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음 스웨덴의 여류작가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셀마 라게를뢰프(Selma Lagerlof)의 ‘진홍 가슴 새의 비밀’ 이라는 동화의 이야기입니다. 천지창조 당시 하나님께서 잿빛 털을 가진 새 한 마리를 만드시고 ‘진홍 가슴 새’ 라고 이름을 붙이셨습니다. 그러자 잿빛 새가 물었습니다. “하나님, 저는 온몸이 잿빛인데, 왜 진홍 가슴 새라고 하십니까? 붉은색이 전혀 없는데”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참 사랑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될 때, 그 이름에 합당한 깃털을 갖게 될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잿빛 새가 갈보리 언덕 위를 날고 있는데 이상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갈보리산 위에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말합니다.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죄가 없는데 왜 피를 흘려야 하는가?” 이 말을 들은 잿빛 새는 예수에게 마음이 끌렸습니다. “죄도 없다는데 왜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걸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측은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에게 가까이 날아가 보았더니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가시로 만든 관을 머리에 썼는데 피가 가시관을 타고 계속 흘러내렸습니다. 많은 가시들이 머리에 박혀 있었습니다. 잿빛 새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죄가 없으신 분인데,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잿빛 새는 예수의 머리 가까이 날아가 이마에 박힌 가시를 부리로 하나하나 뽑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가시가 뽑힐 때마다 피가 솟구쳐 나왔습니다. 진홍 가슴새는 곧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가슴에 묻은 피를 씻기 위해 시냇가로 날아가 피를 씻었으나 피가 씻겨 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잿빛 새는 아무리 씻어내도 지워지지 않는 ‘진홍 가슴새’로 거듭나게 되었으며, 그 새가 낳은 새끼들도 가슴에 선명한 진홍 깃털을 갖고 태어나게 됩니다. 이름대로 진홍 가슴 새가 되었습니다. 가슴에 그리스도의 피가 묻은 새가 된 것입니다. 가시 면류관에서 흘러내리는 그리스도의 피는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히브리 기자는 구약시대 제사의 실체인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사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구약시대 제사로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에 미흡하지만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는 영원한 효력이 지속되는 제사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유언이 효력을 갖기 위해서는 유언자의 죽음이 필연적이듯 그리스도의 죽음 또한 필연적임을 말합니다. 저자는 옛 언약의 제한된 효력으로 말미암아 좌절할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장래 좋은 일에 관해 언급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짐승의 피가 아닌 바로 자신의 피를 흘리시고 하늘의 더 크고 온전한 장막, 곧 영원한 성소로 들어가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새 언약과 그리스도 자신을 제물로 드린 제사는 어떤 효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영적 효력은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사하게 하시리라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Juan Carlos Ortiz) 목사는 자신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범한 죄 때문에 괴로워했습니다. 그로 인해 심한 편두통으로 고통을 당했습니다. 어느 날 편두통이 심해 강단에서 설교를 하다가 기절해서 병원으로 실려 가기도 했습니다. 명한 의사도, 좋은 약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라는 말씀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 너 때문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때문에 네가 네 자신을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자세히 너를 알고 있는 내가 이미 용서했다. 그런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너는 누구냐? 나보다 더 거룩한 자냐?” 오르티즈 목사는 불완전성 때문에 자신에 대해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의 행위와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더 이상 자신의 행위를 보지 않기로 생각했습니다. 대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평안과 신비스러운 행복감을 맛보았습니다. 그로부터 3주일 후, 편두통이 사라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모든 죄를 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여기의 속죄는 ‘뤼트로시스’ 인데 속전을 받고 풀어주는 것을 뜻하며 ‘구속, 속량’으로 번역됩니다.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는 것은 ‘오직 단 한번만 성소에 들어가셨다’는 의미로서 더 이상 들어갈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는 제사는 영원하고 완전한 속죄제인 것입니다. 구약시대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갈 때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갔습니다. 피의 제사는 해마다 반복되어야 했습니다. 그 피가 온전치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짐승의 피 대신 자기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피의 제사는 한번으로 끝났습니다. 더 이상 반복되지 않았습니다. 단 한 번의 제사로 속죄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가 완전하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가 완전히 사하여졌습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 받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습니다. 둘째로 정하게 하시리라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실망스러웠습니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연약함 때문입니다. 거짓말도 하고 살아가는 것들이 마음에 불편함을 주었습니다. 어느 날, 죄 때문에 고민을 하다가 잠들었는데 꿈에 하나님이 흑판을 보여주셨습니다. 흑판 위에 마틴 루터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곳에 루터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지은 죄의 목록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수를 셀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본 루터는 더욱 절망에 빠졌습니다. “나는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야” 하며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갑자기 손이 나타나더니 죄의 목록 위에 ‘그 아들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라고 기록하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니 기록하는 사람의 손에 큰 못 자국이 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손에서 붉은 피가 떨어지는데 그 피가 흑판에 쓰였던 죄의 목록을 깨끗이 지우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루터는 깨달았습니다. “내 죄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정하게 하시는구나” 예수의 피는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효력이 있습니다. 아무리 더럽고 추악한 심령이라도 예수의 피로만 깨끗하게 씻음 받을 수 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피가 없다면 정하게 되는 길은 없습니다.
