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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이윤재목사

눅16:19-31 2013.10.27(일)

16:19-31 2013.10.27()

우리가 잊고 사는 것들

요즘 우리에게 많은 것이 건망증과 치매입니다. 두 가지는 조금 다르지만 잘 잊어 버린다는 점에서 비슷합니다. 한 할머니가 택시 정거장에서 택시를 탓습니다. 한참 가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소리쳤습니다. “기사양반, 내가 어디로 가자고 했지?”. 이때 기사 아저씨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아이구, 깜짝이야! 할머니, 언제 탔어요?“ 둘이 똑같이 건망증 환자였습니다.

 

건망증과 치매는 기억력과 관련있습니다. 건망증은 단순히 기억력이 감퇴해서 깜빡 깜빡하는 현상입니다. 문제는 치매입니다. 치매는 질병이고 그나마도 큰 질병입니다. 우리 집 주소를 잊어버리는 것은 건망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집이 어딘지 잊어버리면 치매라고 합니다. 아내 생일을 잊어버리면 건망증입니다. 그러나 아내 얼굴을 잊어버리면 치매라고 합니다. 어떤 할머니가 동창회에 참석했습니다. 마침 교가를 부를 시간이 되었는 데 아무도 모른다고 해서 할머니가 나갔습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친구들은 모두 박수를 치고 자기들은 벌써 잊어버린 교가를 부른 친구를 칭찬했습니다. 할머니가 집에 돌아와서 할아버지에게 자랑을 했습니다. "그래? 그럼 그 교가 다시 한 번 불러보구려"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할머니가 노래를 불렀습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노래를 듣고 있던 할아버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습니다. “이상하다. 학교는 다른데 왜 우리학교 교가하고 똑 같지?”

 

사람에게 기억력은 중요합니다. 기억력은 다만 우리가 옛날 일을 잊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사람은 과거없이 현재없습니다. 우리의 존재를 이루는 중요한 기반이 과거입니다. 그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면 우리의 현재와 미래도 없습니다. 따라서 기억력 상실은 인격의 상실이요 존재의 상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고 사는 것은 다만 과거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목표와 의미입니다. 이것이 잊고 사는 것이 가장 큰 망각입니다. 과거를 잊는 것은 어떤 때 필요하기 하고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목표와 의미를 잊으면 모든 것을 다 잊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행중에 제자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제목은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입니다.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에 한 부자가 있었다. 그는 굉장히 잘 살았는 데 죽은 후 지옥에 갔다. 그래서 엄청난 고생을 당했다. 또 한 사람이 있었는 데 그 사람은 나사로다. 그는 땅에서는 매우 가난하게 살았지만 죽어서는 천국에 가서 행복을 누렸다. 그때 지옥에 있던 부자가 나사로에게 도와 달라고 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어서 서로 오고 갈 수가 없었다. 부자가 할 것이라곤 아직도 땅에 남아 있는 그의 다섯 형제가 자기처럼 지옥에 오지 않도록 기도하는 일이었다“.

 

