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이윤재목사

눅19:1-10 다시 일어나세요 2013.11.24(일)

19:1-10 2013.11.24()

다시 일어나세요

오늘 교회를 찾은 모든 분들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따뜻한 말로 이렇게 위로드리고 싶습니다. “그동안 사시느라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그래서 들려 드리고 싶은 시가 있습니다. 도종환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힘들고 넘어질 때마다 이 시를 읽으며 힘을 냅니다.

 

흔들리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꿏둘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윘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젖지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었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정말 그렇습니다. 세상 살아가면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가장 많이 넘어지는 시기가 20-30대입니다. 마음은 아직 청소년인데 몸은 벌써 어른이 되고, 온갖 유혹과 시련은 몰려 옵니다. 그러다가 꿈을 안고 결혼했으나 생존경쟁의 치열한 전쟁에 나도 모르게 내몰립니다. 40대는 어떻습니까? 어떤 분이 한국에서 40대로 사는 것은 사망진단서를 받고 살아가는 시한부 환자와 같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남성문화 연구소 이의수 소장이 낸 책 제목이 재미있습니다. <아플 수도 없는 마흔이다>. 한참 가정을 이끌어야 하는 40대 남녀는 아플 수도 도망갈 수도 없습니다. 50대는 어떨까요? 서울대학교 송호근 교수가 쓴 책 제목이 이 시대의 분위기를 대신합니다. <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는다>. 50대가 얼마나 힘들면 이 소리내 울지 않는 것일까요?

 

저마다 외롭고 힘들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힘들게 살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까에 관심이 있습니다. 서점에 가 보면 이 부분에 도움을 주는 많은 책이 있습니다. 대부분 이 경우에 해답은 이것입니다. “마음을 다스려라”. 그러나 마음을 다스린다고 넘어지지 않을까요? 성경으로 가면 전혀 다른 해답을 제시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흔들리지 않는 법, 넘어지지 않는 법에 대하여 한번도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넘어졌다가 일어나는 법을 가르칩니다. 절대로 넘어지지 않는 법이 아니라 넘어졌을 때 반드시 일어나는 법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몇 번 넘어졌는지를 세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가 몇 번 일어났는지를 셉니다. 성경의 사람들이 승리한 것은 한번도 넘어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수없이 넘어졌으나 그것보다 한번 더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승리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넘어진 수보다 한번 더 일어나면 그것이 승리입니다. 다윗이 그랬고 베드로가 그랬고 엘리야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잠24:16절 말씀이 중요합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면 됩니다. 한번도 안 넘어지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번도 안 넘어지기를 기대하기 보다 넘어질 때마다 일어나기를 원합니까? 오늘 성경 말씀에 나오는 주인공이 그 살람입니다. 이름은 삭개오, 삭개오를 통해 성경은 우리에게 넘어질 때 잘 일어나는 법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삭개오를 통해 배우기 원합니까?

 

삭개오에게는 갈망이 있었습니다.

오늘 삭개오가 성경에서 보여주는 프로필은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2절 보시겠습니까? 19: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그의 직업은 여리고 세무서 소장, 한평생을 세무서에서 일한 까닭에 부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그가근검절약하고 돈을 아꼇기 때문에만 부자가 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당시의 세리들의 삶을 통해 볼 때 그도 역시 부정축재의 방법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공무원이 월급만 받아서 부자가 될 수 없지 않습니까? 삭개오도 예외없이 당시 세리들이 사용하는 부정한 방법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돈도 모르고 집도 샀습니다. 아름다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생존경쟁의 치열한 현장에서 어떻게 하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치지 않습니까? 세리와 같은 방법은 아니지만 우리도 나름대로도 살기 위해 많은 방법들을 동원하지 않습니까?

 

삭개오가 우리와 같은 또 한 가지는 컴프렉스입니다. 3절을 보실까요? 19: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그에게 있었던 컴프렉스는 크가 작다는 것입니다. 키가 작다는 것이 무슨 컴프렉스입니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크가 큰 사람입니다. 사람이 키가 작으면 모든 것이 왜소해 보입니다. 학교다닐 때 키가 작거나 체구나 작은 사람을 꼬마라고 불렀던 기억이 있습니다. “꼬마야하고 부를 때 이 말은 이 쬐끄만 한 놈, 너 까불지 마”. 이 말입니다. 체구가 작으면 사람도 작아 보입니다. 그래서 늘 무시당하고 짓눌립니다. 이 사람은 평생 키큰 사람 옆에 가지 않습니다.

