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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이윤재목사

눅2:8-14 평화를 위해 오셨습니다 2013.12.8(일)

2:8-14 2013.12.8()

 

평화를 위해 오셨습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 셋째 주일입니다. 한 주간동안 이스라엘에 잘 다녀왔습니다. 목회자 30명을 모시고 이스라엘 전역을 돌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예수님이 탄생하신 베들레헴 탄생교회에 갔는 데(사진) 이 교회는 이미 성탄 준비로 들떠 있었습니다. 대형 트리가 불을 밝혀 수많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고 있었습니다(사진). 우리 목회자들도 거기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며 목소리높혀 찬양했습니다. 문문제는 다음 날이었습니다. 저녁 늦게 베들레헴에 들어와 보지 못했던 장벽을 본 것입니다(사진). 분리장벽이었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틴을 가로지르는 이 분리장벽은 2002년에 만들어 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분리장벽은 현재 200킬로가 완성되었는 데 다 완성되면 총 730킬로 우리 나라 휴전선 길이 248킬로보다 세 배가 깁니다. 이 장벽은 이스라엘 입장에서 계속된 팔레스틴의 테러를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사실 그 목적대로 테러가 많이 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팔레스틴 사람들의 인권과 생존권이 크게 위협받는 것도 사실입니다. 주로 이스라엘에 3d 업종에 종사하여 먹고 사는 팔레스틴 사람들은 아침 저녁으로 이 장벽을 검문을 받으며 드나들어야 합니다. 어떤 가족은 장벽 밖에 살기도 하고 어떤 가족 장벽 안에 살기도 합니다. 2004년에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이 장벽은 불법이라고 철거하라고 판결했지만 이스라엘은 테러가 없었다면 장벽도 없었을 것이라고 수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르는 이름도 다릅니다. 팔레스틴은 분리장벽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은 보안장벽이라고 부릅니다. 한쪽은 테러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한쪽에서는 인권을 유린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베들레헴 성탄교회 트리는 밝혀지고 모든 사람이 아기 예수 오신 것은 찬양하는 데 그 바로 옆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틴을 가르는 장벽이 높이 5미터에서 8미터, 철조망, 전기감지기로 무장된 채 서 있습니다. 2천년전에 오신 예수님의 평화는 아직도 이 땅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일까요? 성탄에 오신 예수님은 아직도 갈등과 전쟁중인 세상에 어떤 해답을 주시려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평화를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말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위해 오셨다고. 예수님은 오늘 가장 낮은 자들에게 오셨고 그들은 모두 평화가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8절을 보실까요? 2:8,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예수님이 오신 그날 밤 이 소식을 가장 먼저 알린 것은 들에 있던 목자들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만일 아들이나 손자를 보았습니다. 참으로 귀한 자손입니다. 장남이나 장손입니다. 그나마 오랫동안 아이가 없다 늦게 태어낫습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가장 먼저 알립니까? 아마 부모님, 친정 부모님, 형제들입니다. 대부분 가족입니다. 교회 다닌 분들은 목사님에게, 교구장에게, 교회 권사님, 목장식구들에게 알릴 것입니다. 친구들에게도 알립니다. 그러나 동네 고아원에 알립니까? 그 아이와 아무 상관없는 사회복지관에 알립니까? 병원 중환자실에 알립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특이합니다. 태어나자 마자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아마 가족들이라면 베들레헴이나 나사렛에 살던 유다지파 친척들일 것입니다. 그들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성전에서 일하던 제사장, 서기관들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 고관, 귀족들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목자들에게 알렸습니다. 한 밤중에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 언뜻 들으면 낭만적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목자는 중노동자입니다. 낮에는 무더워 일찍 나오고 더운 오후에 잠깐 쉬었다가 밤늦게까지 일해야 합니다. 8절을 다시 보십시오. 2:8,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왜 목자들이 밤에까지 일했겠습니까? 그래야 양을 키우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먹고 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목자들은 존경받는 직업도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사회입니다. 율법사회란 모든 것을 정결과 부정으로 구별하는 이분법적 사회체계입니다. 다른 평가는 없습니다. 오직 정결하냐 부정하냐. 정결하면 선이고 부정하며 악입니다. 돈을 많이 버느냐 적게 버느냐. 그 일이 사회적으로 유익하냐 유익하지 않느냐. 그 직업이 그에게 적성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일이 정결하냐 부정하냐? 그런데 율법은 동물을 부정한 존재로 봅니다. 돼지같은 동물은 먹지도 말 아니라 만지지도 말아야 합니다. 양이나 소는 조금 낫지만 율법에 의하면 죽은 동물의 시신을 만져서도 안됩니다. 만일 만지면 거기에 맞는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목자는 날마다 양을 만집니다. 양의 몸도 만지지만 때로 양의 오물도 만져야 합니다. 살아 있는 양만 만지는 것이 아니라 병든 양, 죽은 양도 만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정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의 소식이 이 목자들에게 처음으로 전해졌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2: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 하는지라”. 중요한 것은 주의 사자가 곁에 섰다는 말입니다. 주의 사자는 천사입니다. 그런데 천사가 부정한 목자들 곁에 섰습니다. 냄새나고 더러운 목자곁에 신령한 천사가 서 있습니다. 서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주의 영광을 비추었습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불입니다. 하나님의 불이 더럽고 추한 목자에게 비췄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이 성탄입니다. 그것이 평화의 주님으로 오신 예수님의 성탄이었다는 것입니다. 평화는 다만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평화는 하나님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오신 것입니다. 평화는 사람 같지 않다고 멀리하던 사람 곁에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사랑의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평화는 하늘의 영광이 땅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한국 초대교회가 그런 교회였습니다.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 한국사회는 양반과 상놈 남자와 여자, 귀족과 천민으로 나눠지던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전파되자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이 사람다운 사람들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1900. 5.14, 한국교회 최초의 목사로 안수받은 사람은 김창식은 머슴이었습니다. 그는 선교사들이 조선의 어린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을 듣고 올링거 선교사의 집에 머슴으로 위장취업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헛소문이었습니다. 선교사는 너무 친절하고 좋았습니다. 그때 감동받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1911년 서울 인사동 승동교회 최초의 장로가 된 박성춘도 머슴이었을 뿐 아니라 백정출신이었습니다. 그가 지금의 서울 관훈동 부근, 백정들이 많은 모여 사는 곳에 살았는 데 어느날 그 아들이 갑자기 중병이 걸려 죽게되자 훗날 세브란스가 된 제중원의 의사 선교사 애비슨이 급히 그를 방문했습니다. 그는 당시 고종의 시의로 궁궐을 출입했는 데 왕의 병을 고치는 그가 백정의 병을 고치러 그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가 아들의 병이 낫게 하자 박성춘은 곧 교회를 나갔습니다. 처음에는 지금의 소공동 롯데호텔 근처에 있던 관당골교회를 나갔는 데 이 교회는 양반들만 나오는 교회였습니다. 양반들이 거세게 항의합니다. “어떻게 양반 교회에 백정이 나올 수 있습니까?” 선교사는 하나님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고 타일렀지만 그들이 완강하게 나오자 백정들만 데리고 나와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지금의 승동교회입니다. 일단 백정들의 교회가 시작되자 서울 장안에 있는 백정, 천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하도 백정들, 첩들, 기생들이 교회에 많아지자 사람들은 이 교회를 첩장교회라고 불렀습니다. 박성춘은 그 교회에서 1911년 최초로 장로가 되었고 그후 정부를 상대로 백정정책차별 철폐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는 훗날 독립협회가 주관하는 만민공동회에 시민대표로 나가 활동했습니다. 이것이 한국 초대교회였습니다.

