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0:25-37 2013.9.8(일)
멀리 가려거든 함께 가라
아름다운 9월입니다. 9월이 되면서 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인터넷에 떳습니다. 연예인 홍석천씨가 한 선행입니다. 그래서 무슨 선행인가 했더니 대로변에서 자고 있던 취객을 깨워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는 것입니다. 지난 4일 새벽, 마포 역 근처 대로변에 한 사람이 술에 취해 쓰러져 있었습니다. 새벽이라 사람들의 발걸음도 뜸하고 몇 사람이 지나가면서 술에 취해 쓰러진 사람을 보았지만 항상 있는 일이거니 하고 지나갔는 데 홍석천씨만이 가까이 가서 그를 깨우고 그래도 안되니까 지구대에까지 달려가 경찰을 데리고 와 함께 부축해서 집으로 가게 했다는 것입니다.
술먹고 거리에서 자는 사람은 우리 주변에서 가끔 보는 일입니다. 그것이 특별한 일도 아니고 그것을 도와주었다고 특별한 일도 아닌데 이 일이 특별한 일로 인식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도와 준 사람이 연예인이라 그랬을까? 요즘은 그나마도 도와 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랬을까? 대부분이 남의 일에 신경쓰지 않고 살아가는 데 이른 새벽에, 그나마 술취한 사람을 끝까지 깨워 집으로 돌아가게 한 것은 잘한 일이 아닌가 하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막상 그 일을 당하면 그렇게 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 글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혹시 나는 내가 돌볼 사람을 돌보지 않고 지나가지 않는가? 그 사람이 누군지 몰라서 그냥 두고 가는 것은 있을 수 있다고 하자. 그러나 내가 반드시 돌봐야 할 사람을 지나쳐 가지는 않는가?
지난 주부터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행입니다. 누가복음 1-8장까지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제자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시며 병든 자를 치료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세상에 오신 더 큰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누가복음 20-24장입니다. 그래서 갈릴리에서의 사역을 마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시작합니다. 9:51절을 보시겠습니까? 눅9: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예수님은 9장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길을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19장에서 도착,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러면 눅9장에서 19장은 어떤 내용입니까? 사마리아를 지나가시는 장면입니다. 다시 지도를 보시겠습니까?(지도). 북쪽에 있는 갈릴리에서 남쪽에 위치한 예루살렘으로 내려가신 장면입니다. 그 가운데에 사마리아가 있습니다. 다시 도표를 보시겠습니까?(도표)
갈릴리 - 사마리아 - 예루살렘
(눅1-8장) (눅9-19장) (눅20-24장)
지난 주에 우리는 이미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행을 시작하면서 세 사람을 만났습니다. 스스로 예수님 따르겠다고 자청한 사람, 아버지 장례치루고 따르겠다는 사람, 그리고 가족과 작별하고 따르겠다는 사람, 이 세 사람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행에 떠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 말씀에서 성경은 “자, 이제 여행을 출발할텐데 너희는 어떤 자세로 나와 함께 가겠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 사람중 어떤 사람이냐?” 하고 묻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고난을 싫어하고 좋은 일만 꿈꾸면서 편하게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입니까? 예수님보다 세상의 다른 일을 우선순위에 두면서 마지못해 따라가는 사람입니까? 하나님보다 사람의 평가를 더 중요시 하면서 예수님따르는 것은 할 수 있으면 뒤로 미루는 사람입니까?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며 예루살렘까지 갑시다.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을 따라 끝까지 예루살렘까지 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주님은 두 번째로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와 함께 가겠느냐?” “나와 함께 동행하는 길에 네가 꼭 같이 가고 싶은 사람은 누구냐? 혹시 너만 혼자 가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나 말고 반드시 함께 가야 할 사람이 있느냐? 그가 누구냐?” 주님은 물으십니다. 그래서 “가깝게 가려거든 혼자 가고 멀리 가려거든 같이 가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루살렘까지 가는 길은 멀고 험합니다. 그것은 십자가로 가는 길이요 생명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나 혼자 가서는 안됩니다. 같이 가야 합니다. 그러면 누구와 함께 가야 할까요?
