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이윤재목사

눅14:1-6 2013.9.29(일)와서 내 식탁에 앉으라

14:1-6 2013.9.29()

와서 내 식탁에 앉으라

 

일년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을 맞이했습니다. “아름다운 가을입니다”. 지난 주 추석때고향에 갔는 데 옛날 시골 초등학교로 가는 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코스모스가 만발해 있었습니다. 옛날 친구들과 함께 코스모스 길을 걷던 생각이 나서 한참을 걸었습니다. 세월이 지나 친구는 없지만 이제는 주님과 함께 걷는구나 생각하며 길을 걸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번 가을에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주님과 사마리아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걸으시면서 매주 한 가지씩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은 어떤 말씀을 주실지 기대가 됩니다.

 

오늘의 주제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오해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옛날, 한국교회 초기에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목사님이 먼 길을 떠나 하루종일 여행하다가 날이 저물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여관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사람이 많아 한 사람이 한 방을 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방에 들어가 보니까 방은 어둡고 거기 한 사람이 있는 데 인상이 아주 험악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경계하면서 반대쪽 벽을 바라보고 잠을 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서로 모르는 사이고 불안하기도 해서 서로 보따리를 가슴에 품고 잡니다. 밤새 뒤척이다가 잠도 제대로 못잤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서로 바라보고 통성명하는 데 아, 이게 웬일입니까? 한 사람은 목사였고 또 한 사람은 장로였습니다. 그것도 같은 지방의 목사, 장로였습니다. “내가 누구요. 당신은 누구입니까?”하고 물으면 될 것을 어두운 방에서 서로 오해하다가 불안한 하룻밤을 지낸 것입니다.

 

실제로 오해가 낳는 비극은 이보다 훨씬 큽니다. 사람끼리 오해하면 서로 풀면 됩니다. 목사가 도둑같고, 장로가 깡패같이 보이지만 날이 밝고 인사하다 보면 다 풀립니다. 문제는 신앙에 대한 오해입니다. 제가 어릴 때 저의 교향교회에 한 전도사님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부부인데도 같이 잠을 자지 않습니다. 각자 다른 방에서 잠을 잡니다. 이들이 서로 존중하고 아끼는 데 잠자리는 같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부부에게는 평생 자녀가 없습니다. 이 부부는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비록 부부관계일지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순결하게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죽는 날까지 깨끗하게 살겠다”. 또 자라면서 그런 교인도 보았습니다. 몸에 큰 병에 걸렸는 데 병원에 가지 않습니다. “모든 병은 하나님이 주신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병은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에 감사로 받아야지 병원에 가면 안된다이 믿음 때문에 그는 병원에 가지 않았습니다. 목회하면서 이상한 교인을 만났습니다. 시간도 있고 믿음도 있는 데 일부러 열심 안내는 교인입니다. 그저 주일 예배만 나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중독중에 가장 큰 중독이 종교중독입니다. 열심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중독이 되면 열심 자체를 위해 열심을 내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 우상이 됩니다. 저는 자신을 우상으로 삼지 않기 위해 일부러 열심을 안냅니다”. 상당히 어려운 말입니다.

 

