정이 흐릅니다. 흘러갈 뿐 아니라 흘러옵니다. 이 흘러가는 것을 영어로 flu라고 합니다. 흘러가다라는 말에 in을 붙이면 in flu입니다. 흘러가되 안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기를 인프류엔자라고 합니다. 세균이 안으로 흘러가 감기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감기말고 영향이 가면 influence, “영향력이라고 합니다.

 

영향력은 우리의 삶에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평소에는 잊고 지나다가 어머니 이야기만 나오면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나옵니다. 어머니의 영향 때문입니다. 지난 주에 아버지를 잃은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문자가 왔습니다.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 가면 내 손을 꼭잡던 아버지의 손목의 느낌, 어쩌면 제 남은 생은 그 따스한 감촉의 기억으로 살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답장을 썻습니다. “집사님, 아버지의 따스한 손길을 잊으려고 하지 말고 따스한 손길과 함께 남은 생을 사세요”. 어머니와 아버지를 우리가 잊지 못하는 것은 그 깊고 큰 영향력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 교회 안식관에 프랑스 이우성 선교사님이 게스트로 와 있습니다. 그가 한번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목사가 된 것은 목사님 때문입니다”. 그가 대학생때 제가 대학부를 지도했는 데 그때 받은 은혜로 목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뭔가 모르게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어떤 분이 영향력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혼자라면 안할 것은 그 사람이 하기 때문에 하는 것”, “혼자 가면 안 갈 길을 그 사람 때문에 가는 것”, 제가 목회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이중표 목사님과 비슷한 길을 가게 됩니다. 혼자라면 안 갔죠. 뭔가 받은 영향이 있기 때문에 그 길로 가는 것입니다. 어떤 가정에 심방갔더니 주일날 제 설교에서 받은 은혜를 큰 붓글씨로 써 붙여 놓았습니다. 말씀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도 모르게 마음 속에 새겨진 삶의 발자취, 누군가 닮고 싶은 마음, 나도 모르게 그가 걸었던 길과 비슷하게 걷는 것,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영향을 받고 삽니다.

오늘 말씀은 그 영향력에 관한 말씀입니다. 13절 보시겠습니까?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14,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잇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성경은 영향력을 말하면서 두 개의 비유로 말합니다. 소금과 빛입니다. 먼저 순서를 봅시다. 보통은 빛과 소금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소금과 빛입니다. 소금이 먼저 나오고 빛이 나중에 나옵니다. 왜 이것이 중요할까요? 우리가 세상에 사는 방식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소금으로 살고 다음은 빛으로 삽니다. 소금이 무엇일까요? 소금은 녹습니다. 세상속에 녹으며 사는 것이 소금입니다. 빛은 드러냅니다. 세상이 어둠이라면 빛은 어둠을 밝힙니다. 하나는 세상과 동화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세상과 구별하는 것입니다. 소금은 동화요 빛은 구별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먼저인가 하면 동화가 먼저입니다. 세상과 구별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세상속에 있어야 합니다. 세상속에 있지 않으면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먼저 동화되고 다음 구별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순서입니다.

 

세상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소금과 빛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영향력에 어떤 원리가 있을까요? 가장 큰 원리는 세상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금이든 빛이든 세상을 떠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소금은 음식속에 있어야 하고 빛은 어둠속에 있어야 합니다. 소금과 빛이 보여주는 원리는 구별과 연합의 원리입니다. 음식과 소금이 다르듯이 어둠과 빛이 다르듯이 세상과 우리와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세상은 악의 지배를 받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치로 살고 세상은 세상 풍조로 삽니다. 사는 방식과 목적이 다릅니다. 그렇다고 분리되는 것은 아닙니다. 분리가 아니라 구별입니다.

