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신우인목사

좋지 않은 것 창세기 2:18-25



좋지 않은 것
창세기 2:18-25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모든 것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2장에서 우리는 좋지 않은 것을 발견합니다. 무엇이며 왜 좋지 않았을까요?
 
“좋지 아니하니”
 
18절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셨습니다.
내가 혼자 사는 것이 편해도 하나님께서 좋지 않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좋은가, 좋지 않은가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1장에서 7번 “좋았더라”고 하실 때 그 기준 역시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떤지가 중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씀하시고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해결하시기 위해 돕는 배필을 지어주셨습니다.
 
혼자 사는 것
 
혼자 사는 것이 왜 좋지 않을까요?
어쩔 수 없이 혼자 사는 분들이 경험해서 알지요. 외롭습니다. 그로 인해 병들 수 있고 인생이 고달픕니다. 그래서 좋지 않습니다. 사람을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혼자를 고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적인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혼자 사는 것은 하나의 교만입니다. 내 힘으로 다 할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나의 불완전함과 약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누군가를 돕는 것은 나도 도움 받아야 할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혼자 사는 것을 즐기고 익숙해지면 이기적인 삶으로 발전합니다. 남을 배려할 형편에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있으면 귀찮고 번거롭게 여기는 이기적인 삶이 익숙해집니다.
통계청에 의하면 혼자 사는 사람이 전체 가구의 25.3%로 400만 가구를 넘었습니다. 여성 1인 가구도 꾸준히 늘어 1995년 93만여 가구이던 것이 2010년 221만8000가구로 늘었습니다.
1-2인 가구의 증가 속도도 매우 높아 2010년에는 835만5천 가구(전체 48.1%)이던 것이 2035년에는 1,520만7천 가구로 전체의 78.3%가 될 전망입니다.
혼자 사는 사람들의 천국이라는 일본은 혼자 살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매년 3만 2천명 이상이 가족도 없이 외로운 죽음을 맞는다는 ‘고독사’ 문제가 일본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혼자 사는 것이 이 시대의 트렌드입니다.
이 세상의 트렌드 중에는 하나님께서 좋아하시지 않는 것들이 많습니다.
전체주의는 위험하다는 것을 역사 속에서 임상적으로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개인주의의 확대 역시 위험합니다. 옆집에서 누가 죽어도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를 강조하던 따뜻한 문화를 배경으로 하던 우리 사회가 급격하게 개인주의로 변하면서 자살률 세계 1위가 되고 말았습니다. 20대, 30대에 이어 10대들의 사망원인 1위도 자살입니다. 우리 사회가 너무 외롭습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최고의 복은 “함께” 입니다.
임마누엘이 최고의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해주시는 것은 복입니다. 더 나아가 임마누엘에서도 중요한 부분이 “우리”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우리가 되면 하나님께서 거기 함께 하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혼자가 아니고 함께 할 때 행복한 것입니다.
혼자 다 먹고 혼자만 차지하고 혼자만 누리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진수성찬 차려 놓고 혼자만 먹는다면 밥맛은 모래 씹는 기분일 것입니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식탁에도 함께 앉아 먹는 사람이 있는 것이 보기 좋습니다. 밥맛이 좋아집니다.
큰집에 혼자 사는 것이 행복할까요?
작은 집에서 복잡하게 살아도 웃음이 있는 가정이 행복할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혼자 모든 것을 다하고 주인인양 하는 것 역시 하나님이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목사 혼자가 아니고 함께 하는 많은 성도가 있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누군가 없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자리잡은 교회는 비정상적입니다.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교회는 위험합니다. 함께 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보기 좋게 함께 하는 길
 
함께 있는 것만으로 좋은 것은 아닙니다. 함께 하는 것이 복이 되게 하는 원리가 나옵니다.
 
우선 “돕는 배필”이어야 합니다.
18, 20절 혼자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돕는 사람을 주셨습니다.
부부의 경우 돕는 배필입니다. 이웃의 경우 서로 돕는 관계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서로 도와 격려하며 아름다운 교회 생활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전도서에서 둘이 하나보다 좋은 이유를 설명합니다.
전 4:10-11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도와주면서 함께 하면 아름다운 동행입니다. 도와줄 필요도 없고 도움 받을 필요도 없다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또 하나는 함께 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23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서로를 즐거워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존중해 주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그러나 무시하고 힘으로 내리누르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은 함께 하는 시간만큼 힘들고 괴로운 일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내가 가르치던 제자가 성인이 되었을 때도 그런 존중이 필요합니다. 아들 같고 딸 같은 성도들을 향해 매주 존중해주는 느낌을 받게 하십시오. 자녀들에게 부모가 존중한다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이 커서 부모를 존중해 줄 것입니다.
 
한 몸 같은 존재여야 합니다.
24절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하나됨이 아니라면 혼자 하는 것보다 불편하고 비능률적이고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부부만이 아닙니다. 혼자가 아닌 두 사람의 동행은 늘 서로 동의되는 부분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갈라서는 것입니다(암 3:3). 뜻이 다르고 항상 다툰다면 함께 갈 수 없습니다.
 
서로 당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25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서로 부끄럽고 껄끄러운 일이 없어야 합니다.
아무리 하나 되려고 해도 서로에게 부끄러운 부분이 있으면 힘듭니다. 부끄러운 것이 전혀 없는 삶은 불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해결하고 사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용서받고 용서하며 사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것입니다.
이럴 수 없다면 함께 있는 것이 화입니다.
차라리 떨어져서 함께 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이 말은 함께 살게 되었다면 이렇게 살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혼자인 사람 곁에 찾아가 주어야 합니다.
혼자인 것처럼 삶이 고달픈 사람에게 우리가 친구가 되어주고 돕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정부가 혼자 외롭게 사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좋은 정책을 잘 펴면 복지 국가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아가 공부하게 해주고 과부가 상실감으로 절망하지 않게 하고 외국인 이주 노동자나 그 자녀들이 이 사회에 정착하는데 도움을 주는 그런 나라를 원하십니다.
이미 율법에 나와 있습니다. 고아, 과부 그리고 나그네를 배려하라고.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고아의 아버지, 과부의 재판장이라고 선언하시기도 했습니다(시 68:5).
혼자이지 않기를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외로울 때도 누군가에게 찾아가 함께 해주면 함께 행복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