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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5:11-24 2013.10.6(일)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들

15:11-24 2013.10.6()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들

 

예수님과 함께 사마리아를 걷는 계절입니다. 아름다운 가을, 예수님과 함께 걸으며 오손 도손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뭔가 중요한 것을 잃어본 적이 있습니까? 지난 주 군산 성광교회에서 교단 총회가 열렸습니다. 그날 하루 종일 회의하고 저녁 식사하고 숙소로 들어 왔는 데 핸드폰이 없습니다. 급한 전화를 해야 하는 데 핸드폰이 없으니 얼마나 답답한지 아무리 찾아도 어디에 두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회의하다 내려와서 교회 까페에서 차 한잔 하고 누구와 밖에서 저녁 식사를 했는 데 없습니다. 그래서 일단 핸드폰을 울렸습니다. 그랬더니 한참 있다 전화가 왔습니다. 식당에 식사하러 온 사람인데 전화가 울려 카운터에 핸드폰을 맡겨 놓고 갈테니 찾아가라고. 참고로 이 식당은 밤 10시만 한다고. 여자 목소리였습니다. 친절한 여자분을 찾아 부리나케 식당으로 갔습니다. 그랬더니 여자분은 없고 핸드폰만 있었습니다. 누가 맡겼느냐고 물었더니 한 아줌마가 식사하러 왔다가 핸드폰 소리를 듣고 맡겨 놓았답니다. 참 고마웠습니다. 그때 제가 알았습니다. 무엇을 잃어버렸다 찾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그것이 소중한 것일수록 그 기쁨은 더 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종종 잃습니다. 핸드폰만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친구도 잃고 거래처도 잃고 그리고 사랑도 잃습니다. 가끔 찾지만 못 찾는 것도 있습니다. 평생 못 찾는 것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잃는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크게 세 가지 잃는 것이 나옵니다. 1-7절은 목자가 양을 잃습니다. 8절에서 10절은 여인이 동전을 잃습니다. 11절부터 24절까지는 아버지가 아들을 잃습니다. 처음에는 짐승을 잃고 다음 돈을 잃고 마지막에 사람을 잃습니다. 잃는 것도 다양하고 잃은 사람도 다양하고 잃는 장소도 다릅니다. 양은 들에서 잃고 동전은 집에서 잃고 아들은 가정에서 잃습니다. 결국은 다 찾습니다. 그러나 잃어버리면서 경험하는 고통은 동일합니다. 양을 잃어버린 목자, 동전을 잃어버린 여인, 아들을 잃어버린 아버지, 모두 마음 졸이며 잃어버린 것을 찾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이 아들을 잃어버린 아버지입니다. 다른 것은 혹시 못 찾으면 큰 마음 먹고 포기하면 됩니다. 그러나 아들을 잃어버리면 포기할 수 없습니다. 아들은 어떤 경우에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셋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아들을 잃어버린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내용은 보면 아버지는 두 아들을 다 잃어버립니다. 결국 찾기는 다 찾습니다만, 아버지는 두 아들을 각 각 한번씩 잃었다 다시 찾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잃어버린 것이 있는 데 그것은 형과 동생과의 관계입니다. 집나간 동생이 돌아와 형제는 서로 만났지만 둘과의 관계는 그 후에도 그렇게 완전하게 회복되지 않습니다. 결국 세 가지 종류의 잃어버린 이야기가 이 말씀의 내용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잃고 큰 아들이 아버지를 잃고 그리고 형제와 형제가 서로 잃습니다. 이것이 누구의 이야기입니까? 우리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삽니다.

 

둘째 아들이 잃어버린 아버지

먼저 살필 것은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잃는 이야기입니다. 아주 오래전 이스라엘에 두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15:12, “아버지여, 재산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요구한 것은 재산 상속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녀에게 재산을 물려 줄 수 있지만 반드시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죽은 후에만 가능하다는 조건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아들은 아버지가 아직도 건강히 살아 있는 데도 재산을 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스라엘에 있을 때 강의를 들은 케네스 베일리라는 교수님이 있습니다. 이 분은 미국 출신으로 중동에 와서 40년간 현장에서 맨발로 뛰면서 성서를 연구하신 분입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교수님, 중동의 문화에서 볼 때 아버지가 아직 살아 있는 데 자식이 재산상속을 요구할 수 있습니까?” 교수님이 어렵습니다대답했습니다. 그가 30여년간 수많은 중동사람들에게 물었답니다. “당신은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재산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습니까?” 사람들이 대답했답니다. “없습니다”. 그래서 왜 그렇습니까?” 했더니 백이면 백 모두 우리 나라에는 그런 풍습이 없습니다했답니다. “그럼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아버지는 어떻게 했을까요?”했더니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동네에서 쫓아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은 아버지 빨리 죽으세요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했습니다.

