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3: 6-9 2013.9.22(일)
내가 네게 거름이 될께
추석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여러분은 추석을 잘 보냈습니까?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넉넉하고 얼굴이 보름달처럼 환하십니다. 추석 전 날 어떤 분이 전화가 왔습니다. 초등학교 친구였습니다. 초등학교때 참 친하게 지냈는 데 초등학교 졸업후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가 제 주소를 알고 전화한 것입니다. 그래서 약속했습니다. “나, 이번에 추석때 집에 가니까 추석때 만나”. 그 친구가 추석 전날 저희 집에 왔습니다. 달은 휘영청 빛나는 데 몇 십년 동안 떨어져 지낸 친구는 오랜만에 옛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고향이 같은 사람은 언젠가 만난다. 반드시 만난다”.
여러분은 서로 고향이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하늘 나라가 고향인 사람들, 우리는 한 고향사람들입니다. 우리 옆에 있는 분에게 말합시다. “우리는 한 고향 사람입니다”. 우리는 가는 방향이 같고 목적지가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만일 같은 방향으로 가는 데 서로 마음이 안 맞다면? 같은 방향으로 가기는 가는 데 서로 이야기도 안 하고 간다면? 같은 가는 사람이 여러분의 감정을 상하게 하거나 기대에 어긋난다면? 서로 사업적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 여러분에게 충분히 잘하고 못할 때 여러분은 그들과 관계를 끊거나 해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렇게 하지 못할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가 가는 길에서 만나는 가까운 사람들이 썩 마음에 들지 않고 그들이 우리의 생각대로 잘 안해줄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6절입니다. 눅13: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 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포도원과 무화과 나무가 나온 것을 보아 이 말씀은 농촌을 배경으로 한 것 같습니다. 내용은 한 농부가 포도원에 무화과 나무를 심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보통은 포도원에는 포도를 심습니다. 그런데 이 농부는 무화과를 심었다고 말합니다.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현장에 가보면 보통 포도원에 무화과나무가 있습니다. 성경에도 나옵니다. 욜1:7, “그들이 내 포도나무를 멸하며 내 무화과나무를 긁어 말갛게 벗겨서 버리니 그 모든 가지가 하얗게 되었도다”. 12절에 또 나옵니다. 욜1:12, “포도나무가 시들었고 무화과나무가 말랐으며”. 포도와 무화과 나무는 성경에 많이 같이 쓰입니다. 저는 식물학적으로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포도과 무화과 나무는 서로 잘 어울리는 나무인가 봅니다.
성경의 포도와 무화과나무는 항상 평화를 상징할 때 쓰입니다. 미4:4,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니라”. 이스라엘 역사속에서 가장 평화로울 때를 상징할 때는 언제나 백성들이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았다”고 표현합니다. 그만큼 먹고 살기 좋았다는 뜻입니다. 슥3:10에도 나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
포도원에 무화과 나무가 심겼다면 그 모양은 어떨까요? 포도 나무는 키가 작습니다. 기껏해야 우리 키 정도입니다. 그러나 무화과 나무는 키가 큽니다. 보통 3-4미터에서 10미터 되는 것도 있습니다(사진1). 인도의 파고다 무화과 나무는 사방 90미터까지 그늘을 드리우고 자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포도원에 이는 무화과 나무”는 어떤 모양을 하고 있겠습니까? 고만 고만한 포도나무들 속에 "군계일학"처럼 우뚝 솟은 모양일 것입니다(사진2). 그 모습은 보기만 해도 시원하고 멋집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포도원은 세상입니다. 포도나무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무화과 나무가 우뚝 서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입니까?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습니다. 우리가 믿지 않은 사람들보다 낫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위에 튀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뚝 선 무화과나무처럼 세상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투명하게 봅니다. 보고 싶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자동적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하는지 못하는지 눈 부릅뜨고 쳐다 봅니다. 포도나무는 작기 때문에 잘못해도 눈에 잘 안 띱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는 눈에 띱니다. 요즘 기독교가 사회로부터 많은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저런 잘못들이 만천하에 드러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히 잘못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는 전체적으로 낫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눈에 잘하는 것은 눈에 안 띠고 잘못한 것만 눈에 띱니다. 잘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잘못하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무화과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철학자 아브라함 죠수아 헤쉘은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세상에 솟은 막대기다”. 사람들은 막대기를 보고 길을 찾습니다. 오랜 세월 이스라엘은 세상의 막대기였습니다. 길을 잃을 사람에게는 그 막대기가 이정표가 되었지만 잘못할 때 그막대기 때문에 비난과 핍박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의식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포도원에 심긴 무화과나무다”. “세상은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을 다 보고 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이다. 우리는 하나님보고 예수님 믿지만 세상은 우리를 보고 하나님 믿는다. 우리는 세상의 막대기다”. 그래서 늘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도덕적 표준이 세상 사람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오래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이 무화과에 열매가 맺기를 오래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6절 뒷 부분입니다. 