 

교회사에 수도원 운동이 있었습니다. 수도원 운동은 주로 주후 3세기, 핍박의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던 시절, 사람들은 광야로, 빈들로, 산으로, 골짜기로 숨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무서워서만 숨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방인들이 믿는 종교, 이방신, 황제 숭배, 세속주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숨었습니다. 그러다가 점점 제도화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주님을 위한 자기부정으로 시작했던 수도원운동이 점점 자기 몸을 학대하는 금욕주의로, 고행주의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시리아의 시므온같은 사람은 광야에 6피트 높이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서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몰려오자 기둥은 점점 높아졌습니다. 마지막에는 60피트의 높이에서 30년간 살았습니다. 제자들이 아침 저녁으로 음식을 밧줄로 올렸고 배설물은 밧줄로 내렸습니다. 그는 자신을 기둥에 꽁꽁 묶어 학대했고 마지막엔 벌레가 몸을 갉아 먹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성자라고 불렀지만 세상은 그에게서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멀리 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떠나지 말고 세상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과 구별되어야지 분리되어서는 안됩니다. 배는 항구에 있을 때 안전하지만 항구에 있기 위해 배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배는 바다를 위해 있습니다. 가끔 우리가 세상을 떠나 기도원에서 금식하고 수도원에서 영성수련할 수 있지만 우리는 기도원에 살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안에 사는 우리가 가져야 할 삶에 대한 믿음은 세상은 말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말세야. 세상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참 문제야”. 심지어 교회에 대해서 탄식하는 소리도 듣습니다.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참 문제야. 대형교회, 성장주의, 목회자, 평신도의 비리, 종교개혁이 다시 필요해”, 우리가 그 말을 들을 때 그러면 당신은 그 대상에서 제외됩니까? 하고 묻고 싶습니다. 어떻습니까? “한국교회라고 말할 때 나는 거기에 안 들어갑니까? “오늘날의 교회는하고 말할 때 우리는 거기에 안 들어갑니까? 시대가 어둡고 교회마저 어둡다면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해가 져서 집이 어두울 때 집이 어둡다고 비난할 수만은 없습니다. 비난하는 그 시간에 차라리 등불이 어디 있는가 찾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내 등불은 밝은가 물어야 합니다. 내 등불에는 불이 꺼져 있는가 켜져 있는가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이 썩었다. 교회가 부패했다”. 말하기는 쉽습니다. 문제는 내 항아리에 소금이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나는 썩은 세상에서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지 물어야 합니다. 자기는 안하면서 비판만 한다고 세상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썩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소금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세상의 변화는 말로 되지 않습니다. 비판하는 그 시간에 자신의 소금이 짠 맛을 내는지 잘 녹고 있는지 살피는 것이 필요합니다. 세상과 교회를 비판하면서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안 일어나나?” 하고 엿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이런 사람들이 나옵니다. 바라새인들입니다. 누가복음 20:20, “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바리새인들은 아무 것도 안 하면서 예수님의 행동을 사사건건 엿보고 있었습니다. 이래 가지고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도의 간디이야기입니다. 한 어머니가 간디에게 자기 아들이 설탕을 너무 좋아해서 문제라고 설탕이 몸이 나쁘니 먹지 말라고 말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이 되어도 간디는 아무 말도 안 합니다. 두 어 달 지난 후 간디가 아이를 데려다 어머니가 부탁한대로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간디 선생님, 왜 바로 말씀하지 않고 두달 후에나 말씀하셨습니까?” 간디가 대답했습니다. “사실 저도 설탕을 좋아했거든요. 저도 설탕을 많이 먹으면서 아이보고 먹지 말라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두 달동안 노력해서 겨우 끊었죠”.내가 못한다고 해서 모든 잘못을 보고만 있으란 말은 아닙니다. 진정한 변화는 말로만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진정성있는 변화는 나의 변화는 전제해야 합니다. 결국은 내가 문제입니다. 내가 소금이 되고 등불이 되느냐가 문제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영향력의 시작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될 때 세상에 대해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

 

