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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3:1~26비아돌로로사

누가복음 23:1~26






내일은 내가 십자가를 지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날
내 지은 죄로 고통의 쓴잔을 마시는 날
나의 모든 시간과 계획과 사고와 생명이 다 하는 날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날이 밝기를 오히려 기다리며
애써 태연하려고 다시 한번 나를 달랜다

내일 내가 달려야 했던 그 언덕에 다시 한번 가봐야겠다
예수라는 그가 내 대신 ...
다시금 주어진 내 생명, 그 많은 시간들...

주님, 난 아직도 십자가에 못 박힐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주님이 날 위해 못 박혔던 그 자리에서
두 팔을 벌려봅니다...

한 무명시인이 바라바의 심정을 그린 시입니다.

오늘 본문에 바라바가 누구인지 한 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러라.”(눅 23:19)
바라바는 당시 가장 악명 높은 범죄자로 십자가형이 확정된 인물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아주려하자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을 선동하였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소리칩니다.
“이 사람을 없이 하고 바라라를 우리에게 놓아주소서!”
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빌라도는 예수님 대신 바라바를 석방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에는 죄인을 석방하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십자가형이 확정되고 말았습니다.

바라바가 어땠을까요?

“뭐 석방이라고?”
갑자기, 느닷없이 찾아온 행운에 정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옥문을 나섰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라는 사람 대신에 자신이 석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릅니다.
어떻든 바라바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생명을 얻은 최초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훗날 바라바는 문학과 영화의 소재가 되었고,
스웨덴 작가 P.F.라게르크비스트는 소설 “바라바”로 1951년 노벨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라게르크비스트는 바라바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다가 순교 당하는 것으로 그의 소설을 끝맺고 있습니다.
정말 그랬을 것입니다.
어찌 예수님으로 인하여 살아난 사람이 아무런 변화도 없이 되는 대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치신 후 자고 있는 제자들을 깨우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마 26:46)

피땀을 흘린 기도로 마음을 정리하신 예수님.
앞으로 닥칠 고난과 죽음을 맞이하러 길을 나섰습니다.
그렇게 비아 돌로 로사의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비아 돌로 로사.
‘슬픔의 길’이라는 뜻의 헬라어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가신 고난의 길을 말합니다.
그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는 순간 도망쳐버린 제자들.
끌려가는 예수님을 먼발치에서 쫓아갔던 베드로.
예수님을 희롱하고 때리며 가지고 놀았던 군인들.
밤새도록 예수님을 들볶으며 심문하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날이 새자 예수님을 세워 공청회를 열었던 산헤드린 공회원들.
예수님을 무죄석방하려 했던 빌라도 로마 총독.

왜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을 석방하려했을까요?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로마 식민지였기에 로마 총독에게 재판권과 형 집행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이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종교적인 문제일 뿐, 너무나 골치 아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헤롯왕에게 전가시켜 버렸습니다.

이 사건을 넘겨받은 헤롯왕에 대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눅 23:8)

예수님을 보고 헤롯왕이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뻐한 이유가 딴 데 있었습니다.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헤롯 왕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었는데, 희한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지금 자기 앞에 끌려와 있습니다.
그래서 신기한 구경이나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이것저것 물어보았으나,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흥미를 잃은 헤롯왕은 예수님을 희롱하고는 다시 빌라도 총독에게 보내버렸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상황을 전하고 있습니다.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눅 23:12)

그렇게 다시 빌라도 총독에게 보내진 예수님은 십자가형이 확정되고,
채찍으로 서른아홉 대를 맞으신 후,
살점이 뜯기고 뼈가 드러난 몸으로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러 거리에 나와 있었습니다.

가시다가 예수님은 그 십자가의 무게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넘어지고 또 넘어집니다.
마침내 예수님의 몸은 무거운 십자가 밑에 깔리고 말았습니다.
빨리 일어나라는 로마 군인들의 무자비한 채찍질이 쏟아졌지만
예수님은 도저히 일어서실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가장 가까이 있던 구레네 사람 시몬이 끌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대신 지게 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전합니다.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눅 23:26)

그리고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의 전 과정을 지켜본 로마 백부장은 두려움에 토로합니다.
“이는 과연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 27:54)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고 숨을 거두시기까지,
도망친 제자들로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토로한 백부장에 이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광경을 지켜보았고, 저마다 크고 작은 느낌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각각의 느낌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신 길, 비아 돌로 로사는 예사 길이 아닙니다.
그 사실을 사람들은 전혀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삼십 여 년 전 일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태어난 지 사십 일 째 되는 날,
마리아와 요셉은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의 성전을 찾았습니다.
율법에 따라 정결 예식을 치루기 위해서입니다.
그 때 한 할아버지를 만납니다.
이름은 시므온.
그 분이 아기 예수님을 보자, 마리아에게 청하여 한 번 안아 보기를 원했습니다.
아기를 품에 안자 그 분이 기쁨의 찬양을 하나님께 돌리며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주재(하나님)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 2:29-32)

그 말에 마리아는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놀란 마리아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눅 2:35)

정말 시므온 할아버지의 말이 맞았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을 갈갈이 찢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고난을 보았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었습니다.
제자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빌라도 총독과 헤롯왕, 바라바와 구레네 지방에서 온 시몬,
그리고 백부장과 병사들과 길거리에 늘어서있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었습니다.
또한 우리들의 마음의 생각도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비아돌로로사를 가시는 예수님에 관하여 들으며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마음이 아프십니까?
아니면 2,000년 전 한 사내의 고난일 뿐입니까? 그저 그런 이야기입니까?
그 사건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궁금하십니까?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서 정말 내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아 소망이 보입니까?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그런데 그 마음의 생각들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의 흥함과 패함을 결정하는 표적이 되는 너무나 중요한,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반응을 보인 사람이 구원을 받을까?
나아가서 누가 흥하고 누가 패할까?