 

평화는 거룩하게 하늘에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나 아닌 다른 존재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곁에 서는 것입니다. 다시 9,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하나님의 사랑의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와 함께 그도 하나님안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날 밤, 천사의 방문을 받은 목자는 피곤하고 지치고 소외된 모든 인류를 대표합니다. 그날밤 주님은 우리곁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평화입니다.

 

평화는 하늘의 영광과 함께 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주시려는 평화는 어떤 것이었을까? 이번에도 베들레헴 목자들의 들판에서 이것을 묵상했습니다. 베들레헴에 가면 목자들의 들판이 있고 거기에 동굴이 있습니다(사진). 안내인의 설명에 의하면 아마도 목자들이 양을 치면서 이 동굴에서 쉬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자세히 보니 자연 동굴이고 사람 20여명은 쉴 수 있는 공간입니다. 그 동굴에는 목자들에게 나타나 말씀을 전하는 천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습니다(사진). 9절을 보시겠습니까? 2: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여기서 주의 영광이란 말을 다시 주목해야 합니다. 이 말은 본래 성전제사 용어입니다. 옛날 성전에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면 제사장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제사장의 기도를 들으시고 제물을 받았습니다. 이때 제물을 받으시는 표시로 하늘의 불이 임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불로 제물을 살랐습니까? 제물로 대표된 인간의 죄를 사하시기 위함입니다. 제물이 불살라지는 순간 제물을 드린 사람의 죄도 함께 사함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았던 죄가 있어서는 제물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불을 내려 죄로 상징되는 제물을 사르고 우리를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영광입니다.

