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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170604]하나님을 좋게 하면 모든 것을 더하신다/ 갈라디아서 1:10

하나님을 좋게 하면 모든 것을 더하신다 1:10

(설교자: 마경훈 목사 비전교회)

 

저는 지난 한 주간 동안 걷는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여러분의 기도로 잘 다녀왔습니다. 이번 걷는 기도는 계획보다 진도가 많이 늦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자동차 고장 때문입니다.

첫날, 고속도로에서 목적지를 향해서 달리고 있는데 자동차의 속도가 떨어지더니 아무리 가속페달을 밟아도 시속 80km를 넘지 못했습니다. 괴산 휴게소에 들어가서 정비를 받아보려고 했는데 거기에는 정비업체가 없었습니다. 화장실을 다녀와서 자동차 시동을 켜니 시동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보험회사의 견인 서비스를 받아 보험회사에서 연결한 정비 업체에 갔습니다. 그곳 사장님이 자동차를 살피더니 연료필터를 5년 동안 한 번도 교체하지 않아서 엔진에 이물질이 들어가서 문제가 발생한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연로 펌프를 고체하고 시동을 걸었지만 시동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사장님은 밧데리를 확인하더니 밧데리도 5년 동안 한 번도 교체하지 않아서 교체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또 밧데리를 새것으로 교체하였습니다. 그리고 시동을 거니 시동이 잘 걸렸습니다. 우리는 그 자동차를 몰고 울진을 향하여 달리다가 식사하기 위하여 문경 휴게소에 들어갔습니다. 식사 후에 시동을 거니 또 시동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다시 견인 서비스를 받아 점촌에 있는 대형 정비공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정비공장 사장님은 기름에 이물질이 들어가서 여러 가지 중요한 부품이 고장났다며 견적서를 보여주었습니다. 금액이 상당했습니다. 저는 시동도 걸리지 않는 자동차를 견인해서 서울까지 갈 바에야 거기서 정비를 받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하고 많은 돈이 들어가지만 사장님에게 정비를 부탁했습니다. 정비를 위하여 몇 시간 대기하고 있는데 사장님이 저를 찾아오셔서 스타렉스는 경유차인데 휘발유를 넣어서 자동차가 고장 난 것 같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주유소에서 받은 영수증을 확인해보니 휘발유라고 표시되어 이었습니다. 제가 출발 전에 마천동에서 주유를 했는데 그때 습관적으로 휘발유를 넣었던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어이없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이런 부족한 목사를 하나님이 써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또 여러분이 목사로 인정해주니 여러분에게도 감사합니다.

자동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 우리는 문경에서 이틀을 보내고 화요일 밤에 울진에 도착했습니다. 우리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일정이 이틀 더 지연 되었고 돈도 많이 손해를 봤지만 소득도 있었습니다. 돈이야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서 주시기도 하시고 거두어가시기도 하시니 돈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언제나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이번 사건을 통해서 몇 가지 생각해봤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도움이 되겠다 싶어서 서두에서 먼저 말씀드리고 본문을 다루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무슨 상황을 만나도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짜증스러운 과정이었겠지만 저와 아내 그리고 함께 걷기 기도를 하는 정목사님은 감사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일 믿었고, 하나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우리가 문경에서 이틀을 있었고 3일째 되는 날 울진에서 걷기를 했는데 제 체력이 바닥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 첫날 온도가 33도였는데 그날 걸었다면 저는 걷는 기도를 포기하고 서울로 돌아오고 말았을 것입니다. 제 체력에 대한 하나님의 안배도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문경에 기도가 필요하다고 확신했고, 문경에 기도를 심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감사했습니다.