소금처럼 녹아야 합니다

먼저 소금을 살펴 보겠습니다. 다시 13절입니다.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했습니다. 주님이 소금을 말할 때 이스라엘 사해바다를 염두에 두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나 지금이나 이스라엘 소금은 사해에서 나기 때문입니다(그림). 사해는 성경에서 염해”, “소금 바다라고 부르는 데 그 이유는 바다 전체가 소금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해의 길이는 남북으로 75킬로, 동서로 17킬로, 가장 깊은 곳은 약 400미터입니다. 둘레는 200킬로이고 총 면적은 1,000킬로 평방에 해당합니다. 작은 바다가 아닙니다. 그런데 거기에 고여 있는 물이 매우 짭니다. 얼마나 짠가하면 보통 바다물의 농도가 3%라면 사해바다는 30%입니다. 보통 바다보다 열배이상 짭니다. 물을 손에 떠 혀 끝에 대보면 짠 것이 아니라 씁니다. 그래서 수영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수영하다 눈에 물이 들어가면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맵기 때문입니다. 오랜 세월 물이 흘러 들어오기만 하고 밖으로 나가지는 않은 데다 40도 이상의 햇빛이 내려쬐어 수분이 증발하기 때문에 소금이 생깁니다. 이 소금이 돈 덩어리입니다. 이 소금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온갖 화학물질이 포함된 보화입니다. 각종 의약품, 화장품, 광물질이 이 소금에서 나옵니다. 염화 나트륨, 염화 칼슘, 염화 칼륨, 칼슘, 포타시움, 마그네슘, 유황, 브로마인등이 소금에서 나옵니다. 이것들을 정제해서 필요한 화학제품을 만듭니다. 그리고 나면 소금이 더 이상 필요없습니다. 그래서 밖에 버립니다. 그러면 마치 밀가루같이 하얗게 되어 사람들이 밟고 갑니다(그림). 이스라엘 사해 근처에 가면 이 하얀 소금들이 지천으로 버려져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소금같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면 짠 맛이 없습니다. 화학물질을 이미 다 채취했기 때문에 소금의 맛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그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말씀대로입니다. 맛을 잃으면 더 이상 소금이 아닙니다. 모양이 하얗다고 소금이 아닙니다. 짠맛이 소금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라고 말합니다. 소금처럼 영향력을 행사하라고 말합니다. 소금의 영향력은 맛을 내는 영향력입니다. 그런데 맛을 내려면 내가 먼저 죽어야 합니다. 녹아야 합니다. 녹지 않고는 맛을 낼 수 없습니다. 소금은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를 깨뜨리는 정도와 함께 맛을 냅니다. 맛은 절여야 나오고 맛은 숙성해야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영향력은 자기를 희생하는 데서 나옵니다. 남들이 뭐라고 해도 계속 자기를 희생하고 깨뜨려야 합니다. 그래야 맛을 냅니다.

 