본문 13절입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는 사람들은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됩니다. 생활이 완전히 변한다는 뜻입니다. 죄악으로 더러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지만 누구나 늪 속에 빠져 들어가듯이 죄악 가운데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깨끗함을 얻는 비결은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는 길 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을 깨닫고 죄를 대적할 때마다 깨끗하게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시체를 만지거나 부정하게 된 자들은 피나 재를 뿌려 정결하게 된 후에 성내에 들어와 함께 살 수가 있었습니다. 피와 재로 말미암아 정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결한 예식은 외적인 것에 불과하고 마음까지 정하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죄의식에 사로잡혀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외적 정결뿐만 아니라 부정한 양심까지도 깨끗하게 만드는 효력이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의 마음과 행실을 정하게 하십니다. 셋째로 섬기게 하시리라 ‘낮은 데로 임하소서’의 주인공 안요한 목사는 본인도 시각장애자이면서 시각 장애인들을 섬기며 헌신하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의사들이 눈을 정밀 검사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거액을 들여 수술하면 광명을 찾을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안 목사는 두 가지 이유에서 거절했습니다. 첫째는 그런 돈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있더라도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써야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는 자신이 광명을 찾는다면 시각장애인들과 아픔을 함께 하며 섬길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안 목사의 섬김이 가능한 까닭은 그리스도의 피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헌신할 때 보상심리를 가지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를 깨닫는다면 그 은혜에 감사하여 섬기게 됩니다. 본문 14절입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여기의 섬김은 ‘라트류에인’으로 ‘복종으로 말미암는 섬김’이라는 의미입니다. 엎드려 경배하며 예배하는 섬김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임을 기뻐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고 자신도 만족을 얻지 못하는 죽은 행실을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죽은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만듭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는 정도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깨닫고 살아가는 사람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살아있는 섬김을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변화되기 전에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사람가운데 으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복음을 깨닫고 오직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고백했습니다. 핍박자였던 바울은 예수를 진정으로 섬기는 일군이 되었습니다. 그가 섬길 수 있었던 까닭은 그리스도 피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국에 파워코스트 백작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대단히 큰 부자로써 거대하고 화려한 성에서 살았습니다. 아무리 화려한 부귀영화를 누린다 하더라도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죽음을 맞게 됩니다. 백작 부인에게도 마침내 그 날이 다가왔습니다. 임종을 기다리고 있을 때 평소에 가까이 지내던 사람이 찾아와 물었습니다. “부인, 얼마나 힘드세요?” 그러자 죽음을 눈앞에 둔 백작 부인은 두렵거나 불안한 기색 없이 환한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 괜찮습니다. 저는 이렇게 죽음에 임박해서 한 가지 분명히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 필요한 것은 단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세상의 돈이나 학식이나 재산이나 명예도 죽음 앞에는 아무 소용이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흰 눈같이 깨끗이 씻어 준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지금 이 순간에 없습니다. 그 말씀이 내 영혼에 그렇게 감미로운 말씀이요, 힘이며, 위안의 말씀이 되는 줄 이 순간까지 몰랐습니다.” 모름지기 교회는 피의 복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새 언약의 중보가 되셨습니다. 피 흘리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여 주십니다. 더럽고 추한 모든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이 씻을 수 있습니다. 피 안에 재앙을 면할 수 있는 요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피는 생명이기에 영원한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부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감격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를 구속하여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를 정결하게 하십니다. 오직 그리스도 피를 믿는 믿음으로 섬기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