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니 에릭슨 (Joni Eareckson Tada)은 1967년 체사피크 만에서 다이빙 훈련을 하다가 사고를 당했습니다. 조니 에릭슨 (Joni Eareckson Tada)은 1967년 체사피크 만에서 다이빙 훈련을 하다가 사고를 당했습니다. 목 아래부터 전신이 마비된 그녀는 좌절, 원망, 분노, 심지어 자살하고 싶은 침체까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감정에 휩싸였습니다. 하지만 재활 훈련과 치료를 통해 그리고 부모, 형제자매들과 친구들의 열렬한 후원을 통해 점차 깊은 블랙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입으로 그림 그리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후원하는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변화의 중심에는 성경을 재발견한 일이 있었습니다. 자기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무력하게 마비된 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보면서 그녀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큰 도움을 준 사실은 예수의 부활이었습니다. “나는 이제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몸이 하늘에서‘영화롭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때는 내가 여기에서 죽은 후 내 발로 춤을 출 때입니다. 손가락은 오그라들어 구부러지고, 근육은 쇠약해지고, 무릎은 비틀리고, 어깨 아래로는 아무런 감각이 없는 내가, 언젠가는 가볍고 밝으며 강력하고 눈부신 의로 옷 입은 새로운 몸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나처럼 척추를 다친 사람에게, 뇌 손상을 입은 환자 혹은 조울증 환자에게 어떤 소망을 주는지 상상할 수 있습니까? 다른 어떤 종교나 철학도 새로운 몸과 정신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직 부활의 복음 안에서만 상처 입은 사람이 이처럼 놀라운 소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의 중심이 되시는 부활하신 예수가 계십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주님이시오 친구요 구세주가 되십니다.” 본문은 복음서에 나오는 여러 부활 전승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시고 무덤에 묻힌 날은 금요일 오후입니다. 금요일 저녁부터 다음날 토요일 저녁까지 유대인들이 거룩한 날로 지키는 안식일입니다. 본문은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한 곳에 모였다는 구절로 시작됩니다.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무덤에 갔다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습니다. 마리아가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전했지만 제자들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고, 예상하지도 못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사면초가에 빠져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될 것이라고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을 추종하는 자신들이 앞으로 어떤 어려움을 당하리라는 것도 불 보듯 하였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주변으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순교를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제자들은 앞으로 어떻게 난관을 뚫고 나갈지 막막했습니다. 이들의 심정을 성경은‘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닫았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음성을 들려 주셨습니다. 부활의 주께서 이르신 말씀은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평강이 있으라 주후 3세기 중반 로마황제 발레리안이 기독교인들을 잡아다가 고문하고 죽일 때, 그 일을 수행했던 군인 중 하나가 히폴리투스(Hippolytus)였습니다. 성 로렌스(Lawrence)를 고문하고 처형하는 일을 했는데 그를 고문하다가 놀랐습니다. 고문으로 인해 고통스럽고, 소리를 질러 대다가도 마지막은 항상 평안하게 마무리 하는 것입니다. 몸이 뒤틀리고 살이 찢겨 나갈 때는 영락없이 다른 이들과 같다가도, 고통의 순간이 지나면 금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루 이틀 지나면서 고문하는 자신이 오히려 마음이 불편하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 날은 고문 받는 로렌스와 함께 하시는 예수를 보고 놀랐습니다. 그 후 히폴리투스도 예수를 영접하게 됩니다. 히폴리투스 역시 발레리안의 선고를 받아 사지가 발에 묶인 채로 찢겨 순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다른 것이 있다면, 바로 평강입니다. 평강의 비밀은 평안 자체이신 예수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평강을 잃고, 좌절하며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는 나약한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본문 19절입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여기의‘평강’은‘샬롬’이 아닌 ‘에이레네’입니다. ‘두려움이 없고, 마음의 동요가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줄 수 있는 평안입니다.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고 담대하게 세상을 이기는 힘입니다. 제자들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자체가 두려움이며, 예수를 죽인 종교지도자들과 로마 권력이 두려움의 실체였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에 빠져있는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시며 두려움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온갖 모욕과 저주를 받으면서도 누리셨던 평강, 배신 속에서도 누리셨던 그 평강, 외로움 가운데서도 누리셨던 그 평강 자체를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그 평강을 이루셨습니다. 그러기에, 부활의 주를 모시면 이미 평강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려워도 부활의 예수와 함께 하는 평강을 누려야 합니다. 참된 평강이신 예수를 붙들고 일어나야 합니다. 둘째로 기쁨이 있으라 순교자 주기철(朱基徹) 목사의 일화입니다. 주 목사가 여러 해 동안 평양감옥에 갇혀있을 때 공산주의자와 같이 지냈습니다. 일부러 함께 지내라고 한 것입니다. 그는 모스크바대학을 나온 철저한 공산주의자였습니다. 어느 날 공산주의자가 주목사에게 “내가 공산주의자가 되기 전에 당신을 만났더라면 예수쟁이가 되었을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공산주의자로서 이 땅에 평등을 이루고, 이 땅에 자유를 이루고, 모든 사람들이 잘살게 되는 사회를 만들고자 이렇게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놀란 것이 있습니다. 나는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납니다. 그런데 예수쟁이들은 죽음 앞에서도 기쁨이 가득하여 하나님 앞에 간다면서 죽더군요. 그 모습을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만 부러울 뿐입니다.” 