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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6:1-9 2013.10.13(일)나 비록 불의할지라도

16:1-9 2013.10.13()

나 비록 불의할지라도

 

아름다운 가을입니다. 이 아름다운 가을에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전성기는 언제입니까? 전성기가 지났습니까? 아직 오지 않았습니까?” 몇 년전 재미있는 기사를 하나 보았습니다. 젊은이 1000명을 대상으로 인생의 고민을 묻는 가운데 인생의 전성기는 몇 살이냐고 물었습니다. 답은 29세였습니다. 29세가 인생의 최전성기라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기 계신 분중 아직 29세가 안된 분은 축하합니다. 아직 29세가 안되어 , 나에게도 희망이 있구나, 아직 29세가 안됐어라고 기뻐하실 분들에게 축하를 드립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29세가 넘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인생의 전성기는 끝난 것입니까? 이제 올라갈 일은 없고 내려갈 일만 남은 것입니까? 어떻습니까? 인생의 전성기가 나이로 결정됩니까?

 

시인 정희성이 쓴 <태백산맥>이라는 시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57세가 된 시인이 아내와 함께 어느날 태백산으로 등산을 떠났습니다. 아내는 왜 그렇게 힘든 산을 가느냐고 지금 자기가 일곱이냐고 열아홉이냐고 구시렁댑니다. 한참 힘들게 올라갔는 데 칠십대 노인들이 벤취에 앉아 있습니다. 이들이 부부를 보더니 같이 가자고 하면서 올해 나이가 몇이냐고 묻습니다. 시인이 올해 쉰 일곱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노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참 조을 때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었네합니다. 쉰 일곱도 적은 나이가 아니지만 70대 노인들이 볼 때는 아직 좋은 나이입니다. 20대 젊은이가 볼 때 50대는 한물간 아버지 세대겠지만 70대 노인들이 볼때는 아직도 한참 좋은 때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전성기는 언제입니까? 전성기가 나이로 정해지는 것입니까? 어느 때를 지나면 인생이 미끄러지는 때가 있습니까?

 

제가 이태리 어느 도시 도서관을 갔는 데 그 입구에 라틴어로 뭔가가 쓰여져 있었습니다. 안내인에게 해석을 부탁했더니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인생에 더 빠른 것도 더 늦은 것도 없다. 카르페 디엠, 현재를 즐겨라”. 그렇습니다. 조금 일찍 된 사람도 있고 조금 늦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요즘 우리 교회에 나이가 든 젊은이들이 결혼하고 있습니다. 제가 염려를 많이 했는 데 때가 되니 짝을 데리고 나타난 것입니다. 제가 깨달았습니다. “, 결혼을 포기하지만 않으면 언젠가 짝이 나타나는구나”. 인생의 전성기는 나이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나이 많다고 전성기가 끝나는 것이 아니니 더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나이 젊다고 전성기가 자동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니 더 노력해야 합니다. 누구에나 전성기는 있고 그나마 한번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를 걸으면서 뜻밖에 인생의 전성기를 맞은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보통은 이 말씀을 성경학자들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라고 말하는 데 저는 이것을 뜻밖에 전성기를 맞은 한 남자의 이야기라고 부르겠습니다. 이스라엘은 농경사회입니다. 농사라는 것이 우리처럼 논에 벼를 심는 농사가 아니고 비탈진 산등성이에 올리브라든가 포도, , 보리 이런 것을 심는 농사입니다. 대부분이 영세하게 살았지만 그중에는 가끔 큰 땅이 있어서 남에게 땅을 임대해주거나 소작을 주어서 그 세를 먹고 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늘의 주인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선조로부터 많은 땅을 물려 받아 자기가 다 지을 수 없어서 직원을 두고 이 일을 했는 데 그 사람이 청지기였습니다. 청지기는 요즘으로 말하면 재산 관리인입니다. 성경 시대에 주인 밑에서 일하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품군과 종과 청지기입니다. 품꾼은 요즘으로 말하면 일용직 노동자입니다. 하루 하루 일해서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주로 포도를 딸 때나 밀, 보리를 수확할 때 일시적으로 고용하는 사람입니다. 비정규직입니다. 그런가 하면 정규직이 있습니다. 종과 청지기입니다. 다만 종은 자유가 없고 모든 것이 주인에게 예속되었습니다. 대개 돈주고 사왔기 때문에 거의 상품입니다. 심지어 종의 아내도 자녀도 주인의 소유입니다. 그런가 하면 청지기는 자유가 있습니다. 주인 밑에 있지만 일정한 자유와 권한이 있습니다.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고 증식하며 재산과 관련된 일을 합니다. 다만 소유권과 처분권은 없습니다. 이런 일은 대행할 수 있으나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부정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부정한 짓이란 뻔 합니다. 주인에게 줄 임대료를 중간에서 착복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땅을 빌어 쓰고 주로 현물로 냈기 때문에 밀 100, 포도주 10 부대, 올리브 5, 이런 식으로 주인에게 바쳤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보니까 어느때부터 이것들이 눈에 띄게 줍니다. 사람을 시켜 조사해 보았더니 청지기가 중간에서 때어 먹었습니다. 딱 한번 조금만 했다면 주인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많이 하다보니까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날 주인이 소작농들이 바친 현물과 실제 곳간에 들어온 현물을 일일이 비교해 보았을 수 있습니다. 그랬더니 장부상으로는 밀 100말 바쳤는 데 실제 들어온 것은 50말입니다. 나머지 50이 어디 있는가 조사했더니 청지기가 인마이 포켓했습니다. 주인이 화가 났습니다. “내가 그렇게 믿고 맡겼더니 이 나쁜 일을 하다니”. 주인이 이 청지기에 해고를 통보했습니다. 모든 것이 탄로나자 청지기는 실직하게 되었습니다. 청지기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인 집에서 편하게 먹고 살았는 데 졸지에 짤리게 되었으니 가족과 함께 어떻게 먹고 삽니까?

