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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170409]십자가의 도는 능력이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는 능력이다.

고전 1:18(설교자: 마경훈 목사 비전교회)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주님께서 나귀타고 예루살렘에 입성 하시던 날을 기념하여 지키는 주일입니다.

우리 주님이 벳바게에서 두 명 제자를 보내셔서 나귀와 나귀의 새끼를 가져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와 나귀 새끼 위에 얹었습니다. 주님은 그 위에 타셨습니다. 무리들은 자신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또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주님의 앞뒤에서 소리 높여 찬송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이 일로 인하여 예루살렘 성이 소동하였습니다.

사실 그때 주님의 모습은 어울리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백마를 타셨다든지 황금마차를 타셨어야 어울리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새끼 나귀를 타셨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대통령이 카퍼레이드를 합니다. 엄청난 군중이 모였습니다. 하늘에서는 꽃가루가 날립니다. 수많은 방송국 카메라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때 대통령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어울릴까요? 고급스러운 검정색 리무진을 타고 경호 차량의 경호를 받으며 위엄 있게 나타나야 어울립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짐자전거를 타고 나타난다고 생각해봅시다. 서민적인 모습에 존경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어울리는 모습은 아닙니다.

제가 이스라엘에서 광야를 횡단할 때, 한 청년이 돈을 지불하여 어쩔 수 없이 나귀를 탔습니다. 제가 극구 사양했지만 그 청년이 하도 강권해서 할 수 없이 어린 나귀를 탔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창피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만 어린 나귀가 제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대로 가다가는 어린 나귀가 쓰러지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귀에서 내렸었습니다. 세상 말로 하면 모양 빠지는 일이었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생각해보세요. 건강한 백마를 타신 것도 아니고 황금마차를 타신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나귀를 타셨습니다. 그것도 새끼 나귀를 타셨습니다. 왜 주님은 그렇게 모양 빠지는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까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예언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은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무엇을 하든지 세상적인 시각으로 모양이 좋으냐 좋지 않으냐를 따라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뭐라고 했는가를 살피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저는 종려주일에는 거의 십자가의 도를 전합니다. 주일 오전 예배만 드리는 분들을 위하여 그렇게 합니다. 우리 주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더 중요한 일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성경에 보면 많은 부분에서 복음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해주고 있는데 대부분이 간접적인 설명입니다. 직접적으로 복음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곳은 두 곳입니다. 그런데 그 두 곳에서 다 복음의 핵심은 우리 주님이 지신 십자가와 부활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2입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이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고전 15:2-4입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복음의 핵심 중에서 십자가에 관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다음 주에는 부활 주일이니 아마도 복음의 핵심 중에 다른 하나인 부활에 관해서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멸망하는 자들은 십자가의 도를 믿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지만 십자가의 도를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이고 그들의 결국은 멸망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믿는 자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도를 믿는 자들에게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오늘 설교는 십자가의 능력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능력이다.

야곱은 자기를 죽이려는 형으로부터 도망을 쳐서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다가 벧엘에서 잠을 잤습니다. 야곱은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야곱이 꿈에 보니 엄청난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었습니다.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천사들이 그 위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야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이 꿈에서 본 사닥다리는 하늘과 땅을 연결시켜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주님이 나다나엘을 만나셨습니다. 나다나엘은 남몰래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기도하며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었던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 부분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나다나엘은 단 번에 주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보고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1:49입니다.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주님은 나다나엘의 고백을 들으시고 더 큰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1:50-51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나다나엘이 보게 될 큰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자들이 하늘과 땅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능력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성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주셨습니다. 성전 중에서도 지성소였습니다. 지성소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대제사장만이 1년 중 단 한 번 대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여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능력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믿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하나님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십니다. 4:16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물리학 용어 가운데 엔트로피 법칙(the entropy law)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에너지와 사물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질서에서 무질서로, 쓸모 있는 것에서 쓸모 없는 것으로 변해 간다는 법칙입니다. 열은 높은 온도에 낮은 온도로 흐르고, 모든 물질은 사용할 수 있는 형태에서 사용할 수 없는 형태로, 질서가 있는 상태에서 질서가 없는 상태로 변해가며 되돌이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엔트로피 법칙입니다.