 

, 그런데 제물은 무엇으로 드렸습니까? 양으로 드렸습니다. 유대인 문헌에 보면 옛날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양을 바쳐 제사할 때 가장 좋은 양은 베들레헴에서 온 양이었답니다. 우리 나라로 생각하면 옛날 왕이 먹던 쌀을 이천이나 여주에서 가져왔다는 말과 같습니다. 가깝기도 하고 품질도 좋습니다. 마찬가지로 옛날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로 드렸던 양은 베들레헴 양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가깝기도 하고 양의 품질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베들레헴은 빵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밀이나 보리가 많이 난다는 것입니다. 왜 천사가 베들레헴 목자에게 성탄의 소식을 처음 전했을까?

 

성탄절은 다른 날이 아닙니다. 하늘의 영광이 불이 되어 내려온 날입니다.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시면서 함께 보내신 것이 영광입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본체로 그 본질은 불입니다. 불은 하나님의 존재의 근원이요 생명의 빛입니다. 이 빛이 세상에 임했습니다. 누구를 통해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그 아들 독생자를 통해 나타났습니다. 세상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불이 그 앞에 있으면 자기를 노출시키기 때문입니다. 불과 다른 존재였던 인간은 그 영광을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어둠에 있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불을 붙이기 원하셨습니다. 12:49, “내가 땅에 불을 붙이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오”. 예수님은 하늘의 불을 가지고 이 땅에 왔습니다. 사람속에 하늘의 불이 붙기를 예수님은 소원하셨습니다. 이 불은 하나님의 영광의 불입니다. 14절을 보시겠습니까? 2:14, “지극히 높으신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중에 평화로다”. 여기에 하늘의 영광과 땅의 평화가 나옵니다. 오랫동안 이 두 가지는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유대교에서 조차도 하늘의 영광은 땅의 평화와 무관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니 하늘에 계시고 사람은 천한 존재니 땅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불은 하늘의 신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프로메테우스란 신입니다. 그것을 빼앗기면 큰 일 납니다. 신의 세계가 망합니다. 그런데 위대한 사건이 성탄절에 일어났습니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내려왔습니다. 땅에 불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불을 주려고 내려왔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땅이 되고 하늘의 영광은 스스로 땅의 평화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탄절입니다.

 

