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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8:1-8 아프면 우세요 2013.11.5(일)

18:1-8 2013.11.5()

아프면 우세요

여러분은 주로 언제 기도합니까? 어느 수도원에 기도는 하기는 하는 데 담배는 못 끊는 수도사가 하나 있었답니다. 그래서 몰래 몰래 담배를 피며 기도하고 있는 데 한번은 수도원장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장님, 기도하다가 답답하면 담배를 한 대 피워도 될까요?” 수도원장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수도원에서 담배를 피다니. 그것 말도 안되네. 어떻게 기도하다 담배를 피우나?” 한참 있다 수도사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원장님, 담배 피우다가 기도할 마음이 들면 기도해도 됩니까?” 원장이 들어보더니 그것은 괜찮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괜찮네. 담배피우다가 기도하고 싶으면 언제라고 기도할 수 있지. 기도 못할 이유가 어디 있나? 하나님도 기뻐할거야. 담배피다 기도하고 싶으면 기도하게”. 그때부터 수도사는 담배피우며 기도했답니다. 기도하다가 담배피우는 것하고 담배피우다 기도하는 것은 다릅니까? 담배를 피우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에게 늘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급할 때 기도합니다. 어느 교회에 아기를 못낳는 며느리를 둔 시어머니가 있었답니다. 한번은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는 데 어머니가 며느리를 데리고 부흥목사님에게 갔습니다. “목사님, 우리 며느리 애기 낳게 기도해 주세요”. 그래서 목사님 쎄게 기도했습니다. “내년 이 맘때쯤 반드시 아기를 낳을지어다”. 그런데 며느리가 아멘을 안합니다. 시어머니가 옆에서 아가, 어서 아멘해. 아멘해해도 아멘을 안합니다. 참다못해 성질이 급한 시어머니가 크게 아멘했습니다. 그 다음 해 시어머니가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옛날에 어떤 교인 하나가 산에 나무하러 갔습니다. 그러다가 발을 헛디뎌 절벽에서 떨어졌는 데 다행히도 간신히 나뭇가지 하나를 붙잡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발아래 펼쳐진 낭떠러지를 보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기도가 나왔습니다. "하나님. 살려 주세요. 만약 저를 살려주신다면 평생 주님의 일을 하겠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정말이냐?” “, 정말입니다”. “그렇다면 네 믿음을 시험하겠다. 오른 손 하나 놓아라". 그때 교인이 소리쳤습니다. "저보고 손 하나를 놓으라고 하셨습니까? 제가 미쳤습니까? 손을 놓게”.

우리에게 기도는 늘 필요합니다. 기도 없이는 우리가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하나님이 들으시며 기도하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오늘은 이야기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를 여행하면서 한 아홉 번째 이야기입니다. 보통 이것을 우리는 과부의 기도 비유라고 부릅니다. 한 도시에 과부가 살았습니다. 과부는 남편이 없는 여자입니다. 과거 이스라엘에서 남편이 없다는 것은 지금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과거 이스라엘 사회는 농경사회이고 가부장적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농사 하나로 먹고 사는 시대에 남편이 없으면 일도 못합니다.

 

결국 과부는 여러 가지 일로 억울함이 쌓여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법정에 호소했는 데 마침 재판장이 아주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무슨 뇌물이나 받을까 기대하다가 뇌물도 없지 과부가 힘도 없지 하자 재판장은 과부를 무시하고 재판자체를 진행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과부는 물러 설 수 없었습니다. 말로 안되니 이제는 읍소작전으로 나갔습니다. 그래서 매일 법정에 가서 웁니다.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할 수 없이 재판장이 재판을 열고 과부의 소원을 들어 주었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를 통해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기도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과부의 기도를 통해 무엇을 배우며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아픔이 기도하게 합니다

