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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5:27-32 2013.10.20(일) 레위의 회심

5:27-32 2013.10.20()

레위의 회심

오늘은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일꾼을 뽑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이 세우시지만 사람의 손을 통해 뽑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은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입니다. 어느 마을에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아버지가 말합니다. “오늘 뒷집 아저씨가 밤따는 날이다. 동생과 함께서 가서 도와줘라”. 아버지의 말을 듣고 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일했습니다. 일이 끝날 때 쯤 아저씨가 말했습니다. “너희들, 오늘 많이 수고했다. 밤 한 자루 싸놓았으니 가지고 가라”. 그런데 소년이 안 가져갑니다. “왜 안가져가니?” 그랬더니 소년이 말합니다. “무거워서요. 아저씨가 좀 갖다 주세요”. “그럼 그래라”.

 

저녁때 아저씨가 집에 왔습니다. 그런데 아저씨가 가져온 밤이 훨씬 많았습니다. 밤이 한 자루가 아니라 몇 자루였습니다. 경운기로 실어 왔기 때문입니다. 저녁 식탁에서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왜 네가 직접 가져오지 않고 아저씨가 가져오게 했니?”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제가 가져오면 조금밖에 못 가져오잖아요. 아저씨가 가져와야 많이 가져오지요. 아저씨 손이 제 손보다 크잖아요?” 이 소년이 바로 저입니다. 아저씨가 주는 밤을 제가 가져올 수 있었지만 아저씨 경운기로 와야 많이 가져올 수 있다고 저는 믿었습니다. 결국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받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손이 나를 붙잡아 주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 손보다 하나님의 손이 큽니다. 우리 손에 무엇을 넣아봐야 얼마나 넣겠어요? 하나님의 손에 넣어야 많이 넣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야 안전하고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야 큰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쓰임받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시기 원하시고 우리는 그의 사용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도 하나님께 사용되기 원하십니까? 오늘 하나님의 큰 손에 사용받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레위였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 만나 나중에 마태가 됩니다. 이 사람이 없었다면 우리가 마태복음을 우리가 가지지 못할 뻔 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이 사람을 사용했을까요? 이 사람은 누구고 어떻게 예수님께 나왔으며 어떻게 하나님께 사용받았을까요?

예수님이 레위를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시는 첫 번째는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27절을 보시겠습니까? 5:27,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예수님이 불렀던 사람은 레위였습니다. 같은 내용을 담은 마9:9절을 보면 이 사람에 대하여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full 이름은 알패오의 아들, 레위였습니다. 본명은 레위요 아버지는 알패오였습니다. 그리고 직업은 세리였습니다. 다시 27절을 보시면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은 보시고”. 했습니다. 왜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습니까? 직업이 세리였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세무공무원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쓰실 때 중요한 원칙은 하나님은 일하는 사람을 쓰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일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부를 때 반드시 일하는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암나귀 찾으러 다니다가 사무엘을 만났습니다. 다윗은 늦게 까지 들에서 양을 치다가 왕이 되었습니다. 모세도 호렙산에서 양을 치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기드온은 밀타작하다가, 아모스는 뽕나무 재배하다가, 베드로는 물고기잡다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성경에 놀다가 부름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일하다가 부름받았다고 그들이 모두 착했던 것은 아닙니다. 레위는 직업이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요즘말로 하면 세무공무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세무공무원은 문제가 많았습니다. 세무공무원은 정부를 대신하여 백성의 세금을 걷는 일을 하는 데 세금을 걷어 결국 로마에 바치고 그나마도 정직하지 않게 걷어 자신은 부자가 되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게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쓰신 사람이 완전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은 완전한 사람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사람, 죄인, 문제가 많은 사람을 부릅니다. 약한 자를 부르시고, 없는 자를 부르시고, 미련한 자를 부릅니다. 세리는 예수님 당시 가장 대표적인 죄인중의 하나였습니다. 당시에 죄인하면 남자는 세리, 여자는 창기를 말했습니다. 오죽하면 세리는 법정의 증인으로도 세우지 말고 회당예배때 헌금위원으로도 세우지 말라고 했겠습니까?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부른 사람이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오늘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받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들입니까? 다른 사람보다 더 정직하고 더 착하고 더 의로운 사람들입니까? 죄송하지만 다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볼 때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은혜입니다. “,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은혜의 부름입니다. 은혜로 불렀다는 것은 우리의 행위를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 덮어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과거를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죄가 있더라도 다 용서했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가리봉에 있는 중국동포의 집에 불이 났습니다. 이로 인해 1층 무료급식소가 다 타고, 11명의 사상자가 생겼습니다(사진1). 범인은 중국 동포 김씨였습니다. 술에 만취한 김씨가 저녁에 불을 질렀고 건물은 순식간에 화염에 쌓였습니다. 사실 이 건물은 고 이중표 목사님이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해 1992년에 하나님께 드린 건물이었습니다. 범인은 불을 질러 도망가다가 다쳐 의식이 없는 채 중환자실에 누어 있었습니다. 중국동포교회 김해성목사는 처음에 너무 남감하고 당황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를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죽어가는 환자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사진2). “내가 용서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내가 당신을 용서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지만 당신이 저지른 방화로 부상당한 피해자들과 발생한 모든 손해에 대해 원망하거나 분노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이대로 떠난다면 장례 또한 돕겠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사람의 생명을 건져 주옵소서“. 그러나 그는 회복하지 못했고 결국 하나님께 돌아갔습니다. 제가 감동해서 김해성 목사님께 문자를 보냈습니다. ”목사님, 잘했습니다. 목사님이 방화범을 용서한 것은 예수님이 목사님을 위해 하신 일이었습니다. 힘드시는 가운데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셔서 큰 감동이 됩니다.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돕겠습니다. 사랑하고 기도합니다“.