모두가 상처받고 삽니다
오늘 이야기는 길을 가다가 상처받은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강도만난 사람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험합니다. 예루살렘에 해발 750미터요, 여리고가 해저 250미터이기 때문에 예루살렘과 여리고의 고도 차이는 약 천미터가 납니다. 고도의 차이뿐 아니라 광야 지역이라 험합니다(사진). 그래서 예로부터 이곳에 강도가 많았습니다. 강도가 많은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이 길은 예루살렘에서 요단강을 거쳐 소아시아, 로마로 가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지금도 이곳에 로마시대의 길이 남아 있습니다. 외부로 연결된 길이 이 길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강도가 숨어 있기에 좋은 곳입니다. 또 하나 이유는 대부분 예루살렘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은 성지순례하고 내려온 사람들입니다. 고대에서 성지순례는 많은 경비와 시간이 드는 일이었습니다. 지금처럼 몇 박 며칠이 아닙니다. 배타고, 나귀타고, 걸어서 몇 달, 몇 년이 걸립니다. 그러니까 음식이나 경비며 노자돈이 필요합니다. 강도들이 이것을 노린 것입니다.
이것이 과거에 강도들이 숨어 있었던 곳입니다(사진). 지금은 정교회 소속의 수도원이 되었지만 이것은 본래 예루살렘에서 내려오는 성지순례객을 털기 위해 강도들이 숨어 있던 곳입니다. 그곳을 주후 330년, 소아시아 출신 채리톤이란 사람이 기도한 후 이스라엘 최초의 수도원이 되었습니다. 강도의 소굴이 기도원이 된 것입니다. 결국 이 사람은 강도에게 돈 뺏기고 얻어 맞고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길이 험하고 좁아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이 이 사람은 힘들게 숨을 몰아 쉬며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상처받고 신음하고 있는 사람이 이 한 사람 뿐입니까? 이 세상에 사는 사람으로 누가 상처받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상처”를 히브리어로 “샤발”이라고 합니다. 우리 말 “사발”과 비슷합니다. 이 말은 “그릇이 깨졌다”는 뜻입니다. 상처를 마음이 깨지는 것입니다. 그저 깨지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아픕니다. 속에 있던 것이 밖으로 나옵니다. 안에서 삶을 지탱하던 것들이 밖으로 나오니 속이 텅빕니다. 허전합니다. 외롭습니다. 있던 그릇이 깨졌으니 자기 정체성이나 자존감이 줄어 듭니다. 자기를 붙잡아 주던 것이 깨지니 사는 목적도, 재미도, 의미도 사라집니다.
상처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상처가 신체적 상처입니다. 병이나 사고로 몸이 다친 것입니다. 감정적 상처가 있습니다. 마음의 기쁨이 사라지고 두려움, 분노, 미움으로 가득찹니다. 관계적 상처가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갈등에서 오는 상처입니다. 영적 상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상처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언젠가 병원을 심방했습니다. 60대 권사님이 몸이 아파 입원했습니다. 병원에 갔는 데 간병인이 조금 기다리라고 합니다. 한 5분 기다렸는 데도 사람이 나오지 않습니다. 한 20분 후에야 만났습니다. 이 분은 어느날 이유없이 몸이 안 좋아 검진받으러 병원에 들어갔습니다. 처음에는 곧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들어왔는 데 검사가 길어지면서 점점 외로운 생각, 소외된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 건강한데 나만 아픈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우울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큰 병인가 갑자기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만일 큰 병이면 어떻게 하나? 밤에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잠 안 오는 밤이 며칠 계속 되면서 갑자기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갑자기 기도도 안되고 하나님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교인인가 권사인가 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심방오는 사람도 꺼리게 되었습니다. 사람만나는 것이 겁이 나고 무서웠습니다.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는 안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든 것입니다. 몸의 상처가 정서적 상처, 영적인 상처, 관계적 상처로 발전한 것입니다. 누구나 이럴 수 있습니다. 때로는 영적인 상처가 육체적 상체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며칠전 한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처음엔 누군가 했습니다. 옛날 목회하던 교회의 신자였습니다. “목사님, 어제 아침 제 동생의 아들이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뇌종양 진단을 받은 지가 겨우 55일밖에 되지 않았는 데, 열흘 전부터 혼수 상태에 빠졌다가 어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가 그 조카를 얼마나 사랑했는 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그 작은 아이가 끔찍한 병으로 죽어야 하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참으로 슬픈 날입니다”. 제가 어떻게 답장해야 하겠습니까? 고민하다 이렇게 썻습니다. “집사님, 솔직히 저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그 이유를 알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집사님도 그 이유를 깨달을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까지 잘 참고 견디시도록 기도하겠습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제가 어느 한인교회에서 설교목사로 잠시 있었는 데 어느 토요일, 한 여신도가 저를 찾아 왔습니다. 그러면서 다짜고짜로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은 제가 태어날 때부터 제가 누구인지 아셨을까요?” 저는 “물론이죠.”하며 렘1:5을 찾아 읽어 주었습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그때 그 분이 말했습니다. “좋아요. 그러면 하나님은 제가 어떤 가정에 태어날지도 아셨을까요?” “물론이죠”. 그녀의 질문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제가 초등학교밖에 안 나왔는 데도 미국에 와서 주립대학을 졸업할 줄도 아셨을까요?” “그럼요”. 그때 그 분이 저를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갑자기 침묵이 흐르더니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습니다. 그리고 더듬거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그렇게 모든 걸 다 아시는 분이 왜 저에게 불구자 아들을 주었다가 빼앗아 간 것일까요?”