 

여러분이 절대 이런 일을 저지를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만일 여러분이 그런 상황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청지기는 자기의 뼈아픈 실수로 일생 헤어날 수 없는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제2의 인생이 없는 것입니까? 그는 어떻게 수렁에서 헤어나와 두 번째 인생에 도전하겠습니까?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가끔 여러분이 원치 않는 침체와 불경기와 실패와 인생의 수렁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그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놀랍게도 이 청지기는 그런 수렁에서 일어났습니다. 간신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놀라운 인생의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다시 일어나야 하지 않습니까? 간신히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제2의 인생의 전성기를 맞이 해야 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청지기는 자신의 실수를 알았습니다.

청지기의 회복은 자기가 한 일을 안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3절을 보실까요? 16: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청지기가 한 일은 옳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잘한 일은 자기가 옳지 않은 일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번도 실수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성자형의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날마다 실수하지만 그때마다 실수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인간적인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계속 실수하고도 한번도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악한입니다. 누구나 1번이 될 수 없으나 2번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1번 보다 오히려 2번을 좋아하십니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으나 실수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으나 죄를 고백하면 됩니다. 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하나님은 우리가 한번도 죄짓지 않기를 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지어도 자백하기를 원하십니다. 죄를 자백하면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한 기자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추기경님은 프랑스어도 잘하시고, 영어도 잘하시고, 여러 나라 말을 다 하신다면서요?” 추기경이 말했습니다. “몇 나라 말을 하긴 합니다만, 한 가지 더 잘하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데요?” “거짓말입니다. 저는 거짓말도 잘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은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죄를 자백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옥에 가면 죄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자백하지 않은 죄인이 있습니다. 천국에 가면 의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받은 죄인이 있습니다.

 

청지기는 어떤 죄를 지었을까요? 주인에게 들어온 임대료를 착복했습니다. 저는 법률전문가가 아니어서 이것이 횡령인지 배임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전을 보니까 횡령은 남의 재물을 불법으로 차지하는 것이랍니다. 배임은 자기 이익을 위하여 임무를 소홀히 하고 남에게 손해를 주는 것이랍니다. 남이 받을 재물을 가로채면 횡령, 그로 인해 손해를 끼치면 배임, 이로 보면 청지기는 배임죄도 저지르고 횡령죄도 저질렀습니다. 소작농들이 주인에게 바치는 밀이나 포도, 올리브등 임대료를 중간에서 자기 것으로 가로챘기 때문에 횡령이요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임무를 저버리고 주인에게 재산상의 손해를 주었기 때문에 배임입니다.

