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음 담장 아래 꽃밭에 해바라기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햇님을 향해 뻗어가며 서로 누구의 키가 더 크게 자랄 것인지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때론 담장 너머의 세계에 대해서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해바라기들의 발밑에 나팔꽃이 찾아 왔습니다. 나팔꽃이 먼저 작은 해바라기에게 부탁합니다. “작은 해바라기님! 저는 혼자서는 설 수 없는 존재랍니다. 누군가를 의지하고 자라야 꽃을 피울 수 있답니다. 해바라기님께서 저의 기댈 곳이 되어 주신다면 가장 아름다운 꽃을 당신께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 말은 들은 작은 해바라기는 신경질을 내며 말했습니다. “너처럼 거추장스러운 존재는 딱 질색이야! 나는 누군가가 내 몸에 와 닿는 것조차 싫어. 그런데 나를 칭칭 감고 올라가 꽁꽁 묶을 것 아니야? 나는 하늘에 보이는 햇님을 향해 커 가는 것만으로도 벅차단 말이야. 그러니 다른 데나 가서 알아보라구.” 작은 해바라기의 가시 돋친 말에 나팔꽃은 주눅이 들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나팔꽃은 큰 해바라기에게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무척이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말입니다. 그런데 큰 해바라기는 나팔꽃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습니다. 큰 해바라기의 미소에 힘을 얻은 나팔꽃은 용기를 내어 부탁합니다. “큰 해바라기님, 저는 혼자서는 일어설 수 없는 존재랍니다. 누군가에게 기대야만 자라서 꽃을 피울 수 있답니다. 거추장스럽더라도 큰 해바라기님께서 저의 기댈 곳이 되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큰 해바라기님께서 허락만 해 주신다면 저는 가장 아름다운 꽃을 보여 드릴 수가 있습니다.” 큰 해바라기는 말했습니다. “나팔꽃 아가씨! 걱정 마세요. 제가 아가씨의 버팀목이 되어 드릴게요. 사실 햇님을 바라보며 남보다 더 크게 자라려고 경쟁하듯 달려온 나의 삶은 각박하기만 했답니다. 아가씨와 함께 하늘의 햇님을 향하여 더불어 여행을 하고 싶군요. 어서 아가씨의 여린줄기를 제 몸에 기대세요. 제 몸에 약간 거칠은 솜털이 박혀 있긴 하지만 조심조심 타고 올라오신다면 못 오를리 없을 거예요” 큰 해바라기의 기꺼운 허락을 받은 나팔꽃은 기쁨에 겨워 해바라기의 몸을 감싸 안으며 자라 올랐습니다. 마침내 나팔꽃은 연분홍 나팔꽃을 가득 피웠고 바깥세상의 아름다움도 구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나팔꽃의 아름다움으로 큰 해바라기도 더욱 아름답고 우아해 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거센 비바람이 휘몰아 쳤습니다. 밤새도록 불던 비바람이 잔잔해지고 아침 해가 돋았습니다. 나팔꽃은 부랴부랴 꽃을 피워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나팔꽃은 작은 해바라기의 모습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작은 해바라기가 목이 꺾인 채로 흔들거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밤의 비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목이 부러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바람을 맞은 큰 해바라기는 든든하게 서 있었습니다. 거센 비바람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큰 해바라기를 꽁꽁 감싸고 있는 나팔꽃 덩굴이 보호했던 것입니다. 아침의 따사로운 햇님을 향해 큰 해바라기와 나팔꽃은 함께 행복했습니다. 이 어찌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닙니까? 본 시편은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라는 머리말이 붙어 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 전후에 여러 가지 국가적인 분열과 반목으로 비통함을 겪었었지만 이제는 자신이 애타도록 기도한 복을 받게 되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여드는 그 모습은 분명히 큰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어찌 그리’라는 표현을 하였습니다. “얼마나 선한지 보라!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라! 선함이나 아름다움을 측량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에게 보라”고 말합니다. 여기의 ‘선하다’와 ‘아름답다’라는 두 형용사의 결합이 주목됩니다. 선하다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또한 아름답다는 것은 금상첨화입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지만 종종 아름다운 것이 악한 경우가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아름다우면서도 선하고, 선하면서도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움에 선함이 그 선함에 아름다움이 서로 보완함으로 완벽한 아름다움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모습이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첫째로 하나된 모습이니 어느 스승이 제자에게 “모자를 사러 가는데 같이 가자” 고 하셨습니다. 