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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주님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가? 빌립보서 2:1-11

어떻게 주님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가? 빌립보서 2:1-11

(설교자: 마경훈 목사 비전교회)

 

그릇은 내용물에 따라서 이름이 달라집니다. 밥을 담으면 밥그릇, 국을 담으면 국그릇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그릇입니다. 자아가 가득하면 내 그릇이고, 마귀가 가득하면 마귀 그릇이고, 주님이 가득하면 주님 그릇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가진 주님의 그릇이 됩시다. 오늘은 주님의 마음에 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유럽에 세운 최초의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성령께서 바울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를 썼으나 성령이 허락지 아니하셨습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였습니다. 환상 속에서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바울에게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청했습니다. 바울은 그 환상을 보고 하나님이 자신들을 마게도냐로 부르신 줄로 인정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서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인 빌립보로 갔습니다.

빌립보에 간 바울은 안식일에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강가에 나갔다가 강가에 있던 여자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때 옷감 장사를 하는 루디아라가 바울의 말을 들었습니다. 주님은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셨습니다. 설교자도 중요하고 설교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역사입니다. 주님이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주시니 그 여인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여 자신의 집을 제공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목사인 저는 이런 하나님의 역사를 사모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역사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는 주의 일을 하면서 항상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으시면 허사입니다. 우리의 노력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때 열매가 풍성합니다. 127:1입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이 원리는 선교사역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집을 세울 때도 적용되고, 나라를 세울 때도 적용됩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직업과 사업과 사역에도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기도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빌립보교회는 여성인 루디아의 헌신으로 세워졌습니다. 루디아가 전도 된 후에는 귀신들린 여종 한 명이 전도 되었습니다. 역시 여성이었습니다. 이렇게 여자들이 먼저 믿고 빌립보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에 다른 교회들보다 여성들의 리더십이 강했던 교회입니다.

빌립보교회는 여성들의 리더십이 강했기 때문에 나타났던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헌신도가 높았습니다. 일반적으로 남성보다는 여성들이 신앙이 좋습니다. 여성들의 신앙이 더 뜨겁습니다. 어떤 분은 농담식으로 여성들의 신앙이 남성들보다 더 뜨거운 것은 남자는 흙으로 만들었고 여자는 뼈로 만들었기 때문에 더 영적이라고 말하는데 타당성은 부족하지만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빌립보교회의 헌신도가 높았다는 증거는 빌립보서 4장에 나옵니다. 4:14이후의 내용을 보면 빌립보교회는 바울에게 여러 번 사랑의 선물을 보냈습니다. 빌립보교우들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 고린도에 있을 때 그리고 옥중에 있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소유를 바울에게 제공하였습니다. 바울의 선교 초기에 바울을 도왔던 교회는 빌립보교회 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이 2차 선교여행 중에 데살로니가에서 극한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도 빌립보 교인들은 두 번이나 바울에게 원조금을 보냈습니다.

다른 특징은 다툼입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마음을 같이하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또 빌 4:2에 보면 2명의 여성 리더들에게 이런 권면을 합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그들은 교회의 리더로서 마음을 같이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빌립보교회는 다툼이 있었던 교회입니다.

빌립보교회의 특징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빌립보교회는 다른 교회들보다 여성 리더십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보다 헌신도가 높았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회는 하나 되지 못하고 다툼이 있습니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본문을 보겠습니다.

 

1. 바울의 4가지 권면(1-4)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형편을 잘 알았기 때문에 몇 가지 권면을 했습니다. 4가지로 요약을 하겠습니다.

 

1) 일치된 마음을 가지라(1-2).

본문 1-2절을 보면 바울은 빌립보교우들에게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같이 해라. 같은 사랑을 가져라. 뜻을 합해라. 한 마음을 품어라라고 권면했습니다. 바울은 같은 말을 4번이나 반복했습니다. 그만큼 빌립보교회는 한 마음을 갖는 것이 시급했던 것입니다.