오늘 이야기에서 깨닫는 첫 번째는 기도는 아플 때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18: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이 과부에게는 어떤 원한이 있었을까? 과부의 원한은 그가 힘이 없다는 데서 시작됩니다. 농경사회는 오직 힘으로 농사짓습니다. 노예제도가 나쁜 것이지만 그것이 필요한 이유는 농사짓는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없으면 노예라도 사와야 했습니다. 노예가 좋은 것은 노예는 우선 싸고, 시키는 대로 하고, 마음 안들면 팔고, 혼내거나 학대해도 문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노예가 아니면 품꾼이라도 있어야 했습니다. 품꾼은 하루 하루 일하는 일용직 근로자입니다. 노예든 일용직이든 사람이 많으면 그들을 관리할 사람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 사람이 성경에 나오는 청지기입니다. 과부에게 원한이 생겼다면 아마 재산상의 문제였을 것입니다. 청지기가 주인의 의사에 반하여 땅을 팔아 자기 소유로 했다든지 주인의 재산을 몰래 빼돌렸다든지 일꾼들이 답합해서 주인에게 재산상의 손해를 끼쳤다든지. 이 경우의 원수는 청지기 또는 일꾼들입니다.

 

과부가 당한 원한의 또 하나 가능성은 가정과 관련된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시형제 결혼법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죽으면 시동생이 형수와 결혼하는 제도입니다. 우리가 볼 때 이상하게 보이는 이 제도는 이스라엘의 기업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기업은 오래전 여호수아에 의해 가문별로, 가정별로 나눠졌습니다. 가정별로 나눠진 기업은 먼저 큰 아들에게 1/2을 주고 나머지는 다른 형제들이 나눴습니다. 그러다 큰 아들이 죽으면 둘째가 형수와 결혼하고 이 기업을 받습니다. 그런데 가끔 시동생중에는 형수가 늙었다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결혼을 안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형의 재산만 차지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일이지만 이스라엘 가정에 가끔 있었습니다. 38장에서 유다의 세 아들들이 그랬습니다. 그러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었습니다. 그래서 과부에게 원한을 품게 한 두 번째 가능한 원수라면 과부의 시동생들이었을 것입니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시부모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주 드물지만 가끔 남편이 죽고 홀로 남은 며느리를 집으로 친정으로 돌려보내고 그 자식만 빼앗는 나쁜 시부모도 있었습니다. 나오미는 좋은 의미에서 과부가 된 며느리들을 친정으로 돌려보냈지만 가끔 아무 것도 안주고 손자들만 빼앗는 나쁜 시부모들이 있었습니다. 꼭 이스라엘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있었고 다른 나라에도 있었습니다. 17세기 프랑스의 쟌느 귀용이 그랬습니다. 1648년 파리에서 테어난 쟌느 귀용은 16세의 나이에 22살이나 연상인 귀족 자크 귀용과 결혼합니다. 그때부터 그는 말할 수 없는 시집살이를 시작합니다. 결혼 첫날부터 귀용은 남편 병 수발을 해야 했고 괴퍅한 시어머니의 학대를 받아야 했고 전염병으로 두 아들, 딸을 잃어야 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큰 것은 남편이 죽자 그의 모든 재산과 그의 하나 남은 아들까지 빼앗깁니다. 결국 이 일로 일해 그가 교회사의 위대한 성자가 됩니다만, 그에게 온 고난은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과연 과부를 괴롭혔던 원한은 무엇이었을까? 그를 힘들게 했던 원수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에게는 말할 수 없이 힘든 인생의 원한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기도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물질문제든, 가족문제든, 자식문제든, 질병의 문제든, 우리에게도 이 과부가 경험한 것과 같은 문제와 아픔이 있고 우리는 그것 때문에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과부가 아무 문제도 없는데 기도했을까? 그에게 물질문제, 가정문제, 자녀문제가 없는 데도 기도했을까? 항상 월급이 제 때 나오고 사업은 계획한대로 잘 돌아가고 자녀는 기대 이상으로 잘 자라서 원하는 대학에 쑥쑥 들어가고 직장에서도 때가 되면 과장, 국장, 사장, 잘 승진되는 데도 밤낮 부르짖으며 기도했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만일 그렇게 했다는 그는 정말 믿음있는 사람입니다. 최고의 믿음은 잘 나갈 때도 잘 믿는 사람입니다. 한 해에 매출 100억 올리는 회사 사장이 주일날 골프장 안가고 주일성수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어려울 때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평안할 때 기도하기가 더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어려워야 기도합니다.

