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8:9-14 2013.11.10(일)
세 가지 발견
한 주간 동안 계속된 새벽 부흥회를 잘 마쳤습니다. 여러분은 부흥회를 통해 어떤 은혜를 받았습니까? 어떤 사람은 말씀의 은혜를, 어떤 분은 믿음의 확신을, 어떤 분은 기도 회복의 은혜를, 어떤 분은 몸과 마음이 치유되는 은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큰 은혜는 하나님안에서 내가 누군가를 발견하는 은혜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안에서 나는 누구인가? 나를 아는 은혜만큼 더 큰 은혜는 없습니다.
오래전에 러시아에 산 한 유대인 랍비가 살았습니다. 그가 여러 가지 힘들고 지친 일 로 인생의 방황을 시작했습니다. 어느날도 손을 주머니를 넣고 골똘하게 걷다가 자기도 모르게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는 군부대 철책선을 넘고 말았습니다. 병사가 소리쳤습니다. “누구냐? 여기 왜 왔느냐?” 랍비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군부대입니다. 병사가 또 소리쳤습니다. ”너는 누구며 여기 왜 왔느냐고 물었다“. 정신을 차린 랍비가 조심스럽게 병사에게 다가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한달 월급이 얼마요?“ 병사가 말했습니다. ”아니 월급이라니. 그것이 너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너는 누구며 여기 왜 왔느냐고 묻지 않았냐?“ 랍비가 대답했습니다. ”사실 내가 그 질문 때문에 이렇게 걷고 있소. 나는 누구이며 왜 여기 있는가? 내가 그것을 모르겠소. 만일 나에게 그 해답을 준다면 당신의 한달치 월급을 주려고 월급을 물었소“.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최고의 질문은 내가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새벽 부흥회 기간 동안 저는 제가 부흥회를 인도하지만 말고 저에게도 필요한 은혜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교인들도 은혜받아야 하지만 목회자인 저도 은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마침 오늘 말씀을 읽게 되었는 데 이 말씀이 저에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주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사마리아를 지나가시면서 하신 또 하나의 비유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보통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라고 부릅니다. 두 사람이 어느날 똑같이 성전에 들어가 기도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눅18: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두 사람이 모두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보통 유대인들이 하는 대로 정한 시간에 맞춰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 갔을 것입니다. 유대인은 하루 세 번 기도합니다. 오전 9시, 12시, 그리고 오후 3시입니다. 이들이 몇 시에 성전에 기도하러 갔는지 몰라도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기도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시간을 정해서 기도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 젊은이가 유명한 영성가 헨리 나우엔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바쁜 일과속에서 기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입니까?” 나우엔이 대답했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도시간을 정해 놓고 그것을 절대 어기지 않는 것입니다. 시간을 정하십시오. 그리고 일단 정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키십시오. 그러면 시간이 지날수록 깊은 기도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도 정한 기도 시간이 있습니까? “하루 일과중 어떤 시간은 반드시 하나님께 기도한다. 어떤 경우에도 그 시간은 기도한다”. 그러면 기도가 됩니다. 기도 시간을 정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 그것이 최고의 기도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기도의 내용과 자세가 달랐습니다. 바리새인은 자기 자랑을 하며 기도했고 세리는 회개하며 기도했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기도했고 세리는 무뤂꿇고 기도했습니다. 바리새인은 사람들이 보는 데서 기도했고 세리는 어두 컴컴한 데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세리의 기도는 들으시고 바리새인의 기도는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 공통점은 있었습니다. 둘은 다 같이 기도했고 다같이 성전에 올라가 기도했습니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이 한 분 하나님앞에 기도했습니다. 문제는 우리는 보통 이 말씀을 읽을 때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죄인이지만 세리는 용서받은 죄인이다. 그래서 바리새인처럼 되지 말고 세리처럼 되어야 한다”. 그러나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면 할수록 깨달은 것은 이 중 하나만 죄인이 아니라 둘 다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사람중 하나가 아니라 두 사람을 다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바리새인입니다.