가끔 그런 분들을 봅니다.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이기 때문에 십일조 안한다“. ”교회는 300명 넘으면 기업이다. 그래서 나는 300명 미만 교회만 다닌다“.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데 문제는 그 이유가 충분히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다니면서 받은 어떤 때 어떤 사람에게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생각이 자라 신념이 되고 확신이 됩니다. 그때부터 그는 그렇게 믿고 삽니다.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 그것이 성경적이냐 아니냐를 묻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믿는대로 평생을 살아 갑니다. 문제는 그것이 오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이 성경적이 아니고 잘못된 것이라면 어떻게 할 것이냐 묻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여행하는 중 어떤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14: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 그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일은 우리로 말하면 금요일 저녁부터 시작됩니다. 금요일 오후 3시가 되면 이스라엘의 모든 자동차가 멈춰서고 모든 관공서, 학교, 가게가 문을 닫습니다. 택시까지 끊어져 처음 이스라엘 간 사람은 당황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오후 6시부터 그 다음 날 오후 6시까지 섬처럼 조용합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바리새인의 초청을 받았다면 그것은 분명 식사에의 초청일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금요일 저녁, 가족이 다 함께 모여 안식일 식사를 합니다. 이때 가끔 외국인도 초청합니다. 저도 여러번 유대인 가정에서 안식일 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1절 마지막 부분이 걸립니다.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엿보는 것은 좋은 신앙이 아닙니다. 엿보는 신앙은 남의 실수를 기다리는 잘못된 신앙입니다. 신앙의 초점이 자기를 성찰하는 데 있지 않고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려는 데 있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말한대로 매일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며 사는 사람은 남을 바라볼 틈이 없습니다”. 한번은 성 프란치스코의 제자들이 프란치스코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사람들이 선생님을 성자라고 말합니다”. 프란치스코가 말했습니다. “그대들이 내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다면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 것을 알 것이요”. 프란치스코는 매일 자기를 들여다 보느라 남을 들여다 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이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엿보았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날이 안식일인데 안식일은 일하지 않는 날입니다. 그런데 그때 그 집에 수종병 든 사람 하나가 있었습니다. 수종병이란 몸에 물이 차서 부어 오르는 병입니다. 그냥만 부어도 아픈 데 물이 차서 부었다면 얼마나 고생스럽겠습니까? 그 사람이 예수님이 그 집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찾아온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과연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지 안 고치는지 그것을 엿본 것입니다. “오늘은 안식일이기 때문에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된다. 만일 예수가 병자를 고친다면 그것은 안식일을 어긴 것이다. 과연 예수는 안식일에 일하냐 그렇지 않느냐?”

 

여러분, 두말할 것이 없이 안식일은 일하지 않는 날입니다. 히브리어로 안식일샤밧이라고 하는 데 이 말은 "일을 그친다"는 말입니다. 구약은 적어도 12번이상이나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장에 처음 나오고 출20, 5장에 계속 나옵니다. 어느 정도 일하지 말라고 말합니까? 20:10,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그 집에 사는 사람뿐아니라 짐승들까지 일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16장은 더 구체적입니다. “안식일에 먹을 것을 구하거나 만들지 말라”. 그래서 유대인은 지금도 안식일 전날 음식준비 합니다. 35장은 한 걸음 더 나갑니다. “안식일에는 아예 불도 피우지 말라”. 음식을 위한 불이든 난방을 위한 불이든 불을 피우는 것은 노동이기 때문입니다. 현관등도 안 켭니다. 이 정도로 일을 금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환자 잎에 있습니다. 더구나 그 환자는 불치병에 걸렸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그를 고친다면 그것은 명백히 율법을 어긴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할 것인가? “병자를 고치면 안식일을 어기고 안 고치면 병자가 죽고“.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율법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는 먼저 율법이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구약에는 모두 613개의 율법이 나옵니다. 365가지는 하지 말아야 할 율법이고 248가지는 해야 할 율법입니다. 율법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삶의 규칙입니다. 이것은 하라”, 이것은 하지 말라”. 반드시 필요한 질서요 법규입니다. 그 질서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40년간 광야를 안전하게 행진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법과 질서는 필요합니다. 신자의 삶에 어떤 질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대표적인 기독교시대가 청교도시대입니다. 청교도는 영국국교의 타락으로부터 교회의 순결을 지키고자 교인들을 철저히 단속했습니다. 그래서 1676년 로버트 바클레이라는 청교도 목회자는 신자는 예수님을 닮아 심각하고 사려깊어야 하며 웃음이나, 스포츠, 게임, 조롱, 농담은 일체 삼가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때 신자가 노름하다 걸렸다든지 주일날 장사하다 발각되었다든지 남녀가 무분별하게 놀다 발각되면 큰 일 났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웃고 즐기는 극장이 아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웃기 위해 살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것은 죄 때문에 통회하기 위해 산다”.

 

한국교회도 이 청교도에 영향을 받아 처음부터 매우 엄격한 신앙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1901년에 신앙생활의 7가지 기본 강령이 생겼습니다. 모든 신자가 지킬 7가지 교회 질서입니다. 첫째 예배출석을 철저히 할 것, 둘째 주일을 반드시 지킬 것, 셋째 부모에게 효도할 것, 넷째 일부일처제를 지킬 것, 다섯째 인가귀도 할 것, 여섯째 근면 성실할 것, 일곱째 금주 금연할 것, 당시 교회는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세례도 안주고 교회직분자가 이렇게 하면 파면까지 했습니다. 1914년에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절대 장로로 세우지 말라는 원칙도 공포했습니다. 매우 엄격한 신앙 질서입니다. 그러면 이런 것들이 나쁜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이 흩으러지면서 한국교회는 위기에 빠졌습니다. 이런 규제가 한국교회의 세속주의, 편의주의, 안일주의를 막아 냈습니다.