제가 보니 신앙생활에도 엔트로피의 법칙이 적용됩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면 신앙이 뜨거워지고 열심을 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도 모르게 신앙이 식어집니다. 열심도 식어집니다. 하나님과 점점 멀어집니다. 이런 신앙을 그대로 두면 결국 믿음은 사라지고 외식하는 종교인이 되든지 아니면 주님을 영영 떠나게 됩니다.

교인들 중에는 교회는 나오지만 이미 신앙이 죽어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이 죽지는 않았지만 영적으로 병이 들어서 무기력에 빠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요?

팽이를 돌려보면 처음에는 잘 돌아갑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도는 속도가 느려지고 끼웃둥 거리다가 결국은 쓰러지고 맙니다. 그런데 끼웃둥 거리는 팽이를 채찍으로 쳐주면 어떻게 될까요? 다시 힘 있게 돌아갑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십자가를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넘어지려는 팽이를 쳐서 다시 돌리듯이 우리의 신앙을 다시 세워주십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능력입니다.

 

2. 십자가의 도는 전가의 능력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 주님이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 그리고 율법의 저주 등을 우리 주님에게 전가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믿는 우리는 죄와 죄책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할머니가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어느 젊은이가 들어주었다면 할머니는 그 짐의 무게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자식이 지고 있는 빚을 부모가 갚아주었다면 자식은 그 빚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이고 복음의 원리입니다.

이사야 53장에는 주님이 당하신 고난이 우리를 대신한 고난이라는 것을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53:4-5을 보겠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주님이 질고를 지셨고, 찔리셨고, 상하셨고, 징계를 받으셨고,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십자가를 지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고통을 받으신 이유는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님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믿는 사람은 영적 싸움에서 승리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죄와 허물이 주님에게로 전가되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죄와 허물을 발판 삼아서 사람들을 공격하고 사람들을 자신의 종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전가를 통해서 우리의 죄와 허물이 주님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이제는 마귀는 우리에게 역사할 발판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를 믿는 사람은 승리합니다. 2:15을 보겠습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십자가는 전가의 능력입니다.

 

3. 십자가의 도는 화목의 능력이다.

화학을 전공하는 한 학생이 중간고사를 쳤습니다. 시험문제는 석탄으로 알코올을 얻는 방법을 쓰시오.” 그 학생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썼습니다. “석탄을 팔아서 알코올을 사면됩니다.” 그 학생은 교수님에게 혼이 나고 F학점을 맞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교수님이 웃으면서 학생에게 너는 석탄으로 알코올을 얻는 가장 손쉬운 방법을 찾아냈구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높은 점수를 주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언제나 화목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답을 찾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화목의 답은 십자가에 있습니다. 십자가를 적용하면 화목하지 못할 상대가 없습니다.

5:14-15을 보겠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여기에 나오는 둘은 유대인과 이방인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막고 있는 담을 허셨습니다.

여기서 독특한 용어가 나옵니다. 성경에 딱 한 번 기록된 독특한 용어입니다. ‘한 새 사람입니다. 영어로 ‘One New Man’입니다. 한 새 사람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 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하나 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사탄이 뿌려놓은 가라지 때문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 될 수 없게 만든 사탄의 가라지 2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유대인의 선민의식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특별한 민족이라고 믿었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습니다. 문제는 이방인을 개처럼 취급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태도 때문에 유대인과 이방인은 하나가 될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겁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유대인이 복의 근원이 되어 온 세계와 열방이 주께로 돌아와 복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을 제사장 국가로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스스로 선민의식이라는 장벽을 치고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의 선민의식 때문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 될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 되는 것을 막는 사탄의 또 다른 가라지는 유대인의 낙인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이 유대인에 대해서 오해했습니다. 유대인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민족이라는 낙인입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민족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27:25을 보겠습니다.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지어다 하거늘유대인들이 빌라도를 압박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할 때 한 말입니다. 이방인들은 이 말씀에 근거해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를 지었으니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께서는 군인들에 의하여(19:2-3), 빌라도에 의하여(19:10-11), 이방인들에 의하여(18:31-33), 가룟유다에 의하여(13:2,27)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스스로 죽으셨고(10:17-18)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고 말씀합니다(53:4-8).