11-12절을 보시겠습니까? 눅18:11-12,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바리새인은 예수님 시대에 있었던 유대인중 한 부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모두 네 부류의 유대인이 있었는 데 바리새인, 사두개인, 엣센파, 그리고 열심당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바리새인이 가장 열심히 믿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라는 말은 히브리어 “프리쉬”에서 왔습니다. 이 말은 “구별하다”는 뜻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철저히 세상과 구별되어 살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구약에 나오는 율법을 “하라”와 “하지 말라”로 구분하고, 하라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먹지 말라는 것은 먹지 않고 성경에서 부정하다는 것은 일체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구별되어 사는 것이 무슨 잘못이겠습니까? 예수님도 마5:20,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하지 않았습니까? 마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하지 않았습니까?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말씀대로 못산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말씀대로 살겠다는 데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문제는 바리새인의 위선이었습니다. 위선이란 말과 행동이 다른 것입니다, 생각은 옳은 데 생각한대로 못사는 것입니다. 행동이 생각을 못 따라가 늘 생각과 행동이 따로 노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내가, 남이 아는 나와 다르고, 남이 나는 내가 하나님이 아는 나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것을 가슴아파 합니다. 그러다가 점점 그렇게 자신을 변명하고 정당화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죄책감도 안느끼고 이중적으로 삽니다.
독일에 본회퍼 목사님이 계셨습니다(사진). 이 분은 히틀러가 집권하던 시대, 모두가 히틀러를 찬양할 때 히틀러를 목숨걸고 반대했습니다. 그는 고백교회를 만들어 그리스도인의 행동하는 양심을 외쳤고 신학교를 만들어 다음 세대 신학생들을 경건하게 훈련했습니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히틀러 암살운동에 가입하여 결국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모든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진보든 보수든 그를 20세기 순교자로 추앙하고 존경합니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말은 이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려고 하지 말고 옳은 것을 하려고 하라”. 그는 당대의 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감옥에서 쓴 시가 있습니다. 제목은 “나는 누구인가?”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종종 말하기를 내가 감방에서 걸어나올 때 마치 영주가 자기 성에서 나오듯 침칙하고 활기차고 당당하다고 한다.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이 종종 말하기를 내가 간수들에게 말을 건넬 때 마치 내가 명령하는 사람인양 자유롭고, 다정하고, 분명하다고 한다.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또 말하기를 마치 내가 승리에 익숙한 사람인 양 불행한 나날을 견디면서 평화롭고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럽다고 한다. 나는 정말 다른 사람이 말하는 그런 사람인가? 아니면 내가 알고 그런 사람인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불안하게 뭔가를 갈망하다가 병들고 목이 졸린 사람처럼 숨가쁘게 몸부림치고 색깔과 꽃과 새소리를 그리워 하며 친절한 말과 인간다운 친근함을 그리워 하고 사소한 모독에도 분노에 떨며 큰 사건을 간절히 기대하고 멀리 떨어진 친구를 그리워 하다 낙심하며 슬퍼하고 기도하고 생각하고 글쓰는 일에 지쳐 허탈에 빠지며 의기소침하여 모든 것과 작별하려는 그런 존재, 나는 누군인가? 전자인가? 후자인가? 오늘 이런 인간, 내일은 다른 인간인가? 타인앞에서는 위선자이고 자기 자신앞에서는 경멸할 수 밖에 없는 가련한 존재. 나는 누구인가? 이 고독한 질문이 나를 비웃는다. 내가 누구인지, 오 하나님, 당신만이 아십니다. 