 

문제는 규례가 좋은 것이지만 절대적 규범으로 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죄인이어서 한번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절대화하려는 경향이 있습니. 죄의 본질은 자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주장이 옳아서만이 아니라 자기가 주장했기 때문에 옳다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죄는 본질에 있어서 자기 주장이고 은혜는 본질에 있어 자기 항복입니다. 은혜안에 산다는 것은 매일 부흥회에 참석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절대화하지 않고 상대화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가질 수 있지만 늘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내 생각은 이래. 그러나 그저 내 생각일 뿐이야.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면 언제라도 바꿀 수 있어. 네 생각은 어때?”. 율법이 좋은 것이지만 가끔 그것이 우리를 부자유케 하는 것은 그것을 절대화할 때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교회를 담임하던 목사님이 은퇴하고 새 목사님이 왔습니다. 새 목사님은 젊고 패기가 있어 이런 저런 일들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급기야 전임 목사님이 하던 일도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뜻있는 안수집사 몇 명이 은퇴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도 아시다 싶이 새로 오신 목사님이 너무 성급하게 일을 벌여 우리가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심지어 목사님이 심혈을 기울여 오신 일도 중단시켰습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교회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말씀드리기는 뭐 하고 목사님이 불러다 이야기해 주세요”. 그랬더니 이 은퇴 목사님이 한참 있다가 이렇게 한 마디 했습니다. “내 교회인가 뭘. 하나님의 교회지”. 그래도 안수집사들이 계속 이야기 하자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인가 뭘. 사람이지

제가 이 이야기를 듣고 한참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안에 이런 저런 규칙도 있고 내규, 정관도 있고 심지어 성경을 출처로 한 많은 규율, 법규도 있지만 그것들이 모두 하나님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규율이나 질서가 너무 강조되어 하나님처럼 되려고 할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내 교회인가 뭘. 하나님의 교회지”. “내가 하나님인가 뭘. 사람이지”.

 

어떤 분이 지난 해 저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보수주의입니까? 진보주의입니까?” 아마 선거때 누구를 찍었나 엿보려고 던진 질문일 것입니다. 그때 제가 말했습니다. “저는 보수주의자도 아니고 진보주의자도 아닙니다”. 그랬더니 그럼 뭡니까? 회색분자입니까?” 문제는 보수와 진보 이분법이 아니라 보수는 보수인데 무엇에 대해 보수이며 진보는 진보인데 무엇에 대하여 진보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 분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성경에 대해서는 보수적입니다. 그러나 역사에 대해서는 진보적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한없이 보수적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해서는 한없이 진보적입니다”. 문제는 보수냐 진보냐가 아니라 보수나 진보를 절대화하여 한 쪽으로 고착시키려고 하는 우리의 죄성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한번 고착되면 바꾸려고 하지 않고 사람을 보수와 진보중 하나로 구분하여 그를 그 이상으로는 봐주지 않으려는 우리의 편협한 태도입니다.

 

우리는 보수적일 수 있지만 다른 사람, 다른 사상을 배타할 만큼 보수주의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진보적일 수 있지만 우리를 지켜온 가치와 전통을 깡그리 무시할만큼 진보주의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한국 교회는 지금 둘로 나눠져 있고 우리 사회도 지금 심각하게 둘로 나눠져 있습니다. 보수는 보수를 절대화하고 진보는 진보를 이상화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어떤 절대도 어떤 이상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우리의 절대시고 하나님만 우리의 이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입니까? 한 가지를 정한 다음 다시 바꾸지 않게. 우리가 하나님입니까? 우리가 가진 생각이 항상 옳고 다른 사람의 생각이 틀렸다고 믿게?”. 율법과 규율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은 아닙니다.

 

내 식탁으로 오라

, 이렇게 율법에 고착되어 있는 바리새인을 향한 주님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함께 식탁에 마주 앉는 것입니다. 식탁 이야기는 성경에 많이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4복음서에 다 나오지만 누가복음에 가장 많습니다. 5장에서 예수님이 세리 레위 집에 식사합니다. 7장과 14장에서 바리새인들과 두 번 식사합니다. 10장에서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서 식사하십니다. 19장에서 여리고의 삭개오의 집에서 식사하십니다. 마지막으로 24장에서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과 식사하십니다. 식사도 많이 하지만 하는 식사를 주제로 한 말씀도 많습니다. 11장에 밤중에 떡을 찾은 친구 이야기가 있습니다. 15장에서 돌아온 탕자를 환영하며 잔치를 베풉니다. 14장에서 어떤 주인이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합니다.