 

여러분, 성경의 이야기는 결국 하나님과 우리의 이야기인 것을 아십니까? 지금 예수님은 어떤 가정에서 일어난 범죄를 고발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것이 아닌 것을 아시죠? 예수님의 말씀의 초점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 우리는 누구입니까? 청지기입니다. 종이 아니고 품꾼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지만 일정한 자유와 권한을 가진 자유민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세상을 맡겼습니다. 가정도 맡기고 회사도 맡기고 재능도 사명도 직분도 맡겼습니다. 우리는 주인이신 하나님의 집에서 일하는 일꾼들입니다. 날마다 주인의 은혜로 살고 주인이 공급한 것을 먹고 주인이 인도해서 하루 하루 삽니다. 그런데 그 은혜로 살면서 우리는 주인을 속입니다. 주인에게 들어갈 재산을 우리의 것으로 가로챕니다. 심지어 주인이 받아야 할 영광까지 가로챕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닌데도 주인 행사를 하고 주인이 가진 소유권을 탐하고, 주인이 가진 처분권을 마음대로 행사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재물을 우리 것이라 우기기도 하고 하나님의 맡기신 자녀도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죄는 우리가 스스로 주인되는 것입니다. 주인의 소유권, 처분권, 용도변경권, 양도권, 다 내 것으로 삼고 주인을 합바지로 만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죄는 주인을 시하는 것입니다. 주인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인의 자리에 내가 앉는 입니다. 재미있게도 누가복음에 나오는 비유중에는 불의한 사람에 대한 비유가 세 개 나옵니다. 15장에 불의한 아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탕자의 비유입니다. 왜 탕자가 불의합니까? 밖에 나가 허랑방탕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허랑방탕은 그 뒤에 일어났습니다. 탕자가 불의한 것은 아버지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밖으로 나갔기 때문입니다. 18장에 불의한 재판장 이야기가 나옵니다. 과부가 억울한 사연을 호소하는 데 불의한 재판관은 뇌물만 기다립니다. 나라가 정한 법에 따라 공정하게 재판하지 않습니다. 재판관은 국민의 주인인 법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권리가 보장된 법을 따르지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불의합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16장에 나오는 청지기는 주인에게 재산상 손해를 줘서 주인을 무시합니다. 그래서 불의합니다. 결국 불의는 주인을 무시한 것입니다. 탕자는 아버지를 무시했습니다. 재판관은 법을 무시했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을 무시해습니다. 죄는 나쁜 행동이 아니라 주인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나쁜 짓은 주인과의 나쁜 관계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회개는 나쁜 짓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나쁜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이 죄인임을 인정합니까? 모든 나쁜 행동은 하나님과의 나쁜 관계에서 온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애쓰겠습니까?

 

