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1:1-13 2013.9.15.(일)
친구가 있습니까?
본격적인 가을이 시작되었습니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친한 친구와 함께 걷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어제 새로 나온 제 책이 <생명의 숲>입니다. 이 책은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을 숲으로 은유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마치 울창한 숲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 숲에서 정말 친한 사람과 함께 도란 도란 이야기하며 걷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거니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는 하늘 위에 혼자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이 땅에 내려와 우리와 함께 걸으시는 분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함께 거닐었습니다. 애굽에 있는 백성들과 함께 40년 광야를 걸었습니다. 농사하는 백성은 정착하고 목축하는 백성은 움직입니다. 이스라엘은 유목민이요 하나님은 유목민의 하나님입니다. 유목민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푸른 풀과 맑은 물을 찾아 부지런히 움직입니다. 한 군데 있으면 부패하고 썩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 유목민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이 땅으로, 이 땅에서 하늘나라로 부지런히 움직이셨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이 계속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도 그를 따라 계속 움직입니다. 예수님이 이 가을에 저와 여러분을 사마리아 여행에 초대하시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3주전에 예수님과 함께 사마리아 여행을 떠나 지금은 잘 가고 계십니까? 처음보다 조금 더 편해지셨습니까? 조금씩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일이 익숙해집니까?
그 길을 걸으면서 주님이 물으신 첫 번째 질문이 이것이었습니다. “너희는 어떻게 나와 함께 길을 걷겠니?” 세 사람이 따랐습니다. 어디로 가든지 주님을 따르겠다는 사람, 아버지 장례식 마치고 따르겠다는 사람,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따르겠다는 사람,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지난 주는 두 번째 질문으로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희는 누구와 함께 가겠니? 혼자 가겠니? 나와 함께 가겠니?” 가까이 가려거든 혼자 가고 멀리가려거든 함께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붙여 주신 사람들, 그들이 누구든 그들과 함께 가야 합니다. 이제 세 번째 시간, 주님은 오늘 이렇게 묻습니다. “너는 친구가 있니? 너와 가장 가까운 친구는 누구니? 혹시 나를 가장 가까운 친구로 생각해 볼 수 없겠니?”. 어떻습니까? 친한 친구와 함께 가면 행복한 데 그나마 예수님이 우리 친구라면 어떻게 될까요? 대단하지 않습니까?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의 가장 가까운 친구입니까? 그 예수님과 함께 여러분의 인생길을 걷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은 그렇게 묻고 있습니다.
기도는 응답됩니다.
우리의 친구가 누구냐고 물으면서 주님이 가르치신 것은 기도입니다. 1절 보시겠습니다. 눅11: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왜 주님이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칩니까? 기도는 주님과 우리가 친구가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여러분은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기도라고 믿습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믿을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들어주신다”. 여러분도 그렇게 믿습니까? 한 믿음 좋은 기업의 총수가 바쁜 틈을 내서 기도하러 교회에 왔습니다. 그에게는 이번에 착수하는 사업을 비롯한 기도제목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업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는 데 한참 기도할 무렵, 한 거지가 들어와 큰 소리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오늘 나에게 10만원을 주옵소서. 오늘 꼭 필요합니다”. 너무 크게 기도하는 바람에 기업 총수가 기도의 방해를 받았습니다. 몇 번 듣다가 참지 못하고 소리질렀습니다. “이봐요. 내가 10만원 줄테니 제발 내 기도를 방해하지 말아요”. 거지가 10만원 받고 나가면서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아, 하나님, 되게 응답 빠르시다. 칼이네 칼”. 기도하면 무엇이나 응답됩니다.