 

다시 1절을 보시겠습니까? 14: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 오늘 이야기는 예수님이 그날 바리새인 집에 식사하러 가서 생긴 일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 식사하러 갔습니다. 예수님은 식사하러 갔는 데 바리새인은 논쟁을 벌였습니다. 예수님은 환대의 마음으로 갔는 데 바리새인은 냉대의 자세로 나왔습니다. 안식일에 일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굳어진 바리새인을 향한 주님의 생각이 무엇입니까? “저는 지금 네가 하는 그 일에 목숨걸고 있구나. 그런데 나를 보아라. 내가 바로 하나님이다. 나를 보라. 내가 너희 집에 왔지 않니? 왜 나를 제쳐두고 다른 일을 하니?” 예수님은 단순히 바리새인과 식탁에 마주앉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 신앙의 본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앙이란 바로 무엇 무엇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이것 저젓 할 일이 많지만 지금 우리 앞에는 예수님이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핵심입니다. 율법도 말씀도 내규도 정관도 교회 제도도 질서도 그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안식일도 주일성수도 봉사도 목회도 예배도 찬양도 그 무엇도 예수님이 주인입니다. 지금 바리새인은 신앙의 중심인 예수님을 제쳐 놓고 다른 것을 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이 예수님인 데 예수님없는 안식일 준수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없는 교회 내규, 예수님 없는 교회 질서, 예수님없는 교회 제도, 예수님없는 교회 직분, 예수님 없는 교회 봉사, 예수님없는 교회 예배, 예수님 없는 설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금 신앙의 중심이신 예수님이 앞에 있는 데 그를 제쳐 놓고 다른 무엇을 하면 그것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우리가 늘 속는 것이 이것입니다. 판교개발이 이루어진 지 몇 년 된 어느날이었습니다. 저는 처음에 판교에 사람들이 입주하면 많은 사람들이 금방 올 줄로 알았습니다. 물론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그런 일이 빨리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한동안 교인들의 복지부동을 탓하고 저의 무능을 탓했습니다. 어느날 새벽에 나왔는 데 하나님께 원망이 나왔습니다. “하나님, 아시죠? 제가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제가 하루 하루 어떻게 사는지 아시죠? 저요. 오직 목회만 하고 있다고요. 남들 잘 가는 골프도 안하고 남들 자주 가는 휴가도 안하고 월요일날도 교회 붙어 있고 그렇게 사는 것 아시잖아요? 그런데 왜 저를 축복하시지 않습니까? 왜 제가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게 못하십니까? 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렇게 따짓듯 물었는 데 한참 있다가 제 마음속에서 누군가 이렇게 묻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너는 언제나 나 하나로 만족하겠니?”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자주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한다고 했고 예수님이 전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찾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제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회자로 때로 행복했지만 때로 불행했습니다. 불행의 원인이 무엇인가 생각했더니 그 이유는 내가 예수님도 원하고 다른 것도 원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의 믿음이 왜 나쁜가요? 열심히 일하고 말씀대로 살고 딴 짓 안하고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고, 그러나 바리새인에게 없는 것은 예수님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바리새인에게 찾아 갔는 데,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제쳐놓고 예수님과 상관없는 자기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영락없이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무릎꿇고 부른 찬송이 인생길 험하고 마음 지쳐입니다. “인생길 험하고 마음 지쳐 살아갈 용기 없어질 때 너 홀로 앉아서 울지만 말고 예수님 품으로 나오세요”. 늘 누르는 노래였지만 그날따라 새로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아니고는 아무 것도 안하리라 마음 먹었습니다. 적어도 예수님을 교회보다는 더 사랑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교회 상황과 상관없이 예수님을 사랑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내 식탁으로 오라. 인생길 험하고 마음 지칠 때 내게로 오라. 내게 와서 마시라. 내 식탁은 풍성하니 내게 와서 먹으라”.

 

신앙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에게 나가 그와 마주 앉아 도란 도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봉사속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혹시 여러분은 여러분이 예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해서 예수님을 감동시키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위해 일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도 예수님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세요. 그와 함께 식탁에 마주 앉으세요”.

