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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2:22-40 희망을 위해 오셨습니다 2013.12.1(일)

2:22-40 2013.12.1()

 

희망을 위해 오셨습니다

 

오늘은 12월 첫째 주, 교회력으로는 대림절입니다. 대림절은 예수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립니까? 왜 기다립니까?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면 몇 년전 칠레 광산에 매몰되었다 살아난 광부들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당시 광부 33명이 지하 700미터 땅속에 매몰되어 생사를 모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세계는 깜짝 놀랐습니다. 결국 69일만에 구조되었는 데 원통형 캡슐을 지하에 넣어서 그것을 타고 올라오게 했습니다. 먼저 굴착기를 이용해 수직으로 땅을 파고 구멍을 뚫었습니다. 그리고 캠슐을 집어 넣었습니다. 캡슐의 크기는 66센티로 사람 하나가 들어오고 나갈 정도였습니다. 그 캡슐안에는 사람을 구조하는 데 필요한 산소공급기, 통신장비, 조명장치, 안전벨트등이 들어 있었습니다. 결국 캠슐을 통해 광부들이 하나씩 밖으로 나왔는 데 사람 한 명 한명이 캡슐에서 나올 때마다 온 세계가 환호했습니다.

 

가끔 그 모습을 기억할 때다 어쩌면 그 이야기가 성탄에 오신 예수님 이야기와 비슷한지 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사람 33명이 땅에 묻혀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자 칠레정부와 온 세상이 나서서 머리를 짜냈는 데 인류 전체가 죽어가는 데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을 연구를 하지 않았을까? 사람을 건져내기 위해 가장 안전한 원형 캠슐이라는 방법을 연구해냈다면 하나님도 인간을 구원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을 연구하지 않았을까? 그 방법이 예수님이 아니었을까? 캠슐이 사람 하나 하나를 구원하는 방법이었다면 예수님도, 십자가도 그런 방법이 아니었을까? 켑슐 하나가 땅속에 묻힌 사람들을 구해내는 유일한 희망이었다면 예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는 희망이 아닐까?

 

그렇습니다. 성탄의 메시지는 희망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희망이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희망이 있어야 우리가 삽니다. 희망은 우리가 사는 이유요 능력이요 힘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지금 왜 살아 있는지 스스로 물어보시겠습니까? 어떤 희망 때문입니다. 히브리어로 희망티크바라 합니다. 이 말은 노끈이란 뜻입니다. 이 말은 꼬다는 말 콰바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 말과 비슷합니다. 노끈처럼 희망은 우리를 미래로 꼽니다. 희망은 노끈을 붙잡는 것입니다. 이 말은 또 바라보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희망은 바라보는 것입니다.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여기서 앙망하다, 바라보다티크바입니다. 그것이 희망입니다. 희망은 바라보는 것입니다. 앙망하는 것입니다. 노끈처럼 붙잡는 것입니다. 이번 성탄을 통해 여러분이 예수님을 희망으로 붙잡기 원합니까? 바라보기 원합니까?

 

먼저 희망은 기다림으로 시작합니다.

오늘 말씀에 예수님을 기다리던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시므온이요 다른 하나는 안나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다 나이 먹고 늙었습니다. 시므온의 나이는 나오지 않지만 전후 문맥으로 볼 때 그가 노인임이 분명합니다. 29절에서 눅2: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한 것을 보면 아마도 그가 예수님 만나기만 하면 더 이상 죽어도 좋다고 생각할만큼 나이가 들었다는 느낌을 줍니다. 안나의 나이를 암시하는 기록은 없습니다. 37절에 과부된 지 84년이 되었다고 했으니 만일 20세에 과부가 되었다 하면 나이가 104세입니다. 보통 이스라엘은 남자는 12, 여자는 13살에 성인식을 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결혼을 허락합니다. 만일 안나가 그때 결혼했다면 7년후에 남편이 죽었으니까 그래서 안나의 나이가 104세입니다. 그렇다면 그 나이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나이가 많으면 할 일이 적어지기 때문에 희망도 점점 줄어 듭니다.