청지기는 주인의 자비에 목숨걸었습니다

자신의 실수를 알았던 청지기가 했던 다음 행동은 무엇입니까? 정말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을 했습니다.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다 모았습니다. 그리고 주인의 이름으로 빚을 탕감해주기 시작합니다. 5-7절을 보시겠습니까? 16:5-7,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여러분은 이 청지기가 한 일을 아시겠습니까? 엄청난 일을 했습니다. 주인에게 빚은 진 가난한 소작농들을 불러 주인의 이름으로 주인에게 진 빚은 깍아주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빚을 탕감받은 소작농들은 이 일이 청지기 혼자 한 일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인의 빚을 탕감해 주면 주인의 재산에 손해가 오는 데 청지기가 주인과 상의없이 이 엄청난 일을 했으리라고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때 청지기가 했던 말이 이것입니다. “당신은 주인에게 얼마 빚졌습니까? 밀 백 말입니까? 0을 떼세요. 10말이라 쓰세요. 주인이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당신이 주인에게 빚는 것이 얼마입니까? 올리브 100통이라고요? 50통만 내세요. 주인의 뜻입니다”. 그렇게 했더니 농민들이 허리를 굽히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합니다. 이때 청지기가 말합니다. “제가 했나요? . 주인이 하라고 해서 한 것 뿐이예요. 주인에게 감사하세요”. 그랬더니 탕감받은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말합니다. “, 우리 주인 최고야. 평소에 좀 엄한 듯 했는데 역시 사랑이 많아. 주인 최고”. 그래서 온 동네에 주인의 칭찬이 자자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소문이 주인의 귀에 들리게 되었습니다. 청지기가 주인의 이름을 빙자하여 소작농들의 빚을 감해 주었는 데 그것으로 인해 주인에 대한 좋은 평판이 온 동네에 가득하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여러분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참 곤란한 일입니다. 이 문제아 청지기 때문에 주인은 엄청난 재산의 손해를 보았는 데 그렇다고 그를 감옥에 보낼 수도 없는 것은 만일 그렇게 하면 빚깍아주는 것이 주인의 자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청지기의 재량에 의해 된 일이라는 것을 농민들이 알았을 때 생각지 않은 반응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반응일까요? 대략 두 가지일 것입니다. 첫째는 주인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주인이 그럴 리가 없지. 그렇게도 인색한 사람이 빚을 깍아줘. 지나가는 소가 웃겠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였어”. 또 하나 청지기에 대해서 그런 나쁜 주인 밑에서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있었다니. 도대체 주인은 그 좋은 청지기를 왜 해고한 거야? 청지기 만세”. 그래서 잠시 올라갔던 주인의 평판은 땅에 떨어지고 청지기는 졸지에 핍박받는 의인이 되어 다음 국회위원 선거가 되면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주인이 어떻게 했습니까? 청지기를 감옥에도 안 보내고 해고도 안할 뿐 아니라 오히려 칭찬했습니다. 8절입니다. 16:8, “주인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여러분은 청지기가 한 일을 어떻게 봅니까? 어떻게 보면 고도의 생존 전략일 수 있습니다. 해고까지 된 마당에 인심이나 쓰자 했을지도 모릅니다. 내 것이 아니니 밑져야 본전이다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청지기에 좋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는 비록 실수를 많이 하고 살지만 주인은 좋은 분이다. 나는 가끔 죄를 짓고 살지만 주인은 의로운 분이다. 나는 본래 인색하고 욕심많은 존재지만 주인은 자비롭고 은혜로운 분이다. 내 비록 실수로 주인 곁을 떠나지만 그것은 주인의 잘못때문이 아니라 내 잘못때문이다. 이제 내가 마지막으로 주인을 위해 할 일은 주인의 자비와 선함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다”. 그는 주인으로부터 해고당했지만 자신이 무죄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침묵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마지막으로 주인의 선함과 인자함을 드러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변명하는 데 목숨걸지 않고 주인의 자비에 목숨걸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주인에게 얼마간의 재산상의 손해를 줄 수 있지만 주인에게 더 중요한 것은 재산상의 손해가 아니라 인격적인 명예임을 알았습니다.

 

여러분은 이 청지기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상당히 위험한 행동이지만 매우 중요한 행동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죄와 실수를 피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다 압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죄짓기 않게 해서 거룩하게 하는 것은 언제나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죄를 보고 매일 일희일비하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닮아 좋은 사람 되는 것보다 나같은 죄인을 통해 좋으신 하나님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죄인인 나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것, 우리 자신의 성화에 목숨걸지 말고 하나님의 거룩에 목숨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보라,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잘 믿어 달라졌다보다는 보라. 나는 여전히 죄인이지만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선하시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성화의 목적 삼지 말고 성화의 도구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머물게 하지 말고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신앙은 위대한 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위대하신 하나님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얻는 것입니다. 얻은 만큼 흘러 갑니다.