 

헤럴드 쿠시너가 쓴 <왜 선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생기는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쿠시너는 모든 교인들로부터 존경받는 훌륭한 목사였는데, 어느 날 3개월 된 어린 아들이 중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는데 놀랍게도 조로증이었습니다. 3개월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이가 노화가 빠르게 진행되어 10살이 되기 전에 팔순 노인처럼 늙어버려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쿠시너 목사님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아들의 고통을 가슴에 끌어안고 오랜 시간 동안 눈물로 기도하다가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1)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 중 기쁨만 누리는 사람도 없고 슬픔만 지고 사는 사람도 없다. (2) 인생의 모든 고난을 나 혼자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당하는 일이다. (3)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대부분 이해가 안되지만 나중에 보면 그 가운데 분명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음을 안다. (4) 하나님은 땅의 문을 닫으실 때 하늘 문을 여시고 하늘의 문도 닫히면 또 다른 비밀한 문을 여신다. (5)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아래 일어난 일임을 깨닫고 감사하면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신다. 아멘.

 

우리가 고통당할 때 받는 가장 큰 축복은 기도입니다. 고통은 우리를 기도로 내몰고 기도는 우리에게서 고통을 내몹니다. 우리 인생에 가장 진실하고 간절한 기도는 우리가 가장 크게 고통당할 때였고 지금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그럴만한 고통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제 책 한 권을 읽었는 데 채리 힐이라는 사람이 쓴 <흔들리지 마>였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한 마디가 제 마음에 남았습니다. “한 봉우리에서 다른 봉우리로 가는 유일한 방법은 골짜기를 통과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옥한 토양은 바로 골짜기에 있다”. 인생의 골짜기는 망하는 길이 아닙니다. 높은 산 사이에 골짜기가 있습니다. 한 봉우리에서 다른 봉우리로 가려면 반드시 골짜기를 통과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골짜기에 비옥한 토양이 있습니다.

 

23:4절에서 우리가 사망한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십니다. 아무 때나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 주와 나와 함께 하심이라”. 시편의 말씀입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함께 하는 곳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갈 때입니다. 시편의 말씀입니다. 112:4,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로다”. 욥기의 말씀입니다. 12:22, “어두운 가운데서 은밀한 것을 드러내시며 죽음의 그늘을 광명한데로 나오게 하시며”. 은밀한 것은 어두운 데서 드러나고 광명한 것은 죽음의 그늘에서 나옵니다. 어떻습니까? 지금 어렵습니까? 지금 힘듭니까?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습니까? 높은 산 사이에 골짜기가 있습니다. 한 봉우리에서 다른 봉우리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골짜기를 통과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골짜기에 비옥한 토양이 있습니다. 아프면 기도합니다. 아프니까 기도합니다. 아파서 기도합니다.

 