4:3-4을 보겠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교회가 하나 되려면 모두가 성령 충만하면 됩니다. 목사도 성령충만, 장로들도 성령충만, 권사들도 성령충만, 집사들도 성령충만, 청년들도 성령충만, 학생들도 성령충만, 어린이들도 성령충만하면 교회는 하나 됩니다. 교회가 하나 되어야 하는 이유는 교인들이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왼쪽 다리는 앞으로 가려고 하고 오른쪽 다리는 뒤로 가려고 하는 일은 없습니다. 모든 지체는 머리의 명령의 따라서 하나 되어 움직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인 성도들은 당연히 하나 되어야 합니다.

 

2) 범사를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3).

슬픈 예화를 하나 들겠습니다. 두 사람이 버스 안에서 심하게 다투고 있었습니다. 좁은 공간에서 다른 승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를 높이고 있었습니다. 함께 타고 있던 다른 승객들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한 중년의 승객이 참다못해 다음 정거장에 내리면서 다투던 사람들에게 소리를 쳤습니다. “여기가 교회인줄 알아?”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다툼의 장소로 인식된 것은 슬픈 일입니다.

빌립보교회는 다툼과 허영으로 일하던 교회였습니다. 3절에 보니 무슨 일을 하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다툼은 자신을 내세우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일어납니다. 허영은 헛된 영광으로 자신을 높이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다툼은 다른 사람보다 나 자신을 먼저 내세우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내가 높아지려는 교만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20:3을 보겠습니다. “다툼을 멀리 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거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다툼을 멀리 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영광입니다. 다투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다투어서 이기는 것은 영광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끄러움입니다.

 

3) 겸손한 마음을 가지라(3).

본문 3절에 보니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사랑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복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늘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3:34입니다.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하나님은 거만한 사람을 비웃으십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비웃으십니다. 그리고 겸손한 사람에게는 은혜를 주십니다. 15:33입니다.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여러분! 존귀해지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겸손하십시오. 자기를 낮추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만들어주십니다.

 

4) 다른 사람을 돌아보라(4).

가족찬송 경연대회에서 어느 집사가 찬송을 부르다가 가사가 틀렸습니다. 교인들이 깔깔대고 웃었고 집사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자리에 돌아와서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어 담임목사 가정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목사도 가사를 틀리게 불렀습니다. 교인들은 다시 깔깔대고 웃었고, 사모님과 자녀들은 왜 틀렸느냐?”고 핀잔을 주는 얼굴로 목사를 힐끗 쳐다보았습니다. 어느 날, 그 목사가 과로로 쓰러져 돌아가셨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장로들이 유품을 정리하다가 일기장을 발견했습니다. 일기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714, 교회 가족찬송 대회가 있었다. 김 집사가 찬송을 부르다 틀려서 교인들이 다 웃었는데 김 집사가 너무 무안해했다.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 그 다음 차례로 우리 가정이 찬송 부를 때 나도 일부러 틀려주었다. 다시 교인들은 깔깔대며 일제히 웃었다. 그때 슬쩍 김 집사를 쳐다보니 목사님도 가사를 틀릴 수 있구나!’ 라고 생각하고 안도하는 것 같았다. 오늘도 작은 일로 한 영혼에 위로를 줄 수 있어서 기쁜 하루였다.” 그 일기를 읽고 장로들은 한 바탕 울었습니다. 목사님은 찬송을 부르다가 가사가 틀린 집사님을 돌아보셨던 것입니다.

4절에 보면 바울은 빌립보교우들에게 자기 일을 돌아보고 또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울의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거듭나면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나이가 많든 적든 영적으로 보면 어린아이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어린 아기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영적으로 자라야 합니다. 영적인 청년도 되어야 하고 영적인 아비와 어미가 되어야 합니다.