 

여러분, 아버지가 엄연히 살아 있는 데도 재산달라고 생떼를 쓰는 이 아들은 누구입니까? 왜 이 아들은 아버지를 그렇게 존경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런데 못된 아들이 누군가 생각해 보면 다름 아닌 우리 자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우리가 하나님을 거의 의식하지 않고 산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매일 하나님을 의식하고 삽니까? 하나님이 우리 곁에 없어서가 아닙니다.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존재를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 느끼지는 못합니다. 평소에 우리는 하나님이 과연 존재하는지 하나님이 내곁에 있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삽니다. 그러다가 주일날 교회와서 예배드릴 때 잠깐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배 끝나면 잊어버립니다.

 

지난 2일은 노인의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국민일보에 한 가슴 아픈 사연이 소개되었습니다. 부산의 한 주택가에서 60대 할머니 한 분이 5년이 넘도록 죽어 있었는 데 아무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할머니는 이미 죽어 백골이 되어 있었고 추위 때문에 꽁꽁 덮은 이불만 덩그렁히 놓여 있었습니다. 수소문해보니 아무 가족도 없었고 유일한 혈육인 이복오빠가 한 분 있었는 데 어릴 때 헤어져 40년째 보지 못했다며 시신 수습을 거부했습니다. 외롭게 죽어간 가난한 할머니, 그 할머니 이야기를 읽으며 저는 오늘날 서로에 대하여 무관심한 안타까운 세태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무관심한 것은 노인들에게뿐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하는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늘 의식하고 삽니까? 정말 하나님이 살아 있다는 것을 매일 경험하고 삽니까?

 

왜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도 아버지의 존재를 그렇게 느끼지 못하고 산 것일까? 그렇다고 그가 아버지가 필요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적어도 아버지의 존재는 인정했을 것이고 때로 감사한 마음과 사랑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들에게 없었던 것은 아버지의 존재가 아니라 아버지와의 관계였습니다. 그의 머리로는 아버지의 존재를 인정했지만 아버지와의 관계는 그렇게 긴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하나님의 존재를 믿습니까? 이 질문을 미국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98% 이상의 절대 다수가 믿는다고 답변했답니다. 그런데 98%의 사람들중 실제 교회 나가는 사람은 60%에 지나지 않았고 그 60%중 매일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사람은 10%대로 떨어졌습니다. 이것을 요즘 말로 말하면 명제적 신앙과 관계적 신앙으로 바꿀 수 있겠습니다. 자 명제적 신앙과 관계적 신앙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명제적 신앙 관계적 신앙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나는 날마다 하나님과 함께 산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나는 성경을 통해 매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다 나는 매일 아침 하나님과 대화한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이다 나는 매일 진리이신 예수님을 따르며 산다

 

우리는 너무 하나님을 머리로만 믿습니다. 관념의 하나님입니다. 우리 머리로는 하나님을 너무 잘 믿습니다. “하나님은 좋으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나 실제 좋으신 하나님과 매일 관계를 갖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매일 느끼는가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명제적 신앙에서 관계적 신앙으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피상적인 관계는 집을 나가 고생할 때도 나타납니다. 아들이 집을 나가 돈 다 떨어지자 돼지 먹는 곳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고생하면서 말합니다. 15: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아버지를 떠난 아들의 삶은 비참했습니다. 유대인이 가장 증오하는 돼지막에서 돼지들이 먹는 쥐엄열매를 먹고 삽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아들은 그때까지도 문제의 본질을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찾지 않습니다. 지금 내 문제의 본질은 못 먹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와의 관계의 파괴가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못 먹고 사는 것이 자신을 불행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아버지를 떠났어도 잘 먹고 살기만 하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어느 집에 심방가서 물었습니다. 남편이 교회 나오다 중단하고 사업하는 데 사업이 잘 안되는 집이었습니다. “집사님, 요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집사님의 즉각적인 이야기가 사업이 안되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업만 조금 잘되면 걱정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탕자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주려 죽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지 않고 경제적 이유에서 찾고 있었습니다. 대체 우리 삶이 곤궁해진 원인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불행해지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경제입니까? 못 먹고 사는 문제입니까? 작년에 10억 매출했는 데 올해 8억 매출한 것이 그렇게 큰 문제입니까? 왜 우리 문제의 근본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지 않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만 좋으면 매출이 80억이면 어떻게 8억이면 어떻습니까? 우리는 집에 있을 때도 아버지를 의식안하고 집밖에 있을 때도 아버지를 의식안합니다. 아들은 집에 있을 때에도 자기 재산 내놓으라고 하더니 집나와서도 못 먹고 산다고 불평합니다. 모든 것이 돈, 물질, 경제요, 하나님은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이 잘 안될 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원인을 생각한 적이 있나요?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나에게 누구입니까? 집에서도 밖에서도 돈만 생각하니 도대체 내가 믿는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둘째 아들이 불행한 원인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의 관계 회복이 그가 살 길입니다. 그가 밖에서 돼지 쥐엄열매 먹는 것이 불행이고 그가 창기와 함께 허랑방탕한 것이 죄가 아닙니다. 그에게 불행은 하나님없는 불행이고 그의 죄는 하나님떠난 죄입니다. 하나님을 회복해야 합니다.

