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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 신우인 목사마가복음 15:22~22, 누가복음 23:34~37, 요한복음 19:28~30

뭘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 신우인 목사



마가복음 15:22~22, 누가복음 23:34~37, 요한복음 19:28~30






탈진한 예수님은 십자가에 눕혀지고
길이가 이십 센티미터가 넘는 커다란 대못이 양 손목에 박혔습니다.
예수님의 발목이 포개져 복숭아 뼈에 그보다 더 큰 못이 박혔습니다.
그렇게 못을 박고 십자가가 세워지자 예수님의 몸이 땅 쪽으로 쏠렸습니다.
그러자 못 박힌 손목과 발목에서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몰려왔습니다.
목을 지탱할 힘이 없어지고 목이 숙여졌습니다.
그러자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손을 잡아 끌어올려 목을 바로 세우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박힌 못은 손목의 힘줄을 끊을 듯이 죄어왔습니다.

십자가형은 인간이 고안해낸 가장 잔혹한 처형방법입니다.
현대의 사형집행은 어떻게 하면 고통을 최소할까에 초점을 맞추는데 반해,
십자가형은 어떻게 하면 고통을 극대화할까에 초점을 맞춥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십자가형은 인간의 극대화된 사악함마저도 받아들이시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사악함도 용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극악한 십자가형에 딱 한번 관용이 베풀어집니다.
몰약을 탄 신포도주입니다.
몰약은 마취성분이 있어서 그것을 마시면 약간이라도 고통을 줄일 수 있습니다.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잡히시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시고,
또 서른아홉 번의 채찍을 맞으시고, 많은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오셨습니다.
지금은 몇 시쯤 되었을까요?
아직 정오는 안 되었을 것입니다.
체포되신 후 열 서너 시간이 지났을까요?
아무 일 하지 않아도 열 서너 시간 동안 물을 마시지 아니하면 목이 타들어갑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목이 마르셨을까요?

마가복음에는 이런 구절이 적혀 있습니다.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막 15:23)

마태는 마가와는 다르게 적어 놓았습니다.
“쓸개를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마 27:34)

“왜 서로 이렇게 달라. 엉터리 아니야?”,
“쓸개를 탄 거야, 몰약을 탄거야?”,
“신포도주야, 그냥 포도주야?”,
“맛은 보신 거잖아. 그렇다면 맛이 없어 거절한 거잖아?”라고 묻는다면,
자신의 마를대로 마른 심정을 드러낼 뿐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십자가형을 받았던 모든 죄수들은 그 신포도주를 허겁지겁 마셨을 것입니다.
더 달라고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너무나 목이 마르셨습니다.
그런데 포도주가 주어집니다.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그러나 침마저 생기지 않았습니다.
침조차 말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입술을 대셨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두셨습니다.
“아니다. 이것마저 견뎌야 한다.”고 결심하셨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혹시 신포도주를 마시지 못한 십자가 처형자가 있을까,
그가 당했을 고통보다 조금 더 내려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한 방울의 배려조차도 참아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린 모습을 보면서 대제사장들과 백성들이 소리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 27:40)
그 소리에는 자신들의 최대 골칫거리를 해결한 의기양양함이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립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공생애 가장 처음에,
예수님께서 사십 일을 금식하시고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으실 때 듣던 소리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을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그 당시 사탄은 예수님께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해보라고 유혹하였습니다.
그 모든 유혹을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물리치셨고,
사탄은 예수님을 시험하는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의 공생애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눅 4:13)

사탄이 아주 떠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탄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사람들을 미혹하여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도록 부추겼습니다.
여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걸려들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예수님을 반대하던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가롯 유다등 예수님의 최측근들까지 걸려들었습니다.
사탄은 종교지도자들과 사람들을 동원하여 마지막으로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조롱이 아닙니다.
엄청난 일입니다.

사탄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 구원의 길이 열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해야 했습니다.

사탄의 초조감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더욱 사람들을 독려하였습니다.
고통은 더욱 극심해지고, 사람들의 비웃음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성전을 부수고 사흘 만에 짓는 자여. 너를 구원해 보라."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탄의 조종을 받는 줄도 모르고 신이 나서 떠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입에서는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34)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이 모든 고통을 견디고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우리들이 살 수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말씀 하나로 사탄은 영원히 패배한 것이며,
우리들에게 구원의 길, 영생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하신 일은 신 포도주를 마신 일이었습니다.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한 19:28-30)

예수님께서 목마르다고 말씀하신 때가 모든 일을 이루신 줄 아셨을 때였습니다.