나는 오직 당신의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신앙의 영웅이라고, 순교자라고, 독재자와 맞선 용감한 신앙인이라고 추앙했지만 본회퍼는 정작 자신은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 볼때는 용감하고 평화롭고 친절해 보여도 나 자신은 늘 불안에 떨고 다른 사람의 작은 말에쉽게 상처받으며 인간적인 정에 굶주린 한 인간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11절 볼까요? “다른 사람들 같이 토색, 불의, 간음하지 않았고”, 우리가 혹시 다른 사람보다 죄를 덜 짓는지 모릅니다. 12절,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고”, 우리가 혹시 다른 사람보다 교회도 잘 나오고 꼬박 꼬박 십일조도 드리고 기도도 많이 해서 사람들이 “와, 감 집사는 대단해. 어쩌면 그렇게 믿음이 좋을까?” 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아는 나와 내가 아는 나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더군다가 하나님이 아는 나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번 부흥회 첫날 목포 사랑의 교회 백동조 목사님이 나아만 장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한 나라의 국방장군이고 풍채도 그럴싸하고 온갖 갑옷과 무기로 무장했지만 그 옷을 벗겨보면 속은 썩은 살투성이다. 속은 썩어 문드러진 문둥병 환자다. 어쩌면 갑옷으로 단단히 무장한 것은 자기속을 보이지 않으려는 위장전술인지 모른다”. 저 역시 여러분 앞에서 설교하지만 여러분 보다 훨씬 못하고 죄인중의 죄인입니다. 제가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말씀대로 잘 살지도 못하고 살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 죄인임이 드러나는 존재입니다. 계3:17에서 주님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한 것과 같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크게 세 가지입니다. 너는 가난하다. 물질적으로 부요하지만 영적으로는 가난한다. 너는 눈멀었다. 세상을 보는 눈은 있으나 하나님을 보는 눈은 없다. 너는 벌거벗었다. 겉으로는 그럴싸한 옷을 입었지만 속은 벌거벗었다. 너는 속다르고 겉다른 바리새인이다. 이것을 첫 번째 발견입니다.
우리는 또한 세리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발견하는 또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또한 세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나는 바리새인입니다”라고 고백할 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도 아직 세리는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바리새인이라고만 고백해도 겸손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말씀을 자세히 읽으면 우리가 세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상징하는 바가 조금 다릅니다. 바리새인은 행위가 잘못된 죄인입니다. 생각이나 마음은 괜찮은 데 행동이 잘못된 것입니다. 죄는 일차적으로 우리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행위를 보시며 행위로 나타난 죄를 심판합니다. 잠16: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전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그런데 세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존재 자체가 죄인입니다. 바리새인이 겉으로 드러난 죄인이라면 세리는 속까지 죄로 물든 죄인입니다. 바리새인이 행위의 죄인이라면 세리는 존재의 죄인입니다. 13절입니다. 눅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왜 새리는 가슴을 치면서 얼굴을 들지도 못합니까? 속까지 새빨간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삶에서 발견한 은혜였습니다. 그가 밧세바를 범한 후 나단 선자자의 책망을 듣고 회개합니다. 그리고 쓴 시가 시51편입니다. 이 시에서 다윗은 먼저 자기의 행위를 회개합니다. 시51: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주앞에 있나이다”. 다윗은 밧세바를 범한 죄룰 회개합니다. 그러나 조금 후에 자신이 처음부터 죄인이었음을 고백합니다. 5절입니다. 시51:5, “내가 죄악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그는 밧세바를 범하기 오래 전부터 이미 죄인이었다고 말합니다. “어머니가 나를 낳을 때부터 이미 나는 죄인입니다”. 그는 행위의 죄인이며 존재의 죄인이었습니다.
