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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에는 집에 있을건가요? / 신우인 목사누가복음 24:13~35

오늘 밤에는 집에 있을건가요? / 신우인 목사


누가복음 24:13~35





가톨릭 신부인 헨리 나우웬은 하버드 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수많은 강연과 40여 권의 저서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버드 교수직과 명성을 뒤로 한 채,
정신 지체자들의 공동체 라르쉬 데이브레이크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살기로 하였습니다.
그의 나이 54세.

열 명 정도의 정신지체아 함께 살고 있는 그 집에는 ‘존’이라는 중년 남자가 있는데,
그에게는 한 가지 버릇이 있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집이 어디예요?”라고 묻는 버릇입니다.

사람들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이때다 싶으면 “집이 어디예요?”를 물었고,
다시 기회를 엿보다가 또 이때다 싶으면 두 번째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질문은 “오늘 밤에는 집에 있을 건가요?”입니다.
존은 날이면 날마다 사람들에게 그 질문을 해댔습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역시 예외가 될 수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지적 장애자가 해대는 뜻 없는 질문으로 여기고 대충 넘어갔지만,
헨리 나우웬에게는 너무나 통렬한 질문이었습니다.

“집이 어디예요?”, “오늘 밤에는 집에 있을 건가요?”
라는 질문에 담긴 의미를 깨닫기까지는 5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하버드 대학교수요, 신도들이 father라고 부르는 신부 헨리 나우웬에게 정신지체자 존은
자신의 가는 길을 쉼 없이 점검케 하는 영적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고 고백합니다.

내 집은 어디일까?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오늘 밤 그 집에 있을건가?
5년 동안 찾았던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탕자의 귀향”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제자가 등장합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의 이름이 ‘글로바’라는 것만 알 뿐,
그들이 정확히 누구인지 모르고,
또한 그들이 향해 가는 엠마오가 정확히 어디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이 왜 엠마오를 가고 있는가, 그 이유는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처형으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자 귀족이요, 공회 의원이면서도 예수님을 사모했던 아리마대 요셉은
당국에 허락을 얻어 미리 준비해둔 자신의 묘에 예수님의 시신을 모셨습니다.
당시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묘는 동굴이었고,
그 동굴 입구를 커다란 바위로 막았습니다.
또한 당국은 추후 일어날 말썽에 대비하여 병사들로 하여금 그 동굴을 지키게 했습니다.

유월절이 지난 날 새벽,
막달라 마리아와 몇 여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품을 들고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그 큰 바위를 옮길 수 있을까 걱정하며 그 동굴로 갔는데,
그 바위가 치워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어찌 된 일일까?
당황한 그녀들 앞에 찬란한 빛을 발하는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놀란 그녀들이 두려움에 땅에 엎드렸습니다.

그 두 사람이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 일만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눅 24:5-7)

이에 여인들은 급히 돌아가 모여 있던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이 놀라운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몇 사람이 동굴로 달려가 확인하였는데,
정말 예수님의 시신을 감쌌던 세마포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정말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일까?
여자들이 전한 천사의 말이 맞는 것일까?
‘살아계셨을 때 예수님이 정말 그렇게 말씀하시긴 하셨어.’
베드로와 제자들의 머리속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교차했고 그에 대한 여러 말들이 오고갔습니다.

성경은 그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끝을 맺습니다.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집이 어디예요?” “오늘 밤에는 집에 있을 건가요?”

정신 지체자 존이 헨리 나우웬 신부에게 물었습니다.
그 질문은 헨리 나우웬 교수의 가장 깊은 곳을 찔렀고, 그 질문에 대답하느라 5년이 걸렸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하던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를 향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더불어 모든 것이 끝났으며,
앞으로 있을 검거열풍에 대비하여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 최상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살기 위해 발길을 재촉하고 있는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길을 가면서 주고받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이에 그들은 가던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예루살렘에 살면서 그 유명한 사건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느냐는 반문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들을 성경은 이렇게 전합니다.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그들은 예수님의 당하신 일에 대해서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법정스님이 돌아가셔도 슬픈데,
모든 것을 걸었던 예수님, 존경하고 사랑하던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는데 왜 슬프지 않겠습니까?

C.S. 루이스의 소설 “천국과 지옥의 이혼”에,
자신보다 일찍 죽은 아들을 너무나 사랑한 한 엄마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죽어서도 아들이보고 싶어 애끓는 한 엄마가 지옥에 있었는데,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셔틀버스가 있어, 그 버스를 타고 천국으로 아들을 만나러갔습니다.
그 여인을 마중 나온 것은 아들이 아닌, 오빠였습니다.

너무나 실망해하는 그 여인과의 대화에서 오빠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단지 마이클을 만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단다.
너는 애 엄마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피조물이야.
너와 아들과의 관계보다 하나님과 너와의 관계가 더 오래된 것이고 친밀한 것이야.”

그러자 이렇게 항의합니다.
“오빠가 애엄마라면 그런 말 못할걸요.
하나님이 절 사랑한다면서 왜 마이클을 빼앗아 가신 거죠?
그런 하나님을 용서할 수가 없어요.”