성경과 역사에서 남에게 선한 영향을 끼친 사람을 보십시오. 그냥 된 사람이 있습니까? 모두 희생하고 사랑했습니다. 자기를 먼저 죽여 남을 살렸습니다. 그 한 사람이 장기려 박사였습니다(사진). 그가 86세로 부산복음병원 원장으로 생을 마칠 때까지 그는 집 한 채, 묻힐 땅 한 평도 없었습니다. 북녘땅 고향이 두고온 아내 때문에 평생 재혼하지 않았고 원장으로 교수로 월급은 받았지만 환자들 때문에 늘 빚지고 살았습니다. 그의 소문이 퍼지면서부터 전국의 가난한 환자들이 그에게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입원비, 약값도 없이 장기려 박사만 믿고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들의 병원비 대주느라 일생 집 한 채 없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에게서 감동과 감화를 받았습니다. 그를 슈바이처를 닮은 성자라고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영향력은 자기 희생으로 옵니다. 이것이 소금의 원리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희생하고 살 때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다 말면 효과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그래도라는 글을 썻습니다. “사람은 불합리하고 자기 중심적이다. 그래도 사랑하라. 사람은 잘 대해주면 딴 속셈이 있는지 의심한다. 그래도 사랑하라. 성공하면 거짓 친구와 진짜 적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래도 성공하라. 오늘 행한 선은 내일이면 잊혀진다. 그래도 선을 행하라. 정직하고 솔직했다가는 상처를 입기 쉽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라. 큰 생각을 가진 큰 사람은 작은 생각을 가진 작은 사람에 의해 무너질 수 있다. 그래도 크게 생각하라. 사람은 약자 편이지만 강자를 따른다. 그래도 약자를 위해 싸워라. 수년 동안 쌓은 것이 하루 아침에 무너질 수 있다. 그래도 쌓아라. 사람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지만 정작 도움을 주려는 사람을 공격할 수도 있다. 그래도 도와라. 세상에 최상의 것을 주었다가는 곤혹을 치를 것이다. 그래도 세상에 최상의 것을 주어라“.

 

그래도”. 그래도 하는 것입니다. 소금은 끝까지 소금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부모인 것은 끝까지 희생하고 사랑했기 때문에 부모입니다. 예수님이 예수님인 것은 끝까지 십자가지고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입니다. 영향력은 소금처럼 자기를 죽여 맛을 낼 때 옵니다. 이것이 소금의 원리입니다.

빛처럼 비춰야 합니다

영향력의 또 다른 원리가 있습니다. 빛의 원리입니다. 14절을 다시 보십시오.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여러분은 빛에 대하여 아십니까? 빛은 밝습니다. 어둠을 비춥니다. 어둠은 빛을 싫어하지만 빛은 존경합니다. 빛이 없으면 살 수 없기 떄문입니다. 빛의 중요성에 대해 과학자들이 실험을 했습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실험용 쥐들의 생존 능력을 실험했습니다. 먼저 완전히 깜깜한 장소에서 대야에 쥐를 한 마리 빠뜨린 후 익사하기까지의 시간을 쟀습니다. 그랬더니 3분을 넘지 못했습니다. 다음 다른 쥐를 대야에 넣었는데 이번에는 빛을 완전히 차단하지 않고 한 줄기 빛을 비추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쥐는 36시간이나 살아 있었습니다. 완전히 깜깜한 장소의 쥐보다 700배나 더 오래 버틴 셈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빛 때문입니다. 빛을 보고 희망이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성경 요1:5절에서 말합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사람은 본성적으로 어둠입니다. 죄로 인해 어두어졌습니다. 자기가 빛이 아니기 때문에 어둠은 빛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어둠은 빛을 통해 희망을 봅니다. 안 믿는 사람이 교회를 통해 보려는 것이 이것입니다. 빛입니다. “, 교회는 다르구나. 믿는 사람은 다르구나”. 안 믿는 사람은 우리가 믿는 내용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이나 속죄니 의인이니 천국이니 하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데는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의 착한 행실에는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16절에서 말합니다.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런데 착한 행실로 어둠을 비추는 빛의 원리는 세 가지 과정을 통해 어둠에 영향을 줍니다. 첫째가 노출, 둘째가 동화, 셋째가 반사입니다. 먼저 빛은 자기를 노출시킵니다. 빛이 비치면 먼저 나를 비춥니다. 빛이 비출 때 가장 먼저 드러나는 것이 나 자신입니다. 역사속에서 남에게 빛을 비췬 사람들을 보면 먼저 자기 자신을 비췃습니다. 빛이 비추면 먼저 자기가 드러납니다. 대개는 좋은 것이 드러나기보다 나쁜 것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나에게 매우 싫은 일입니다. 그래도 비춰야 합니다. 그래서 계속 비추면 나의 모든 것이 다 드러냅니다. 내 죄가 드러납니다. 내 어둠도 드러납니다. 내 무지도 두러납니다. 오래전에 제가 어느 교회에 설교하기로 약속하고 떠났습니다. 다행히 교통이 잘 열려 생각보다 먼저 도착했습니다. 그래서 화장실을 갔는 데 이게 웬일입니까? 제 넥타이에 우유가 엎질러져 있었습니다. 떠나기 전 우유 한 잔을 마셨는 데 그것이 엎질러 진 것입니다. 만일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세상에 거룩한 영향력을 나타낼 사람은 먼저 자신을 빛에 노출시켜야 합니다. 은혜를 많이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앞에 자기를 많이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남에게 빛을 많이 비춘 사람은 자기 어둠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이사야가 그랬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요 성전에서 일하는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그는 큰 죄를 모르고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빛앞에 노출되었습니다. 갑자기 하늘 문이 열리면서 천사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아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찬양할 때 자신의 더러운 모습이 노출되었습니다. 특히 자기 입이 더러웠습니다. 그때 그가 탄식했습니다. 6:5,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아이신 왕을 뵈었슴이로다”. 그가 많은 사람에게 빛을 비춘 것은 자신속에 부정한 것이 있는 것을 안 뒤였습니다.