본래 부탁을 안 하는 스승인 것을 알기에 제자는 의아해 하며 뒤를 따랐습니다. 평소에 스승에게 하려던 이야기를 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은 시장 구석구석을 돌며 몇 시간째 어떤 모자를 살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시간을 돈 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스승인 것을 모두 알기에 제자는 스승이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스승은 허름한 모자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랜 시간 끝에 마음을 굳힌 곳이 고작 낡고 허름한 가게란 것에 실망한 제자는 모자를 사들고 나오는 스승에게 참다못해 여쭈었습니다. “스승님, 백화점에 가시면 훨씬 더 좋은 모자를 살 수 있으며, 시간도 절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대답하였습니다. “나도 그건 안다네. 하지만 이런 곳의 모자도 팔아 주어야 저 사람들이 먹고 살 것이 아닌가? 게다가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자네와 할 이야기도 다 했으니 그만큼 시간도 벌지 않았는가?” 스승이 가게 앞에서 망설였던 것은 어떤 모자를 살 것인가 고민이 아니라, 어느 가게의 물건을 팔아줄까 고민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누구입니까? 일제시기에 ‘조선민족 갱생의 도(道)’를 지어 민족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었던 국어학자 최현배(崔鉉培) 선생이었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원문에는 “보라”는 단어가 앞에 있습니다. 주목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반목하고 불신하던 백성들이 하나 되어 성전으로 모여드는 모습은 다윗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볼 때에도 감탄이 나오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주목하여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성전을 중심으로 동거하는 하나 된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교제하는 영적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교제의 핵심은 연합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연합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회가 아니라 다툼의 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예수 안에 숨겨지고 예수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이 나타나야만 합니다. 아무리 추하고 악한 죄인도 예수와 연합되면 아름다운 사람으로 바꾸어집니다. 혼자는 어떤 아름다움도 선함도 없습니다. 은혜를 받고 은사가 넘쳐도 혼자 있는 것은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는 하나되는 교회입니다. 혼자 있으면 유혹받기가 쉽습니다. 넘어지기가 쉽습니다. 사랑의 교제로 하나이 되어야 합니다. 그 모습이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넘치는 모습이니 어느 가정주부가 남편의 수입이 적어 구멍가게를 냈습니다. 그녀는 정직하고 친절하여 소문이 많이 퍼졌고 손님이 많아졌습니다. 나중에는 물건이 달릴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트럭으로 물건을 사들이고 하루 종일 정신없이 팔아야 할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하여 돌아온 남편이 바쁘게 물건을 팔고 있는 아내에게 “우리 동네 다른 가게들은 손님이 별로 없다고 하네. 저 건너가게는 곧 문을 닫을 처지가 되었다네”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부인은 깨닫는 것이 있었습니다. 트럭으로 주문하던 물건을 트럭으로 주문하지 않았고 파는 물건 종류도 줄였습니다. 손님이 찾아오면 “그 물건은 저희 가게에 없습니다. 그 물건은 저 건너편 가게에 가면 사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 손님은 줄게 되었고 수입도 줄게 되었습니다. 그녀 역시 바쁘게 장사하는 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많아진 그녀는 좋아하던 독서를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틈틈이 글도 쓰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꼬 (三浦綾子)의 젊은 시절 이야기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랑의 넘치는 마음이 복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본문 2절입니다.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성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적합한 사람으로 구별되어야 합니다. 기름부음 받은 대제사장 아론과 같이 특별한 하나님의 소유이며, 그 용도가 구별되었습니다. 