그때 제가 망치로 제 머리를 한 대 꽝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이미 제가 실컷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고 말한 뒤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다 알고 계셨다면 왜 아들은 불구자로 태어났으며 결국 그가 죽을 것도 알고 있었다면 왜 그를 땅에 보냈느냐는 것입니다. 그날 저는 차마 무슨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분에게 충분한 답변을 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답은 있습니다. 첫째 모든 사람은 세상에서 상처받고 산다는 것, 우리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 이유를 아신다는 것, 언젠가 우리도 하늘 나라 가면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것 같이 모두 알게 될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때까지 우리는 이 세상에서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며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 그것은 알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그 사실을 인정합니까? 사람은 누구나 상처받고 삽니다.
나는 누구의 이웃입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다른 사람이 내 상처를 보듬어 주기는 바라지만 나는 다른 사람의 상처를 보듬기는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제가 그것입니다. 한 율법학자가 서두에서 예수님께 와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내 이웃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누가 내 이웃인지 말해주기 위해 오늘 이야기를 하십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있다. 그런데 첫 번째 제사장은 그냥 지나갔다. 둘째 레위인도 그냥 지나갔다. 그런데 셋째 사마리아 사람은 그냥 지나가지 않고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 줬다. 그리고 예수님이 묻습니다.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냐?” 답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비슷하지만 다른 질문이 있습니다. “누가 내 이웃이냐?” 이렇게 묻는 질문이 있고, “너는 누구의 이웃이냐?” 이렇게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만일 “누가 내 이웃이 냐?”고 묻고만 있다면 해답은 없습니다. 가만히 앉아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오기만을 기다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웃에 대하여 말한 구약의 대표적인 구절이 레19:18절입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여기에 “이웃”이 나옵니다. 문제는 이 “이웃”이 누구냐의 문제입니다. 이웃에 대해 해석을 유대인들은 두 가지로 합니다. 넓은 해석은 이웃은 “다른 민족”을 의미한다. 유대인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 그것이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좁은 해석은 자기 동족 유대인을 가르킨다는 해석입니다. 두 가지가 다 있지만 대부분의 유대인 랍비들은 “이웃”을 유대인 동족으로 해석했습니다. 혹시 유대인 동족이 아닐지라도 한 가지 는 분명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이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인은 앗시리아와 혼혈되어 민족의 혈통을 어지럽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벤시락>이라는 주전 2세기의 유대인 문헌을 보면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 불레셋 사람, 둘째 에돔 사람, 그리고 셋째 사마리아 사람.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마리아 사람과 함께 떡을 먹는 것은 마치 돼지의 살을 먹는 것과 같다”. 그 정도로 싫어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사람들이 싫어하는 사마리아 지역을 스스로 지나갑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싫어하고 받아 들이지 않는데도 지나갑니다. 지나갈 뿐 아니라 비유를 통해 사마리아인을 칭찬합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피해 가는 데 예수님은 그속으로 들어갑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은 사람으로 취급조차 않는 데 예수님은 가장 좋은 이웃의 모델로 사마리아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은 제사장이 아니요, 레위인도 아니다. 사마리아인이다“. 했을 때 율법사는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질문앞에 서 있습니까? “누가 나의 이웃이냐?” 묻습니까? “나는 누구의 이웃이냐?”라고 묻습니까? 내가 누구의 이웃이냐고 물어야 이웃을 찾아 떠날 것입니다.