 

베드로로 그랬습니다. 그가 갈릴리 바다에서 주님의 앞에 서자 자신의 죄가 노출되었습니다. 그래서 소리쳤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으로 가다가 하나님의 빛앞에 노출되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내 나를 핍박하느냐?” 그래서 세상에 거룩한 영향력을 나타낸 교회사의 사건의 배후에는 회개운동이 있었습니다. 1907년이 대부흥운동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빛이 임하자 사람들은 꼬꾸라졌고 저마다 자기의 죄를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길선주장로는 사람들앞에 나와 나는 아간입니다. 나는 내 친구가 나에게 맡긴 유산을 먹어 버린 사람입니다라고 통곡했습니다. 그 회개운동이 부흥운동으로 발전, 1907년 한 해만 30만의 신자가 늘었고 우상, 조혼, 첩제도는 타파되고 신식 학교가 생기고 병원에 생기고 독립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자기를 노출시킨 빛이 다른 사람에게 동화되자 그들도 빛을 비추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기를 비춘 빛은 남을 비추기 시작합니다. 빛은 감춰 둘 수 없습니다. 15절 보실까요? 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빛은 스스로 비춥니다. 아무리 덮어 놓아도 빛은 밖으로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빛이 먼저 우리를 비춰 우리 자신을 어둠에서 건져냈다면 반드시 그 빛은 남을 비춰 같은 효과를 가져오게 합니다. 이것이 동화입니다. 빛은 빛과 동화되는 효과를 가져 옵니다. 왜 사람들이 강재구 소령을 좋아합니까? 강재구소령이 부하들을 위해 목숨버린 것에 감동해 나도 강재구같은 사람이 되어야지“. 동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을 좋아합니까? 나도 그 분들처럼 순교자가 되어야지”. 동화된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많이 알아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처럼 되고 싶은 열망을 갖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에게 위인전, 고전, 독서를 많이 시킬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닮고 싶은 인물들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빛이 강할수록 많은 사람이 닮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큰 빛은 예수님입니다.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믿기 전에 자신들이 어둠이라 예수님을 싫어하지만 예수믿은 후 어둠을 벗어버리고 난 후에는 예수님처럼 되기를 사모합니다. 예수님에게 빛을 받아 어둠을 벗어버리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고, 예수믿어 나도 예수님처럼 빛을 비추며 살겠다는 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빛을 비치기 원하면 내가 빛안에 있어야 합니다. 빛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발광체와 반사체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스스로 빛을 비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빛을 받아야 비췹니다. 빛은 받은 만큼 비췹니다. 많이 받으면 많이 비춥니다. 강하게 받으면 강하게 비췹니다. 약하게 받으면 약하게 비춥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 최고의 영향력은 예수님이 끼쳤습니다. 예수님의 영향력을 알 수 있는 증거가 하나 있습니다. 제가 미국 버클리에서 잠시 공부했는데 버클리 대학 도서관에 한번 가 보았습니다. 300만권의 도서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신학대학이 아니고 일반대학인데 예수님에 관한 책들이 긴 벽면에 수 십 미터 계속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히브리 대학 도서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기록된 책이 거의 한 층에 가득 진열되어 있습니다. 어떤 분이 말합니다. 지난 1900년동안 인류가 출판된 모든 책보다 지난 100년동안 예수님에 관해 기록된 책이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예수님에 관한 책이 많을까? 영향력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의 영향력이 그렇게 클까? 딱 한 가지 이유입니다. 소금처럼 자신을 죽이고 빛처럼 어둠을 비췄기 때문입니다. 역학자 필립 샤프가 말한대로입니다. “나사렛 예수는 돈도 군대도 없이 알렉산더, 카이사르, 마호메트, 나폴레옹보다 더 많은 사람을 정복했고, 학술과 학문도 없이 모든 철학자와 학자가 남긴 빛보다 더 많은 빛을 남겼다. 예수는 학자의 웅변술도 없이 예전에 아무도 말하지 못했고 또 앞으로도 말하지 못할 생명의 말을 남겼고, 웅변가나 시인이 도달할 수 없는 위대한 영향을 온 인류에 남겼다. 예수는 글 한 줄 쓰지 않았지만 고대와 현대의 위인을 다 합한 것보다 더 많은 펜을 움직였다. 그러나 가장 큰 것은 그의 십자가였다. 그의 모든 영향력의 비밀은 그가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고 희생함으로 그는 인류역사에 불멸의 영향력을 남겼다. 그의 영향력은 지금까지 인류가 진군했던 모든 군대와 지금까지 세워진 모든 나라, 의회, 모든 왕을 합해도 그가 그의 거룩한 영향력을 따라가지는 못한다.”