 

그들도 내 식탁으로 오게 하라

예수님이 식탁에 앉았을 때 한 사람이 집에 들어왔습니다. 수종병걸린 사람이었습니다. 몸에 물이 차서 온 몸이 붓고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 그가 예수님앞에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그를 고치나 엿보고 있는 데 예수님은 그에게 다가서더니 머리에 손을 얹었습니다. 예수님의 손이 닿자 즉시 나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했습니다. 14:5,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최소한 사람은 소나 나귀보다는 존중받아야 합니다. 소나 나귀도 안식일에 건져내는 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사람이겠습니까?

 

우리 말 안식은 히브리어로 크게 세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먼저 샤밧입니다. 이 말은 일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을 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쉬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식의 첫 번째 의미입니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월요일은 다른 날에 비해 심장마비 발생율이 50%나 높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주말에 너무 과음하고 과식하고 과로해서 몸을 피곤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몸을 쉬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첫째 안식입니다. 둘째는 메누하입니다. 이 말은 평온함”, “기쁨이란 뜻입니다. 23:2절에 쉴만한 물가메누하로 되어 있습니다. 샤밧이 몸을 쉬는 것이라면 메누하는 영혼이 쉬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안식일을 시작할 때 마치 여왕을 맞이하듯 하나님께 나오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모든 가족이 정장을 하고 회당에 갑니다. 마치 여왕을 뵈옵든 하나님앞에 나아가는 것, 그래서 메누하”, 기쁨을 맛보는 것, 이것이 예배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안식입니다. 세 번째 안식이 있습니다. “샬롬입니다. 이것을 평화로 번역하지만 더 줗은 번역은 살림입니다. “샬롬은 살림입니다. 살리는 것입니다.

 

지금 같은 방에 두 안식이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안식은 지키는 안식입니다. 예수님의 안식은 살리는 안식입니다. 수종병이든 손마른 자든, 귀신들린 자든,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고친 사람만, 4복음서에 7번 나옵니다. 안식은 살리는 것입니다. 신앙도 살리는 것입니다. 신앙은 결국 한 가지가 아니고 두 가지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종교입니다. 신앙은 대신 예수님 식탁으로 내가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살려 그앞에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교단 총회에서 우리 교회 곽준상 장로님이 전도 최우수상을 받았습니다. 장로님이 평소 하시는 일은 교회 주변을 다니며 전도하는 일입니다. 특히 호반상가에 입점한 가게들에 집중적으로 전도했습니다. 새벽에는 기도하고 낮에는 전도하고, 새벽에는 자신이 예수님께 나아가고, 낮에는 다른 사람을 예수님께 인도하고, 이것이 살리는 삶입니다. 모든 장로님들이 수고하지만 함장로님, 주일 아침 6시에 나와 교인을 영접하기 시작해서 오전 10시에는 입주하는 백현 4단지에 봉고차 몰고 가서 한 바뀌 돌고 사람들을 싣고 교회로 옵니다. 살리는 일입니다. 장로님의 일은 이런 일입니다. 살리는 일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 살리는 일을 하고 있는가?” 백현 전도에 나선 20여명의 전도자들이 발에 물집이 생기도록 수고하고 있습니다. 살리는 일입니다. 이번에 우리가 계획한 새생명 축제도 살리는 일입니다. 단순한 행사가 아닙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과 접촉한 기회를 사람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참여하고 초청해야 합니다.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14:1-6 2013.9.29()

와서 내 식탁에 앉으라

 

14: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 20:10,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그 집에 사는 사람뿐아니라 짐승들까지 일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한국교회 신앙생활의 7가지 기본 강령

(1) 예배출석을 철저히 할 것

(2) 주일을 반드시 지킬 것

(3) 부모에게 효도할 것

(4) 일부일처제를 지킬 것

(5) 인가귀도 할 것

(6) 근면 성실할 것

(7) 금주 금연할 것

 

 

내 식탁으로 오라

14: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

 

 

인생길 험하고 마음 지쳐

인생길 험하고 마음 지쳐 살아갈 용기 없어질 때 너 홀로 앉아서 울지만 말고 예수님 품으로 나오세요...

 

그들도 내 식탁으로 오게 하라

14:5,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안식

(1) 샤밧: 일하지 않는 것

(2) 메누하: 평온함, 기쁨(예배)

(3) 샬롬: 살리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