눅13:6, “와서 그 열매를 구했으나 얻지 못한지라”. 여기서 “구했다”는 말은 “열매를 얻기 위해 주인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입니다. “열매를 딴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열매를 줍는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열매를 구한다”고 했습니다. 열매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열매맺기 위해 세 액체가 필요합니다. 땀과 눈물과 피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그렇게 수고했는데도 얼마후에 가 보니까 열매가 없습니다. 그런데 무화과 나무의 특징이 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심으면 바로 그 해에 열리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나마도 일년에 열 달 정도 열매맺는다는 것입니다. 심으면 열고 열어도 열 달을 계속 여는 나무는 무화과 나무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무화과 나무는 보통 여름이 시작되는 2-3월 경에 파란 잎과 함께 열매가 맺힙니다(사진3), 그러다가 4월, 유월절 쯤이면 먹을만하게 됩니다(사진4), 가을이 되면 익습니다(사진5). 열매가 없는 것은 겨울, 한 두 달입니다(사진6). 예수님도 성전에 올라가시다가 열매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그랬나 이해하지 못하지만 간단합니다. 그때가 유월절 무렵, 4월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열매맺혀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도 열매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주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열매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의 무화과 나무에는 열매가 있습니까?
열매는 때가 되면 맺힙니다. 그러나 주인은 오래 수고하고 오래 기다렸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눅13:7,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 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겠느냐?”. 자, 여기에 “삼년”이 나옵니다. 이 말을 언뜻 보면 “아, 주인이 무화과나무를 심고 3년을 기다렸다는 뜻이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삼년”은 그 “삼년”이 아닙니다. 구약율법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과일 나무를 심으면 처음 3년은 먹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처럼 나무도 할례받을 기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레19:23-25절입니다.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 년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 제 사 년에 그 모든 과실은 거룩하니 여호아께 드려 찬송할 것이며 제 오 년에는 그 열매를 먹을지니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 소산이 풍성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아니라”.
일단 과일 나무를 심으면 3년동안 열매를 먹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4년째부터 먹을 수 있는 데 4년째는 먼저 열매를 따서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러면 5년째가 됩니다. 그때부터 사람이 먹을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5년째부터 열매를 먹게 했을까요? 아마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첫째는 열매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열매가 생기자 마자 따 먹으면 열매가 자라지 못합니다. 자라게 해서 먹어야 합니다. 둘째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신앙 고백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드리기 전에는 먹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주인이 말한 “3년”의 계산이 나옵니다. 주인의 “3년”은 심자 마자 3년이 아닙니다. 3년은 먹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그대로 두었고 4년째는 하나님께 바쳐야 했기 때문에 그냥 지나갑니다. 5년째부터 먹을 수 있기 때문에 5년째 되는 해가 1년입니다. 6년째가 2년입니다. 7년째가 3년입니다. 그러니까 주인이 열매맺기를 기다린 것은 총 7년입니다. 주인은 무화과나무를 심고 무려 7년을 기다린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이 땅에 심고 오랫동안 열매맺기를 기다리신 것을아십니까? 롬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길이 참으신 하나님”. 왜 그렇게 우리의 신앙과 인격은 잘 자라지 않는지 우리가 생각해도 답답합니다. 어떻습니까? 우리의 지식은 자라고 생활형편도 좋아지고 문화적 수준도 자라는 데 우리의 인격, 성품은 잘 자랍니까? 우리의 아파트 평수는 커지고, 월급도 오르고, 몸매도 커지는 데 우리의 신앙인격은 잘 커지지 않지 않습니까? 그렇게 기도해도 우리 혈기 하나 못 죽이고 그렇게 오래 교회를 다녀도 우리안에 부정적인 생각, 비판적인 생각, 남 미워하는 생각 사라지지 않지 않습니까? 그렇게 강조해도 예배 안드리는 사람은 여전히 안 드리고, 십일조 않는 사람은 여전히 않하지 않습니까? 어떻습니까? 그것을 만일 열매없는 삶이라고 한다면 그 나무를 심은 주인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7절 뒷 부분을 보실까요? 눅13:7, “무화과 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겠느냐?”. 주인 입장에서는 찍어 버려야 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찍어 버린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나무를 베어버린다”고 말할 때 이스라엘에서는 “나무를 뽑아버린다”고 말합니다. 실제 이스라엘에서 나무가 죽으면 나무를 베어내지 않고 뽑아냅니다. 왜 그렇습니까? 땅이 넓은 곳에서는 배어 내고 그 자리에 무엇을 안 심으면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땅이 좁기 때문에 베어내고 그루터기만 남기면 땅을 못 씁니다. 그러니까 뽑아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뽑아내셨습니까? 아무 쓸모없이 땅만 버리는 우리를 쏙 뽑아 없애버리셨습니까? 아닙니다. 다시 롬3:25절, 길이 참고 간과했습니다. 간과했다는 말은 못 본척하고 지나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못 봐서 그냥 기나가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참고 기다리신 것입니다. 일꾼이 주인에게 한 말과 같습니다. 눅13:8,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다같이 “내가 더 거름을 주겠습니다”.