 

희망이 없는 것은 나이 때문이 아닙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이 희망이 없었습니다. 우선은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이었습니다. 주후 37년부터 주전 4년까지 33년동안 헤롯이 이스라엘을 강권통치한 후 죽었습니다. 헤롯 이후 나라는 셋으로 나눠져 세 아들이 다스렸습니다. 그중에서 유대를 다스렸던 큰 아들 아켈라오는 무능한 사람이었습니다. 9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리다가 로마의 황제 시저의 소환을 받아 귀양가서 죽습니다. 그리고 그 해부터 로마의 총독정치가 실시됩니다. 총독정치는 주후 6년부터 나라가 망한 주후 73년까지 계속되었고 그때까지 총독은 모두 10명이 다녀갔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한 빌라도는 5대 총독이었습니다. 여러분, 나라가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오늘의 주인공 시므온과 안나는 성전에 나와 기도합니다. 왜 성전에 나왔습니까? 성전은 기도하는 곳입니다. 다른 데 가봐야 희망이 없습니다. 나라도 꿈도 먹고 사는 일도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희망입니다. 그래서 25절을 보십시오. 2:25-26, “에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게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36-37절을 보시겠습니까? 2:36-37, ”또 아셀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84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시므온도 안나도 성전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이었고, 그래서 성전에 나와 기도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의 끈이었습니다.

 

여러분, 왜 기도하는지 아십니까? 희망 때문에 기도합니다. 희망 때문에 기도하고 기도하면 희망이 생깁니다. 저희 고향 선배 한 분이 소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지금은 퇴직하고 고향교회를 지킵니다만, 이 분이 언젠가 간증한 것이 기억납니다. 총알이 빗발치는 어느날, 전장터에서입니다. 그날도 소대원을 아끌고 베트콩과 한창 전쟁중이었는 데 동료 하나가 총에 맞아 부상을 당했습니다. 총알은 빗발치고 도무지 그 동료를 구할 상황이 아니었는 데 옆에 있던 병사가 한참 시계를 쳐다 보더니 갑자기 뛰어가 부상당한 동료를 엎고 왔답니다. 다행히 부상은 경미해서 살릴 수 있었는 데 얼마후에 조용한 시간에 물었답니다. 며칠전 부상당한 동료를 구할 때 왜 시계를 보고 있었냐고. 왜 시계를 보더니 부상당한 동료에게 달려갔냐고. 그랬더니 그 병사가 말했답니다. “소대장님, 저의 어머니가 매일 낮 12시가 되면 항상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거든요. 그날도 거의 12시가 되어 어머니 기도를 믿고 뛰어갔죠”. 기도의 힘이었습니다. “지금 어머니가 나를 위해 기도한다. 어머니가 기도하니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실 것이다”. 이 믿음으로 그가 달려갔습니다. 결국은 부상당한 병사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는 희망이고 희망은 기도에서 옵니다. 그러면 기도를 통한 희망의 본질은 무엇일까? 기다림입니다. 다시 25-26절을 보시겠습니까? 2:25-26, “에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게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기도는 희망이고 희망은 기다림입니다. 우리는 기도하기 때문에 희망이 있고 희망이 있기 때문에 기다립니다. 기도의 아들이 희망이고 희망의 본질이 기다림입니다. 언제나 희망은 기다림을 통해 옵니다.

 