 

그렇습니다. 소금과 빛 때문에 예수님의 영향력이 세계에 미쳤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를 따라 가야 합니다. 앞으로 저는 6- 8월까지 이 소금과 빛의 영향력을 우리가 살아가는 직장, 일터, 학교, 가정, 세상에서 어떻게 미칠지 살펴 보겠습니다. 소금과 빛이 되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거룩한 영향력을 미치며 살기를 기원합니다.

 

 

 

 

 

 

 

 

 

 

 

 

 

 

 

5:13-16 2013.6.9()

 

빛과 소금, 선한 영향력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잇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세상안에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20:20, “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소금처럼 녹아야 합니다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사해(그림).

 

흰 소금(그림).

 

장기려 박사(사진).

 

그래도

사람은 불합리하고 자기 중심적이다. 그래도 사랑하라.

사람은 잘 대해주면 딴 속셈이 있는지 의심한다. 그래도 사랑하라.

성공하면 거짓 친구와 진짜 적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래도 성공하라.

오늘 행한 선은 내일이면 잊혀진다. 그래도 선을 행하라.

정직하고 솔직했다가는 상처를 입기 쉽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라.

큰 생각을 가진 큰 사람은 작은 생각을 가진 작은 사람에 의해 무너질 수 있다. 그래도 크게 생각하라.

사람은 약자 편이지만 강자를 따른다. 그래도 약자를 위해 싸워라.

수년 동안 쌓은 것이 하루 아침에 무너질 수 있다. 그래도 쌓아라.

사람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지만 정작 도움을 주려는 사람을 공격할 수도 있다. 그래도 도와라.

세상에 최상의 것을 주었다가는 곤혹을 치를 것이다. 그래도 세상에 최상의 것을 주어라“.

 

빛처럼 비춰야 합니다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빛의 원리 노출 동화 반사

 

 

6:5,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아이신 왕을 뵈었슴이로다”.

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