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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에 올라 눅 22:39-46

1913년 프랑스 작가 장 지오노는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 한 낯선 곳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 지역은 척박한 땅, 변변한 나무도 없는 황무지였습니다. 날이 어두워져 유숙할 곳을 찾았으나 그런 곳에 민가가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 때 어두움 속에서 한 사나이가 나타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엘제아르 부피에로, 홀로 양을 치며 살아가는 50대의 중년 남자였습니다. 그는 장 지오노를 집으로 안내하고 따뜻한 스프를 끓여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자루에서 뭔가를 꺼내 식탁에 쏟아놓고는 실한 것과 상한 것을 골라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도토리였습니다. 정성스럽게 알찬 도토리 100개를 골라낸 다음, 다시 자루에 담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아침을 차려준 후, 아무 말 없이 그 도토리 자루를 들고 산등성이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는 정성스럽게 그 도토리를 한 알 한 알 심어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와 함께 있는 동안 부피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몇 년 후, 1차 대전이 일어났고, 온 유럽에는 무서운 파괴와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소용돌이가 몰아쳤습니다. 젊은 장 지오노도 전쟁에 참가하였습니다.

몇 년 후 전쟁이 끝나고, 장 지오노는 기억을 더듬어 그 곳을 다시 찾았습니다. 부피에가 거기에 여전히 있을까?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여전히 거기에 있었고, 여전히 하루에 100개의 도토리를 심었고, 어느덧 그 주위는 푸른 숲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습니다. 매년 장 지오노는 그곳을 찾았고 말없이 나무를 심는 부피에를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그로부터 22년이 지난 1935년, 한 산림 감독관이 처음 보는 울창한 숲을 발견하고 당국에 보고하였습니다. 의회는 그 숲으로 조사단을 파견하였습니다. 국회의원들, 산림전문가들, 고위 관료들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이 엄청난 숲은 자연이 준 선물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는 사람”이라는 짧은 책의 내용으로, 장 지오노가 엘제아르 부피에를 만난 후, 20년 동안에 걸쳐 다듬고 또 다듬어 완성하였습니다.

원래 엘제아르 부피에는 사랑하는 아내와 외아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죽고 뒤이어 아내마저 죽었습니다. 그 후, 부피에는 사람들이 전혀 살고 있지 않는 이곳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슬픔에서 깨어난 그는 어느 날, 나무가 없어서 이곳의 땅이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달리 해야 할 중요한 일도 없으므로 이런 상태를 바꾸어 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매일 100개의 도토리를 심었습니다.

그렇게 10년, 20년이 지나자, 황무지는 점차 울창한 숲으로 변화됐습니다. 말라붙었던 시내에는 물이 흐르기 시작했고, 떠났던 사람들은 다시 돌아와 마을을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그 동안 엘제아르가 해 온 일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 숲이 스스로 자라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죽을 때까지 나무를 심어 황무지를 희망의 땅으로 바꾸어 놓은 엘제아르 부피에는 89세를 일기로 행복하게 숨을 거두었습니다.

장 지오노의 고향 남 프로방스의 소도시 마노스코의 입구에는 이렇게 쓴 팻말이 걸려 있습니다.

“이곳은 프로방스의 위대한 작가 지오노가 태어나고 살고 잠든 곳이니, 조용히 해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정말 위대한 사람은 홀로 말없이 나무만 심었던 양치기 엘제아르 부피에입니다. 오직 한 가지 일에, 생명의 일에 전념했던 그 앞에서 우리는 조용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입을 다물고 조용해져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십니다.

엘제아르 부피에가 나무를 심기 위해 이 땅에 왔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셨던, 그 일은 모두 모두 십자가에 달리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죽을 날이 멀지 않았는데 죽음은 준비하지 않고 살길만 찾습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죽을 인간은 살 생각만 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언제나 죽을 생각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죽으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죽으러 오셨는가?

죽는다는 것은 자신을 내어준다는 것입니다.

살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관계를 맺습니다. 그 관계가 얼마 후에 벽에 부딪힙니다. 그 벽은 더 이상 내 자신을 내어주지 않겠다는 곳입니다. 나는 더 이상 죽지 않겠다는 곳입니다. 어떤 사람은 만나서 몇 마디만 해도 곧 그 벽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지위가 높고 가진 것이 많아도, 그럴 듯한 언변으로 수많은 말을 늘어놓아도 사람들은 그 벽 앞에서 돌아섭니다. 그리고 그는 그 벽에 갇혀 외롭게 죽어갑니다. 그리고 곧 잊혀집니다.