지금은 은퇴한 김진홍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그가 남양만으로 가기 전에 한때 청계천에서 가난한자들을 위해 일했습니다. 그가 한 일은 가난하고 배고프던 시절, 어떻게든지 미군의 식량을 얻어다가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는 일이었습니다. 또 필요한 사람에게 돈도 나눠주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고마운 일이었고 그 자신에게도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 나가던 어느날 한 여자가 소리 소리 지르며 김목사님 집을 두드렸습니다. 그러면서 다짜고짜로 김진홍 목사 어디 있느냐고 소리쳤습니다. 김목사님이 왜 그러냐고 나가서 묻자 그가 말합니다. “당신이 우리 남편을 버려 놓았어. 평생 술쳐먹고 노름하다가 먹을 것 없어서 한동안 자빠져 있더니 당신이 준 밥먹고 돈받고 힘이 나서 노름하고 다시 술쳐먹고 다니니 왜 그런 인간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냐고 소리친 것입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지난번 말씀드린대로 1997, 이 나라에 IMF터지고 수많은 사람이 일자리 잃고 거리로 내 쫓겼을 때 이 나라가 참 어려웠습니다. 한번은 버스터미널을 갔는 데 추운 날, 어떤 사람이 터미널 밖에서 웅크리고 자고 있었습니다. 날씨는 영하인데 그러다가 죽지 싶었습니다. 제가 가까이 가서 그 사람을 깨웠으나 반응이 없었습니다. 교회 청년들을 시켜 급히 병원으로 떼매고 갔는 데 그 날 저녁 그가 죽었습니다. 집도 절도 없는 사람을 교회에서 장례치루고 화장터에 데리고 가 화장을 시켰는 데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매주 수요일, IMF로 인해 집을 잃고 직장을 잃은 실직자들을 위해 교회에서 점심을 제공하기로 했습니다. 50명에서 150명을 육박했습니다. 실직자 식사를 제공하다 보니까 아예 식사하러 교회까지 걸어나오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반찬배달을 시작했습니다. 교회에서 여신도들이 나와 오전에 반찬을 만들면 오후에 남신도들이 반찬을 들고 집집마다 배달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 2년을 했는 데 한번은 거리를 나갔는 데 어떤 사람이 치고 박고 싸우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우리 교회에서 매주 수요일마다 밥먹는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달려가 말렸습니다. 그래도 싸웁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구나“. 그렇습니다. 하늘의 영광이 임해야 진정한 평화가 시작됩니다. 배고픈 자에게 빵을 주면 평화의 일입니다. 그러나 빵만 주어서는 진정한 평화가 없습니다. 허기진 배는 채울 수 있으나 가난한 영혼은 채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에배였습니다. 예배가 시작되고 시간이 지나자 술먹는 사람도 서서히 줄었습니다. 담배피우는 사람은 예배전에 입을 닦고 들어왔습니다. 하늘의 영광이 임하자 땅의 평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의 순서가 중요합니다. 5장에 나오는 산상수훈의 순서를 보면 8절에서 먼저 마음의 청결을 이야기합니다.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요”, 다음 9절에서 평화를 이야기합니다.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그리고 10절로 가면 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왜 이 순서가 중요합니까? 성경이 말하는 평화가 무엇인지 말할 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자 평화의 위치는 어떻습니까? 앞에는 마음의 청결이 나고 뒤에는 의가 나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평화는 마음의 청결에서 나오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있다는 말입니다.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이것이 평화의 시작입니다. 10, “의를 위해 박해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이것이 평화의 목적입니다. 이것이 산상수훈이 말한 평화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많은 사람이 평화를 사회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평화가 운동이라면 마음의 운동입니다. 영적 운동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청결한 마음을 받은 사람이 평화운동을 하는 것이고 그가 이루는 나라는 그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워가시는 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평화를 위해 일할 사람은 운동권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투쟁경력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늘의 영광을 받아야 합니다. 하늘의 불을 받아 마음이 청결해야 합니다. 어떤 경영서적을 보았더니 포드회사 전 ceo였던 돈 피터슨이 이런 이야기를 했답니다. 경영의 3p를 말하면서 people, 사람이 가장 중요하고 그 다음이 product, 제품, 마지막이 price, 가격이랍니다. 가격은 우리가 하는 일의 성과를 말합니다. 경제적, 사회적 이익, 평판, 성공 이런 것이 price입니다. 그런데 그 priceproduct 제품에서 나옵니다. 좋은 제품이 좋은 마진을 낳습니다. 그런데 그 제품은 어디서 왔느냐? people, 사람에게서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격보다 제품이 중요하고 제품보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도표로 그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people > product > price.

 

이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평화운동을 하느냐 보다 그 일을 누가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값싼 평화가 아닙니다. 운동이 아닙니다. 하늘의 영광으로 마음이 변화된 사람이 사는 삶입니다. 산상수훈의 말대로 하면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보다 앞서고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야고보 사도가 이렇게 요약합니다. 3:17절입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야고보가 강조한 순서에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화평보다 성결이 먼저입니다. 마음이 청결해야 화평하다는 말입니다. 이 순서가 바뀌어서는 안됩니다. 85:10절 말씀도 중요합니다. 85:10,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의는 깨끗함입니다. 성결이요 청결입니다. 죄가 없는 것입니다. 그 의가 화평과 입맞춥니다. 다시 말하면 의로워야 화평합니다. 성결해야 평화롭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평화입니다.

 