 

어떻습니까? 김해성 목사가 방화범을 용서한 것처럼 예수님이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을 믿습니까? 수많은 사람을 다치게 만들고 아까운 건물을 불태운 용서받지 못할 방화범을 용서한 것 이상으로 주님이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을 믿습니까? 특히 오늘 후보자 된 여러분, 그 은혜를 감사합니까? 바울이 말한대로 나의 나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쓰신다면 우리가 이러한 겸손한 고백을 할 때입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살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 용서받은 레위는 어떻게 변했습니까? 29절입니다. 5: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참 놀랍게 변했습니다. 예수님께 돌아온 즉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 잔치에는 예수님도 초청하고 자기와 같은 세리, 그리고 이웃들까지 초청했습니다. 이 사건은 레위에게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한번도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평생 자기 한 목숨 위해서 살아온 인생이었습니다. 남의 눈에서 눈물빼고 가난한 사람의 호주머니를 털어 자기 배를 채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사람이 난생 처음으로 자기 돈들여 잔치를 열고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달라진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랑받으면 달라집니다. 은혜받으면 달라집니다.

 

어떻습니까? 오늘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들, 여러분도 이렇게 달라지기 원합니까?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는 데 직분만 받으면 무엇 하겠습니까? 그 직분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겠습니까? 그 직분이 사람을 살리겠습니까? 조금 달라져야 합니다. 겨우 자기 한 사람 사는 데 급급했던 인생이 이제는 남을 위해 사는 쪽으로 달라져야 합니다. 달라지지 않으려면 아예 직분 받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직분자가 없어 사회적 지탄을 받습니까? 달라져야 하고 달라지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 레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29절에 보면 크게 두 가지입니다. “예수를 위하여”, “다른 사람과 함께”. 따라 하겠습니다. “예수를 위하여”, “다른 사람과 함께”. “위하여는 목적이고 함께는 의미입니다. 레위는 크게 두 가지로 달라진 것입니다. 첫째는 사는 목적이 달라졌고 둘째는 사는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 먼저 예수님을 위하여입니다. 어떻습니까? 오늘 항존직 후보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을 위하여살기로 다짐했습니까? 왜 예수님을 위하여 사는 것이 중요할까요? 인생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왜 사냐고 물을 때 답변할 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레위란 이름은 성경에서 아주 존귀한 이름입니다. 레위는 야곱의 셋째 아들이었습니다. 르우벤, 시므온 다음입니다. 레위는 이스라엘 역사중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직분을 받았습니다. 곧 제사장 직분입니다. 아론도 레위인, 그 후에 나온 모든 제사장, 대세장이 레위인입니다. “레위라는 이름의 뜻은 연합한다”, “찬양하다의 뜻입니다. 그래서 레위는 하나님과 연합될 사람, 평생 하나님을 찬양할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레위세리가 되었습니다. 영광스러운 제사장 레위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도둑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 만났습니다. 예수님 만나서 그가 한 것은 본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위하여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선 예수님을 예배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산다면서 예수님을 예배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삽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이 기억할 것은 우리는 일꾼이 되기 전에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worker 가 되기 전에 worshipper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에 일하러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배하러 나옵니다. 옛날 제사장은 성전에 24시간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직분자가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장에서 두 일꾼에 대하여 말합니다. “복음의 일꾼교회의 일꾼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일꾼보다 복음의 일꾼이 먼저입니다. 복음의 일꾼이 되고 다음 교회의 일꾼이 됩니다. 복음의 일꾼은 예수님 잘 믿는 사람이고 교회의 일꾼 은 일잘하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일잘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잘 믿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 잘 믿는 사람은 교회 일도 잘하지만 교회 일만 잘하는 사람은 예수님 잘 못 믿을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 잘 믿는 사람은 무엇보다 예배 잘 드리는 사람입니다.