제가 오래전 이스라엘에 있을 때 한번은 딸이 사해바다로 수영하러 가자고 졸랐습니다. 저는 시간도 없었지만 차도 없어서 못간다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애가 계속 조릅니다. “아빠, 더워. 수영하러 가. 빨리”. 제가 나중에 가자고 했더니 애가 토라져서 말합니다. “정말 안갈거야? 그러면 나 하나님께 기도한다”. 어리지만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날 그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차를 가진 한국목사님 부부가 전화왔습니다. “목사님, 우리가 지금 여리고, 쿰란들렀다가 사해바다 가려고 하는 데 혹시 같이 가실래요? 같이 가시면 저희가 맛있는 것 사드리겠습니다”. 제가 그때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 안가면 나 기도한다?” 했는 데 그 기도가 그렇게 빨리 이루어질 줄 몰랐습니다. 거기다 맛있는 것까지. 하나님은 정말 좋으신 분입니다. 막11:24 말씀을 아십니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다같이 “무엇이든지”. 더 좋은 말씀이 있습니다. 사65:24 말씀입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부르기 전에”, “말을 마치기 전에”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자, 그래서 주님이 가르친 기도가 주기도입니다. 2절, “아버지여”로부터 4절,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는 이것을 주기도문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중요한 초점이 여기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쳤지만 기도를 가르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양으로 볼 때 예수님이 가르친 기도는 2절에서 4절, 곧 3절밖에 되지 않습니다. 내용상 여섯 마디고 단어수도 38개 밖에 되지 않습니다. 제가 천천히 읽어보니까 5초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의 초점은 오히려 그 뒤에 나오는 친구의 이야기에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훨씬 길고 자세합니다. 2절에서 4절이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라면 5절에서 13절은 기도의 실제입니다. 앞 부분이 기도에 대한 이론이라면 뒷 부분은 실제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기도에서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를 이론으로 배우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도가 무엇이고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 알아야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도를 배우기 전에는 기도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다 배운 후에 걷습니까?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연구한 것을 보니까 한 사람이 제대로 걷기 까지 약 3천에서 4천번 넘어진답니다. 어떻습니까? 수영을 비디오로 배울 수 있습니까? 물에 빠져보지 않고 수영이 가능합니까?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존 채프만의 말을 반복합니다. “기도를 배우는 유일한 길은 기도하는 것이며 기도를 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이다”. 걸음마를 배우는 유일한 길은 걷는 것이고 수영을 배우는 유일한 길은 물속에 들어가는 길이며 기도하는 유일한 길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이야기가 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기도는 관계입니다
이 이야기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세 친구가 나타납니다. 한 친구가 여행하다가 밤늦게 친구를 찾아왔습니다. 친구가 배가 고프다는 것을 안 친구는 동네 친구에게 찾아 갑니다. 가서 먹을 것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친구는 마침 가족과 함께 막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친구는 주고 싶지만 내 가족을 다 깨워야 하기 때문에 줄 수 없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친구가 소리칩니다. “뭐라고? 잔다고? 식구들 자는 것이 중요해? 내 친구 죽는 것이 중요해? 당장 안내놓으면 쳐들어간다”. 성경은 이것을 “강청”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얼굴에 철판깔고 강청할 사람은 친구밖에 없습니다. 친구니까 강청하고 강청할만하기 때문에 친구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9절, 눅11: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무엇이든 구하면 준다. 찾으면 찾고 두드리면 열린다. 맞습니다. 무엇이든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물어야 합니다. 구하면 주고 찾으면 찾고 두드리면 열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까? 관계입니다. 한번 물어 봅시다. 밤에 잠자는 친구집에 가서 먹을 것 달라고 소리친 사람이 지나가던 취객이었다면 그에게도 먹을 것을 주었을까요? 주인이 착했다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 99%는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한참 자고 있는 데 지나가는 사람이 술먹고 문을 두드렸다면 여러분은 열어 주겠습니까? 안 열어줍니다. 경찰에 신고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도 열어줄 때가 있습니다. 밤늦게 학원갔다 집에 돌아온 딸이 문 두드리면 반드시 열어 줍니다. 시골에서 밤늦게 아버지가 상경해 문 두드리면 반드시 열어줍니다. 얼마나 열심히 두드렸느냐가 아니라 누가 두드렸느냐가 중요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가르치신 주기도가 “아버지”로 시작한 것 아십니까? 왜 아버지가 중요합니까? 2절에서 4절까지 주기도문에는 모두 다섯 개의 기도가 나옵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시험에 들게 마시옵소서” 그런데 이 모든 기도가 한 단어를 향합니다. “아버지여”, 예수님에 의하면 이 모든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는 이유가 딱 하나 있습니다. “아버지여”,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요 우리가 그의 자녀이기 때문에 들으십니다. 그가 아버지기 때문에 일용할 양식도 주시고 죄도 사하고 악에서 구원합니다. 친구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 동사가 다섯 개 나옵니다. “꾸어 달라, 괴롭게 하지 말라,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이 모든 요구가 응답되는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친구. 친구이기 때문에 들어줍니다. 배고픈 친구와 그에게 빵을 준 친구는 사실 전혀 모르는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친구가 있습니다. 가운데 친구는 양쪽을 알고 양쪽 친구는 서로 모릅니다. 이 친구는 한쪽으로는 자기 집에 온 배고픈 사람과도 알고, 밤늦게 문두드려 먹을 것 달라고 요청하러 간 사람과도 압니다. 배고픈 사람이 빵 줄 사람에게 직접 찾아가 빵달라고 했으면 절대 빵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가운데 두 사람을 잘 아는 친구가 중재했기 때문에 빵을 얻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응답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착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11절에서 13절을 보시겠습니까? 눅11:11-13,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아버지, 아들”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응답받는 이유는 그 분은 우리 아버지고 우리는 그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열심보다 관계 때문입니다. 참으로 기도의 신비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고, 예수님은 우리 친구다“. 믿습니까? 우리의 열심보다 우리의 신분이 기도응답을 가져옵니다. 아들이 아니면 아무리 울고 불고 매달려도 생선을 주지 않습니다. 친구가 아니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문 열어 줍니다. 문 잘못 열어 주었다가 큰 일 납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버지요, 예수님은 여러분의 친구입니까?