 

큰 아들이 잃어버린 아버지

그런가 하면 큰 아들도 아버지를 잃어버렸습니다. 사실 큰 아들은 아버지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동생이 집을 떠날 때에도 그는 끝까지 아버지 곁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읽으면 그에게 정말 아버지가 같이 있었는지 의문이 듭니다. , 지금 동생이 돌아왔습니다. 그때 큰 아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15:28절입니다.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왜 큰 아들은 노하여 밖에 있었던 것입니까? 그의 말에 의하면 동생이 아버지 재산을 축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고생 고생하다 돌아온 동생은 안보이고 없어진 아버지 재산만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29절입니다. 15:29, “내가 여러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이 이야기는 정말 놀랄만한 이야기입니다. 이 말은 재산을 다 없애고 돌아온 동생을 맞이한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는 말이지만 동시에 그 자신의 깊은 진심이 묻어 있는 말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자신과 관계를 보여줍니다. 큰 아들이 이야기하는 아버지와의 그와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아버지 명을 받들었습니다. 한번도 그 명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런데 나에게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안주시다니”. 그와 아버지와의 관계는 부자관계가 노사관계였습니다. 주인과 일꾼, 사용자와 노동자, 엄한 주인과 머슴과의 관계, 겉으로 그는 아버지에게 잘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일하고 보수받는 노동적 관계였습니다. 그는 열심히 일했지만 아버지는 그 이상을 원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위해 일했지만 아버지와 함께 살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원했던 것은 노동적 관계가 아니라 교제적 관계였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도 이 때문인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와 친밀한 부자관계를 원하는 데 우리는 일하고 월급받는 노사관계로 그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시키는 관계가 아니라 말시키는 관계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날이 서늘할 때에 아담과 함께 걸었습니다. 일시키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말붙이시는 하나님, 한 젊은 목사님이 탄광지역에 있는 교회에 부임했습니다. 교인들을 심방하러 길을 나섰는 데 모든 교인이 온 몸에 검은 석탄질을 한 채 먼지 속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목사가 가서 손을 내밀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제가 이번 주에 이곳에 온 아무 아무 목사입니다”.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제 손이 더러워 목사님과 악수를 못하겠습니다.” 그때 젊은 목사님이 허리를 굽혀 자기양손에 석탄 가루를 가득 묻혔습니다. 그리고 다시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이제 괜찮겠습니까?”. 사람들이 목사님과 악수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시키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손을 내밀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죄의 석탄가루속에 사는 것을 아시고 일부러 석탄을 두 손에 바르고 우리에게 손을 내미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노동적 관계가 아니라 교제적 관계입니다. 어떤 초등학생이 교회 건물에 돌을 던지다 붙잡혔습니다. 경찰서에 끌려간 이 아이는 놀랍게도 그 교회 목사님 아들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했느냐?”고 묻자 아들은 아빠가 나 하고 놀아주지 않고 교회에서 일만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인 목사는 그렇게 했는지 몰라도 하나님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놀지 않고 사무실에서 일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일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친구가 되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이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어느 순간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위해 노예처럼 일만 할 때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노동만 있으면 우리가 하나님께 바라는 것은 늘 보상입니다. 그러나 보상은 많이 받아도 감사가 없고 적게 받으면 불평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보상적 관계가 되면 그때부터 우리의 관계는 피곤해지고 잘못하면 깨어집니다. 하나님은 무서운 주인이 아닙니다. 아버지입니다. 좋으신 아버지입니다.