내가 더 거름을 주겠습니다.
마땅히 찍거나 뽑아 버려야 할 무화과 나무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주인에게
말한 일꾼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이여, 한 해만 그대로 두소서. 내가 더 거름을 주
겠습니다”. 이것이 누구의 마음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뽑아내지 않을 뿐 아니라 한
마디 더 하십니다. “내가 더 거름을 주겠다”. 여러분은 거름을 아십니까? 거름은 시
골에서 농사할 때 쓰는 퇴비나 인분을 말합니다. 퇴비는 짚이 썩어서 생긴 것이고 인
분은 사람의 배설물입니다. 냄새도 좋지 않고 모양새도 아름답지 않습니다. 주인이 차
마 뽑아버리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일꾼은 한 해만 그대로 두시면 내가 더 거름을 주
어 열매맺게 해 보겠다고 말합니다. 거름은 찌꺼기요 쓰레기입니다. 누구나 거름이 필
요하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거름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거름의 특징은 이렇습니다.
거름이 한 군데 있으면 냄새나고 썩지만 나무에 뿌려 흩어지면 생명이 됩니다. 거름
속에 효소와 미생물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냄새나고 지저분하지만 식물속에 들어가
자신을 죽이고 생명을 살려 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세 종류가 있습니다. 남의 거름을 들춰내는 사람, 남을 거름으로 사용하는 사람, 스스로 남의 거름이 되는 사람. 먼저 남의 거름을 들춰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끊임없이 남을 의식합니다. 자기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늘 남만 바라봅니다. 남을 바라보되 비판적으로 바라봅니다.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같습니다. 눅6: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빙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엿보니”. 여기 “엿본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끊임없이 남의 실수를 엿봅니다. 상대방이 잘못하기를 기다렸다가 잘못하면 “왕”라고 터뜨립니다. 눅14장에 또 나옵니다. 눅14:1,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이 사람이 예수님 주변에 있으면서 하는 것은 늘 엿보는 것입니다. 남을 엿보는 사람의 문제는 정작 자기를 성찰할 시간은 없다는 것입니다. 남을 엿보는 시간의 1/10만 자신을 성찰하는 데 써도 이 사람은 더 좋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남의 거름을 헤치는 사람입니다. 거름을 잘쓰면 비료가 되는 데 이 사람은 남의 거름에서 썩은 악취만 찾아 냅니다. 불행한 인생입니다.
남을 거름으로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생산성이 높이 평가받는 시대입니다. 생산성과 유용성이 없는 사람들은 필요없는 사람으로 여깁니다. 학교는 성적순, 군대는 계급순, 직장은 연봉순입니다. 그 기준에 부합한 사람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다 땅만 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외칩니다 “찍어 버리라. 무능한 사람 직장에서 찍어 버리라. F 학점 받은 학생, 학교에서 찍어 버리라. 능려없는 사람, 퇴출시켜라. 땅만 버린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실제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한때 열매가 없었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몇 년전 예일 대학 총장이 오하이오 주지사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A학점과 B학점을 받는 학생들에게 언제나 친절하십시오. 그러면 언젠가 그들은 훌륭한 교수가 되어 캠퍼스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C학점을 받은 학생들은 존중하십시오. 그러면 언젠가 그들은 캠퍼스로 돌아와 2백만달러짜리 실험실을 지어줄 것입니다.” 공부 잘한 사람은 교수가 될 수 있지만 공부못한 사람은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거름을 주겠습니다”. 이것은 성공을 향하여 빠르게 달려가며 능력없는 자를 소외시키는 세상적 풍조에 대한 성경적 삶을 보여줍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잘라내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우리 조금 더 기다려 봅시다. 우리 그 사람들에게 시간을 더 주면 어떻겠습니까? 빠른 해결책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드신 비유를 보면 대부분 그 주제가 오래 걸리는 것들입니다. 누룩, 쟁기질, 빛, 소금, 고기잡이, 씨, 그리고 거름, 모두 느리고 시간이 걸리고 마지막에야 열매가 나타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서두르지 않습니다. 성경에 많이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시36:7, “여호아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니라”. 영성가 리쳐드 포스터가 말했습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유혹은 성급함이다. 성급함은 마귀의 일이 아니라 마귀 자신이다”. 저는 솔 벨로우라는 사람의 말을 좋아합니다. “오래 입을 다물고 있을수록 우리의 내면은 더 비옥해진다.”