청지기에 대한 주인의 평가를 보십시오. 16: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전반부는 주인의 평가고 후반부는 예수님의 평가입니다. 16:8,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주인이나 예수님의 공통적인 평가는 청지기가 지혜로웠다는 것입니다. 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지식은 내가 주인이고 지혜는 하나님이 주인입니다. 내가 나를 드러내는 것을 지식이라고 내가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어떤 공장에서 사장님이 신입사원에서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앞에 일할 때 어려움이 생길 것입니다. 그때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일을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저에게 오십시오. 저에게 오는 것이 여러분의 일입니다”. 신입사원 하나가 기계를 만지다 문제가 생겨 고치려고 끙끙대다 결국 사장에게 왔습니다.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고 묻자 자기가 해보는 데 까지 해보다 안돼서 왔다고 말합니다. 사장이 말했습니다. “내가 처음부터 말했습니다. 여러분에게 뭌제가 생길 때 여러분이 할 일은 나에게 오는 것이라고. 그것을 언제나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에게 가능한 일을 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불가능한 일을 하실 것이다.”(You do the possible, then God will do the impossible)”. 지혜는 안되는 일을 내가 하려고 발바둥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목숨겁니까? 우리의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을 통해 정말 목숨거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드러내는 일에 목숨거십시오. 성공과 실패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성공했어도 하나님이 실패했다면 그것은 실패입니다. 내가 실패했어도 하나님이 성공했다면 그것은 성공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고 전능하시고 위대하십니다. 성공한 내가 자랑이 아니라 실패한 내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하나님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실패요 나를 통해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이 성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로입니다.

그래서 나온 신앙고백이 우리는 하나님의 통로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열등의식이 꽤 많은 사람입니다. 남들이 볼 때는 겸손같지만 대부분 그것은 제가 자신이 없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설교자의 가장 큰 문제는 설교한 대로 못산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시는 분보다 설교자들에게 이 문제는 심각합니다. “사랑하라”. 나는 사랑하고 있는가? 못하고 있습니다. “항상 기도하라”. 너는 항상 기도하고 있는가? 못하고 있습니다. “대적자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함께 가라”. 대적자가 누군지는 알지만 함께 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설교대로 못사는 저를 보면서 가끔 설교를 중단해야 하지 않을까도 생각했습니다. 같은 질문을 감리교의 창설자 요한 웨슬리의 제자가 했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웨슬리 목사님, 제가 설교한 대로 못살고 있으니 제가 설교하지 않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그때 웨슬리가 말했습니다. “그렇게 살 때까지 설교하십시오”. 좋은 대답이었지만 저에게는 좋은 해답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될 때까지 해도 안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오늘 말씀을 읽었습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을 선전하기 위해 소작인들의 빚을 탕감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주인의 자비를 드러냈다는 것입니다. 그는 불의했지만 그가 목숨걸고 믿은 것은 주인의 자비하심이었다는 것입니다. 청지기는 자신을 성화시키기 보다 있는 자신의 그대로의 모습에 주인의 선하심을 담아 냈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의로우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도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제가 알았습니다. 목회자인 나에게 중요한 것은 나의 성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다. 나는 죄가 없고 깨끗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사용받는 것이 아니라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용을 받는 것이다. 이것이 진짜 은혜다. 하나님앞에 선 나의 부족함이 문제가 아니라 부족한 내 앞에 선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중요하다. 그때부터 담대해 졌습니다. 이번에도 항존직 후보들 중에 나는 부족하다고 사양한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 분들게 말씀드렸습니다. 불의한 청지기도 자신을 통해 주인을 나타냈다고. 자신감을 가지라고. 당신의 완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죄인인 당신을 통해 하나님의 완전이 드러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렇습니다. 우리 삶의 최고 목적은 나를 통해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내 사업, 내 지식, 내 학업, 내 가정, 내 자녀, 내 미래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드러날 때 의미가 있습니다. 그때 인생의 전성기가 시작됩니다. 청지기는 불의한 일을 하고 해고되고 직전에 인생의 전성기기 시작되었습니다. 나이와 상관이 없습니다. 출애굽기에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4:19-20, “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생명을 찾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 모세가 그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여기에 지팡이가 나옵니다. 그 지팡이는 시내산의 가시나무로 만든 평범한 나무였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그 나무를 잡을 때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지팡이가 대단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면 하나님의 지팡이가 됩니다. 우리의 최고 꿈은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약해도, 비록 내가 실수했어도, 비록 내가 좌가 있어도, 나를 통해 하나님이 나타나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