 

동생을 잃어버린 형

오늘 말씀은 두 아들이 아버지를 잃기도 했지만 또 하나의 잃은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형제입니다. 오늘 이야기를 읽다보면 조금 화가 납니다. 둘째 아들이 집나갔다 돌아온 것은 그렇다고 칩시다. 혹 큰 아들이 아버지에게 불평하는 모습도 이해할 수 있다고 합시다. 그러나 정말 이해가 안되는 것은 형의 동생에 대한 태도입니다. , 철없는 동생이 한 순간 잘못해서 집나갔다고 합시다. 형이 그때 말렸습니까? 동생을 붙잡고 그러지 말라고 타일렀습니까? 그렇게 해서 집을 나갔으면 찾으러 가야 하지 않습니까? 늙으신 아버지가 동생 때문에 괴로워 하는 데 아버지를 위해서도 동생을 찾으러 가야 하지 않습니까? 저는 5형제중 장남으로 태어나 동생들의 문제는 곧 저의 문제로 알고 자랐습니다. 밤늦게 동생이 안 들어오면 책임은 저에게 있습니다. 그래서밤에 안 들어오면 찾으러 나갔어야 합니다. 동생이 안 들어오는 데 형이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란 저는 도저히 이 형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형은 집나가는 동생을 만류하지도 않았고 집나간 동생을 찾지도 않았고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돌아온 동생을 환영하지도 않았습니다.

 

더 있습니다. 아예 동생이라 부르지도 않습니다. 30절에 기가막힌 말이 나옵니다. 15:30, “아버지의 재산을 창녀와 함께 삼켜버린 이 아들이 오매”. 이 아들이 누구입니까? 자기 동생입니다. 자기 동생을 동생이라 부르지 않고 아들이라 부릅니다. 내 동생이 아니라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동생은 집나가서 고생한 것은 형으로서 조금도 마음이 아프지 않고 창녀와 함께 재산 먹어버린 그것이 아깝습니다. 이게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가 바로 못난 형이요 속좁은 형제들입니다. 안도현이 쓴 연탄이란 시처럼 우리는 언제 한번 남에게 따뜻한 적이 없으면서 남을 발로 차기는 합니다.

부끄러운 고백입니다. 저희 어머니가 시골에 살면서 일을 많이 해서 무릎에 연골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무릎이 아프시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난 여름에 분당에 올라와서 수술을 했습니다. 그런데 연세가 많아 금방 회복되지 않아 항상 전화해보면 무릎이 아프시답니다. 그런데 제 딸이 지난 8월에 미국 유학을 떠나 미국 미시간에 있습니다. 처음 하는 미국생활이고 또 흑인들도 많이 사는 지역이라 저희 부부가 많이 걱정합니다. 그래서 처음엔 카카오톡을 하다가 요즘은 얼굴보고 이야기가 하는 화상전화를 합니다. 저희 집사람이 매일 전화하는 데 제가 집에 가면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어때? 신혜 잘 있대?”.

 

어느날 딸 하고 전화하다가 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너는 딸에게 매일 전화하면서 어머니에게는 매일 전화하니? 네 딸에게 잘있냐? 무엇을 먹고 사냐? 공부는 잘하냐? 그렇게 자상하게 물으면서 어머니에게는 어머니 잘 계셔요? 몸은 어떻세요? 걷는 것은 잘 걸으세요? 한 마디 하기가 그렇게 어렵냐?”. 딸에게 전화하면 딸은 힘들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이것 저것 힘들어요. 먹지도 못해요. 차가 없어 불편해요”. 그런데 어머니에게 전화하면 한번도 아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괜찮다. 어제 읍내가서 약사왔어. 약먹으면 낫겠지”. 딸 하고 전화하면 걱정이 쌓이고 어머니 하고 전화하면 위로가 되는 데 나는 주로 딸 하고만 전화합니다. 나는 그런 사람입니다. 어머니에게 그렇게 잘한다고 하는데도 딸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니 저는 어쩌면 동생을 보살피지 않는 큰 아들입니다. 큰 아들이 동생을 돌보지 않은 것이 나쁜 일이라면 나도 나쁜 사람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자식은 정도 이상으로 사랑하면서 늙으신 부모님에게는 일주일에 한번 전화하기도 힘들지 않습니까?