작년인가 나온 책중에 좋은 책이 있습니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철학자 한병철교수가 쓴 <피로사회>입니다. 이 책은 작년 대선이 끝난 후 출판인들이 대통령 당선인에게 추천한 책이기도 했습니다. 저자의 말은 각 시대마다 주요한 질병이 있는 데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질병은 신경성 질환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애는 박테리아, 바이러스가 주종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면역학의 발달로 이런 질병은 어렵지 않게 고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가장 질병인 신경성 질환은 쉽게 고치기 어렵습니다. 우울증, 성격장애, 행동장애, 이런 것들은 대부분 영적인 질병들이기 때문입니다. 육체로부터 원인이 온 것이 아니라 정신과 마음으로부터 원인이 왔습니다. 이런 질병은 어떻게 고칠까요? 하나님이 고칩니다, 그러니까 더 현대로 갈수록 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정말 신앙생활 잘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지금입니다. 다시 14절을 보십시오. 2:14, “지극히 높으신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중에 평화로다”.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합니까? 하늘의 영광이 여러분의 삶속에 스며들기 바랍니까? 능력의 원천이 거기 있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중요성이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이 평화의 주님으로 오셨으니 너희도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목자들은 그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목자직을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대신 그들이 만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평화를 전하며 평화의 사람들로 살았을 것입니다. 5:9을 기억하십니까?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화평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화평케 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자기만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은 아직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화평케 해야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중세의 문학가 단테가 한번은 묵상과 기도를 위하여 수도원 문을 두드렸습니다.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안에서 수도승이 물었습니다. “이 늦은 밤에 당신은 무엇을 원하시오?” 단테가 대답했습니다. “, 평화를 찾으러 왔습니다.” 그러나 수도승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단테가 다시 문을 두드렸습니다. 수도승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문을 두드리시오?“ 단테가 말했습니다. ”평화를 주고 싶습니다“. 문이 열렸습니다. 그렇습니다. 평화는 찾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평화를 만드신 방법을 알기 원합니까? 그것은 자기 몸을 십자가에 못박는 방식입니다. 2:14절 말씀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이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다같이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두 가지 평화가 있습니다. 로마식 평화와 성경적 평화입니다. 로마식 평화는 자기를 위하여 남을 죽이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로마는 천년동안 팍스 로마나, 로마의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방식은 남을 위해 자기를 죽이는 방식입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평화는 모두 로마식입니다. 2차 대전때 독일, 일본이 그렇게 했습니다. 과격파 이슬람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김일성, 김정일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평화는 언젠가 무너집니다. 예수님의 방식을 따라야 합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죽이는 방식입니다. 어떤 사람이 미국 카네기 공대를 졸업하고 성공한 사람들을 추적한 결과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을 성공시키는 데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이 15%밖에 영향을 주지 못했으나 좋은 인간관계가 85% 영향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직장에서 성공하는 것은 전문성보다 관계입니다. 그런데 관계의 핵심은 자기 포기입니다. 자기포기와 자기희생이 좋은 관계를 만듭니다. 누구나 결혼할 수 있으나 행복한 결혼은 자기를 포기해야 이루어집니다.

 

세상 사는 모든 원리가 이 원리입니다. 미국 미시간대학의 심리학자 브라운 박사가 말했습니다. “베푸는 사람이 오래 산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자기만 아끼고 남을 돕지 않는 사람은 남을 돕는 사람보다 일찍 죽을 가능성이 2배 이상 높다.” 그는 무작위로 약 400쌍 이상의 장수하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5년 간 조사했습니다 그랬더니 여성 중 72%, 남성 중 75%가 아무런 대가 없이 가사나 육아 등의 봉사로 이웃들과 친구들을 도우면서 살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브라운 박사는 장수하는 사람은 도움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남을 도와주는 사람이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예수님의 평화의 원리가 이것입니다. 자기 몸을 깨뜨려 평화를 만들고 자기를 희생시켜 평화를 지키신 예수님, 우리가 예수님 방식대로 살면 행복하고 장수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영원한 과제인 통일은 어떻습니까? 요즘 살기가 어렵다고 통일에 대한 생각이 현저하게 떨어졌습니다. 옛날에는 반드시 통일되어야 한다” 35%, “가급적이면 통일되었으면 좋겠다” 47%, 대략 80%가 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60% 미만입니다. 누가 통일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닙니다. 통일의 영웅이 나오기를 기대해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우리가 염원하고 우리가 서로 손해봐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평화의 사람입니까? 어디를 가면 여러분 때문에 사람들이 행복해 합니까? 분위기가 깨집니까? 가정에서나 특히 교회에서 나 한 사람 때문에 서로가 불행해지지 않도록 자기를 희생해야 합니다.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영원한 진리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 때문에 평화를 얻었습니다. 이제 화평을 위해 일합시다. 그러면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

 

 

 

 

 

 

 

2:8-14 2013.12.8()

 

평화를 위해 오셨습니다

 

탄생교회(사진)

트리(사진)

(이스라엘 분리장벽)사진

 

예수님은 평화를 위해 오셨습니다.

 

천사(사진)

2:8,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2:8,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2: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 하는지라”.

 

평화는 하늘의 영광과 함께 옵니다.

2: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12:49, “내가 땅에 불을 붙이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오”.

2:14, “지극히 높으신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중에 평화로다”.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요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돈 피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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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85:10,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한병철, <피로사회>

 

2:14, “지극히 높으신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중에 평화로다”.

 

우리는 평화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이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