어린 아기의 특징은 자기 일도 돌아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몇 년 지나면 겨우 자기 일을 돌아보는 정도가 됩니다. 인내하고 기다리다보면 자기 일을 돌아보는 정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도 돌아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믿은 지 수 년 아니 수십 년이 됐지만 자기 일만 돌아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역 일이나 교회 일이나 하나님의 일에는 관심도 없고 돌아볼 마음도 없습니다. 오직 자기, 오직 내 자식, 오직 내 집안 일만 돌아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한 대로 자기 일을 돌아보고 다른 사람의 일도 돌아봐야 합니다. 교회의 장로, 권사, 집사 정도 되면 이제는 자기 일만 돌아보면 안 됩니다. 구역 일도 돌아보고, 교인들도 돌아보고, 교회도 돌아보고, 하나님의 나라의 일도 돌아봐야 합니다. 바울이 그것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2. 주님의 마음을 품어야 가능하다(5).

여러분! 바울이 권면한대로 일치할 줄 아는 마음을 갖고 범사를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않고 겸손한 마음으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자기 일을 돌아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사람의 크기는 키로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재산이 많다고 큰 사람이 아닙니다. 높은 권력을 잡았다고 큰 사람이 아닙니다. 마음이 커야 큰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로 보면 주님의 마음을 품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우주 전체를 봐도 주님보다 큰 마음을 가진 존재는 없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품어야 할 마음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5절에 보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3. 주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6-8)

주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11:29에 보면 주님이 직접 자신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주님의 마음은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입니다.

주님의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을 본문에서는 4가지로 표현했습니다.

 

1) 자기의 권리를 포기할 줄 아는 마음(6)

6절에 보면 주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마땅히 취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적 권리는 믿음으로 취해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 권리는 취할 때 취하고 포기할 때 포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세상적인 권리가 필요하다면 권리를 사용했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였습니다. 그는 재판을 받을 때는 로마로 가서 복음을 증거 하려고 로마 시민권을 주장했습니다. 빌립보에서 귀신들린 여종을 치료한 후에 주인의 고발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을 때는 로마인의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권리를 사용했다면 매 맞을 일도 감옥에 갇힐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으나 그 일로 간수와 간수의 가족이 구원을 얻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권리가 되었든 무엇이 되었든, 내가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가 사용할 수 없는 가를 따지면 안 됩니다. 그것을 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모든 권리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작은 권리도 주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자기를 비우는 마음(7)

7절에 보면 주님은 자기를 비우시고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이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자기를 비우시니 성육신하여 인류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신앙생활을 채우는 작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맞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으로 채우는 작업이고, 주님이 주시는 은혜로 채우고,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채우고, 주님이 주시는 복으로 채우는 작업입니다. 하지만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채우기 위해서는 먼저 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으로 채워지려면 먼저 나를 비워야 합니다. 주님의 것으로 채우려면 먼저 나의 것을 비워야 합니다. 물이 가득 들어있는 컵에 꿀을 채우려면 먼저 물을 비워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기도는 비우고 채우는 작업입니다. 내 의를 비우고 주님의 의로 채워야 합니다. 자아를 비우고 주님으로 채워야 합니다. 내 고집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을 채워야 합니다. 육신의 속성을 비우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우는 것이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면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복으로 우리를 채워주십니다. 그러나 먼저 나의 것을 비워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것으로 우리를 채우기 전에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우리의 고집을 회개하고, 우리가 채운 세상의 것들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를 주의 보혈로 깨끗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것들로 채워주십니다.

 

3) 자기를 낮추는 마음(8)

8절에 보면 주님은 자기를 낮추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자기가 높아지려고 노력합니다. 자기가 높임을 받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원리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23:12입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하나님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추시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을 높이시는 분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견지낚시 하러 온 사람들 중에는 돈 많은 부자도, 장군 같은 계급 높은 사람도 오고, 큰 회사 사장이나 회장들도 오기 때문에 허름한 옷차림에 벙거지 같은 모자를 쓴 사람이라도 우습게보면 안 됩니다. 견지낚시를 할 때는 돈이 있어도 있는 체 말고, 계급이 높아도 높은 체 말고, 공부 많이 하고 학위가 있어도 아는 체하면 안 된답니다.