 

둘째,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한국에서 가장 걸어보고 싶은 곳 100선을 했는데 그 중에 1위가 문경세재입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그곳을 걸으며 하나님께 기도도 드리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한 시간이었습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이라고 믿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셋째, 습관이 무섭다는 것입니다. 저는 휘발유 자동차를 탑니다. 주유소에 가면 늘 휘발유를 넣었는데 경유차를 가지고 가서 저도 모르게 휘발유를 넣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휘발유를 넣었습니다. 습관 때문에 한 실수였습니다. 생각은 행동을 만들고 행동은 습관을 만들고 습관은 인생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습관이 인생을 만들기 때문에 믿음의 습관, 좋은 습관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넷째,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정신을 차리고 주유를 했으면 경유차에 휘발유를 넣는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영적인 생활도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라고 하시는가 봅니다.

 

다섯째, 실력이 중요하다 것입니다. 아마 첫 번째 정비소에 갔을 때 원인을 잡아냈다면 자동차에 손상이 덜했을 것입니다. 첫 번째 정비소 사장님은 페티 병에 기름을 담아서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기름에 이물질이 있는 것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름을 눈으로 보면서도 그 기름이 휘발유라는 것을 그 사장님도 저희들도 몰랐습니다. 두 번째 정비공장 사장님은 처음에는 이물질이 들어간 것 같다고 하시더니 좀 시간이 지나서 원인을 잡아냈습니다. 우리는 두 분을 비교하며 실력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22:29입니다.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실력 있는 사람은 왕 앞에도 서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자기 분야에 실력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여섯째, 성령님의 지도와 인도에 더 민감해야합니다. 출발하기 전에 이상하게도 제 마음에 승용차로 가고 싶은 생각이 자꾸 왔습니다. 성령님의 인도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눈치를 채지 못했습니다. 제가 아내에게 이번에는 이상하게 승용차로 가고 싶다고 했더니 아내는 교대로 운전을 해야 하는데 정목사님이 부담스러워할 수 있다고 그냥 승합차로 하자고 했습니다. 저도 승용차를 가지고 가려면 보험처리를 해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승합차를 가지고 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자동차가 고장 나고 보니 그 마음이 성령님이 주신 마음이었구나라고 깨달아지면서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일곱째, 가장 중요한 깨달음입니다. 혼합주의 신앙은 아주 위험하다는 가르침입니다. 경유만 넣어야 하는 자동차에 휘발유를 넣으니 처음에는 잘 달리던 자동차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고장이 나고 말았습니다. 혼합신앙은 처음에는 위험한 것을 모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곧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혼합주의에 빠지면 혼유된 자동차가 고장 나듯이 믿음이 고장납니다.

저는 지난 수요일에 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장신대에서 발행하는 신학춘추라는 잡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잡지에 동성애를 옹호하는 쪽의 주장만 실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 내용은 무당을 하늘과 땅을 잇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기사를 보면서 신학이 타락하면 신앙이 타락하고 신학이 무너지면 교회가 무너진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문제 중에 하나가 신학의 타락입니다. 신학이 타락하니 교회가 타락해서 종교다원주의를 받아드렸습니다. 한국교회는 WCC를 통해서 종교다원주의, 혼합주의를 받아드렸습니다. 혼합주의를 받아드린 신학자들은 기독교 외에도 구원이 있다. 하나님께 가는 길은 많다. 그 많은 길 중에 하나가 예수다라고 반성경적인 주장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 우리는 종교혼합주의를 받아드리지는 않지만 우리 안에도 혼합된 것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안에는 오직 주님만 계셔야 합니다. 우리 안에 주님 외에 다른 무엇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주님이라고 말하지만 자아가 살아있습니다. 이것도 일종의 혼합주의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셔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자아가 너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또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뜻만이 충만해야 하지만 자기 욕망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주님과 자아가 혼합되어 있고, 하나님의 뜻과 자기 욕망이 혼합되어 있습니다. WCC나 종교다원주의를 받아드리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안에도 혼합된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 중에는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거짓 선지자들의 반성경적인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 설교하던 거짓 선지자들 중에는 바울이 전한 복음 말고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6절에 보면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인들 가운데 다른 복음을 따르는 자들이 있어서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7절에서는 다른 복음은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들었던 다른 복음은 복음이 아니라 갈라디아 교인들을 교란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8-9절에서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거짓된 가르침으로 인하여 갈라디아 교인들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하여 갈라디아서를 쓴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의 일을 할 때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성령의 감동에 순종해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일을 하다보면 우리의 자아가 살아서 우리의 생각과 감정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빠지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부분을 주의해야 합니다.

