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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김광일목사

이 성전을 헐라-요 2:13~22

이 성전을 헐라-요 2:13~22
이름 김광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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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전을 헐라

어느 교회의 성전 앞 벽면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라는 글자를 붙였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담쟁이가 자라면서 십자가에 못 박힌이란 글자를 덮어버렸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글자만 남았습니다. 또 세월이 지나면서 담쟁이는 그리스도라는 글자도 덮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한다라는 글자만 보이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 교회 목사가 우리는 무엇을 전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담쟁이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덮어 버린 것을 비유하면서 그리스도가 빠져 있는 세속화된 교회를 지적하였습니다. 예수를 잃어버린 현대 교회의 모습이 아닌지 돌아보게 합니다.

로마 바티칸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San Pietro in Vaticano)은 세계적인 건축물입니다. 웅장한 건축물과 동시에 유명한 화가들이 그린 천정화와 벽화, 그리고 조각품들은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의 귀한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한국교회도 건축물에 대한 관심이 무척 높아졌습니다.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을 짓는 것이 마치 신앙의 업적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표징으로 생각하여 성전 건축을 하는 것 같습니다. 어마어마한 규모로 성전들을 건축하고 있습니다. 건축물을 통해 종교심을 발휘하겠다는 생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종교에 나타나는 현상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모리아 산에 세 차례에 걸쳐 지어졌습니다. 첫째는 솔로몬이 세운 최초의 성전입니다. 둘째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뒤 스룹바벨이 세운 성전입니다. 셋째는 헤롯왕이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증축한 성전입니다. 이 성전은 예수의 공생애 동안에도 공사 중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다윗이 건축 자재를 마련하고, 아들 솔로몬이 완공한 성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믿음을 이어왔습니다. 자신들의 모든 것을 드려 성전을 건축하고 복원하며 유지하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실증적 표적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삶이 이루어졌습니다. 시간에 맞춰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기도하였습니다. 성전이 없는 유대교는 감히 상상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엄청난 도전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타락과 분열을 방지하기 위해 성전을 마련해 주시고 예배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정신은 사라지고 율법의 형식만 남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그 율법마저 거추장스럽게 느끼고 하나님도 귀찮아졌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을 성전에서 몰아내고 자신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성전에 예수께서 오시면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전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성전 안에서 채찍을 드신 까닭은 무엇이었습니까? 왜 성전을 허물라고 하셨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보셨기에 성전을 허물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예수께서 성전을 보시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아버지의 집인가

전도자 무디(D. L. Moody)는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하는 신앙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너는 나를 주인이라고 부르면서도 나에게 묻지 않았다. 너는 나를 빛이라고 하면서도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 너는 나를 길이라고 하면서도 나를 따르지 않는다. 너는 나를 진리라고 하면서도 나를 믿지 않는다. 너는 나를 생명이라고 하면서도 나를 원하지 않는다. 너는 나를 지혜라고 하면서도 나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너는 나를 사랑이라고 하면서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너는 나를 부()라고 하면서도 나에게 그 무엇을 간구 하지 않는다. 너는 나를 영원이라고 하면서도 나를 찾지 않는다. 너는 나를 자비하다고 하면서도 나를 신뢰하지 않는다. 너는 나를 전능하다고 하면서도 나를 존경하지 않는다. 너는 나를 의롭다고 하면서도 나를 경외하지 않는다.”

본문 14절입니다.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하나님의 자리에 누가 앉아 있습니까? 사람들이 앉아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이 사람의 집이 되어버렸습니다. 성전은 사람을 만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한 곳을 정하시고 만나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성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성전 안에 제사 드리는 도구와 제사장, 제사를 드리러 온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습니다.

교회들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의 고집, 욕심, 주장만 남아있는 이름만 성전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대신해 다른 것들이 성전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아닙니까? 만약 예수께서 이 성전을 보신다면, 채찍을 드시지 않을 거라 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습니까? 누가 성전의 주인입니까? 도대체 누구의 집입니까? 사람의 집인 성전은 허물어져야 합니다. 성전은 마땅히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아버지 집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장사하는 집인가