아플 때 우세요

기도에 대한 두 번째 교훈은 아플 때는 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과부가 아플 때 잘한 것이 있습니다. 운 것입니다. 재판장이 자기 말도 안듣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도 없지 속에서는 원한이 끓지. 이 과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우는 것밖에 없습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18: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여기에 번거롭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원어는 누디닉입니다 이 말을 요즘 말로 고치면 복싱 선수가 상대방의 눈 아래 펀치를 날린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말로 보통 한방 먹였다라는 뜻입니다. 아무 대비를 안하고 있을 때 갑자기 강펀치가 날아와 눈덩이가 시커멓게 멍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재판장 입장에서 어떻게 해야 예상밖의 강펀치가 되겠습니까? 말로 하는 것은 재판장앞에 안됩니다. 재판장은 수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법리공방, 누가 옳고 그르냐 그것 따지는 것이 재판장의 일입니다. 이 일로 하면 재판장이 이깁니다. 재판장이 당한 강펀치는 과부의 말이나 논리나 법리논쟁이 아니라 과부가 하고 그냥 울어 버린 것입니다. 너무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늘 말로 하던 재판장에게 괴부가 울음을 터뜨리자 재판장은 당황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러다 말겠지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 이틀이 아니라 매일 와서 웁니다. 말은 안하고 울기만 합니다. 재판장이 귀찮아 죽을 지경입니다. 너무 성가시고 다루기 힘듭니다. 말이고 논리고 법리고 다 소용없습니다. 매일 와서 우는 바람에 재판장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여러분, 어떤 기도가 가장 좋은 기도입니까? 유창한 말로 하는 기도입니까? 조목 조목 논리를 따져 하는 기도입니까? 성경을 들먹이며 하나님과 입씨름하는 기도입니까? 이런 기도는 쉽습니다. 말이 안 맞고 논리가 틀리면 안주면 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어쩔 수가 없는 강펀치가 있습니다. 우는 기도입니다. 아무 말없이 하염없이 울기만 하는 기도입니다. 자기 감정을 실어 온전히 마음을 바치는 기도입니다. 그 기도가 무서운 기도입니다. 성경의 기도를 보십시오. 성공한 경우도 있고 실패한 경우도 있는 데 성공과 실패에 한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먼저 가인입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과 함께 제사드리다가 하나님께 거절당했습니다. 제사를 곡식으로 드렸느냐 양새끼로 드렸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떻든 가인은 하나님께 거절당했고 그 결과 슬펐습니다. 슬픔은 곧 분노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4:5절입니다.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그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거절당해서 얼굴빛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가인의 결정적인 실수는 그 마음의 상처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오지 않고 애꿎은 동생에게 쏟았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때 가인이 마음에 있었던 아픈 마음을 하나님께 토로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벨이 죽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당대의 의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가인의 실수는 그가 하나님께 예배를 잘못 드렸거나 그로 인해 상처를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를 하나님께 털어놓지 못하고 아벨에게 뒤집어 씌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감정이 상하지 않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 감정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의 후처 하갈은 자신의 감정을 하나님께 쏟아서 성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라의 권유로 아브라함의 후처가 될 때까지만 해도 하갈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태어나자 마자 문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자기를 권해서 아기를 낳게 한 사라가 자기를 미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브라함조차도 자기를 멀리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때 하갈은 아마 큰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배신감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갈이 잘한 것이 있습니다. 그 아픈 상처를 갖고 아브라함과 사라와 싸우지 않고 하나님께 토로했다는 것입니다. 어린 핏덩어리를 데리고 광야로 나와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21:16절입니다. “하갈이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내어 우니”.

 

그렇습니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합니다. 목말라 죽어가는 어린 아들을 품에 안고 하갈은 우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21:17절입니다. “하갈아 무슨 일이냐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느니라”. 하나님이 들으신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기도는 하갈이 했는 데 하나님은 아이의 기도를 들었다고 한 것입니다. 어머니의 기도가 곧 자식의 기도였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어머니의 기도를 자식의 기도로 대신 들으신다는 것을 아십니까? 어린 자녀가 기도하지 못할 때 어머니의 기도를 자녀의 기도로 들으신다는 것을 아십니까? 오늘날 자식 때문에 고민이 없는 어머니가 누구입니까? 어떤 자식이 그렇게 쉽게 자랍니까? 당신은 쉽게 자라지 않았지 않습니까?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하갈에게 사막을 터뜨려 물을 낼 뿐 아니라 아들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민족이 오늘날 아랍민족입니다. 아랍민족을 그냥 미워만 할 것이 아닙니다. 그 민족도 하나님이 낸 민족입니다.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의 결과입니다.

