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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2:31-38족하다


“저 도둑질 한 적이 있어요.” “괜찮아.”
“저 술 먹고 담배 폈어요.” “괜찮아.”
“저 친구를 왕따 시키고 괴롭힌 적 있어요.” “괜찮아.”
“저 본드 했어요.” “괜찮아.”
“저 폭주족이었어요.” “괜찮아.”
“저 죽으려고 손목 그은 적이 있어요.” “괜찮아.”
“저 학교에도 안 가고 집에만 쳐 박혀 있었어요.” “괜찮아.”
“전 원조교제 한 적이 있어요.” “괜찮아. 얘들아. 어제까지의 일들은 전부 괜찮단다.”
“죽어 버리고 싶어요. 죽어 버리고 싶어요.”
“하지만 얘들아. 그것만은 절대 안 돼. 오늘부터 나랑 같이 생각을 해보자.”

이 말은 미즈타니씨가 한 말입니다.
밤거리의 아이들과 폭력조직은 그를 “밤의 선생님”이라 부릅니다.
1956년 요코하마에서 태어나 일본 상지대학 철학과를 졸업한 미즈타니 씨는
현재 요코하마의 한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미즈타니 선생님은 밤거리로 나가 비행청소년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지 12년입니다.
그동안 마약 상인에게 옆구리를 찔리고 조직폭력배에게 손가락이 잘렸습니다.
그래도 다시 밤거리로 나섭니다.
미즈타니 선생님과 이야기를 시작하여 새 삶을 되찾은 아이들은 5,000여명입니다.

한 아이가 이런 말을 합니다.
“미즈타니 선생님이 우리들한테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뭔지 아세요? “괜찮다.”예요.
그 “괜찮다.”는 말로 우리들은 구원받았어요.”

밤거리 12 년간의 이야기를 “얘들아, 너희가 나쁜 게 아니야.”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였습니다.
그 책에서 미즈타니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학생을 절대로 야단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꽃을 피우는 씨앗'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꽃씨라도 심는 사람이 제대로 심고
시간을 들여서 정성스레 가꾸면 반드시 꽃을 피웁니다.
부모와 교사, 어른들과 사회 전체가
아이들을 아끼고 사랑하며 정성껏 돌본다면 아이들은 반드시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만약 꽃을 피우지 못하고 그대로 시들어 버리는 아이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 어른들의 잘못입니다.
아이들은 그 피해자입니다.
나는 그런 피해자인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오랫동안 밤거리에서 살았습니다.
그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저 그들 옆에 있고 싶었습니다.
밤거리의 아이들은 아무리 강한 척 허세를 부려도 모두 연약한 아이들일 뿐입니다.
그들은 때로 슬픈 눈빛을 보입니다.
그들도 밝은 세계로 나가고 싶고, 부모와 선생님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밝은 세계는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상처받은 아이들은 밤거리로 나갑니다.
그들은 사랑에 굶주려 있고 그래서 나를 필요로 합니다.
12년 간 밤의 세계에서 수천 명의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은 모두 슬펐습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모두가 소중한 만남이었습니다.
그들과의 만남을 한 번도 후회해본 적 없습니다.”

38절에 이런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희가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이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족하다.” 이 말씀은 검 두 자루면 충분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칼을 제일 싫어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족하다.”말씀은, 미즈타니 선생님이 하는 말 “괜찮다.”는 의미와 같은 것입니다.
칼로 자신을 지키고 남을 해하려는 삶을 살았어도 괜찮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최후의 만찬을 마쳤습니다.
오늘밤이면 예수님은 체포되어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그 무서운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그들의 하는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시고 듣고 계십니다.
마치 어린 자녀를 혼자 남겨 두고 떠나는 부모의 심정일 것입니다.

그런데 철없는 제자들은 예수님 앞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성경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또 저희 사이에 그 중에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눅 22:24)
그 다툼이 심해지자 예수님께서 다툼 중에 끼어 드셨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눅 22:26)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세상 사람들은 서로 힘자랑을 하며 더 높아지려고 하지만,
세상 사람들 모두 서로 많이 가지려고 서로 싸우지만,
그래 놓고는 모두 백성들을 위하고 이웃을 위함이라고 말하지만,
지금 너희들 역시 그들과 똑같이 더 높아지려고,
더 옳다고 싸우고 있지만,
“괜찮다.”는 말씀입니다.

그저 괜찮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라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까지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무엇을 했던지 예수님께서는 “괜찮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알콜 중독자예요.” “괜찮아.”
“저는 사기꾼입니다.” “괜찮아.”
“저는 지금까지 형편없이 살았습니다.” “괜찮아.”
“저는 살인을 하고 온갖 범죄를 저질렀어요.” “괜찮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베드로는 펄쩍 뛰며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야단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래도 괜찮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정말 괜찮은 것일까요?

실제로 그랬습니다.
일곱 귀신 들렸던 거리의 여자 막달라 마리아,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했던 삭개오,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러 왔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네 죄가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괜찮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이 땅에서도 잘 살고, 천국에 간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말씀을 비웃었습니다.
수천 개의 율법 중, 하나라도 어기면 절대로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바리새인들은
그런 예수님을 하나님을 모독하였다고, 불경하다고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래도 괜찮은 이유를 조용히 가르쳐 주십니다.