혹시 여러분이 좋아하실지 모르지만 제가 좋아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가수 윤복희가 부른 “여러분”이라는 노래입니다. “네가 만일 괴로울 때면 내가 위로해줄께. 네가 만약 서러울 때면 내가 눈물이 되리“하는 이 노래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윤복희가 가수 남진과 결혼하고 가정이 어려워졌을 때 심한 우울증에 걸려 자살 직전까지 가게 되었답니다. 이때 오빠인 윤항기 목사가 동생의 그런 모습을 보고 동생을 위로하고 붙잡기 위해 쓴 노래랍니다. T.V 프로그램 ”나가수“에서 가수 임재범이 불러 더 유명해진 이 노래는 외롭고 힘든 친구에게 우리가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를 내용으로 한 것입니다. 우리 한 귀절 들어 볼까요? ”네가 만약 외로울 때면 내가 친구가 될게. 네가 만약 기쁠 때면 내가 웃음이 되리. 어두운밤 험한 길 걸을 때 내가 내가 내가 너의 등불이 되리. 허전하고 쓸쓸할 때 내가 너의 벗 되리라. 나는 너의 영원한 형제야 나는 너의 친구야“.
이 노래는 실제 오빠가 동생을 위해 작곡한 곳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너의 영원한 형제야“라는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실제 형제는 아니지만 우리 주변에 외롭고 힘든 사람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에게 나는 등불이 되고 벗이 되고 있습니까? 우리는 남의 거름만 들추는 사람은 아닙니까? 우리는 능력있는 사람, 잘 나가는 사람만 좋아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언제 한번 다른 사람에게 따뜻한 연탄이었습니까? 우리는 여러 가지 일로 힘들고 피곤한 사람들에게 찾아가 ”네가 만일 괴로울 때면 내가 위로해줄께. 네가 만약 서러울 때면 내가 눈물이 되리“라고 노래합니까? 성경적 삶의 진수가 있습니다. ”주인님,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내가 그에게 더 거름을 주겠습니다. 아니 내가 거름이 되겠습니다. 나도 누군가의 거름으로 살았으니 이제 조금이나마 나도 거름이 되겠습니다“.
구원은 또 한번의 기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의 태도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의 태도이기도 합니다. 여러번 이야기합니다만, 예수님은 지금 누구와 함께 어디를 여행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가기 위해 사마리아를 여행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최종 목적지요 사마리아는 그 과정입니다. 예수님은 최종 목적지는 예루살렘에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십자가에 죽고 부활했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지가 예루살렘이고 그의 목적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사마리아 여행은 그 메시지의 빛에서 조명되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말씀에 나타난 예수님의 메시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자, 여기 7절에 “찍어 버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이 “찍어 버리라”는 말의 동사가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골고다로 향할 때 백성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동사와 같습니다. “찍어 버리라”, “십자가에 못박으라”, 두 말은 똑같이 “없애라”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8절에 “그대로 두소서”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에페스“인에 이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기도하신 내용과 같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오늘의 비유는 그냥 “열매가 있다 없다. 그러니 찍어 버리라”는 농사의 교훈을 주려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농사의 비유를 통해 무엇인가 다른 것을 말씀하시려는 것이지 다만 농사의 지혜를 가르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의 무엇을 가르치려는 것일까요? 자,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면서 열매없는 나무를 찍어 버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냥 두어라. 내가 거름을 주겠다”는 말은 성경의 본래적 메시지와 어떻게 관계된 것입니까? 두 가지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열매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그래서 다 찍히고 뽑혀야 합니다. 죄의 삯은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대신이 죽으신 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입니다. 롬4:25절입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은 우리 대신에 찍혔습니다. 그리고 죽었습니다. 그러자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살았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또 한번의 기회를 받은 것입니다. 죽어야 할 기회를 살 기회로 바꿔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예수님에게 돌리고 우리에게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죄없는 예수님에게는 “찍어 버리라” 말씀하시고 죄인인 우리에게는 “그대로 두라, 내가 거름을 주고 다시 살리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저를 십자가에 못박으라”. 예수님께는 십자가의 형벌을 내리시고 “저는 한번 더 기회를 주라”. 