이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한 가지 오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그것은 부자는 지옥가고 가난한 자는 천국갔다는 오해입니다. 성경은 부자와 가난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습니다. “부자는 나쁘고 가난한 자는 좋다“. 이것 아닙니다. 좋은 부자도 있고 나쁜 가난한 자도 있습니다. 믿음으로 부자된 사람도 있고 게을러서 가난하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의 부자가 지옥에 갔지만 그가 부자이기 때문에 지옥 간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나사로가 천국갔지만 그가 가난했기 때문에 천국 간 것이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은 믿음과 관련되지 물질과 관련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오늘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무엇인가 잊고 사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를 잊고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소중한 삶의 목적과 가치를 잊고 산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잊고 사는 것입니까? 다른 말로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먼저 사람을 잊고 삽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첫 번째로 잊고 사는 것을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것은 사람입니다. , 19절부터 보시겠습니까? 16:19-21,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여기에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부자고 또 한 사람은 나사로입니다. 부자의 이름은 나오지 않고 나사로는 이름이 나옵니다. 성경이 이렇게 어떤 부자라고 말할 때 그것은 누구에게도 해당된다는 말입니다. 일반적인 대상을 지칭합니다. 특정한 누구가 아닙니다. 누구나 돈많으면 고운 베옷을 입고 잘 먹고 살 수 있습니다. 누구나 돈 많으면 사람들이 알아주고 힘도 쓸 수 있습니다. 문제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이 이렇게 가난한 사람을 구체적으로 나사로라고 부른 것은 가난한 사람은 이름이나 불러야 알아주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누구나 알아주는 데 가난한 나사로는 누구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이름이 나사로지만 나사로가 누군지 아무도 관심이 없습니다. 부자는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다 압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이름을 대도 잘 모릅니다. 20절을 다시 보세요. 16: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앞에 버려진 채”. 부자집 대문앞에서 온 몸이 헐어 상처난 채 앉아 있는 이 사람은 놀랍게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곳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부자를 만나려고 발이 닳도록 다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누구도 나사로를 위로해 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누구나 그 옆을 스쳐갑니다. 누구 하나 거기 나사로가 있는지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어떻습니까? 혹시 우리도 우리 곁에 있는 사람을 그냥 지나쳐 가지 않습니까? 몇 달전 운행 중인 시내버스 운전기사가 취객에게 마구 폭행당하고 있는 데 승객중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는 뉴스 보도가 있었습니다. 대낮에 운전수가 술에 취한 승객에게 주먹과 발로 얼굴과 가슴 등을 수십 차례 폭행하고, 차가 기우뚱거렸지만 차안에 있던 승객 누구도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지 싶지 않았거나 보복이 두려워서 그랬을 것입니다. 어떤 때는 거리에서 사람이 맞고 있어도 지나가는 행인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는 뉴스도 있었습니다. 같은 아파트에서 사람이 몇 달채 죽어 있었어도 옆 집 사람도 몰랐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현대인의 가장 큰 질병은 외로움이요 현대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무관심이다”. 맞는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을 관심없이 지나치다가 나중에 가슴을 친 일이 있습니까? 제가 그랬습니다. 지난 금요일 저녁, 심야기도를 준비하고 있던 오후 7, 8시 경이었습니다. 담당 목사님이 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상이 났습니다.” “누군데? 누가 돌아가셨는데?” 제가 그 이름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진주영 성도, 지난 3월에 등록하고 남편도 6월에 등록한 우리 교회 신자였습니다. 보통 갑자기 돌아가셨다 하면 나이 많은 분입니다. 그런데 이 분은 절대 돌아갈 분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나이가 젊습니다. 34, 평소에 어디 아프다는 말도 못 들었습니다. 결혼한지 2년 남짓, 아직 아이도 없습니다. 제가 더 놀란 것은 그 분의 사인이었습니다. “스트레스성 심장마비”, 아니 그렇게 젊은 분이 어떤 스트레스를 받았길게 그렇게 갑자기 돌아갔을까? 놀란 가슴을 진정하며 눈을 감았더니 그 분의 교회 생활이 떠 올랐습니다. 이 분은 지난 6월부터 1부 새벽기도를 나왔습니다. 남들보다 일찍 나왔고 끝나자 마자 일찍 나갔습니다. 기도가 끝나면 올라가 1층 도서관에서 책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정장차림이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새벽기도 끝나고 직장에 나가려고 그렇게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한 특이한 일이 있었습니다. 새벽에 설교를 마치고 제 자리에 앉아 기도를 시작하면 어김없이 제 자리에 와서 음료수를 놓고 갔습니다. 여름에는 시원한 칠성사이다를, 날씨가 조금 추워지면 따뜻한 음료수를 놓고 갔습니다. 어떤 때는 제 손을 툭 치면서 놓고 가고 어떤 때는 말없이 놓고 갑니다. 눈을 떠보면 음료수가 있습니다.

 