그 첫 번째 이유가 무엇인지 28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제자들은 삼 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예수님으로부터 배웠습니다.
지금은 여전히 형편이 없습니다.
전혀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작은 어려움만 생겨도 우왕좌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언젠가는 그 모든 가르침이 생각나고,
그 가르침대로 살게 될 것을 아셨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와도, 생명의 위협을 받아도 절대로 물러서질 않을 것과
예수님의 방법으로, 예수님처럼, 세상을 다스릴 것을 아셨습니다.

술 끊고 담배 끊고 교회에 나오겠다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만납니다.
지은 죄가 많아 교회에 나오질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어떤 잘못을 저질렀어도 괜찮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먼저입니다.
설교가 들려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면 그 사람은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수십 년 동안 아무런 성장이 없어도, 그 꼴이 저 꼴이라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반드시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변화시키는 능력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혼과 영과 골수까지 스며든 죄악을 쪼개고 치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들려오는 말씀에 나를 던지고,
그 말씀에 따라 살기만 하면 됩니다.

두 번째 괜찮은 이유는 31,3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으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키질을 합니다.
곡식들이 하늘 높이 올랐다가 아래로 떨어집니다.
바람이 불어와서 쭉정이를 다 날려보냅니다.

내가 곡식이 되어 키질을 당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정신이 없겠습니까?
아마 죽을 것 같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키질 자체입니다.
매일 매일 어려운 일, 울화통 터지는 일, 난감한 일, 짜증나는 일,
가슴이 덜컹하고 떨어지는 일의 연속입니다.
그 정도는 약과입니다.
삶의 근본을 뒤흔드는 환난이 갑자기 들이닥칩니다.
불치병에 걸리기도 하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그래도 괜찮다고 하십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으니”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친히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탄이 나를 무너뜨리려고 달려들어도,
하나님의 아들이 기도하는데 누가 나를 건드릴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성령도 친히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연약하고 어리석고 사악한 우리가 오늘도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잘 나서가 아닙니다.
운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돈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성령님과 누군가 나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알콜 중독자 남편이 있습니다.
아내는 아이들과 살겠다고 발을 동동 구르며 밤낮 없이 뛰고 있습니다.
낙담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당장 그만 두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습니다.
어느 날 밤, 술에서 깬 남편이 옆방에서 들려오는 아내의 울음소리를 듣습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그것은 한탄의 울음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기도 소리였습니다.
만약 그 울음이 신세한탄이었다면 남편의 짜증만 더했을 것이고,
더욱 술로 숨어들었을 것입니다.
기도는 어떤 어두움도 물리칩니다.
어두움에 빠진 사람을 빛으로 나오게 합니다.

또한 키질을 하면 할수록 알곡만 남습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서 나에게 남아 있는 모든 쓸데없는 것을 날리고 계십니다.
주님은 나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있는 한,
언젠가는 하나님의 향상을 회복하고, 나에게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는 훗날, 교회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한,
그 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사람들을 돌보고 굳게 하는 귀한 일을 감당할 것입니다.

세 번째 괜찮은 이유는 3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나이다.”

예수님의 질문에 우리들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부족한 것이 있더냐?” 대부분 “너무 많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부족한 데도 우리는 여기까지 왔습니다.
누구 덕입니까?
내 노력의 결과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우주의 운행을 멈추기로 하신다면 모든 것이 끝이 납니다.

아브라함 헤셀이 이런 말을 합니다.

“헬라인들은 알기 위해서, 히브리인들은 공경하기 위해서 연구한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써먹기 위해서’ 연구한다.
하나님도 써먹기 위해서 연구한다.
그 결과 하나님은 금송아지가 된다.”

무엇이든 ‘써먹기 위해서’ 연구하는 동안은 언제나 부족합니다.
기독교를 내 소원 충족의 수단으로 사용할 때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반역을 보고 너무나 실망하였습니다.
그런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출 33:19)
이 말씀을 직역하면 “내 모든 선함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리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물질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곧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하나님의 영광, 곧 하나님의 선하심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한 사람은 죽어도 삽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굶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가다 보면
어느새, 병든 것이 회복되고, 무너진 것이 세워지고
몸과 마음과 영혼까지 풍성해진 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괜찮은 이유, 가장 중요한 이유가 3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입니다.
그 어떤 삶을 살았어도 괜찮은 이유는 예수님께서 내 잘못과 죄를 대신 지셨고,
죄 값을 모두 모두 갚아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길, 영생의 길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것입니다.
이제 그 분의 말씀을 믿고 시작하면 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밤거리는 조직폭력배가 장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아이들을 사랑하는 미즈타니 선생님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옆구리를 찔리고 손가락이 잘려도
여전히 길 잃은 청소년들을 만나러 미즈타니 선생님이 밤거리를 나서면,
조폭들도 꼬리를 내리고 슬그머니 어두움으로 숨어버립니다.
절망에서 허우적거리는 아이들은 자신의 마음에서 꿈틀대는 소망을 봅니다.
“나도 저 선생님을 한번 만나볼까?”

세상은 돈이 지배하고 권력이 힘을 쓰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께서 만드셨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영광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온전히 드러났습니다.
그 사랑을 받아들일 때, 주 앞으로 나올 때, 아무리 망가진 인생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 주님을 만나십시오.
그 주님의 말씀 따라 살기로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