오빠가 말합니다.
“하나님은 마이클을 위해 먼저 데려가셔야만 했어”

그러자 이렇게 외칩니다.
“말도 안돼요. 전 마이클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최선을 다했어요. 평생을 다 바쳐서.
마이클을 향한 내 사랑은 수백만 년을 살아도 변하지 않아요.”

죽어서도 아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여 슬픈 그 여인은,
아들을 위하여 뭔가를 열심히 하였으나 한발도 가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인하여, 살아서도 지옥에, 죽어서도 지옥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너무나 슬퍼하며 집을 향해 열심히 가고 있지만
사실은 이들의 발걸음은 정말 가야하는 집과는 정반대를 향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딸이 암에 걸렸습니다.
그 부모는 하나님께 매달려 필사적으로 기도하였고, 딸은 암에서 회복되었습니다.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그 부모는 딸의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굳게 하셨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걱정이 생겼습니다.
다음에는 누구의 고난을 통해 가르치려 하실까? 남편? 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굳건해졌다고 말해도 사실은 그들은 한발도 더 가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눈에 띄는 구절이 있습니다.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안중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 곳에 집중하느라, 너무나 집착한 나머지 다른 것을 전혀 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수단이 될 때 예수님을 절대로 볼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열심히 믿어서 나도 그 무서운 죽음을 피하리라.
예수님을 열심히 섬겨 저주를 피하고 하나님의 복을 듬뿍 받으리라.
바로 이것이 예수님을 수단으로 삼는 것이며, 이 때 예수님을 절대로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기복신앙자들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최대 비극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함께 가고 있는 예수님조차 알아보지 못한 이들을 깨우기 위하여,
“내가 정말 부활한 거야. 나를 자세히 보아라. 이래도 못 믿겠니?”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시는 대신,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부활하기 위해서? 아닙니다.

율법을 잘 지켜, 전도 봉사 헌금을 열심히 해서 하나님의 복을 듬뿍 받아보겠다는
헛된 몸부림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경에서 밝히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하기 위해서,
모세와 선지자들이 전한 하나님의 뜻을 우리들이 믿고
그 뜻에 따라 살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야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이 더욱 풍성해진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오셨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성경 강해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어느덧 목적지에 당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는 길을 계속 가시려 하였습니다.
그러자 두 사람이 예수님을 강권하였습니다.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예수님은 왜 그냥 가시려 했을까요?
엠마오는 다만 그들의 목적지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목적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따뜻하신 예수님은 그들의 강권을 받아들이시고 그들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식사를 하실 때에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보더니”
떡을 먹자 그제야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왜 갑자기 그들의 눈이 밝아졌을까요?
예수님의 권능이 그 떡에 전해져 그렇게 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기독교에는 미신이 들어설 여지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미신이란, 특정 물건이나 특정 사람에게 특별한 힘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예배, 기름받아 세운 종, 목사의 안수기도, 금식기도, 일천번제, 거룩한 제단 등등,
그런 것에는 영험한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미신입니다.

성경의 역사는 미신타파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법궤, 성막, 모세의 불뱀, 하나님의 성전, 예수님의 십자가,
그 모든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무너뜨려 치우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마저도 승천해 버려 그 어떤 흔적도 이 땅에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모세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고,
다윗의 하나님의 성전 건축을 거절하셨고,
바울이나 베드로가 로마 교회를 세우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외에 그 어떤 특정 사물이나 인물이나 행위에 신적권능을 부여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오직 영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접속하라는 것입니다.

예배나 기도 자체에 신적 권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와 기도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접속하는 통로이므로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바람은 오직 신령과 진정으로,
몸과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과 접속하라는 것입니다.

떡을 축사하시고 떼어 주실 때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불현듯 생각났습니다.
그러자 영안이 떠졌습니다.
그런데 미처 반가워할 틈도 없이 예수님은 홀연 사라지셨습니다.

그들이 서로에게 놀라 말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네 맞았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들과 또한 우리들에게 바라시는 것입니다.

“마음이 뜨거워지니라.”
하나님의 깊은 뜻을 통달케 하시는 성령께서
죽은 영혼에 생명의 뜨거운 바람을 불어넣으시는 순간입니다.
가야할 집, 영원히 거할 집이 보이는 순간입니다.

내가 열심히 이렇게 기도하고 예배하고 헌금하니까 내 길을 열어주시겠지, 생각한다면
여전히 한발도 가지 않는 것입니다.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니라”

마음이 뜨거워진 그들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야심해도, 다시 먼길을 가야해도, 예수의 잔당을 체포한다고 눈을 부릅뜬 군인들이 깔려있어도
상관없습니다.
예수님이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내딛는 첫발은 영원한 집을 향한 첫발이었습니다.

“집이 어디예요?” “오늘 밤에는 집에 있을 건가요?”

정신 지체자 존이 헨리 나우웬 신부에게 물었습니다.

죽음이 공갈치거나 큰소리치지 못하는 세계,
죽음으로 삶이 제한받지 않는 세계,
죽음으로 인하여 오히려 내가 더욱 생동하는 새로운 하나님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믿음에 나약한 저에게 단비를 내려주십니다. 성서학당의 목사님께서 전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저의 세상적인 가식적인 믿음을 한올한올 벗겨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