너무 자주 음료수를 주기 때문에 제가 한번 만나서 그러지 말라고. 새벽까지 그렇게 안해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계속해서 음료수를 놓고 갔습니다.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제가 좀 성가셨습니다. 아침에 꼭 먹어야 하는 것도 아닌데 하지 말라고 하는 일을 계속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조금 모자란 사람이 아닐까? 솔직히 그런 생각도 했습니다. 돌아가신 금요일에는 새벽에 안 나왔고 그 전날인 목요일까지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분이 금요일에 돌아갔습니다. 제가 토요일 저녁에 입관예배를 갔는 데 참 사람이 허망했습니다. 엊그제까지 새벽에 나와 내 앞에 음료수를 놓고 간 분이 거기 누어 있었습니다. 갑자기 그는 그의 마지막 인생을 우리 교회를 스쳐갔고 그의 마지막 순례길의 끝자락에 저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길지 않은 짧은 생의 마지막 부분이 우리 교회였다니. 그리고 그의 인생에 마지막 나그네 길에 나를 만났다니. 갑작스럽게 인생이 무엇일까?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요 며칠동안 그의 삶의 아픔이 조금씩 벗겨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결혼 전부터 조울증으로 고생해서 약을 계속 먹었답니다. 그리고 생활이 어려워 일을 계속했는 데 일을 하면서 직장 상사들에게 엄청나게 고통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업무 성적이 안 좋았던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몸이 아프고 한편으로는 마음도 아파 어쩌면 그의 유일한 갈망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와서 위로 받고 힘을 얻고 그것이 감사해서 저에게 매일 음료수를 갖다 주었던 것입니다. 음료수를 주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목사님, 저 힘들어요. 조울증이 있어요. 매일 약을 먹어야 해요. 일도 그만 둘 수 없어요. 그런데 성과가 없다고 매일 혼나요. 그래도 가까운 곳에 교회가 있어 매일 내와 기도히고 울 수 있어서 고마워요. 너무 너무 감사해서 제가 드릴 것은 없고 목사님 설교하면 목마르시죠? 음료수 하나 놓고 가요”. 그의 영정사진앞에서 생각했습니다. “, 그때 나는 달려가 그의 손을 붙잡아 주었어야 했다. 아니면 전화하고 아니면 심방이라도 가서 감사하다고, 힘내라고 말해야 했다. 그런데 나는 귀찮게 생각하고 성가시게 생각했다. , 이 다음에 나는 천국 가서 그를 어떻게 그를 볼까?” 이것이 그가 저에게 지난 목요일에 주고 산 사이다입니다. 그는 다름 아닌 내 곁에 있다가 천국간 나사로였습니다. 그는 저에게 늘 나는 외로워요. 힘들어요하고 신호를 보냈디만 저는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나를 스쳐 멀리 갈 그를 붙잡아 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홀연히 제 곁을 떠났습니다.

 

이 사건은 저에게 큰 충격과 함께 뼈아픈 깨달을 주었습니다. 누구나 사람은 죽어간다는 것, 누군가가 내 곁에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것. 누구나 사람은 성가신 존재가 아니라 아픔의 존재라는 것, 그리고 내 곁에 있을 때 한번이라도 손잡아 주어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필립 얀시가 한 기도가 기억났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 세상에 살면서 어떤 사람도 불쾌한 존재가 아니라 목마른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소서”. 여러분 곁에도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손길이 필요해서 하나님이 보낸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해서 하나님이 보낸 사람을 다시 하나님께 돌려보내지 마십시오.

 

다음 천국을 잊고 삽니다.

우리가 잊고 사는 또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입니다. 오늘 말씀에 부자와 나사로가 세상을 뜬 다음에 간 곳이 있습니다. 지옥과 천국입니다. 지옥과 천국은 과연 실재할까? 많은 사람이 지옥을 보았다. 천국을 갔다 왔다 하지만 천국과 지옥을 본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본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는 천국은 너무 좋은 곳이기 때문에 한번 가면 돌아올 마음이 없고 지옥은 너무 나쁜 곳이라 한번 가면 돌아올 수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있습니다. 나사로는 부자이기 때문에 지옥간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지옥갔고 나사로는 가난했기 때문에 천국간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천국 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나사로처럼 믿음으로 살면 천국가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 세상만일까요?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세상입니다. 이태리 밀라노 대성당에 가면 세 마디 글귀가 쓰여 있습니다. "모든 기쁨은 지나간다“, ”모든 고통도 지나간다“. ”오직 영원한 것만 남는다“.

 