만일 하나님이 아버지요 예수님이 친구라면 그때부터는 기도가 쉬어 집니다. 세 가지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착한 이미지를 버리고 내 모습 이대로 나가야 합니다. 친구와 이야기할 때 가명쓰는 사람이 있습니까? 친구와 이야기하면서 주민등록을 속이는 사람 있습니까? 중학교, 고등학교, 뻔히 같이 다녔는 데 중학교때, 고등학교 때 나는 반에서 1-2등 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고등학교 2학년때 대천해수욕장에서 한 일을 엊그제처럼 기억하는 데 나는 고등학교때 여학생을 한번도 안 만났다 말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예수님이 친구라면, 나의 과거, 현재 다 알고 계시는 데 그 앞에서 우리가 착한 척, 괜찮은 척, 죄없는 척 할 수 있습니까?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부질없이 낙심말고 기도드려 아뢰세”. “이런 진실하신 친구 찾아볼 수 있을까 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예수님이 친구라면 다 알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아픔도 약함도 상처도 고통도 희망도 다 알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아버지요 예수님이 친구라면 많은 말을 하려고 하지 말고 잘 들어야 합니다. 친구끼리는 많은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을 많이 안해도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것이 친구입니다. 예수님이 친구고 내 사정을 잘 아시기 때문에 장황하게 내 이야기를 늘어 놓지 않아도 됩니다. 프랑스의 잔다르크는 어릴 때 하나님의 음성을 많이 들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왕이 그를 불러 말했습니다. “네가 잔 다르크냐? 하나님이 너에게 자주 말씀하신다고 들었는 데 사실이냐?” 잔 다르크가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왕이 말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너에게는 음성을 들려주고 왕인 나에게는 들려주지 않을까?” 잔다르크가 대답했습니다. “왕이시여, 하나님은 왕께도 말씀하십니다. 다만 왕이 그 음성을 듣지 않기 때문에 못듣는 것뿐입니다”.
한 늙은 농부가 날마다 마을 교회당에 들어가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떻게 기도하냐고 묻자 그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냥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나를 그냥 바라보십니다.” 친구이신 예수님과의 기도는 이렇습니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을 토하면 됩니다. 내가 말하기 보다는 친구의 말을 듣는 것이 좋습니다. 때로는 말을 그치고 침묵으로 바라보기만 해도 됩니다.
예수님이 친구라면 내가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와 친밀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끔 우리의 목적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이용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친구끼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친구는 우정을 위해 있지 나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친구라면 그는 우리의 이용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주님은 이런 저런 것을 줄 수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받기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친구관계의 목적은 우정이고 유익은 덤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응답은 선물이고 목적은 하나님 자신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스왈드 챔버스는 <주님은 나의 최고봉>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은 서로를 유용성과 실용성의 관점에서 보지만 하나님은 절대 그렇지 않다. 기도는 하나님을 얻는 것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선물이다. 기도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임재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이다. 기도는 유용해지지 않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한대로 응답하지만 산타클로스로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그렇게 합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가 어려울 때 도와주지만 119 구조대원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친구로서 그렇게 합니다. 기도의 가장 큰 목적은 친구를 얻는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목적이고 응답은 선물입니다.
기도는 필요입니다
그렇다고 기도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단어가 무엇인가 하고 찾으면 “빵”입니다. 자. 앞에서 가르친 예수님의 기도 6가지 중 한 가운데가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누가복음이나 마태복음이나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 하고 묵상해 보았습니다. 주기도문을 앞에서 읽어도 중간으로 가면 “일용할 양식”이 나오고 뒤에서부터 읽어도 “일용할 양식”이 나옵니다. 일용할 양식은 앞에서 시작하나 뒤에서 시작하나 반드시 만납니다. 중앙에 빵이 있습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의 중심에 빵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뒤에 나오는 이야기에서도 친구가 빵을 구합니다. 하루 종일 빵을 먹지 못한 친구가 밤중에 친구집에 왔고 친구는 빵을 얻기 위해 다른 친구 집을 방문합니다. 예수님이 기도를 주제로 말씀하셨는 데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빵입니다. “빵좀 주세요. 빵을 못 먹었어요. 빵 세 조각만 빌려 주세요. 친구가 배고프답니다”. “빵, 빵, 빵”. 오늘의 이야기는 빵에서 시작해서 빵으로 마칩니다.