헤밍웨이의 명작, “노인과 바다는 무려 80번이나 고쳐 썻답니다. 한번에 쓴 것이 아닙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그림 한 점 그리는 데 10년이 소요되었다고 합니다. 괴테의 파우스트도 괴테가 23살때부터 쓰기 시작하여 82세까지 무려 60년이나 걸려 완성했다고 합니다. 명작은 하루 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대나무를 아십니까? 죽순이 자라 대나무 되는 것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지만 대나무가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적게는 60, 길게는 120년을 기다려야 한답니다. 기다림이 꽃을 피웁니다. 아브라함을 아십니까? 아브라함은 아들을 얻기 위해 25년을 기다렸습니다. 4:8절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아브라함의 신앙은 기다림의 신앙, 그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기다렸고 기다리면서 믿음이 자랐습니다. 모세를 아십니까? 모세의 일생은 기다림의 일생, 11:24-26절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여기에 모세의 삼 단계 희망이 있습니다. 첫째 거절하고”, 둘째 더 좋아하고“, 셋째 바라보고“, 긴 기다림이 그를 승리하게 했습니다. 희망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거절해야 합니다. 모세는 애굽의 공주의 아들을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더 좋아한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했습니다.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바라보았습니다. 고난에 찬 현재를 바라보지 않고 희망에 찬 미래를 바라보았습니다. 희망은 바라보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희망이 생깁니다. 희망이 생기면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희망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시므온과 안나가 누구를 기다렸느냐가 중요합니다. 26절부터 보십시오. 2: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를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여기에 시므온이 가졌던 희망의 실체가 나옵니다. “주의 그리스도”,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그가 죽지 않을 것이라는 성령의 지시입니다. 성령이 기도하는 그에게 희망의 실체를 보게 했습니다. “주의 그리스도”.

 

이스라엘은 아기가 태어나면 성전에 들어가 예식을 행합니다. 그것을 결례라고 합니다. 그 뜻은 정결하게 하는 예식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를 데리고 40일만에 성전에 올라갑니다. 그 이유는 아이를 낳으면서 어머니가 부정해졌기 때문에 부정을 씻기 위한 것입니다. 그 아이가 장자일 경우에는 부정을 씻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장자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부모가 예수님을 안고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미문이라 부르는 문앞에 섰습니다. 그랬더니 제사장이 나왔습니다. 부모가 말했습니다. “제사장님, 저희에게 하나님이 아들을 주셔서 하나님께 드릴 정결예물과 함께 왔습니다”. 보통 정결예물은 양으로 드리지만 가난한 사람은 비들기로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했기 때문에 그 부모가 비들기 한 쌍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제사장은 준비한 피를 부모의 머리에 뿌리며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하나님 여호아께서 너희 예물을 받으시고 너희를 정결케 하시기를 원하노라”. 예수님 부모는 아멘하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이 광경을 시므온이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아기를 낳고 성전에 나와 제사장에게 축복받는 가정이 한 두 가정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려준 분이 계셨습니다. 성령님입니다. 성령이란 말이 오늘 말씀에 두 번 나옵니다. 26,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아이들이 부모의 품에 안겨 성전을 오르내렸으나 예수님을 알아보게 한 것은 성령의 감동이었습니다. 안나도 마찬가지입니다. 37, 2:37,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기도외에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기도했더니 성령의 감동을 받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수님을 알아 본 것입니다.

 