며칠전 지방에서 목회하는 저의 친구 하나가 전화하다가 이런 이야기를 해서 제가 감동받았습니다. 자기 옆집에 교회 안 나오는 사람이 하나 사는 데 늘 어떻게 전도할까 하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집을 지나가는 데 그 집에서 키우는 개가 와서 그 목사의 손을 물었습니다. 집에 붕대를 감고 돌아오자 사모님이 물었습니다. “여보, 어떤 일이예요? 손에 붕대를 감게”. 그때 친구가 말했답니다. “개에게 물렸어. 피가 조금 났지.” 사모님이 걱정스런 얼굴로 다시 물었습니다. “아니, 그런데 지금 웃음이 나와요?” 그러자 친구가 말했습니다. “나, 지금 너무 기뻐. 그 집이 바로 우리 교회 옆집이야. 내가 늘 전도하려고 했던. 그런데 그렇게 전도해도 반응이 없었잖아. 오늘 내가 그 집 앞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개가 뛰어 나오더니 내 손을 물더라고. 큰일났다 싶었는 데 그 집주인이 나와 나를 자기 차에 태워 병원으로 데려갔어. 치료를 받는 데 연신 주인이 미안해 하더라고. 그러더니 붕대를 감고 나오니까 그렇게 말하더라고. 너무 죄송합니다. 다음 주부터 교회 나가겠습니다. 아, 주인이 미안해서 다음 주부터 교회에 나오겠다는 거야. 그나마 온 가족을 다 데리고 나오겠다는 거야. 어때 괜찮잖아? 손 한 번 물리고 한 가정을 인도하게 되었으니 잘 된 거 아니야? 여보 어디 또 개 키우는 집 없어?”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역시 목사는 다르구나 생각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같은 날에 우리 교회 젊은 집사님이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월요일 아침이었는 데 제가 가려고 했으나 도무지 일어날 수 없어 교구 목사님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잠시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꿈에 큰 소리로 소리칩니다. “내가 개만도 못하냐?” 그래서 깜짝 놀라 일어났습니다. 누가 나에게 그렇게 말할까 아무리 둘러 봐도 없었습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아,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이구나”. “친구 목사는 개한테 물려도 전도하게 되었다고 기뻐하는 데 너는 그렇게 젊은 집사가 안타깝게 하나님의 부름받고 장례식을 하는 데 피곤하다고 안가? 도대체 교인이 너에게 개만도 못하냐?” 하나님의 질책이었습니다. 제가 이런 사람입니다. 게으르고 자기만 알고 조금 힘들면 주저 앉고 저는 바리새인이 세리입니다. 그날 저는 한참 동안 앉아 저 자신의 게으름과 연약함을 한탄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세리처럼 하나님앞에 서면 얼굴을 들 수 없습니까? 겸손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죄송해서 그러지 않습니까? 우리가 무슨 수로 하나님앞에 얼굴을 듭니까? 롬3:10-12의 말씀에 동의합니까?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는 시간이 갈수록 이 말씀에 동의하게 됩니다. 조금 젊을 때는 “모든 사람이 죄인?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텐데. 뭐 깨닫는 자 하나님을 찾는 자가 아무도 없어? 지나친 과장법 아니야?” 그런데 이제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행위가 죄인이기 전에 우리 존재 자체가 죄인입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전적인 타락”이라고 합니다. 남김없이 죄에 물든 것입니다. 행동이 문제가 아닙니다. 속에서부터 우리는 죄인입니다. 모태에서부터 죄인입니다.
어떻게 친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보험금을 가로챕니까? 어떻게 친 아버지가 친 딸을 성폭행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친 아들, 친 딸들이 어머니가 죽어 냉장고에 있는 데 장례는 안 치루고 부의금만 가지고 도망갈 수 있습니까? “의인이 없으니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속으로부터 썩은 것입니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습니다. 세리가 따로 없습니다. 창기가 따로 없습니다. 내가 세리고 창기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했던 마지막 말이 맞습니다. 그가 죽으면서 했던 말입니다. “우리는 거지다. 그것은 사실이다”. “하나님앞에서 우리는 모두 거지요 죄인이다.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 이야기를 루터가 한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동의합니까?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가 발견한 두 번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중요한 것이 또 하나가 있습니다. 14절입니다. 눅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오늘 말씀은 바리새인이 아니고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의롭다 하심”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받아들여졌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신 것입니다. 죄가 없어서 받아주신 것이 아닙니다. 죄가 있어서 받아주셨습니다. 죄의 역설이 있습니다. 죄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나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죄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죄는 하나님께 나가는 걸림돌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 나가는 디딤돌입니다. 죄와 은혜와 늘 함께 갑니다. 죄가 있어 은혜가 사라지지만 죄가 있어 은혜가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롬5:20, “그러나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더욱 넘쳤나니”. 하나님은 우리 죄를 짓기 때문에 미워하시지만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사랑하십니다. 비유한다면 이렇습니다. 환자가 암에 걸려 수술합니다. 의사가 환자를 수술하느라 환자는 아픕니다. 그러나 의사가 아프게 한 것은 환자가 아니라 암입니다. 의사는 환자를 사랑하기에 암을 미워합니다. 하나님도 죄인을 미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를 미워합니다.