 

삭개오가 우리에게 친숙한 것은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인물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은 고민을 안고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월간 직장인이라는 잡지를 보면 우리 나라 근로자의 70퍼센트 이상이 매일 어떤 특별한 기대감없이 일터로 나간다고 합니다. 직장인 세 명가운데 한 명은 일하기가 죽기보다 싫다고 말합니다. 직장인 세 명 가운데 두 명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장에 다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직장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부는 주부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노인은 노인대로, 모든 사람이 다 만족하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문제가 있고 누구나 아픔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미국인인 그는 태어나기도 전에 부모에게 버림받았습니다. 미혼모였던 생모는 자기 힘으로 아이를 키울 수 없어서 그를 입양 보냈습니다. 양부모는 대학을 나오지고 부유하지도 않았지만 심성이 착하고 좋은 분들이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한 그는 인문학 분야에서 손꼽히는 일류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남들이 다 가고 싶어 하는 대학이었지만 그는 입학한 지 17개월 만에 자퇴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양부모가 노동자로 일하면서 평생 쌓은 적금이 모두 학비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집을 떠난 그는 대학 친구의 방 거실에서 잠을 자며 빈 병을 주워 팔아 끼니를 연명하며 살았습니다. 한 끼를 얻어 먹으려고 11km나 걸어간 적도 있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시작한 사업이 성공을 거두었지만 얼마 후 그는 자신이 설립한 회사에서 도리어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희망을 품고 시작한 일이 비참한 실패로 끝나자 그는 더욱 큰 절망과 좌절 가운데 빠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람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얼마전 죽은 애플 사의 CEO 스티브 잡스입니다(사진). 우리가 대단한 인물로 생각하는 이 사람은 사실 대단한 상황에 살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얼마든지 절망하고 포기할 수 있는 상황속에 살았습니다. 그가 우리와 다른 특별한 상황에서 태어나고 날 때부터 누가 도와주고 하는 일마다 잘되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고난과 악한 환경과 컴프렉스와 아픔들, 그것이 우리와 동일하게 갖는 인간적 조건들입니다. 그가 바로 삭개오였습니다.

그런데 삭개오에게 정말 다행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갈망이었습니다. 남들만큼 먹고 살고 돈도 조금 모았지만 늘 무엇인가를 찾는 갈망, 갈망은 곧 타는 목마름입니다. 현재의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영혼의 갈증, 처음에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예수님이 여리고에 오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는 무엇인가 이끌려 거리로 나갔습니다. 거리는 이미 사람들로 인해 발디딜 틈도 없었습니다. 도저히 자기 키로서는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3절을 보실까요? 19:3,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이 할 수 없어”.

 

2절과 3절의 변화를 잘 보셔야 합니다. 2절에서 삭개오는 세리장이요 부자라했습니다. 그렇다면 3절은 이렇게 나가야 합니다. “그가 비행기를 타고 전 세계 여행을 떠났더라”. 2, “삭개오는 세리장이요 부자라”, 3, “그가 골프장같은 그림같은 집을 짓고 호화호식하며 살았더라”. 이렇게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다시 보십시오. “삭개오는 세리장이요 부자더라”. 3,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 왜 부자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려고 하는 것입니까? 부자와 예수님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입니까? 그의 무엇이 그가 평생 살아온 삶과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을 갖게 했습니까? 생의 갈증입니다. 생의 갈증은 대개 삶에 대한 불만족에서 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 살아도 마찬가지고 꿈을 다 이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자기의 삶에 만족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까를로 마짜라는 브라질 작가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프랑스 어느 마을에서 스페인 산티아고 성 야고보 교회까지 수 백 킬로를 걸어 순례를 했습니다. 그리고 순례영성이라는 책을 썻습니다. 이 책에서 그가 말했습니다. “어느 곳이나 인간이 지닌 근원적인 열망과 향수를 잠재워줄 영원한 고국은 없다. 영혼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에 인간은 어디에서나 행복하지 않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누구도 인생의 갈증이 풀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갈증은 먹고 마시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면 풀립니다. 그러나 영혼의 갈증은 영혼의 집, 곧 하나님께 돌아가기 전에는 해소되지 않습니다. 삭개오의 마음속에도 이런 갈증이 있지 않았을까? 직장도 안정되고 돈도 남보다 많이 벌어 부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영혼의 갈증이 그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3절을 보시겠습니까?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여기에 본다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본다는 말은 에제데이”, 눈으로 본다는 말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그리워 하며 본다는 말입니다. 군대 생활하는 아들이 어머니 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시집살이에 지친 딸이 친정어머니 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마음에 간절한 소원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도 이 소원이 있습니까? 세상에서 이것 저것 다 해보았지만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영혼의 갈증, 그 갈증을 안고 오늘 하나님께 나오셨습니까?