 

오래전에 제가 딸에게 선물 하나를 했습니다. 겨울 부츠였습니다. 20만원 들었습니다. 그랬더니 얼마후에 딸이 핸드 크림 하나를 선물했습니다. 딸이 볼 때 제 손이 까칠 까칠하더랍니다. 4천원 짜리 핸드 크림이었습니다. 제가 그때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봉사한다는 것이 그런 것이구나. 우리는 하나님께 20만원짜리 부츠를 거저 받는 데 우리가 기껏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4천원 짜리 핸드 크림 이구나“. 봉사가 필요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배가 봉사보다 더 크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20만원 짜리 부츠를 공짜로 받는 것입니다. 봉사는 우리가 노력해서 4천원짜리 핸드크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봉사도 필요하지만 봉사보다 예배가 더 큽니다. 항존직 직분 후보자 여러분, 여러분은 예배하기 위해 살겠습니까? 예수님을 높이고 그를 찬양하기 위해 살겠습니까? 예배를 소중히 여기겠습니까? 예배를 통해 날마다 은혜를 받겠습니까? 예배때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4천원짜리 핸드크림 드리는 심정으로 주님께 겸손히 봉사하겠습니까? ”예수를 위하여“, 우리 인생의 최고 목적입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며 살겠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살기로 결심한 레위가 한 가지 더 결심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울입니다. 예수님을 예배하다 보면 우리 자신이 보입니다. 우리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보입니다. 이때까지는 나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만나고 보니까 다른 사람들이 보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안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만나고 보니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고통도 보이고 그들의 아픔이 보이고 그들의 상처도 보입니다. 그들은 내가 최근까지 살았던 것과 똑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레위는 생각했습니다. “내 친구들을 예수님께 부르자. 그래서 그들도 예수님을 알게 하자”. 그리고 친구들을 초청합니다. 과부 마음은 과부가 알고 홀애비마음은 홀애비가 알 듯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레위는 친구들의 마음을 압니다. 남들은 그들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레위는 그들의 외로움과 아픔과 상처를 잘 압니다. 그래서 다시 29절입니다. 5: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이 결심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위하여 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웃과 함께 살고, 예수님과 이웃, 예배와 섬김, 위로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아래로는 사람을 섬기고, 위로는 하나님은 예배하고, 아래로는 교인들은 섬기고, 예배하듯 섬기고, 섬기듯 예배하고, 예배와 섬김, 결국 교회 일꾼이 하는 일이 두 가지 아니겠습니까? 예배하고 섬기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교인들을 섬기고,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이 두 가지를 확실히 붙잡겠습니까?

 

놀라운 것은 마태복음을 보면 이 레위가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9:10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누가복음과 같은 내용인 데 이름이 레위가 아닌 마태입니다. 학자들은 마태복음이 누가복음보다 늦게 쓰였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누가복음에 기록된 레위가 훗날 이름을 바꾼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라는 뜻은 하나님의 선물이란 뜻입니다. 레위가 예수님 만나고 바뀐 것은 이름뿐 아니라 인생의 목적과 의미입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알아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만나고 바뀌었습니다. “마타이”, “God’s gift”, “하나님의 선물로 바뀌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가정도 직장도 자녀도 우리 몸도 지식도 받은 달란트도 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거주 주신 것이니 아깝지 않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쓰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틀 섬기고 사랑하는 데 쓰고, 쓰고 쓰고 쓰다가 하나님이 오라 그러면 가면 됩니다. 뭐 아끼고 말 것도 없습니다. 시간도 물질도 건강도 생명도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쓴 성경이 마태복음입니다. , 죄인인 세리가 예수님 만나 변화되어 하나님의 선물이 되고 마태복음을 우리에게 선물로 남겼으니 우리도 마태처럼 살 수 없을까? 우리도 레위처럼 살면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이 되지 않을까? 이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5:27-32 2013.10.20()

레위의 회심

 

예수님이 레위를 불렀습니다.

5:27,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중국동포의 집에 불(사진1)

죽어가는 환자(사진2).

 

예수님을 위하여 살겠습니다.
5: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레위”=연합한다, 찬양하다

 

worker 가 되기 전에 worshipper가 되라

 

교회의 일꾼이 되기 전에 복음의 일꾼이 되라

 

다른 사람을 섬기며 살겠습니다.

5: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위하여 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웃과 함께 살고, 위로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아래로는 사람을 섬기고, 예배하듯 섬기고, 섬기듯 예배하고, 예배와 섬김, 이것이 교회 일꾼이 하는 두 가지 일이다

 

마태”=하나님의 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