예수님의 받으신 고난과 죽음에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까?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토로했던 로마 백부장은 구원을 받았을까?
이에 대한 정확한 답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았던 가롯 유다도 예수님의 고난을 보며 마음이 찢어졌습니다.
가롯 유다 자신도 그럴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은 삼십을 하나님의 성전에 던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그의 마음은 가장 아픈 사람 중 하나였지만 구원과는 멀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마음이 아픈 것이나,
‘과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토로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것일까요?

구레네 시몬이 올바로 반응하는 길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던 사람이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당시에는 그 일을 기록한 사람, 기자와 같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마가복음 15:21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로마서에는 이런 기록도 있습니다.
“주 안에서 택함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내 어머니니라.”(롬 16:13)
사도 바울이 어머니라 부를 정도로 훌륭한 그 여인이 누구일까요?

루포의 아버지가 바로 구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루포의 어머니는 곧 시몬의 아내입니다.
시몬의 아내를 사도 바울이 어머니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이 두 구절에 담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면 어떻게 반응해야 구원을 받는지,
나아가서는 흥하게 되는 길을 알게 됩니다.

구레네는 아프리카 북쪽에 위치한 오늘날의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를 말합니다.
예루살렘까지는 육로로는 2,000킬로 이상, 바닷길로도 1,000킬로 이상 떨어진 머나먼 곳입니다.
그 먼 곳에서 예루살렘까지 오게 된 이유는
시몬이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평생에 한 번은 유월절에 하나님의 성전에 와야 한다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옛날 그 머나먼 길을 가기 위해서는 평생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천신만고 끝에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꿈에 그리던 하나님의 도성에 왔다가 봉변을 당한 것입니다.

십자가는 최고의 저주 자체입니다.
그것을 지라고 했을 때 그의 마음은 얼어붙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참배하러 그 먼 길을 왔는데, 이 무슨 변고인가!
하나님께서 내게 왜 이러시나!’
그러나 서슬 퍼런 로마 군인들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는 법.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십자가를 졌습니다.
마음은 이미 무너졌습니다.
내게 저주의 십자가를 지게하시다니,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신걸까?
신앙마저 흔들렸을 것입니다.
그렇게 정신줄을 놓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데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슬퍼하고, 또 수많은 사람들이 야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죄인이 행하는 일거수 일투족을 보았습니다.
다른 죄인들과는 달랐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이길래 이러는 것일까?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었고,
또 후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 이런 분이셨구나.”
그런데 며칠 후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 분이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그 소문의 진위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초대교회 일원이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고향으로 돌아간 시몬은 온 가족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며 구원자임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온 가족은 가장 충성스러운 교회 일꾼이 되어 사도 바울까지 힘써 도왔습니다.
사도 바울을 도왔다는 것은 트리폴리를 떠나 아예 이스라엘로 이주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선교 사역은 오늘날 이스라엘 북쪽과 터어키와 유럽 지역인데
리비아와는 엄청나게 떨어진 지역입니다.
신앙을 위하여 모든 것을 뒤로 하였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시몬 집안의 주님에 대한 충성이 너무나 고마워
루포와 알렉산더의 어머니, 즉 시몬의 아내를 어머니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훗날 구레네까지 기독교 도시, 축복 받은 도시로 변했습니다.

시몬과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시몬은 예수님께 반응하였습니다.
반면 다른 사람들은 자신에게 반응하였습니다.
예수님께 반응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참혹한 십자가 고난을 봅니다.
어떤 이들은 늘상 보아 오던거라 그러려니 합니다.
어떤 이들은 안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 내 마음이 아픕니다.
어떤 이들은 기득권에 코를 박고 있는 종교지도자들이나 압제자들에게 이를 갈며,
목숨 걸고 이들을 반드시 무너뜨리겠다 다짐을 합니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가롯 유다처럼 너무나 괴로워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아무리 비장해도 그저 내 생각 내 감정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몬은 그가 누구이며, 왜 그런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 알아봅니다.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 분의 가르침을 듣습니다.
그 가르침과 내 생각이 충돌합니다.
내 생각을 버리고, 그 분의 가르침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따라갑니다.
고난과 어려움이 생깁니다.
그러나 그 분의 가르침으로 이겨냅니다.
점점 그 분께 가까워지고 그 분과 하나가 되어 갑니다.

예수님께, 예수님을 향하여 반응한 사람 시몬을 성경은“주 안에서 택함을 입은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주 안에서 택함을 입은” 이것은 우리들이 구해야 하는 최고의 형용사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면 언제 어디서나 생명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그 분의 생명은 곧 사랑입니다.
그 사랑으로 우주만물과 특히 우리 사람들을 창조하시고 그 사랑으로 운행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이 떨어지는 곳에서 최고의 생명이 피어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오늘도, 이 시간에도 살아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우연이라도 상관없습니다.
그 생명의 피를 받은 사람은 살아납니다.
변화되고, 복의 근원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