 

예수님이 삭개오를 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삭개오의 갈망을 알아 보셨습니다. 삭개오가 뽕나무에서 예수님을 내려다 보고 있는 순간, 갑자기 예수님이 뽕나무를 바라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5절입니다.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참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누구도 삭개오가 뽕나무 위에 있다는 말을 해 준 적이 없습니다. 더구나 뽕나무는 속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 삭개오가 올라간 뽕나무는 우리 나라 뽕나무와는 다릅니다. 우리 말로는 뽕나무로 번역되었지만 사실은 돌무화과 나무입니다. 이 나무의 특징은 잎이 무성하다는 것입니다. 너무 잎이 무성해서 그 나무로 올라가면 그 나무에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나무위에 있는 사람은 나무 잎사귀틈사이로 밖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무 밖에 있는 사람은 무성한 잎때문에 나무 안에 있는 사람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삭개오를 보라보신 것입니다. 아무도 몰랐고 아무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삭개오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불렀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쳐다 보셨다는 말입니다. 이 말이 우리 말로 여러 가지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올려다 보았다고도 하고 우러러 보았다고도 했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성경에서는 예수께서 나무 밑에 오셔서 올려다 보았다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 자리에서 흘끝 보신 것이 아니라 나무 밑에 까지 걸어와서 고개를 들고 나무위를 쳐다 보셨다는 것입니다. 원문은 아나브레포입니다. “아나”, “위를”, “브레포” “보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얼마나 바쁘신데 삭개오 하나 보려고 뽕나무까지 걸어갑니까? 예수님 말씀을 듣던 그 많은 여리고 사람은 무엇입니까? 길가에 있던 수많은 여리고 사람이 삭개오 하나만 못하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설교하시다가 그냥 눈을 들러 쓱 봐주기만 해도 감사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삭개오를 보려고 다른 사람들을 제치고 나무 밑까지 걸어서 삭개오를 올려다 봅니까? 보통은 누가 누구를 올려다 봅니까? 밑에 있는 사람이 위에 있는 사람을 올려다 봅니다. 키작은 사람이 키 큰 사람을 올려다 봅니다.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올려다 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사람입니다. 그나마 키작고 죄많은 보통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 죄없고 의로우신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신 그 분이 죄인쪽으로 다가와 그를 바라보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 여러분 중에 누가 오늘 하나님의 눈길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렇게 바쁘신 분이 나같은 사람 하나 봐 주실까 알아 주실까 생각합니까? 오늘 누구의 인도로 처음 교회 나오신 여러분, 어쩌다 교회 나왔는 데 아는 사람도 없고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으니 그냥 앉아 있다 가면 된다고 생각합니까?

 

20104월 초, 서울 서초동 가정법원 소년법정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고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날 16살된 A양이 서울 도심에서 친구들과 함께 오토바이등을 훔쳐 달아난 혐의로 법정에 섰습니다. A양은 지난 해부터 14건의 절도, 폭행을 저질러 이미 한 차례 소년법정에 섰던 전력이 있었습니다. 법대로 한다면 그는 소년보호시설 감호위탁같은 무거운 보호 처분을 받을 수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재판을 맡은 김귀옥 부장판사는 A양에게 아무 처분도 내리지 않는 불처분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가 내린 처분은 A양이 의자에서 일어나 판사를 따라 몇 마디를 외치는 것뿐이었습니다. 김 판사가 그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A, 이제 일어나봐”. 어개를 잔뜩 움츠리고 있던 A양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판사가 말했습니다. “, 나를 따라서 크게 외쳐 봐.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이다“. 예상치 못한 재판장의 요구에 A양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그러자 재판장이 말했습니다. “더 크게 말해봐. 나는 무엇이거나 할 수 있다” “나는 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 ”나는 세상에는 혼자가 아니다”. 재판장의 말을 따라 하던 A양이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고 말할 때 참았던 눈물이 터졌습니다.