예수의 부활이 기쁘고 감격이 되는 것은 바로 그 안에 우리의 부활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영원한 부활을 기다릴 수 있는 믿음 안에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은 믿을 수 없는 기쁨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 20절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여기의 ‘기뻐하다’는 말은 ‘두려워하다’의 반대되는 감정의 표현입니다. 두려움이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변화의 원인은 문 밖의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변화는 문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두려움이 기쁨으로 변하게 된 이유는 환경의 변화 때문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었던 예수를 현실에서 만났기에 기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활 경험은 바로 그것입니다. 부활의 믿음이 생기니 마음을 덮고 있던 슬픔의 그림자가 걷히고 기쁨이 솟아났습니다. 예수의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본 제자들이 기뻐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상처들이 오히려 승리의 표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악한 세력으로 인하여 생긴 인간적 상처가 있다면 부활의 믿음으로 극복하며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헛된 기쁨, 근거 없는 기쁨, 언제 빼앗길지 모르는 세속적 기쁨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께서 주시는 빼앗기지 않는 영원한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성령을 받으라 18세기 덴마크는 영국과 독일과의 두 차례의 전쟁으로 척박하고 협소한 농토, 나무 한그루 자라지 못하는 광활한 황무지만 남겨졌습니다. 희망을 잃은 국민들은 퇴폐적인 향락과 도박, 싸움질을 일삼고, 정신적으로 타락하며 병이 들었습니다. 당시 구룬트비(Nikolai Grundtvig)목사는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목사고시를 치렀습니다. ‘덴마크 교회 지도자들이여 회개하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는데 시험관들이 건방지다는 이유로 작은 섬으로 발령을 내었습니다. 구룬트비는 교회를 개혁하고 나라를 구하겠다고 나섰지만 결국 신경쇠약에 걸려 잠을 못자고 헛소리까지 하며 폐인 직전까지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구룬투비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기도하는 그에게 성령의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자복하며 눈물로 부르짖을 때 부활의 주님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천국의 존재를 확신하면서 이 땅이 아닌 천국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신경쇠약과 불면증을 이기고 용기 있는 사람으로 바뀐 구룬트비를 통해 덴마크에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나라사랑’을 국민들에게 외쳤습니다. 청년들이 변하였습니다. 사회가 변하였습니다. 그 결과 덴마크는 선진국으로 올라 설 수 있었습니다. 덴마크 국민들은 구룬트비 목사를 국부로 생각하여 곳곳에 그룬트비의 동상을 세웠습니다. 성령의 바람은 살리는 역사가 있습니다. 국가도 살리고 개인도 살립니다. 부활의 주께서 주시는 성령을 받아 우리도 살아나야 합니다. 본문 22절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여기의‘받으라’는 ‘라베테’인데 ‘영접하라’는 뜻입니다. 즉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능력을 받거나 도구적 수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서의 성령을 실존 속에 모신다는 의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하심은 생명 회복의 역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당시 제자들은 영적으로 죽어있는 상태였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목격했고 예수께서 함께 하시지 않자 의기소침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말미암아 두려움에 떨며 문을 잠그고 낙심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한 제자들을 향해 예수께서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을 가리키는 단어는 ‘루아흐’와 ‘프뉴마’인데 하나는 바람이고, 다른 하나는 영입니다. 루아흐와 프뉴마는 생명의 영 즉 살림의 영입니다. 성령을 받으라는 말은 생명의 영에 사로잡히라는 뜻입니다. 두려움 가운데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 하심은 성령만이 고난과 핍박 가운데 살아가는 그들 속에 내재하여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선교사 리빙스톤(David Livingstone)이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일입니다. 그레스코 대학이 수여하는 명예 박사학위를 받으려고 나타난 리빙스턴은 몹시 쇠약해 보였습니다. 심한 열병으로 20번이나 쓰러졌었습니다. 리빙스톤이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간다고 말하자 사람들은 귀를 의심했습니다. 고생과 죽음의 땅 아프리카로 리빙스턴이 돌아가리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리빙스톤의 연설은 이렇게 맺어졌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 살아계신 주님이 길동무 되어주시어 원시림과 광야를 함께 걸어가 주실 것입니다.” 리빙스톤이 극심한 고생을 택하고 죽음의 땅 아프리카로 돌아가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고난과 역경,절망 중에도 끝 날까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문을 닫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혹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는 조그마한 것에도 두려워하며 어두움 속에서 절망합니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부활의 예수께서 오셔야 합니다. 우리 삶의 한복판에 서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 앞에서 사명을 확인해야 합니다. 더 이상 문을 닫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주께서 보내시는 현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부활의 주께서 주시는 숨을 받아 부활의 영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성도는 모름지기 두려움의 사람이 아니라 부활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부활절의 예수로만 아니라 살아계신 부활의 주를 만나야 합니다. 우리를 향해 부활의 주께서 이르시는 음성은 삶을 역전시키는 동력이 됩니다. 부디 부활의 주께서 주시는 평강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주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부활의 주께서 주시는 성령을 받아 부활의 주를 담대히 전하는 삶을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