왜 성령님은 예수님이 시므온과 안나가 만날 희망이라고 말한 것입니까? 지난 주에 제가 고린도전서 13장을 읽었습니다. 보통 사랑장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13장을 읽으면서 유달리 많이 눈에 띄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참고 기다리고 바라고”, 사랑으의 특징으로 고전13장이 가장 많이 말한 것은 참고 기다리고 바라고입니다. 고전13:7입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왜 사랑은 참고 기다리고 바랄까? 사랑에 어떤 속성이 있어서 그럴까? 사랑에는 희생이 있습니다. 헌신이 있습니다. 자식들은 부모가 자기들을 위해 희생한 것을압니다. 자녀가 부모의 사랑을 아는 것은 말이 아닙니다. “사랑한다”, “예쁘다말하지 않아도 부모는 늘 자식을 위해 희생합니다. 제가 저희 부모님을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일생 동안 저희 부모님은 저에게 사랑한다한번 말한 적이 없지만 저는 부모님이 저를 사랑한 것을 잘 압니다. 희생 때문입니다. 일생동안 먼지 구덩이 방앗간에서 일하셨습니다. 일생동안 논밭을 가꾸며 가을이면 쌀이며 감이며 고구마를 보내셨습니다. 이번에도 보내셨는 데 아침 저녁으로 제가 먹는 것이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왜 시므온이 아기 결례를 보며 희망을 발견했습니까? 결례는 우리 죄를 씻는 속죄의 상징입니다. 구약적으로 말하면 아이를 낳은 어머니들은 부정합니다.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부정해서는 하나님께 나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양이든 비들기든 무엇인가로 부정을 씻어야 합니다. 마리아도 비들기로 자신의 부정을 씻었습니다. 왜 예수님이 우리의 희망입니까? 우리를 위해 베푸신 희생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희생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그 희생으로 피를 흘려 우리 죄를 씻었습니다. 그것을 말한 것이 롬5:5입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어떤 면이 우리에게 소망을 주었는가? 부어졌다는 것입니다. 양동이에 가득 물을 채워 우리에게 부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부음이요 희생입니다.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았습니다. 우리 죄가 그대로 있었다면 하나님께 나가지 못했을텐데 예수님이 희생함으로 우리가 하나니님께 나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5:5절이 오기전에 롬5:2절이 있습니다. 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이것이 희망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희망의 걸림돌을 제거해 주셨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어떤 면이 우리에게 희망입니까? 사랑은 영원한 약속입니다. 한번만 사랑하고 마는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끊임없고 변함도 없습니다. 사랑에는 미래에 대한 약속이 있습니다. 과거에 희생한 사랑은 미래를 위해서는 약속합니다. “내가 영원히 너를 버리지 않을께. 내가 영원히 너와 함께 할께“. ,이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을 뿐 아니라 영원히 함께 하겠고 또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신약의 모든 말씀은 이 약속을 선포한 것입니다. ”내가 다시 오리라“. 그래서 요한계시록 마지막 말씀을 아십니까? 22:20,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천년 교회의 희망이 여기 있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초대 교회 핍박의 카타콤에서 성도들이 소리쳤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1949년 모택동이 문화혁명으로 수많은 그리스도인을 죽이고 스탈린이 시베리아를 순교의 피로 물들이고 일제시대, 6.25 때 우리의 선배들이 감옥에서, 역사의 현장에서 순교자 죽어갈 때 기도했던 기도가 이것이었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것이 희망입니다. 희망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어 절망의 원인인 죄를 정복함으로부터 시작되어 예수님이 다시 오시겠다고 마약속하신 그 찬란한 미래의 약속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이 희망의 시작이고 희망의 완성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래서 딤전1:1이 말합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예수님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아멘.

 

우리가 사는 것은 희망때문입니다.

그러면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만난 시므온과 안나는 그 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먼저 시므온입니다. 2:30-32,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시므온이 이 기쁨을 어디서 얻겠습니까? 예수님 통해 얻었습니다. 안나는 어떻습니까? 38절입니다. 2: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104세에 전도자가 되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그 많은 나이에 희망을 갖게 했습니까?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희망을 얻었고 그리고 희망 때문에 삽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확실히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히 희망을 품고 살았고 희망을 말하며 살았고 희망을 퍼뜨리고 살았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어떤 유명한 화가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선생님이 그린 그림 가운데 가장 잘 그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가 대답했습니다. “다음에 그릴 작품이요”. 아마도 시므온과 안나는 그들이 전애 살았던 것보다 앞으로 살날을 더 기대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므온과 안나는 더 건강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시카고 트리뷴이라는 잡지에서, 아주 큰 절망을 경험한 사람은 동맥경화증에 걸릴 확률이 낙관적인 사람보다 무려 20%나 높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 말은 희망을 안고 사는 사람이 그렇지 않는 사람보다 더 건강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므온과 안나가 혹 나이가 많아 죽었을 수도 있지만 그들은 아마 이 세상에서의 삶보다 천국에서의 삶을 더 소망하며 기쁘게 죽었을 것입니다.