 

A양은 본래 학교에서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며 간호사를 꿈꾸던 공부잘하는 발랄한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작년 초, 남학생 여러 명에게 끌려가 집단폭행을 당했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삶은 급격하게 바뀌었습니다. A양은 사건의 후유증으로 병원 치료를 받았고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신체 일부가 마비되었습니다. 심리적 고통과 죄책감에 시달리던 A양은 그 뒤부터 학교 생활을 적응하지 못하고 비행 청소년과 어울리면서 범행을 저지르기 시작했습니다. 판사는 한없이 울고 있는 A양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A양은 지금 가해자로 재판정에 섰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망가진 삶을 보면서 누가 A양이 가해자라고 말하겠어요? 아이의 잘못이 있다면 사회가 있고 더 잘못이 있다면 나같은 지도자들에게 있지 않겠어요?” 그 말을 하면서 눈시울이 붉어진 재판장은 눈물로 범벅이 된 A양에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중요할까? 그건 바로 너야. 그 사실만 잊지 않으면 너는 성공할 수 있어. 그러면 지금처럼 힘든 일도 이겨 낼 수 있어”. 그러면서 일어서더니 단밑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두 손을 쭉 뻗어 A양의 손을 곽 잡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음 같아선 너를 안아주고 싶지만 너와 나 사이에 법대가 가로막혀 있어 그럴 수 없구나. 그러나 한 마디만 더 하고싶다. 지나간 과거는 어쩔 수가 없지만 미래는 네가 바꿀 수 있다는 것을 한 시라도 잊지 마라”. 그리고 그 자리에서 A양을 석방되었습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읽고 거의 성경을 읽는 것 같았습니다. “, 법조계에 문제가 있다고 해도 아직 훌륭한 법조인도 많이 있구나”.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그렇게 용서하시겠구나. 우기가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시는 하나님”, “네 과거는 어쩔 수 없어도 네 미래는 네가 바꿀 수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49:16,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의 손바닥에 우리 이름을 새겼다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의 성벽이, 우리의 문제가, 우리가 넘어야 할 인생의 과제가 항상 하나님앞에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씀이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것을 아십니까?입니다. 4복음서에만도 예수님이 직접 두려워 말라하신 말씀이 21번이나 나옵니다. 10:31, 8:50,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14:27,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12: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17:7,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내 아픔, 내 눈물, 내 문제를 아시고 두려워 하지 말라 하신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삭개오는 다시 일어났습니다

삭개오의 놀라운 제2의 인생은 그가 뽕나무에서 내려올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5절뒷부분을 다시 보십시오. 19:5,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리라 하겠다 하시니”. 삭개오가 뽕나무에서 내려오자 예수님은 그와 함께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도란 도란 밤새워 함께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낸 하룻밤, 삭개오에게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요? 우선 무거운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을 것입니다. 삭개오를 그동안 붙잡고 있었던 것은 무거운 죄책감이었습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부자가 되긴 했지만 그것이 늘 양심이 걸렸습니다. 삭개오의 마음은 마치 칙칙한 뽕나무 잎사귀처럼 무엇인가 누르고 있었습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두려움의 실체는 죄의식이었습니다. 죄를 지으면 반드시 죄책감이 생깁니다. 죄책감에 눌려살면 자유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나오면 모든 죄책감이 사라집니다. “예수앞에 나오면 모든 되 사하고 주의 품에 안기어 편히 쉬리라”.

 