 

여러분은 야베스의 기도라는 것을 아십니까? 대상4: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나의 지경을 넓혀 주옵소서”. 어떤 사람은 이 기도를 기복적인 기도라고 비판합니다. 왜 영적인 기도를 해야지 땅을 넓혀 달라는 물질적 기도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한 가지는 알고 두 가지는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 기도의 생명은 야베스라는 이름에 있습니다. 이 이름의 뜻은 고통, 아픔이런 뜻입니다. 어떻게 그가 고통이란 이름을 얻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말씀을 내용을 보아 어머니가 그를 낳다 죽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상처를 안고 자랐겠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상처없이 자란 사람 있습니까? 나름대로 다 상처가 있습니다. 그런데 상처받고 자랐다고 다 잘됩니까? 아닙니다. 야베스처럼 해야 잘됩니다. 야베스는 상처를 안고 하나님께 나왔습니다. 야베스가 아뢰었다는 10절의 말씀을 영어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Jabez cried out to God of Israel”. 야베스가 그동안 서로웠던 아픔과 상처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와 cried out, 소리쳤다는 것입니다. 상처가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를 향하여 소리치고 어디에다 쏟아부었느냐가 문제입니다. 야베스는 어머니도 없이 태어나 고통가운데 살았지만 그 고통을 하나님께 나와 하나님을 향해 cried out, 소리치고, 하나님께 poured out, 쏟아냈습니다. 이것이 야베스의 기도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들에게도 우리와 같은 상처와 아픔이 있었지만 그 상처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가 오늘의 과부처럼 하나님께 눈물로 쏟았습니다. 다윗이 그랬고 한나가 그랬습니다. “주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마음을 쏟아노라. 늘 은밀히 보시는 주님, 큰 은혜를 베푸시리”. 쏟아야 합니다. 시편 102편의 제목은 고난당한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 근심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는 기도입니다. 기도의 본질이 여기 나타나 있습니다. 상한 마음과 근심을 하나님앞에 토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38:5,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울면 하나님이 듣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과부가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흥미롭습니다. 5절입니다. 18: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결국 재판장이 졌습니다. 그렇게 힘있는 사람이 그렇게 힘없는 사람에게 졌습니다. 그렇게 말잘하는 사람이 말한마디 못하고 울기만 한 여인에게 졌습니다. 그렇게 큰 권력을 가진 자가 그렇게 연약한 과부에게 졌습니다. 딱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울며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도 끝까지 울며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시골에서 목회할 때 한 권사님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갑가지 연락이 왔는 데 권사님의 남편 집사님이 소변에서 피가 나와 가까운 병원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종합병원으로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았습니다. 그랬더니 의사들조차도 잘 모르는 희귀 악성 방광암 말기랍니다. 이미 손을 쓸 수가 없다는 진단이 나왔다고 합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놀란 권사님이 병원에 입원한 남편을 대신해 새벽 기도회에 나와 안수를 부탁했습니다. 어차피 병원에서도 안된다는 것,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새벽에 나와 기도하는 데 처음엔 권사님만 나오다가 가족들이 함께 나왔습니다. 그 이전에는 이들이 조용 조용히 기도했는데 이제는 죽기 아니면 살기입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도록 기도했습니다. 저도 교인들도 이 가정을 위해 계속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전날까지만 해도 줄줄 흐르던 피가 거짓말처럼 싹 멈추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병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담당 의사나 같은 병실에 있던 모든 환자, 그리고 병원 직원들조차도 이 기적에 놀라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절박하고 위급했던 집사님의 말기 악성 방광암이 깨끗이 치료받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약 15년이 지났지만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딱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눈물로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하물며라는 말입니다. 7절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여기에 하물며란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을 영어로 하면 “how much more”입니다. “얼마나 더 많이입니다. 과부는 재판장을 귀찮게만 했는 데도 응답받았는 데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도한다면 얼마나 더 많은 응답을 받겠습니까? 과부는 울기만 했는데도 응답받았는 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기도한다면 얼마나 더 많이 응답받겠습니까? 악한 재판장인데도 응답했는데 선한 재판장이 들으신다면 얼마나 더 많이 응답하겠습니까? 과부 혼자 기도해도 응답받았는 데 모두 모여 함께 기도한다면 얼마나 더 많이 응답받겠습니까? 과부는 아무 말씀도 듣지 않고 조용히 기도해도 응답받았는 데 우리가 이번에 새벽 부흥회를 통하여 한국 최고의 목사님들로부터 말씀을 듣고 기도한다면 얼마나 더 많은 응답을 받겠습니까?