우리에게는 부활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예수님이 당시 사용했던 실제 언어는 아람어였답니다. 그런데 아람어가 재미있습니다. “뿌리를 뽑아 버리라” 와 “그냥 두어라”가 어원이 같습니다. 아람어로 “뿌리 뽑아라”란 말을“프수키”라고 하고, “그냥 두어라”라는 말을 “슈부키”라고 합니다. 두 언어가 공통합니다. 언어속에 담긴 구원적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누구입니까? 한번 더 기회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마땅히 찍히고 뽑혀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냥 두어라” 자비의 선언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대신 찍히시고 우리가 대신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정죄받으시고 우리는 용서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속박을 당하시고 우리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찢기시고 우리는 나음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죽었으니 우리는 다시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형벌을 받았으니 우리는 다시 형벌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시 실패하지 않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모든 일에 성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찍어 버리라” 말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가만 두어라” 말씀합니다. 직장은 학교는 생존경쟁은 우리에게 “찍어 버리라” 말하지마 주님은 우리에게 “가만 두어라. 혹시 부족하면 내가 다시 거름주리라. 가만 두어라. 혹시 죄를 범했을지라도 다시 일어나게 하라. 내가 저들의 거름이기 때문이다. 내가 거름이다. 그래서 너희는 살았다. 내가 거름이 되리라. 그래서 너희가 살 것이다. 한 가지만 더 묻겠다. 혹시 나와 같이 너희도 할 수 있겠니? 이 썩은 세상에 썩은 것을 자꾸 들춰내는 사람 되지 않고 내가 스스로 거름이 되겠다고. 너희도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할 수 있겠니? 내가 당신의 거름이 되겠다고”. 거룩한 주일, 하나님의 이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눅13: 6-9 2013.9.22(일)
내가 네게 거름이 될께
눅13: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 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욜1:7, “그들이 내 포도나무를 멸하며 내 무화과나무를 긁어 말갛게 벗겨서 버리니 그 모든 가지가 하얗게 되었도다”.
욜1:12, “포도나무가 시들었고 무화과나무가 말랐으며”.
미4:4,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니라”.
슥3:10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
무화과 나무(사진1).
포도원에 이는 무화과 나무(사진2).
하나님이 오래 기다렸습니다.
눅13:6, “와서 그 열매를 구했으나 얻지 못한지라”.
이스라엘 무화과 나무(사진3-6)
레19:23-25,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 년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 제 사 년에 그 모든 과실은 거룩하니 여호아께 드려 찬송할 것이며 제 오 년에는 그 열매를 먹을지니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 소산이 풍성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아니라”.
롬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눅13:7, “무화과 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겠느냐?”.
눅13:8,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내가 더 거름을 주겠습니다.
세 종류의 사람
(1) 남의 거름을 들춰내는 사람
(2) 남을 거름으로 사용하는 사람
(3) 스스로 남의 거름이 되는 사람.
눅6: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빙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엿보니”.
눅14:1,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시36:7, “여호아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니라”.
윤복희, “여러분”
“네가 만일 괴로울 때면 내가 위로해줄께. 네가 만약 서러울 때면 내가 눈물이 되리....네가 만약 외로울 때면 내가 친구가 될게. 네가 만약 기쁠 때면 내가 웃음이 되리. 어두운밤 험한 길 걸을 때 내가 내가 내가 너의 등불이 되리. 허전하고 쓸쓸할 때 내가 너의 벗 되리라. 나는 너의 영원한 형제야 나는 너의 친구야“.
구원은 또 한번의 기회입니다
“찍어 버리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
“그대로 두소서”=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롬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뿌리 뽑아라”(프수키)=“그냥 두어라”(슈부키)
'추천 설교 > 이윤재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눅15:11-24 2013.10.6(일)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들 (0) | 2018.04.12 |
---|---|
눅14:1-6 2013.9.29(일)와서 내 식탁에 앉으라 (0) | 2018.04.12 |
눅11:1-13 2013.9.15.(일)친구가 있습니까? (0) | 2018.04.12 |
눅10:25-37 멀리 가려거든 함께 가라 2013.9.8(일) (0) | 2017.04.20 |
시63:1-11 영혼의 회복 2013.8.25(일) (0) | 2017.0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