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느냐고 물어야 우리의 존재, 관계, 교육, 믿음, 교회, 선교등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들이 될 것입니까? 현재 우리 사회를 형성한 잘못된 성공관의 기초에 그런 것이 있습니다. “누가 내 이웃이냐?” “누가 나를 도와 나를 성공시킬 것이냐?” 이 경우는 자기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 민주당의 상원의원 중 로버트 버드(Robert Carlyle Byrd)라는 의원이 있습니다. 그는 40년간 하원의원을 역임하고 2010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헌법학자이기도 한 그는 “걸어다니는 미국 헌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운전 중 앞차를 들이받는 사고를 내고 파출소에 연행되었습니다. 파출소에 연행되어 보니까 상원의원입니다. 상원의원은 면책특권이 있어서 경찰이 그를 귀가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10일 후 재판소에 나와 자기 순서를 기다린 다음 자기 차례가 되자 모든 혐의를 인정하고 벌금을 물었다고 합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이것과 온갖 부정축재로 떼부자가 전직 대통령이 “난 돈없다. 되져 봐라“ 어떻게 비교되지 않습니까? “누가 내 이웃이냐”고 묻지 말고 “나는 누구의 이웃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좋은 이웃이 내게 다가오기를 기대리지 않고 찾으러 나간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사마리아 사람을 봅시다. 세 가지로 헸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눅10: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첫째 불쌍히 여겼습니다. 마음이 먼저였습니다. 마음이 먼저 가지 않는 구제는 동정입니다. 먼저 마음으로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34절, 눅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 볼보아 주니라”. 둘째 “가까이 가서”입니다. 마음으로만 불쌍히 여겨서는 안됩니다. 몸이 가야 합니다. 그리고 셋째, “돌보아 주니라”. 행동이 따랐습니다. 먼저 불쌍히 여기고, 다음으로 찾아가고 마지막으로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것이 “내가 누구의 이웃이냐?”고 묻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살지 않는 유일한 기관입니다. 교회는 “누가 우리의 이웃이냐”고 묻지 않고 “우리가 누구의 이웃이냐”고 물어야 합니다. 최근에 나온 좋은 책이 있습니다. “교회밖으로 나온 교회”. 이 책은 좋은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라 안에만 있지만 말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밖으로 나간 교회의 특징이 있습니다. 믿음과 삶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믿었으면 그렇게 삽니다. 교회가 자체 건물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역의 건강과 봉사를 위해 존재합니다. 말보다는 삶으로 전도합니다. 교인 수를 늘리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영향력을 늘리는 것이 교회입니다.
상처받은 치유자가 됩시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상처받은 치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상처받은 치유자”라는 말은 헨리 나우웬이라는 사람이 썻습니다. “wounded healer"라고 합니다. 이 말은 내가 상처받았지만 내 상처 때문에 앉아서 울지만 말고 더 상처받은 사람을 위해 치료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오늘 이야기에 두 사람의 상처받은 사람이 나옵니다. 하나는 강도만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강도에게 얻어 맞아 몸에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상처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상처받은 사마리아인이 상처받은 강도만난 이웃을 돌봅니다. 강도만난 사람만 상처받은 것이 아닙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미 훨씬 더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받았습니다. 자기가 상처받지 않아서 다른 사람을 치료하지 아닙니다. 자기가 상처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치유합니다. 남을 치유할 수 있으려면 두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첫째는 자기가 상처를 당해 보았어야 합니다. 과부 마음 과부가 알고 홀애비 마음 홀애비가 압니다. 두번째로는 그 상처에서 치료받은 경험을 가져야 합니다. 상처가 있다고 다 남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상처를 치료받은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상처는 받았는 데 치유받지 않으면 속에서 쓴뿌리가 생깁니다. 그래서 결정적인 때 남을 찌릅니다.