 

저는 아내에 대해서도 할 말이 없습니다. 목회자로 산다는 것은 어느 정도 가정을 포기하고 산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내는 오늘까지 한 마디 불평없이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많은 월요일이 있었어도 저는 월요일에 아내와 함께 어디 한번 제가지 가보지 못했습니다. 생일, 결혼기념일도 잘 못 챙겼습니다. 사실 저는 제 생일도 못 챙깁니다. 그래서 나이가 먹으면서 미안해 집니다. 한번은 늦게 집에 들어갔는 데 아내가 소파에서 피곤해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잘 챙겨주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불을 덮어주면서 미안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한 시장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일본 다카스키시의 시장이었던 애무라 도시오는 시장에 선출되어 훌륭히 임무를 수행하고 1년 후에 치를 시장 선거에 다시 출마하기로 했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거의 식물인간이 된 상태로 8년 동안이나 투병 생활을 하고 있는 아내가 있었습니다. 날마다 간호한다고 하는 데도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의식이 없는 사람도 아내나 남편의 말에는 반응하는 경우가 많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시장을 그만두기로 아내만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시장으로서 직무를 잘 수행하는 것이 아내를 돌보는 것보다 사회를 위해서 더 중요하다고 충고했지만 그의 결심은 확고했습니다. 시장직을 그만두는 날 그는 고개를 숙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시장은 바꿀 수 있지만 남편은 바꿀 수 없습니다. 그동안 제가 여러분을 위해 살았지만 이제 부터는 아내를 위해 살겠습니다”. 그날부터 그는 하루 24시간을 아내와 함께하며 씻겨 주고, 밥을 먹여 주고, 책을 읽어 주고 이야기를 계속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8년이 지난 어느날이었습니다. 사랑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남편이나 아내가 형이 무관심한 동생처럼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내와 남편은 우리가 이 땅에서 만난 가장 큰 인연이 아닙니까? 길고 긴 고난의 세월을 함께 살아 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조금 더 다정하게, 어디가 아픈가 살펴보고 마음도 헤아리고 함께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젠가 테레사 수녀에게 누가 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질병이 무엇입니까? 나병입니까? 암입니까? 에이즈입니까?” 테레사는 뜻밖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외로움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질병은 외로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미국인 네 명중 하나는 엄마, 아빠 없이 혼자 잡니다. 외로운 세상입니다. 현재 우리 나라 노인중 20.4%는 독거노인입니다. 노인 다섯명중 한 명은 혼자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돌보아야 합니다. 같은 교회를 다니지만 저 사람이 무엇하는지 모르는 분이 많습니다. 내가 문제가 있듯이 그들에게도 문제가 있고 상처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외로운 사람들입니다. 며칠전에는 같은 노회소속의 어떤 목사님가정에 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재수하는 아들이 군대에서 휴가를 나온 형과 차를 몰고 가다 사고가 나 재수생은 그 자리에서 죽고 형은 중환자실에 실려 갔습니다. 제가 너무 마음이 아파 찾아 갔습니다. 두 부부가 눈물만 흘렸습니다. 엄마는 죽은 아들이 착한 아들이었다는 말만 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사모님, 아들은 살아서만 착한 것이 아닙니다. 아들이 죽음으로 목사님의 목회가 깊어지고 은혜로워 질 것입니다. 아들은 죽으면서도 아빠에게 선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같이 울었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무관심의 창을 열고 보면 우리가 돌봐야 할 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연로하여 자식들의 전화만 기다리는 부모님, 사업이 힘들어 형과 누나의 도움이 필요한 동생, 진액을 짜내며 고입, 대입시험을 준비한 우리의 아들, 딸들, 갑자기 몸이 아파 입원하여 불안한 가운데 수술을 기다리는 우리의 교우들, 하나같이 우리가 무관심할 수 없는 우리의 형제들입니다. 이들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잃지 않고 또 한편으로는 사람을 잃지 않는 것,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행중에 하신 탕자의 비유의 메시지입니다.

 

 

 

 

 

 

 

 

 

 

 

 

 

 

 

 

 

 

 

 

15:11-24 2013.10.6()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들

 

 

둘째 아들이 잃어버린 아버지

15:12, “아버지여, 재산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명제적 신앙 관계적 신앙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나는 날마다 하나님과 함께 산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나는 성경을 통해 매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다 나는 매일 아침 하나님과 대화한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이다 나는 매일 진리이신 예수님을 따르며 산다

 

15: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큰 아들이 잃어버린 아버지

15:28“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15:29, “내가 여러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동생을 잃어버린 형

15:30, “아버지의 재산을 창녀와 함께 삼켜버린 이 아들이 오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