“네에? 다 이루었다고요? 여전히 불의와 부조리가 판을 치고 있는데요!
나는 이렇게 아프고 억울하고 슬프고 가난한 대요!
둘러보세요. 얼마나 문제가 많아요! 그런데 다 이루었다고요?”

그래도 예수님의 대답은 “다 이루었다”입니다.

“다 이루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내리는 그 은혜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은,
인간의 사악함은 물론 그 어떤 사람의 슬픔과 고통과 소외와 절망을 다 덮고도 남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사악한 사람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담으신 관용을 진심으로 안다면
자신의 악함을 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조롱하고 못을 박았던 사람들마저도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억울한 사람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담으신 용서를 안다면
그 억울함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절망한 사람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담으신 소망을 안다면
그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사신 곳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보존하는 곳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극대화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은혜를 흘러넘치게 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행하는 모든 일들은 십자가의 은혜를 재생산하는 것이야 합니다.
은혜를 재생산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기도와 설교도, 찬양도, 봉사도 헌금도,
모두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재생산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아직 하나님의 은혜를 모른다면 봉사를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모른 상태에서의 봉사는 오히려 화를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네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것은 모든 것을 덮고도 남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본 사람은 구원에 이릅니다.

이미 예전보다는 불의와 부조리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많이 해결되었고,
예전에 비하여 너무나 많은 것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평과 억울함과 절망은 오히려 더 커졌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그 사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 사랑을 알고 받았습니다.
그 사랑 앞에서 불평과 원망과 내 주장이 침묵합니다.
그 사랑이 너무 고맙습니다.
나는 그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며 내게 주어진 일을 해나갑니다.
그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앞에서 생색도 억울함도 비장함도 사라집니다.

“나의 나 됨은 하나님의 은혜라.”
그 마음을 가진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재생산되어 흐르기 시작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변의 사람이 그 사랑에 감염됩니다.
그 사랑에 감염된 사람들이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또 재생산됩니다.
몸과 마음과 영혼이 가난했던 사람들이 그 사랑에 녹아듭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불의와 죄악들은 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저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그저 내 작은 촛불을 켤 뿐입니다.
그 불 역시 예수님의 빛으로 켜진 것입니다.
다만 바람이 있다면 그 작은 불들이 더 많이 켜지는 일입니다.
그 역시 하나님께서 하시리라 믿습니다.

우리들이 그 사랑을 받고 그 은혜를 깨닫기 위해,
그래서 내 마음의 중심에 밝은 빛 하나를 켜기 위해 여기 모여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우리들도 그 사랑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플라시도 도밍고와 호세 카레라스는 세계 2대 테너입니다.
둘은 라이벌이면서 앙숙이었습니다.
도밍고는 스페인의 마드리드, 카레라스는 카탈로니아 출신인데,
두 지방은 대대로 앙숙이며,
카탈로니아는 마드리드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투쟁 중이라,
둘은 절대로 같은 무대에 서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1987년 카레라스가 백혈병에 걸렸습니다.
모든 공연을 중단하고 치료에 전념하느라 막대한 치료비로 재산이 바닥나고 말았습니다.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절망에 빠졌을 때, 너무나 소망스런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마드리드에 허모사 재단이 백혈병 전문 병원을 세웠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카레라스는 그 병원에서 무료로 치료를 받고
극적으로 건강을 회복하였고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었습니다.

카레라스가 허모사 재단에 보답하기 위해 회원으로 등록하다가 놀라운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재단 설립자가 바로 플라시도 도밍고였던 것입니다.
도밍고는 카레라스의 병을 치료해주기 위해 그 병원을 설립하였고,
카레라스의 자존심을 위하여 자신의 이름을 숨긴 것입니다.

카레라스는 도밍고의 사랑과 깊은 배려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카레라스는 도밍고의 공연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관중들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감사하였습니다.
도밍고는 얼른 카레라스를 일으키고 힘껏 안았습니다.
관중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습니다.

훗날 도밍고는, 왜 도와주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목소리를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난 너를 결코 잃고 싶지 않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