갈라디아 교회에서 거짓 선지자들이 가르쳤던 다른 복음은 율법주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이라는 단어를 23번이나 사용했습니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믿음에 할례나 안식일이나 절기 등 다른 율법적인 조건을 충족시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추가 시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약화시키는 죄입니다. 2:16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율법의 행위로는 구원 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진짜 믿음을 가지면 자동으로 행위는 따라옵니다. 그래서 행위가 없으면 그 믿음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장로는 온전한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이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믿음을 마음에 확신으로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는가로 확인해야 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행함이 없으면 죽은 믿음이고 행함이 있다면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바울은 10절에서 다른 복음으로 신앙이 혼잡케 된 것과 같은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오늘 설교에서 다루려고 하는 내용이 이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잘못될 수 있는 두 가지를 지적합니다. 첫째는 이제 내가 사람들을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라는 부분이고, 둘째는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라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10절의 말씀을 가지고 2가지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을 좋게 하라

사도 바울은 10절에서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합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나는 누구를 좋게 하는가?”입니다.

여러분은 이 질문에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자신은 사람들에게 좋게 하는 사람입니까 하나님께 좋게 하는 사람입니까? 나는 누구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사람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좀 더 구체화 시키면 크게 세 종류의 대상이 있습니다.

 

1) 자기를 위하여 사는 사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중심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무엇을 하든지 자기를 위하여 합니다. 때로는 자식을 위한다, 가족을 위한다, 공동체를 위한다고 말은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자기를 위하여 자식을 위하고, 자기를 위하여 가족을 위하고, 자기를 위하여 공동체를 위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사는 사람은 무엇을 하든지 자기중심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인정받아야 하고 자기가 높임을 받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주목 받기 위해서 말하고 일합니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줘야 합니다. 자기를 향한 관심이 적거나 관심이 없다면 섭섭한 마음을 갖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언행이 공동체에 이익이 되느냐 손해가 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인정을 받느냐 못 받느냐입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를 위하여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삼상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울 왕에게 아말렉과 전쟁을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아말렉의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아말렉의 죄를 갚아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좋은 것을 남기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만 진멸시켰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이 명하신 전쟁에서 하나님이 도우셔서 승리하였으나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사울은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위하여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삼상 15:12을 보겠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그 전쟁은 분명히 여호와의 전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시고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 전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울은 당연히 하나님을 위한 기념비를 세웠어야 했습니다. 모든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셨다고 승리의 하나님을 알렸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자기의 이름을 높이려고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위하여 살면 안 됩니다.

 

2) 타인을 위하여 사는 사람

신앙 밖에서 보면 이런 사람은 참 훌륭한 사람입니다. 자식을 위하여, 가족을 위하여, 공동체를 위하여, 인류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며 사는 사람들은 세상적으로 존경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 중에 하나는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우선순위가 아니라 자신이 섬기는 대상이 우선순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선순위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섬기는 대상이라면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우상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자식을 위하여 사는데 자식이 우상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선한 일에 자신의 인생을 헌신하는데 그 선한 일이 우상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회자들 중에는 목회가 우상이 된 경우도 있습니다. 목회를 열심히 하는 것은 좋은 것 같아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열심이 목회 성공을 위한 열심이냐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냐입니다. 우선순위가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부르심보다 섬기는 대상이나 자신이 하는 선한 일이라면 그것도 우상입니다.