오늘 말씀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이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두 사람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두 가지 길을 보여줍니다. 바리새인은 자기가 짓지 말았어야 할 죄에 집중합니다. 그는 매일 하지 말았어야 할 죄의 목록을 점검합니다. 그는 자기 노력으로 힘들게 죄와 싸웁니다. 그래서 몇 번 이깁니다. 그러나 세리는 죄와 싸우지 않고 차라리 하나님께 나갑니다. 그는 죄와 싸운다고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는 아예 죄를 짓고 살기로 마음 먹은 것이 아니라 죄를 지어도 하나님을 의지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는 죄를 없애고 하나님께 나가는 길을 것이 아니라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택합니다. 바리새인은 열심히 죄와 싸워 몇 번 이겼으나 그는 죄와 싸워 이긴 자기가 자랑스럽습니다. 그래서 그의 기도에는 “나”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나는, 내가, 나는”, 그는 죄와 싸워 이긴 자기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세리는 죄와 싸워 이길 수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이것을 비유하면 이렇습니다. 아기가 엄마와 함께 길을 갑니다. 길 건너편에서 개가 컹컹하고 달려옵니다. 이때 아기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자기가 개와 싸우든지 얼른 엄마 품으로 뛰어 가든지. 아기가 개와 싸운다고 이기겠습니까? 몇 번 소리칠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개가 도망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엄마 품으로 도망가면 그때부터 엄마가 싸웁니다. 엄마가 큰 소리로 “저리가” 하고 소리칩니다. 그러면 개가 도망갑니다.
결국 누구를 보느냐의 문제입니다. 바리새인은 자기를 바라봅니다. 세리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후회와 회개가 다릅니다. 후회는 감정이고 회개는 의지란 점에서 다르지만 더 중요한 것은 후회는 잘못한 자기를 보는 감정이고 회개란 용서하는 하나님을 보는 믿음이란 점에서 다릅니다. 후회는 못난 자기를 봅니다. 하도 못난 자기만 바라보니까 상처와 좌절과 절망감이 몰려 옵니다. 그러나 회개는 의로우신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니까 용기와 믿음과 담대함이 생깁니다. 예수님을 판 가롯 유다가 가졌던 것은 후회고 예수님 배신한 베드로가 가졌던 것은 회개입니다. 그 결과 가롯 유다는 자살했고 베드로는 초대교회 기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참된 회개자는 자신에 대해서는 절망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절망하지 않는다”. 여러분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만 바라보겠습니까? 성공했어도 하나님 바라보지 않고 자기를 바라보면 실패한 것입니다. 실패했어도 하나님 바라보면 성공한 것입니다. 죄를 안짓고도 잘난 자기를 바라보면 믿음이 아닙니다. 죄를 지었어도 용서하시는 하나님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중의 하나가 롬7:25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이 말씀은 바울이 자기 마음속에 있는 두 싸움에 대하여 내린 결론입니다. 롬7장에서 바울은 자기 속에는 두 종류의 자기가 있다고 실토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자기와 자기도 모르게 죄를 짓는 자기입니다. 물론 자기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자기 속에 있는 죄가 자기를 사로잡아 자기도 모르게 죄를 짓게 합니다. 그래서 너무 너무 괴로워 2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주랴”. 바울은 권투로 말하면 거의 녹다운 지경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에서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왜 이런 변화가 오는 것입니까? 24절에서 죽겠다고 해놓고 25절에서 왜 감사합니까? 논리적으로는 말이 안됩니다. 중요한 키워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입니다. 어차피 바울은 날마다 죄짓고 삽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죄짓는 자기를 보지 않고 용서하시는 주님을 보고 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자기를 볼 때는 절대 감사가 안 나옵니다. 그러나 나는 항상 실패하지만 예수님은 언제나 승리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 부분을 유진 피터슨이 쓴 “메시지” 성경에서 이렇게 번역합니다. 24절. “나는 지금 벼랑 끝에 있습니다. 절망에 빠진 나를 위해 누군가 도와줄 사람 없습니까?” 25절입니다. “감사하게도 해답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것을 하실 수 있고 또 하십니다”. 아멘.