 

하나님이 이번 부흥회를 통해 주실 은혜와 치유의 축복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는 목적과 뜻이 있습니다. 이번에 부흥회 목사님 초청을 두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어떤 분을 모실까요?” 하나님이 감동하셨습니다. “사랑과 치료의 능력이 있는 분을 모셔라”. 이번에 오실 네 분은 모두 두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사랑으로 목회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치유의 능력이 있는 분들입니다. 치유가 각각 다릅니다. 백동조 목사님은 사랑의 목회자입니다. 말씀으로 우리 영혼을 부드럽게 치료할 것입니다. 영혼의 치료입니다. 이금만 목사님은 상담학자입니다. 우리 마음을 하나님의 은혜로 상쾌하게 치료할 것입니다. 마음의 치료입니다. 송태근 목사님은 청년들이 만명 이상 모이는 삼일교회의 목사님입니다. 젊은이들의 좌절된 꿈을 치료합니다. 비전과 꿈을 심어 절망과 좌절에 빠진 사람들 치료합니다. 꿈의 치료입니다. 손기철 장로님은 우리 육신과 정신을 치료합니다. 손장로님은 이미 수많이 사람들이 병 나았다고 간증하는 한국교회에서 최고의 능력자입니다. 몸과 마음의 치료입니다. 손을 얹으면 귀신이 떠나가고 질병이 떠나갑니다. 능력치료입니다.

 

이번 새벽부흥회는 치유의 집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영혼을 치료합니다. 단단히 굳어진 우리 마음을 옥토와 같이 치료합니다. 학업과 사업과 스트레스로 좌절된 우리의 내면의 꿈을 치료합니다. 무엇보다 아픈 육신을 치료합니다. 여러 가지로 놀라운 치료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한 가지 이상 치료받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갈급해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6번 모두 참여하는 것입니다. 앞자리에 앉아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은혜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과부처럼 우는 것입니다. 과부처럼 한을 품고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울면 해결되고 울어야 고칩니다. 놀라운, 과부처럼 인생을 바꿀 기회가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하나님이 이번 새벽부흥회를 통해서 각자의 삶을 만지고 치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8:1-8 2013.11.5()

아프면 우세요

아픔이 기도하게 합니다

 

18: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과부의 원한

(1) 물질손해

(2) 시동생

(3) 시부모

 

헤럴드 쿠시너, <왜 선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생기는가?>

(1) 사람들중 기쁨만 누리는 사람도 없고 슬픔만 지고 사는 사람도 없다.

(2) 인생의 모든 고난을 나 혼자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당한다

(3) 고난은 대부분 이해가 안되지만 나중에 보면 그속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다(4) 하나님은 땅의 문을 닫으실 때 하늘 문을 여신다

(5) 고난이 올 때 감사하면 하나님이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신다.

 

채리 힐, “한 봉우리에서 다른 봉우리로 가는 유일한 방법은 골짜기를 통과하는 것이다. 가장 비옥한 토양은 골짜기에 있다”. (흔들리지마)

 

23:4,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 주와 나와 함께 하심이라”.

112:4,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로다”.

12:22, “어두운 가운데서 은밀한 것을 드러내시며 죽음의 그늘을 광명한데로 나오게 하시며”.

 

아플 때 우세요

18: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가인

4:5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하갈

21:16 “하갈이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내어 우니”.

21:17 “하갈아 무슨 일이냐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느니라”.

 

야베스

대상4: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나의 지경을 넓혀 주옵소서”.

 

“Jabez cried out to God of Israel”.

 

주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마음을 쏟아노라. 늘 은밀히 보시는 주님, 큰 은혜를 베푸시리”.

 

102, “고난당한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 근심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는 기도

 

38:5,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울면 하나님이 듣습니다

18: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18: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하물며”= “how much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