 

희망이 우리의 힘입니다. 13:12,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거니와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곧 생명 나무니라”. 희망이 없거나 더디 이루어지면 우리 마음이 상합니다. 그러나 희망이 있으면 모든 낙심과 불안도 이깁니다. 42: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이것은 다윗의 고백입니다. 다윗은 사울 때문에 12년을 12번이나 광야로 피해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정말 못 견디는 것은 광야가 아니라 희망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광야에서 못 먹고 못 자는 것은 참을만 합니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것은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마다 그가 한 것은 자기 영혼을 향하여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소리친 것입니다. 그것이 시42-43편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자기 영혼을 향하여 낙심하거나 불안해 하지 말라고 세 번이나 소리치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다같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여러분도 여러분을 향해 소리치세요. 한번은 길을 지나가는 데 어떤 할아버지가 혼자 말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영철아, 괜찮아. 영철아, 괜찮아”. 지나가는 사람이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영철이가 누구예요? 손자예요?”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아니야, 나야. 내가 내에게 말하고 있는거야”.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다윗처럼 우리 영혼을 향해 말해야 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러나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선포한 분은 하나님입니다. 2차 대전 후 영국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2차대전의 폐허속에 모든 사람이 고통스럽게 살 때 고스라는 한 할머니가 온 가족을 모아놓고 말했습니다. “빈 콜라 병과 코르크마개와 메모지를 준비해라”. 그 이유는 자신이 기도하다가 사람들에게 하나님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가족이 메모지에 희망의 성경구절을 쓴 다음 종이를 접어 콜라 병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콜라 병 수백개를 해변으로 가지고 가서 파도 위에 던졌습니다. 그 후 놀랍게도 감사의 편지가 바다 건너에서 오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 네델란드, 독일, 이 할머니가 197411월에 돌아가셨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한 달 후에 온 편지 한 부분입니다. 네델란드에서 온 편지였습니다.

 

친애하는 고즈 부인. 저는 지금 깜박이는 촛불 아래에서 이 글을 씁니다. 제가 촛불 아래에서 편지를 쓰는 이유는 저희 농장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 남편은 지난 가을에, 트랙터가 전복되는 바람에 그 밑에 깔려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제게 남긴 거라곤 열한 명의 어린 아이들뿐입니다. 남편이 죽은 후로, 은행은 어서 집을 비우라고 통고를 하루가 멀다 하고 해오고 있습니다. 지금 저희 집에는 먹을 음식이라고는 빵 한 덩어리밖에 없습니다. 어느날 제가 일하려고 돌멩이로 얼음을 깨고 있는데, 얼음이 갈라지면서 콜라 병이 쑥 하고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빈 병이었는데, 안에 무언가 적어놓은 듯한 종이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병마개를 열었는데 놀랍게도 그 쪽지에는 이런 말씀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9:4,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6: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7:19,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좋은 소망을 주시나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감사합니다. 제가 잊고 있었던 희망을 다시 붙잡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든 것을 잃었지만 희망은 잃지 않겠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날은 성탄절을 준비하는 아침이었습니다. 온 식구가 그 편지를 성탄에 주신 하나님의 선물로 알고 감사했습니다. 누구에게나 희망이 필요합니다. 바다 건너나 여기나 언제나 필요한 것이 희망입니다. 하나님이 희망을 주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성탄절이 그 희망의 시작이요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날이 그 희망의 완성입니다. 우리는 이 대림절에 그 희망을 기다립니다.

 

 

 

 

 

 

 

 

 

 

 

 

 

 

 

 

 

 

 

2:22-40 2013.12.1()

 

희망을 위해 오셨습니다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먼저 희망은 기다림으로 시작합니다.

2: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2:25-26, “에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게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36-37, ”또 아셀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84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희망의 본질은 기다림이다.

 

2:25-26, “에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게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4: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2: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를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37,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고전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왜 하나님의 사랑이 희망인가?

 

(1) 희생 때문에

5: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2) 약속 때문에

22:20,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딤전1: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우리가 사는 것은 희망때문입니다.

2:30-32,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2: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13:12,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거니와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곧 생명 나무니라”.

42: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9:4,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6: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7:19,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좋은 소망을 주시나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