어제는 2년전 죽은 한 할머니의 2주기 추모일이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할머니였습니다. 오래전 평화 시장 노동자 전태일이 오래전에 죽을 때 그 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답니다. “어머니, 나는 가지만 어머니는 이 땅의 모든 노동자들의 어머니가 되어 주세요”, 어머니가 눈물만 흘리고 있자 전태일이 말했답니다. “어머니 약속하세요”. 그래서 어머니가 약속했습니다. 그 뒤 40년, 이소선 할머니는 모든 고통당하는 노동자들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가난한 노동자들의 벗이 되고 갑자기 사고로 군대에서 성폭행으로 죽은 자식들의 어머니가 되고 가난해서 자살한 사람들의 어머니가 되고, <어머니>란 영화가 그 내용입니다. 1987년 민주화 운동때 죽었던 이한열 어머니가 이소선 할머니 영전에 읽은 글이 있습니다. "어머니, 87년 8월 12일, 제가 어머니를 처음 뵈었을 때 어머니는 제 아픈 마음을 헤아려 주시고 누구보다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괴로움에 지쳐 자식을 따라서 죽고 싶었던 저는 그 이후부터 어머니의 손을 잡고 힘을 내어 오늘까지 살아왔습니다. 우리보다 더 큰 상처를 안고 사는 어머니가 우리 손을 잡아줄 때 우리 상처는 눈송이처럼 녹아 내렸습니다. 어머니는 고통받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입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잘 가세요“.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을까요? 자신도 상처받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아들 전태일도 그렇게 죽어 어머니의 가슴에 못박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처를 입은 사람만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중에 인생의 상처를 많이 받아본 분 계십니까? 여러분은 그 상처의 아픈 추억속에서 남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자격증을 얻은 것입니다. 인생에서 넘어지기만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넘어지면 줍는 것도 있습니다. 여러분, 자식죽은 어머니의 심정으로 다른 사람을 보면 어떨까요? 다 자식같을 것입니다. 만일 여리고 골목을 그 날 자식잃은 어머니가 지나갔다면 그는 강도만나 신음하는 사람을 버리고 갔을까요? 차마 자기 자식이 생각나서 그냥 지나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자기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바라본다면 세상에 버릴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 가을에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갈 때 우리가 버리고 가는 사람은 없습니까? 자기 불행에 익숙해지는 것도 문제지만 자기 불행에 빠져 있는 것도 문제입니다. 저는 19살 때 시집와서 30년을 여섯 시동생, 시누이 키우고 시집, 장가보내고, 그 뒤 30년을 5 자식 키우고 장가보낸 어머니를 압니다. 그에게는 60평생 자기 삶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60년을 그렇게 살자 그의 손때가 묻어 자라난 사람들은 모두 그 앞에 무릎꿇고 당신 때문에 우리가 살았오라고 감사해 했습니다. 그 분이 우리 어머니입니다. 저는 또 13년을 치매 부모를 모시고 산 며느리를 압니다. 처음 3년은 시아버지를, 나머지 10년은 시어머니를 모셨습니다. 그가 시집와서 한 것은 시아버지, 시어머니, 오직 두 사람 살린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소모적인 인생을 살았지만 그의 자녀들은 어머니의 희생을 본받아 훌륭한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그가 저희 이모입니다. 저는 저의 어머니와 이모를 보면서 현대판 사마리아인을 봅니다. 그들은 여리고에 간 적도 없고 여리고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지만 그들 인생길에 하나님이 함께 가도록 붙여준 상처받은 사람들을 버리고 않고 끝까지 그들과 함께 가 결국은 승리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바쁘게 인생을 살면서 잃어버린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엇을 성취하기 위해 혼자 바쁘게만 살아가지 않나요? 이 가을에 예수님과 함께 버림받은 땅 사마리아를 지나면서 우리가 놓고 간 사람, 우리가 잊고 사는 사람, 우리가 우리 때문에 버리고 간 사람은 누군지 생각해 봅시다. 그래서 가깝게 가려거든 혼자 가지만 멀리 가려거든 함께 갑시다. 한편으로는 예수님과 함께 가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맡겨진 상처받은 그 사람들과 함께 갑시다.
눅10:25-37 2008.8.10(일)
멀리 가려거든 함께 가라
눅9: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지도) 갈릴리-에루살렘
갈릴리 - 사마리아 - 예루살렘
(눅1-8장) (눅9-19장) (눅20-24장)
모두가 상처받고 삽니다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사진).
강도들이 숨어 있던 동굴(사진).
나는 누구의 이웃입니까?
레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두 질문
(1) 누가 나의 이웃이냐?”
(2) “나는 누구의 이웃이냐?”
눅10: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눅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 볼보아 주니라”.
상처받은 치유자가 됩시다.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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