저는 목회자지만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천국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의 장모님은 오래전 62세에 세상에 떳습니다. 장모님이 세상을 뜬 것은 아파서가 아니라 갑자기 된 일이었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어느 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고 있는 데 결혼한 후 2년만에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태어난 후 얼마 안돼 집사람이 자꾸 친정을 가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아프지도 않는 데도 왜 고향에 가고 싶어 하나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월요일에 시간을 냈습니다. 그리고 장항선을 타고 고향에 갔습니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장모님이 그날 마루로 올라오다가 넘어져 머리를 크게 다친 것입니다.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아프시다고 해서 간 것도 아니고 그냥 갔는 데 그날 바로 다쳐 삶과 죽음사이를 헤메시다니. 집사람이 왜 그렇게 친정에 가고 싶어했는지 그때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뒤에 집사람은 어머니 때문에 병이 생겼습니다. 오랜만에 그렇게 벼루던 친정에 갔는 데 그 날 바로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어머니 생각하다 울고 속상해고 울고, 그러던 어느날 퇴근했는 데 집사람이 싱글 벙글 웃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환상중에 어머니를 보았답니다. 방에서 몸이 안 좋아 엎드려 있었는 데 갑자기 환상이 열리더니 어머니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모습은 살아 있을 때와 너무 달랐습니다. 어머니는 머리가 흰 머리에다 허리가 굽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환상가운데 본 어머니는 19살 색시같았습니다. 허리는 쭉 펴져 있었고 머리는 까맿습니다. 얼굴은 미소를 띠고 주름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어머니 좌우에 누군가 어머니를 보필하고 있었는 데 하얀 옷을 입었으나 얼굴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천사인 듯 했습니다. 집사람이 물었습니다. “엄마, 어디야?” “어디긴 어디야. 천국이지”. “천국이 그렇게 좋아?” 그럼 좋지. 말로 다 할 수 없단다“. 어머니는 환히 웃고 있었고 천사들은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니를 본 후 집 사람은 다시 슬퍼하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천국에 계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우리의 생이 이 세상뿐 아니라 저 세상도 있고 저 세상은 우리가 믿기만 하면 천국 간다는 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 인생이 그때부터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혹시 부모님 돌아가신 분들, 부모님이 어디 계신지 몰라서 슬프지 부모님이 분명히 천국에 있다는 것을 알면 슬프겠습니까? 우리의 생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 불안하지 내가 반드시 하나님 계시는 천국에 간다는 것을 안다면 불안하겠습니까? 그때부터 저와 집사람이 달라졌습니다. 어머니는 분명히 천국에 계시고 천국은 분명히 존재하고 우리도 때가 되면 천국갈텐데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최선을 다하다가 때가 되면 천국가리라 하니까 두려운 것도 사라지고 걱정, 염려도 사라집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을 좋아합니다. “천국을 목표로 삼으면 그 안에서 지상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상을 목표로 삼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영국의 C.S.루이스가 한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두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고래중에 향유고래가 있습니다. 이 고래는 두 세계를 삽니다. 주로 바다에 살지만 정기적으로 물밖으로 나와 코로 숨을 쉽니다. 그러면 그 숨 때문에 엄청난 물기둥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나서 꼬리를 수면 위로 높이 쳐들었다가 물속 깊이 들어갑니다. 향유 고래가 들어갈 수 있는 물속 깊이는 1마일, 1.6킬로 까지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바다속 1600미터를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깊히 들어가도 하루에 몇 번이고 물밖으로 나와 숨을 쉬어야 합니다. 그가 물속 깊이 들어간 이유는 물밖에서 숨을 쉬었기 때문입니다. 한낱 말못한 고래를 통해서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깊은 세상에서 살 수 있는 힘이 어디서 옵니까? 세상밖, 천국의 소망과 능력 때문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대한 희망을 많이 가질수록 이 세상에서 담대해지고 용기를 갖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요즘 살기 어렵습니까?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물속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물속에 아무리 많은 물고기가 있어도 고래는 물고기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공기마시고 사는 존재입니다. 하늘에 대한 소망, 천국에 대한 열망이 없으니까 우리가 답답하고 힘든 것입니다. 제가 비행기타고 유럽을 갈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알프스가 제 밑에 있습니다. 그런데 스위스에 도착해서 알프스를 가까이 가면 얼마나 높은지 모릅니다. 깍아지르는 빙벽에 하늘을 찌를듯한 산들이 병풍처럼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높은 산을 비행기에서 보면 제 발아래 있습니다. 똑같은 알프스가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지금 힘들어하며 죽을 지경이라고 하는 삶의 고통을 높은 비행기를 타고, 비행기보다 더 높히 계신 하나님의 눈으로 본다면 어떨까요? 하나님의 눈으로 봐도 그것들이 대단할까요? 아주 작아 보이지 않겠습니까?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때는 부산에서 배타고 가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떠나보내는 사람들은 언제 다시 만날까 하고 울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미국 샌프란치스코 항에는 먼저 도착한 동표들이 마중나와 , 미국 입성, 환영합니다라는 큰 프랑카드를 걸고 기다리지 않았습니까? 떠나는 모습을 샌프란스시코에서 본다면 어떨까요? 괜히 우는 것입니다. 떠나는 슬픔보다 에비된 환영이 더 크기 때문에 기쁘게 떠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천국은 있습니다. 오늘 나사로처럼 살아 힘든 분들, 천국의 눈으로 오늘을 보십시오. 천국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미 천국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그 천국의 눈으로 오늘을 보면 다 감당할 만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않습니다.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주시고 능히 감당케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임니 천국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전도를 잊고 삽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깨닫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전도를 잊고 산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나사로는 다행히 천국에 갔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지옥에 갔습니다. 부자가 지옥에 간 것은 그가 믿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왜 안 믿었습니까? 간단합니다. 그에게 전도한 사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에게 신세진 사람은 있었어도, 그에게 아첨하고 잘 보이려는 사람은 있었어도, 그 집에 가서 얻어 먹고 덕본 사람은 있었어도 전도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나는 데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10:14-15,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은 사람의 죄 때문에 심판하지 않는다. 회개하지 않아서 심판한다눈 말이 있습니다. 부자가 자기의 부를 믿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호화호식하며 산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가 죄가 있기 때문에 지옥에 간 것이 아니라 그가 회개하지 않아서 지옥에 갔다면 왜 회개하지 않았겠습니까? 누군가 회개하라고 말해주었어야 하지 않습니까? “당신 그렇게 살다가 큰 일나요말해 준 사람이 있었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것을 전도라고 합니다.