예수님과 함께 보낸 그 날 밤, 삭개오에게 생긴 또 하나의 변화는 예수님과의 교제가 시작된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고 우리와 멀리 지내는 분이 아닙니다. 죄를 용서하고 함께 삽니다. 삭개오는 늘 손가락받으며 살아온 사람이라 변변한 이웃이 없었습니다. 누구하고 마음을 열고 대화 한 번 제대로 나누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외로웠습니다. 그러던 그가 밤새도록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외로움이 사라졌습니다. 유대인 엘리에젤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하나님은 이야기하고 싶어서 사람을 만드셨다”. 이야기하지 못해 심심한 쪽은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이야기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 나오면 대화가 회복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보낸 그 날 삭개오에게 생긴 또 하나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삶의 의미의 변화입니다. 지금까지 삭개오는 돈만 벌면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돈은 많고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는 데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돈만 가지고 살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님앞에 서자 다른 무엇도 예수님보다 더 소중한 것을 알았습니다. 절대자앞에서는 모든 것이 상대화됩니다. 삭개오는 순간에 없어질 것을 붙들고 영원한 것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돈이 전부였으나 돈 이상의 세계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앞에서 이렇게 결단했습니다. 8절입니다.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마음에서 변화되자 그 변화가 밖으로 나타났습니다. 마음에서 자유를 얻자 물질에서도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변화된 삭개오가 어디로 갔을까요? 우리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합니다. “삭개오가 예수님 만나고 변화된 후 아마도 세리를 그만 두었을 것이다. 아마도 직업도 바꿨을 것이다. 아니 다른 곳으로 이사갔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늘 말씀 어디를 봐도 예수님 만난 삭개오가 변화된 후 세리라는 직업을 그만 둔 흔적은 없습니다. 직업을 바꾸거나 다른 곳으로 이사간 흔적은 더구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 만난 후 신학교 갑니다. 최선이 아닙니다. 예수님 만나고 겪은 변화는 내가 하던 일을 그만 두는 은혜가 아니라 내가 하던 일을 잘하는 은혜입니다. 예수믿고 변화되었다고 다 신학교 가면 누가 공무원하고, 누가 회사 운영하고, 누가 가정 주부합니까? 직업을 바꾸는 변화가 아니라 마음을 바꾸는 변화가 더 중요합니다.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의 은혜만 있으면 우리는 언제나 승리한다”. 지난 7, 저희 부부가 딸과 함께 제주도에 갔습니다. 딸의 유학을 앞두고 며칠이라도 시간을 같이 보내기 위해서 였습니다. 올레 길을 찾다가 가장 쉬어 보이는 올래 10번으로 결정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외돍개에서 시작해서 강정마을까지 가는 코스였습니다. 그 길은 바닷길을 끼고 이어져서 참 아름다웠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제자 앞바다를 보며 우리는 넋을 잃었습니다. 우리를 가장 감동시켰던 것은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였습니다. 그 많은 물이 대체 어디서 오면 어디로 가는지 파도는 계속 밀려오고 밀려 갔습니다. 딸이 말했습니다. “아빠. 파도가 계속 밀려와요.” 그때 제가 불연 듯 감동받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 그거 아니?” 딸이 말했습니다. “뭔데?” “천 년 전에도 파도는 똑같이 밀려왔다”. 마치 제가 천년전에도 거기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또 말했습니다. “우리가 죽고 난 천년 후에도 이 파도는 계속 밀려올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파도에 발을 담갔습니다. 밀려오는 파도가 우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천년 전에도 밀려왔던 파도가 천년 후에도 그렇게 밀려 온다고 생각하니 새삼 자연의 위대함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제가 말하는 말을 잘 들으세요. “하나님의 은혜도 우리가 천 번을 넘어져도 또 다시 우리에게 밀려올 것입니다.” 파도 같은 하나님의 은혜, 그 변치 않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한 우리가 흔들려도, 우리가 넘어져도, 우리가 실수해도, 심지어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도 하나님의 은혜의 피도는 우리에게 밀려 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한 우리는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한 우리는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삭개오를 다시 일으켰던 하나님의 은혜, 다윗, 엘리아, 베드로를 다시 일으켰던 하나님의 은혜로 주여, 오늘 우리도 일으켜 주옵소서.

 

 

 

 

 

 

 

 

 

 

 

 

 

 

 

 

 

 

19:1-10 2013.11.24()

다시 일어나세요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흔들리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꿏둘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윘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젖지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었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아플 수도 없는 마흔이다>().

 

<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는다>().

승리는 넘어진 수보다 한번 더 일어나는 것이다”.

 

24: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삭개오에게는 갈망이 있었습니다.

19: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19: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스티브 잡스(사진)

 

19:3,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이 할 수 없어”.

 

까를로 마짜, “어느 곳이나 인간이 지닌 근원적인 열망과 향수를 잠재워줄 영원한 고국은 없다. 영혼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에 인간은 어디에서나 행복하지 않다”(순례의 영성)

.

예수님이 삭개오를 보셨습니다.

19:5,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지나간 과거는 어쩔 수가 없지만 미래는 네가 바꿀 수 있다

 

49:16,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14:27,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12: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17:7,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삭개오는 다시 일어났습니다

19:5,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리라 하겠다 하시니”.

 

(1) 죄책감

(2) 예수님과의 교제

(3) 삶의 의미의 변화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천 번을 넘어져도 또 다시 우리에게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