 

3)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사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를 위하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14:7-8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바울 사도는 먹고 마시는 문제를 다루면서 믿음의 사람들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사람이 아니라 주를 위하여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우선순위는 하나님께 있어야 합니다. 자기나 자식이나 가족이나 인류가 우선순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선순위입니다. 고전 10:31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그리스도인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목적을 위하야 해야 합니다.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고 사는 사람들이 참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아브라함의 장점 3가지를 들라하면 저는 그의 믿음과 순종과 예배를 꼽겠습니다. 그의 믿음과 순종과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우선순위의 다른 표현입니다.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갈 바를 알지 못했으나 말씀을 좇아 순종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나 아버지나 친척보다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둔 것입니다. 그는 100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에게는 아들보다 하나님에게 우선순위가 있었던 것입니다. 13:18을 보겠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아브라함은 예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을 위하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자기가 은혜 받고, 자기가 축복 받고, 자녀가 잘 되고, 만사가 형통하기 위한 예배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예배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고, 우리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고 살면 우리는 뭔가?’라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면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져주시는 분입니다. 6:33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더해주십니다.

삼하 12:28-29입니다. “이제 왕은 그 백성의 남은 군사를 모아 그 성에 맞서 진 치고 이 성읍을 쳐서 점령하소서 내가 이 성읍을 점령하면 이 성읍이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을까 두려워하나이다 하니 29 다윗이 모든 군사를 모아 랍바로 가서 그 곳을 쳐서 점령하고요압이 암몬 자손의 랍바성을 쳤습니다. 요압은 그 성을 점령하기 직전에 다윗에게 전령을 보냈습니다. 자신이 랍바성을 점령하면 자기 이름이 나기 때문에 왕이 와서 마지막 부분을 점령하라는 내용입니다. 공로는 자신이 세웠지만 영광은 다윗이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내가 영광 받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내 이름을 높이지 말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라.

바울은 10절 하반절에서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하여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4장에 보면 초대교회 때 주목을 받았던 한 사람이 나옵니다. 바나바입니다. 그는 자기 소유의 밭을 팔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헌신했습니다. 그의 신앙과 인격 그리고 헌신으로 인하여 초대교회는 그를 주목했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바나바의 헌신 후에 이상한 시험이 있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자신들의 재산을 정리했습니다. 그 가운데 일부는 감추고 일부는 교회에 바쳤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그 부부는 현장에서 차례로 죽었습니다. 바나바와 이 부분의 다른 점이 있습니다. 바나바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한 것이고,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하여 재산을 팔아 바친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잘못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람만 의식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인정만을 원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면 헛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인정을 해도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시면 진짜 의미는 없는 것입니다.

7:22-23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주님께서 마지막 심판대에서 일어날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고, 귀신도 쫓아냈고, 권능도 많이 행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있을 때 사람들에 많은 인정을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주님은 그들을 인정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 그들은 결국은 영원한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일하지 마십시오. 사람의 인정을 받아야만 만족해하는 것은 어리석일입니다. 목사가 몰라주면 어떻습니까? 교인들이 몰라주면 어떻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몰라주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인정해주면 되지 않습니까!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누가 알아줬습니까? 사람들은 미쳤다고 했을 겁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아를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인정하셨습니다.

제발 사람의 인정을 추구하는 생활을 하지 맙시다. 바리새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화려한 옷을 입었고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에서 큰 소리로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구제를 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선한 일을 했습니다. 23:27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이스라엘에서 회칠한 무덤이 석양빛을 받으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무덤은 겉이 아름다워도 속에는 죽은 시체가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 아름다워도 하나님이 보실 때 사망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일하지 맙시다. 하나님께 인정받으려고 일합시다. 사람이 몰라줘도 괜찮습니다.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아도 섭섭해 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마지막 심판대에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우리가 됩시다.

 

출처 :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글쓴이 : 마경훈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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