홀로 살았으나 엘제아르 부피에가 외롭지 않았던 이유, 살수록 행복이 더해졌던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자신을 내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 이 땅에 오셨으나 여전히 그 분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변화되고 살아나는 이유는 예수님은 죽으러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 세상이 아직도 살만한 이유, 죽지 않겠다고 발버둥쳤던 사람들이 죽었고, 여전히 자신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언젠가는 죽을 것이기 때문이며, 그래도 예수님처럼 자신을 내어주겠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죽어야 교인이 살고, 교인들이 죽어야 교회가 살고, 교회가 죽어야 세상이 하나님께서 바라는 곳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여기에 모인 이유는 죽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죽을 때 비로소 나를 내어줄 수 있고, 나를 내어줄 때, 가족들이 살고, 사람들이 살고, 그 때 진정으로 내가 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 다른 말로 어떻게 하면 제대로 살 것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최후의 만찬을 마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끌고 감람산 위, 겟세마네로 올라가셨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전합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쫓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쫓았더니”감람산 겟세마네로 가신 이유를 습관을 쫓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예수님께 기도는 습관이었습니다. 늘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여느 때와는 달랐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당시 심정을 이렇게 전합니다. “제자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예수님께서 고민하시고 슬퍼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기도부탁까지 하셨습니다. 바로 코앞으로 다가온 십자가 고난과 죽음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두려워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육신을 입은 사람이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께 십자가가 아무 고통을 주지 않는다면 그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에게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식은 죽 먹기라면 우리가 지은 죄 값을 치르는 것 이 아닙니다. 인간이 지은 죄 값을 치르기 위해서는, 인간이 지은 모든 죄에서 나오는 고통과 두려움이 십자가에 담겨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께서 모두 감당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두려움과 고뇌는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 그 곳은 올리브 나무가 심겨진 아름다운 동산이 아닙니다. 겟세마네는 “기름 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올리브 열매를 모아 기름틀에 넣고 기름을 짜는 곳입니다. 기름을 얻기 위해서는 열매가 커다란 연자 맷돌에 산산이 부서지고 철저히 으깨지고 갈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기름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신 것은 바로 자신의 몸을 산산이 부서뜨려 으깨기 위해서였습니다.

성경은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이렇게 전합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더라.”(누가복음 22:44) 말이 최선을 다하여 뛰면 그 땀이 핏빛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온몸에 피가 맺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그렇게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돕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천군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자신의 몸을 부수고 으깨기 위해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는 예수님과, 천군 천사를 보내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 알게 됩니다.

사람들은, 천군 천사를 보내어 나를 반대하고 괴롭히는 사람들을 제거하고 나를 왕으로 세우면 된다고, 나를 부자로 만들고, 내 병을 고쳐주고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살게 하면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생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다릅니다. “네 몸을 으깨고 갈아서 기름을 내어라. 십자가에서 네 몸을 찢고 부숴 피와 물을 내어라. 그래야 네가 산단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에게 원하는 것이고, 우리들에게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은 모르고 있지만 예수님은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 고통과 두려움을 감당할 힘을 얻기를 원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온 몸으로 기름을 짜라하셨을까요? 그것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과 능력과 돈과 명예와 권력과 건강이 아닙니다. 생명의 기름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의 메마른 심령에 생명의 불,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을 켜기 위해서입니다. 그 외에는 구원의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천군 천사를 보내 로마와 권세자들을 쳐부수는 대신, 모든 아픈 사람을 낫게 하는 대신, 모든 가난한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대신, 자신의 아들 예수님으로 하여금 생명의 기름을 짜내는 일을 돕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홀로 그렇게 몸을 으깨고 부수는 동안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제자들은 잠에 골아 떨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사람들의 심령에 불을 밝혀야 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불을 완전히 끄기 위하여 마지막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생명의 빛을 밝힐 책임이 있는 가롯 유다는 그들의 하수가 되어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일에 골몰하고 있고,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원망과 술에 취해 있으며, 큰 소리와 향락에 빠져 있으며, 근심과 걱정에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뭘 하고 있었을까?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촛대니”(계11:4)

우리가 누구인지 알려주시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촛대와 감람나무로 세우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불을 밝히고 있는가?”

요번 수련회의 주제는 “거룩한 자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거룩의 뜻은 “빛나다” “따뜻하게 하다” “새롭게 하다”입니다. 나를 만나면 상대방이 빛나가게 되는가, 따뜻하게 되는가, 새롭게 되는가를 스스로 점검해야 합니다.

“저 양반 또 저 소리” 나를 만나면 사람들이 입을 다물어 버리고 멀리하고 짜증나게 한다면, 나는 불을 꺼버리는 사람입니다.

촛대는 불을 밝히는 도구입니다. 불을 밝히기 위해서는 감람나무의 열매, 즉 올리브기름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하면 내 안에서 불을 밝히는 기름이 나올까?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굵은 베옷을 입고” 겸손하라는 말씀입니다.

교만은 내가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뜻대로 세상이고 교회가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교만은 나를 별 볼 일 없는 내안에 가둬버립니다. 그래서 안됩니다.

겸손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분의 생각과 능력과 영감에 나를 던지는 것입니다. 몽당연필이라도 하나님께 잡힐 때 그 어떤 천재도 그릴 수 없는 그림을 그려냅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분명한 엄청난 약속이 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계 11:5)

그저 우리의 할 일은 하나님의 사명을 묵묵히 감당하는 일입니다. 한 그루의 감람나무로서 한 알의 올리브 열매로서 내 몸에서 기름을 내어 촛대가 활활 타도록 하는 일입니다.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십니다. 비판에 대한 대응도, 걱정도 근심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그 예언을 하는 동안 물을 변하여 피가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땅을 치리로다.”

감람나무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을 움직이는 능력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평생을 묵묵히 나무만 심어도 마른 시내에 물이 흐르기 시작하며, 새들이 깃들여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떠났던 사람들도 숲으로 돌아와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내 가정과 내 사업과 우리 교회가 생명의 기름이 흘러 넘치는 겟세마네 동산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