십자가는 유대인의 선민의식과 이방인의 유대인에 대한 오해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2:16을 보겠습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여기서 이 둘은 유대인과 이방인입니다. 십자가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몸 된 한 새 사람으로 만듭니다. 또 십자가는 한 새 사람이 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사람은 원수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십자가의 화목의 능력을 아는 사람은 어떤 사람에게도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화목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4. 십자가의 도는 새생명으로 사는 능력이다.

민수기 2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로 인하여 원망하다가 뱀에게 물린 사건이 나옵니다. 뱀에게 물려서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21:8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놋으로 불뱀을 만들어서 장대 위에 달았습니다. 그 결과를 민 21:9에서 말합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불뱀에 물려서 죽어가던 사람들은 놋뱀을 바라보므로 새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새생명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는 장대에 높이 들린 놋뱀이 보여주는 진리를 말씀합니다. 3:14-16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대에 달린 놋뱀을 바라보고 산 사건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사람들이 십자가의 도를 깨닫게 되면 그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앞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영생을 얻었습니다. 5:24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십자가의 도를 믿는 사람은 이미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제는 새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2:20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를 새 생명 가운데서 살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믿는 우리는 이제 옛 생명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살아야 합니다.

춘천에 감리교 권사님 한 분이 강가 여기저기에 콘도 같은 것을 만들어 놓고 분양하기도 하고 임대하기도 합니다. 그분은 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많은 집을 지었습니다. 그 이유는 물에서 죽은 딸 때문입니다. 홍수가 극심하던 어느 날 권사님이 아들과 딸과 함께 강을 건너다가 배가 뒤집혔습니다. 권사님은 두 자녀를 양 손에 붙들고 급류에서 살아보려고 발버둥쳤습니다. 급류가 너무 심해서 둘 다 살리려고 하다가는 둘 다 죽일 것 같았습니다. 할 수 없이 하나를 놓아야 했습니다. 그 권사님은 누구를 붙잡고 누구를 놓을 것인가를 갈등하다가 아들을 붙들고 딸의 손목을 놓았습니다. 딸은 급류에 떠내려가며 말했습니다. “아빠! 내 손을 놓으셨군요.” 권사님은 죽은 딸의 모습 때문에 그 강가에서 넋을 잃고 있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랍니다. 아들은 그때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자기를 놓았으면 자기가 죽은 것입니다. 아들은 자기에게 생명을 준 아버지에게 늘 감사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죽은 누나를 생각하면서 아파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 아들은 인생을 헛되이 살 수 없습니다. 아버지에게 감사해서 인생을 헛되이 살 수 없고, 먼저 간 누나에게 미안해서 인생을 헛되이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압니다.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헛되이 살면 안 됩니다. 이제 우리는 엣 사람으로 살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새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살리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루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얼마나 값비싼 존재인지를 알려면 십자가를 보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

32:8 말씀으로 오늘 설교를 정리하겠습니다.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존귀한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존귀함을 유지시켜주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제 그분으로 사십시오. 새생명으로 사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이고 존귀한 생활입니다.

오늘은 십자가의 도를 나누었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능력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능력입니다. 전가의 능력입니다. 화목의 능력입니다. 새생명으로 사는 능력입니다.

 

 

 

출처 :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글쓴이 : 마경훈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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