 

전도의 방법이 많지만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삶으로 전도하고 말로 전도합니다. 몇 년 전에 한 할아버지가 스스로 교회 나오셨습니다. 제가 심방가서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어떻게 교회 나오셨어요?”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우리 집 사람이 교회 나가면서 좋아졌어, 몸이 아팟는 데 몸도 좋아지고 마음도 무거웠는 데 마음도 편해졌어. 나에게도 잘하고 밝아졌어. 그래서 교회 나가게 되었어”. 할머니는 한번도 할아버지에게 교회나가자고 말한 적이 없지만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달라진 모습 때문에 교회 나온 것입니다. 한국교회 평균 그렇게 사람을 통해서 교회에 나온 사람이 전체 새신자의 85%가 됩니다.

 

그러나 그 방법만 전도가 아닙니다. 말로 전도해야 합니다. 삶으로 하는 전도는 아름답고 좋은 전도이지만 시간이 걸립니다. 가장 빠르고 손쉬운 방법이 말로 하는 전도입니다. 독일 히틀러 시대에 니믈러 라는 훌륭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이 본회퍼목사님과 함께 히틀러 암살운동에 참여했다가 붙잡혀 감옥에 갔습니다. 감옥에 있던 어느날 이 분이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히틀러가 하나님앞에 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이 세상에서 너무 악한 죄를 저질렀다. 도대체 왜 이렇게 살았느냐? 네가 그렇게 살 때 그렇게 살아서는 안된다고, 하나님을 믿고 회개해야 한다고 말해준 사람이 없었느냐?” 이때 히틀러가 옆에 있는 니믈러 목사를 쳐다 보면서 말합니다. “저 니믈러 목사가 나를 암살하려고만 했지 나에게 전도하지 않았습니다. 나에게 조금만 더 일찍 전도했더라면 나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말했습니다. 니믈러 목사가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그때 그가 생각했습니다. 히틀러가 악한 지배자로 평생 그를 반대하고 심지어 암살까지 하려고 했지만 그에게 전도한다는 생각은 못하고 살아 왔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감옥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말로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전도는 초청입니다. 예수믿으라고 교회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내가 전도한다고 그가 바로 예수 믿고 구원받지는 않을지 모릅 니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그들을 교회로 인도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초청한 영혼을 믿게 하고 구원할 책임은 없습니다. 그럴 능력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초청할 책임은 있습니다. 초청하면 목회자의 설교와 양육을 통해 믿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성도 여러분,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잊고 산 것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우리 주변에 우리의 사랑을 바라고 서성거리는 사람들을 회복합시다. 그들이 우리의 가족이든, 자녀든, 친척이든, 교인이든, 목장식구든, 직원이든 그들은 하나님이 보낸 나사로들니다. 천국을 회복합시다. 천국의 눈으로 오늘의 삶을 봅시다. 전도를 회복합시다. 우리에게 믿게 하거나 구원할 능력은 없지만 우리는 적어도 초청할 책임은 있습니다.

 

 

 

 

 

 

 

 

 

 

 

 

 

 

 

 

16:19-31 2013.10.27()

우리가 잊고 사는 것들

 

먼저 사람을 잊고 삽니다.

16:19-21,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16: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앞에 버려진 채”.

 

현대인의 가장 큰 질병은 외로움이요 현대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무관심이다”.

 

진주영 성도(사진)

 

필립 얀시, “하나님, 제가 이 세상에 살면서 어떤 사람도 불쾌한 존재가 아니라 목마른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소서”.

 

다음 천국을 잊고 삽니다.

밀라노 대성당, "모든 기쁨은 지나간다. 모든 고통도 지나간다. 그러나 오직 영원한 것만 남는다“.

 

천국을 목표로 삼으면 그 안에서 지상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상을 목표로 삼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C.S.루이스)

 

향유고래(사진)

 

마지막으로 전도를 잊고 삽니다.

10:14-15,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신자는 영혼을 초청할 책임이 있고 목회자는 믿게 할 책임이 있고 하나님은 구원할 책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