부흥회가 끝났습니다. 이제 누구를 보고 살겠습니까? 부흥회 이후 저는 여러분이 더 예수님을 닮은 거룩한 성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고 노력할수록 여러분은 세리처럼 날마다 넘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바리새인의 방법을 따르지 말고 세리의 길을 따르세요. 실패한 자기를 바라보지 말고 승리한 예수님을 바라보세요. 죄짓고 실망한 자기를 보고 후회하지 말고 언제나 용서하시는 하나님께 나와 회개하세요. 죄인인 여러분을 받아들인 여러분을 받아들이세요. 최고의 사랑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저와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이고 최고의 용기는 하나님이 받아들인 나를 내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한번의 죄가 우리를 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많습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세요.
눅18:9-14 2013.11.10(일)
세 가지 발견
눅18: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먼저 우리는 바리새인입니다.
눅18:11-12,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바리새=“프리쉬”=“구별하다”
마5:20,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하
마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본회퍼 목사(사진)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종종 말하기를 내가 감방에서 걸어나올 때 마치 영주가 자기 성에서 나오듯 침칙하고 활기차고 당당하다고 한다.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이 종종 말하기를 내가 간수들에게 말을 건넬 때 마치 내가 명령하는 사람인양 자유롭고, 다정하고, 분명하다고 한다.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또 말하기를 마치 내가 승리에 익숙한 사람인 양 불행한 나날을 견디면서 평화롭고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럽다고 한다.
나는 정말 다른 사람이 말하는 그런 사람인가? 아니면 내가 알고 그런 사람인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불안하게 뭔가를 갈망하다가 병들고 목이 졸린 사람처럼 숨가쁘게 몸부림치고 색깔과 꽃과 새소리를 그리워 하며 친절한 말과 인간다운 친근함을 그리워 하고 사소한 모독에도 분노에 떨며 큰 사건을 간절히 기대하고 멀리 떨어진 친구를 그리워 하다 낙심하며 슬퍼하고 기도하고 생각하고 글쓰는 일에 지쳐 허탈에 빠지며 의기소침하여 모든 것과 작별하려는 그런 존재
나는 누군인가? 전자인가? 후자인가? 오늘 이런 인간, 내일은 다른 인간인가? 타인앞에서는 위선자이고 자기 자신앞에서는 경멸할 수 밖에 없는 가련한 존재.
나는 누구인가? 이 고독한 질문이 나를 비웃는다. 내가 누구인지, 오 하나님, 당신만이 아십니다. 나는 오직 당신의 것입니다”.
눅18:11, “다른 사람들 같이 토색, 불의, 간음하지 않았고”,
눅18:12,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고”,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우리는 또한 세리입니다.
잠16: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전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바리새인이 행위의 죄인이라면 세리는 존재의 죄인이다”
눅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시51: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주앞에 있나이다”.
시51:5, “내가 죄악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롬3:10-12,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런데 우리는 받아들여졌습니다.
눅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롬5:20, “그러나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더욱 넘쳤나니”.
“후회와 회개는 다르다”.
“참된 회개자는 자신에 대해서는 절망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절망하지 않는다”.
롬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주랴”.
“최고의 사랑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를 받아들이신 것이고 최고의 용기는 하나님이 받아들인 나를 내가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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