여기의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는 기름이 처음 떨어진 장소에 한정되지 않고 머리를 흘러내려 수염을 적셨던 것처럼 머리로부터 흘러내리는 사랑이 흘러내려 모든 것을 향기롭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는 쉬지 않고 흐르므로 기름을 옷에 바른 것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교제는 다른 지체에게 넘쳐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교회나 민족이나 분파나 연령의 경계선을 넘어서야 합니다. 비록 종이라도 주인이 누리는 은혜를 함께 나누면 형편이 더 좋아집니다. 은혜가 주인에게 넘치므로 그 은혜가 하인에게까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은혜 받으니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 혜택을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머리에 부은 기름이 아론의 수염도 옷깃에도 흐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기름의 향기가 넘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사랑이 만민에게 생명의 향기로 넘치게 하여야 합니다. 그 모습이 바로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닙니까? 셋째로 살리는 모습이니 남편 없이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구겨진 돈 10,000원을 들고 동네 모퉁이 구멍가게에 분유를 사러 갔습니다. 분유 한 통을 계산대로 가져가니 주인은 16,000원이라고 합니다. 힘없이 돌아서는 아이 엄마 뒤로 가게 주인은 분유통을 제 자리에 올려놓습니다. 그러다가 가게 주인은 분유통을 슬며시 떨어뜨립니다. 주인은 가게를 나가려는 아이 엄마를 불러 세우고서 찌그러진 분유는 반값이라고 말합니다. 10,000원을 받고 2,000원을 거슬러 줍니다. 아이 엄마는 너무나 감사한 마음으로 분유를 얻었고, 가게 주인은 8,000원에 천국을 얻었습니다. 여인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고 살리는 주인의 마음에서 작은 천국을 봅니다. 사소한 배려나 말 한 마디가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힘든 세상이지만 한 사람, 또 한 사람의 작은 사랑이 일파만파 퍼지는 세상이 되었으면 합니다. 본문 3절입니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헐몬 산은 팔레스타인 북북에 있는 해발 2,815m의 사계절 만년설이 있는 산입니다. 갈릴리 호수 북동쪽에 위치하고 요단강의 수원지 역할을 합니다. 헐몬 산에서 만들어내는 이슬의 양도 풍성합니다. 그것이 시온에 내려 풍성한 생명의 역할을 합니다. 과일이 꽃을 피우고 식물을 힘을 얻는 것은 이슬 때문입니다. 헐몬이 없으면 시온은 시들어 버리고 활기가 없습니다. 헐몬에서 내려오는 이슬이 시온을 살리는 일을 합니다. 공동체의 특징은 함께 나누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배려하고 협력하는 것이 교회의 특징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성령 충만한 공동체 역시 나누는 공동체였습니다. 말씀을 나누고, 기도를 나누고 사랑을 나누고, 가진 것을 나누고, 서로의 삶을 나눌 때에 나눔으로 사랑이 더욱 깊어지고, 더욱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이슬이 내려야 합니다. 이슬은 하나님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높은 데서 낮은 데로 내리며, 삶의 원기를 회복시키고 생기가 돌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 될 때 거룩해지고 하나 될 때 생명력이 넘치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도 복을 내리십니다. 그 복은 곧 영생입니다. 영생은 길이로서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귀는 복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 되어 연합하는 일이야말로 선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손양원(孫良源) 목사의 소원은 자신도 나병이 들어 애양원 안에서 나환자들과 함께 사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손 목사가 부산 감만동에서 목회 할 때 한센병 환우가 발에 커다란 상처가 났는데 보니 상처가 깊어 그대로 두면 다리를 절단해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그 때 손 목사는 고름 나는 상처를 빨아 치료해주었습니다. 여순반란사건 때는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용서하고 구명하여 아들로 삼았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예수 안에서 하나 될 때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과연 어떠합니까? 악하고 부끄러운 모습입니까? 아니면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부디 깨닫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연합하여 하나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사랑이 넘치도록 구해야 합니다. 생명으로 살리는 삶이 되어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회복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