짐 베이커(Jim Bakker) 목사는 PTL이라는 그룹을 통해 크리스천 테마파크를 조성하고 회원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사기협의로 구속되어 45년형을 받고 복역 중에 있습니다. PTL이란 “Praise the Lord” 하나님을 찬양하라의 약자입니다. 베이커 목사는 자서전 나는 잘못 살았다’(I was Wrong)이란 책에서 자신은 번영의 신인 금송아지를 숭배하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고 금송아지에게 인도하는 것이 교회를 실패하게 만드는 요인들입니다. 로마 교회는 성베드로 성당의 엄청난 건축을 계획하였습니다. 면죄부를 팔아 건축 재원을 마련하고자 하였습니다. 신부 테젤(Tezel)이 면죄부를 팔러 다녔습니다. 면죄부를 사면 지난 죄를 다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앞으로 지을 죄도 용서받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데절은 하나를 더 사면 앞으로 지을 죄도 사함을 받을 수 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테젤 신부가 면죄부를 팔고 돌아오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이 돈은 면죄부를 판돈이라고 말하였으나 강도가 모두 털어갔습니다. “면죄부를 판돈을 훔쳐 가면 지옥 밑에 들어간다고 말하자 강도는 면죄부 두 장을 보여주며 앞으로 지을 죄도 면죄 받는다고 그러지 않았소라며 가버렸다고 합니다. 물질주의와 상업주의의 산물이 성베드로 성당입니다. 현대 교회 역시 물질이라는 맘몬신에 붙잡혀 있는 현실입니다. 교회는 물질주의와 상업주의로부터 해방되어야만 합니다. 성전은 장사하는 세속적 원리가 횡행하는 집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본문 16절입니다.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예수의 꾸짖음에서 종교의 본질을 훼손하는 행위에 대한 거룩한 분노를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동기가 순수했다고 하더라도 장사하는 쪽으로 간다면 성전의 본질이 망각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장사는 영혼보다 물질만 있으면 거래가 성사됩니다. 돈이 중요한 가치로 떠오르며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러므로 성전은 장사하는 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가복음 1117절입니다.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성전은 오직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도외의 것은 인정되지 않는 곳이어야 합니다. 성전은 장사하는 곳도, 사회 개혁하는 곳도, 사회 사업하는 곳도, 정치하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버림받은 영혼들이 기도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는 곳이 성전입니다. 하지만 장사하는 집으로 바꾸어진 성전이기에 예수께서 성전을 허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분노를 터뜨리신 예수의 채찍에서 성전의 본질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삼키려는 집인가

김연숙 작가의 흔들리는 신앙, 붙들어 주소서라는 글에 22년 동안 미국 이민 교회에서 108번 교회를 옮긴 장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1년에 약 5번 정도, 평균 두 달에 한 번 정도 교회를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이상향의 교회를 찾았습니다. 교회를 옮기는 날로부터 그 교회의 단점을 찾기 시작합니다. 목사의 허물을 맨 먼저 찾아냅니다. 그리고 자기 눈에 드러난 허물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한답니다. 교회주보, 성가대, 주방, 교인들의 태도 등 108개 교회의 단점을 낱낱이 노트에 적어서 마치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었답니다. 그가 병으로 죽게 되자 어느 교회도 그의 장례식을 해줄 수가 없었답니다. 이유는 그가 섬긴 교회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죽기 전 108번째 교회 목사님이 불쌍히 여겨 그의 장례식을 해주었답니다. 만일 그 사람이 천국에 올라가 주님 앞에 108개 교회의 허물을 기록한 두툼한 노트를 펴놓는다면 주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주님은 그 사람의 허물이 적힌 수십 권의 노트를 던져주시지는 않았을까요? 무엇을 위한 열심으로 신앙생활을 하십니까?

본문 17절입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한 것을 기억하더라.” 무엇에 열심을 내야 합니까? 내 안에서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려고 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분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내쳐야만 합니다. 잘못된 열심이 주를 삼켜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향한 열심입니까?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진정한 열심입니까? 아니면 성전의 체제를 지키려는 성전 권력을 향한 열심입니까?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바른 열심을 내고 있는지 스스로 질문해야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행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못하는 잘못된 열심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열심은 하나님마저 삼켜버리고 말 것입니다. 문제를 깨닫고, 문제를 고치는 사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심을 내며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있습니다.

로버트 멍어(Robert Boyd Munger)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이란 책을 통해 주님, 저의 이 마음이 주님의 것이 되기를 원합니다. 저는 주께서 이곳에 정착하셔서 온전히 안주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 집의 모든 것을 당신의 것처럼 사용하시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고백합니다. “주여 당신은 손님이었고, 제가 주인이었습니다. 이제 후로는 제가 하인이 되려 합니다. 당신이 저와 이 집의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여기에 제 존재와 소유의 모든 것이 있습니다. 이제 당신이 집을 운영해주십시오. 저는 단지 심부름꾼과 친구로서 당신 곁에 있겠습니다라고 끝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택하신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성전입니다. 유대교가 떠받들던 성전, 매일 제사가 드려지던 장소, 하지만 이미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린 성전이 목적지였습니다. 예수께서이 성전을 허물라고 말씀하신 후 골고다로 향하셨고 그 곳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성전 종교가 아니라 십자가 종교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성전 신앙이 아니라 십자가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채찍을 내리치신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성전은 과연 어떠합니까? 하나님 아버지가 다스리시는 아버지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장사하는 집이 아니라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를 삼키는 열심이 아니라 주를 드러내는 성전의 회복을 위하여 열심을 내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