가끔 하나님께 기도할 때는 인간적인 필요는 구하지 말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너무 작은 존재로 만들고 기도의 수준을 떨어 뜨린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기도만 헤야 합니까? 천국? 그 나라와 그의 의? 하나님의 영광?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평생을 수도원에서 기도하다 죽은 기도의 사람 토마스 머튼이 있습니다. 그가 그의 책 <칠층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자신의 필요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구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교만이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내게는 모자라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도 필요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8절을 보십시오. 눅11:8,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여기서 “요구대로”란 말은 영어 성경에서 “whatever he needs”입니다. 필요한 모든 것입니다. 예수님과 친구관계에 있기만 하면 “whatever he needs", 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든 다 준다는 것입니다. 여기 ”필요한 것“에는 물질적인 것은 없고 영적인 것만 있든지 영적인 것만 있고 물질적인 것만 있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영이든 육이든 다 필요합니다. 무엇을 필요로 하든지, 그것이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지금 필요한 것이든, 나중에 필요한 것이든, 그것이 영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나에게 직접 필요한 것이든, 나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든지, “whatever he needs", 모든 것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친구라고 해서 우리와 대등한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가 자신을 낮추고 우리를 친구로 받아 주었다는 것이지 그가 우리와 똑같은 존재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 그는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는 마28:18, 하늘과 땅의 권세를 받은 분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적어도 7가지가 있습니다. 계5:12,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power, wealth, wisdom, strength, honor, glory and praise” 정말 대단합니다. 그 분에게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바로 그 분이 말합니다. 눅11:8, “네가 만일 내게 강청하면 내가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주겠다”. “whatever you need", 그래서 예수님을 친구삼은 우리가 가질 가본적인 자세는 영적으로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급이 없이는 한 시도 살 수 없다는 가난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세리처럼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며 그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의 마지막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눅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주님은 빵을 구하는 친구이야기를 하면서 그 이야기를 발전시킵니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빵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먼 곳을 여행하다가 빵을 먹지 못한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를 위해서 또 한 친구가 빵을 구하러 갑니다. 그 친구의 간청때문에 세 번째 친구가 빵을 줍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빵 이야기입니다. 기도는 친구가 친구에게 빵을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겻은 빵만이 아닙니다. 13절,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기도하면 아버지가 자녀에게 생선도 주고 알도 줍니다. 맞습니다. 시21:2의 말씀을 아십니까? “그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셨으며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소원을 다 들어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없습니다. 빵이나 생선이나 알보다 훨씬 크고 많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합니다. 그 분이 성령님입니다. 성령은 영이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이 친구이신 예수님을 통해 기도할 때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렘29:13이 중요합니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하나님 만나는 복, 하나님만나는 응답, 이것이 최고의 응답입니다. 이 시간, 믿으십시오. 예수님을 친구로 모셨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을 응답으로 받습니다. 하나님을 응답으로 받고 선물로 받으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면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우리안에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계시는 데 우리가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관건은 예수님이 우리의 친구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친구입니까? 멀리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우리의 여정에 예수님을 친구로 모시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눅11:1-13 2013.9.15.(일)
친구가 있습니까?
책 <생명의 숲> (사진)
기도는 응답됩니다.
눅11: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막11:2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사65:24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기도는 관계입니다
눅11: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눅11:11-13,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친구 기도
(1) 착한 이미지를 버리고 내 모습 이대로 나가야 합니다.
(2) 많은 말을 하려고 하지 말고 잘 들어야 합니다.
(3)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와 친밀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세상은 서로를 유용성과 실용성의 관점에서 보지만 하나님은 절대 그렇지 않다. 기도는 하나님을 얻는 것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선물이다. 기도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임재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이다. 기도는 유용해지지 않는 것이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
기도는 필요입니다
토마스 머튼,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자신의 필요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구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교만이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내게는 모자라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도 필요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칠층산)
눅11:8,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요구대로”=whatever he needs
계5:12,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power, wealth, wisdom, strength, honor, glory and praise)
눅11:8, “네가 만일 내게 강청하면 내가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주겠다”.
눅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시21:2, ““그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셨으며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
렘29: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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