한 번은 청평 댐에서 계급 높은 분이 벙거지를 뒤집어쓰고 낚시를 하는데 별 2개 단 장군이 벙거지를 쓰고 그 옆에 배를 바짝 갖다 댔습니다. 더 높은 분이 점잖게 좀 떼어대라고 부탁해도 들은 척도 않고 계속했습니다. 계속 떼라고 하니까 그 장군이 , 이 새끼야. 네가 뭔데 남보고 떼라 말라 해?” 하니까 더 높은 그 사람이 참고 있다가 낚시를 마치고 나가서 그 2성 장군의 뺨을 치면서 차렷! 열중쉬어!” 하면서 기압을 주더랍니다. 알고 봤더니 별 2개 사단장보다 훨씬 계급이 높은 사람이었답니다. 높아도 낮은 자같이 처신하고, 있어도 없는 자같이 처신했다면 큰 실수를 안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2성 장군이 자기가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교만하게 행동하다가 부끄러움을 당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를 높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저주하시며 그들을 낮추셨습니다. 세례요한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영적인 스타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주님과 관련하여 겸손한 고백을 했습니다. 1:27입니다.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3:30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한은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높였습니다. 그랬더니 주님은 세례요한을 놀랍게 높여주었습니다. 11:11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하나님은 자기를 낮추는 사람을 높이십니다. 자기를 높이는 사람을 낮추십니다. 우리는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4) 죽기까지 복종하는 마음(8)

8절에 보면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우리도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명하신다면 죽기까지 복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이 영혼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10:28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우리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께 죽기까지 복종하셨더니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님을 높여주셨습니다. 9-1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님을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무릎을 주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죽기까지 복종합시다.

 

4. 어떻게 주님의 마음을 가질 수 있나?

우리는 어떻게 주님의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주님의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내가 노력해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마음은 하나님이 내 안에 넣어주셔야 가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은혜 받아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36:26입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하나님이 새 영을 주셔야 거듭나고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셔야 마음이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마음이 바로주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거듭나면 우리 안에 주님의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이 들어오지만 우리 속에는 옛 마음도 남아있습니다. 우리는 거듭나는 순간부터 옛 마음과 새 마음이 영적 전쟁을 시작합니다. 영적 싸움에 승리해서 새 마음을 따라서 살면 생명이고, 영적 싸움에서 패배하여 옛 마음을 따라서 살면 사망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 때문에 탄식해야 합니다. 고후 5:4입니다.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활 전체가 생명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속에 살아있는 옛 마음이 주님의 마음인 새 마음을 막아서서 생명으로 살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죄를 범하고, 그래서 우리의 시간들이 사망으로 흘러갑니다. 우리는 이것 때문에 탄식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이 싸움에서 패배한 후에 탄식했습니다. 7:24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그런데 바울은 이 탄식 후에 곧 바로 승리의 비결을 가르쳐줍니다. 7:25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감사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길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 비결은 성령충만입니다. 그 다음 절인 롬 8:1-2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우리가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가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므로 죄와 사망의 법을 이깁니다.

우리의 마음의 변화는 우리의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충만할 때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마음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지배할 때 우리에게 주신 새 마음이 옛 마음을 누르고 승리하는 것입니다.

미국에 폭풍의 날씨라는 노래로 세계적인 가수가 된 에델 워터스라고 하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비참하게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성폭행을 당해 임신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릅니다. 가난한 빈민굴에서 비참할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진실하고 성실하게 살아서 훌륭한 성악가가 되었습니다. 한번은 헐리웃에서 노래를 불러 많은 이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때 부른 노래가 폭풍의 날씨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폭풍의 날씨처럼 안정을 찾을 수 없었기에 더욱 감동적으로 불렀던 것입니다. 그 이후 그녀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얼마 후에 누군가가 폭풍의 날씨를 불러 달라고 요청했을 때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기 때문에 더 이상 내 마음 속에는 폭풍이 있지 않습니다. 지금 내 마음속에는 평화와 기쁨이 충만합니다. 다시는 폭풍의 날씨라는 노래를 부르지 않겠습니다성령충만하면 폭풍의 날씨 같던 마음이 주님의 마음으로 충만해 잔잔한 호수처럼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주님의 마음이 충만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